사사명의 난

 

1. 소개
2. 758년: 사사명, 재봉기
3. 759년
3.1. 사사명의 남하와 이광필의 대응
3.1.1. 상주 안양하 전투
3.2. 곽자의의 퇴진과 이광필의 대두
3.3. 사사명의 칭제
3.4. 사사명의 남하와 낙양의 포기
3.5. 하양의 격전
3.5.1. 전초전
3.5.2. 결전
3.6. 그 외
4. 760년
4.1. 교착상태
4.2. 어지러워지는 기본질서
4.2.1. 이보국의 전횡
4.2.2. 내지절도사들의 전횡
4.3. 그외
5. 761년
5.1. 망산의 패배
5.2. 사사명의 죽음
5.3. 혼란 속의 전황
5.4. 조정 내 : 이보국의 전횡과 당숙종의 견제
5.5. 그외
6. 762년~763년
6.1. 하동의 폭동와 진압
6.2. 혼란스러운 전황과 통제를 벗어나는 절도사들
6.2.1. 이광필의 분투
6.2.2. 평로치청번진의 등장
6.2.3. 절도사 내진의 죽음
6.3. 조정 내에서의 혼란
6.3.1. 당현종의 죽음
6.3.2. 장황후의 정변시도와 당숙종의 죽음
6.3.3. 정원진의 정권 탈취와 이보국의 몰락
6.4. 회흘의 개입과 전쟁의 종결
6.4.1. 회흘의 개입
6.4.2. 당-회흘 연합군의 진격
6.4.3. 사조의의 죽음과 반란의 끝


1. 소개


안사의 난사사명이 안록산에 이어 일으킨 반란. 안록산의 난에서 이어진다.
안록산의 난이 먼저 일어났고 사사명은 원래 안록산의 부하였다보니, 간단히 소개하는 경우 안록산의 난에 포함해서 서술되기도 한다.

2. 758년: 사사명, 재봉기


사사명은 안록산이 가장 신임하던 부장으로서, 반란 초기부터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별동대의 지휘를 맡을 정도였다. 그런 사사명이지만 757년 안록산이 그 아들 안경서에게 사망하고 당의 반격으로 인해 하북으로 쫓겨나자 더이상 연에 희망을 걸기 어렵다고 생각하게 된다. 거기다 안경서가 사사명의 세력이 자신보다 더 강성한 것을 시기해 그 전력을 흡수하려 시도하자 사사명은 결국 장악하고 있던 13개 군과 8만여 병력을 이끌고 당에 항복한다. 당숙종은 매우 기뻐하면서 사사명에게 귀의왕, 범양절도사직을 내리고 안경서 토벌에 동참할 것을 명했으며, 사사명은 이에 따라 하북에 남아있던 안경서 세력권을 제압했다. 사사명까지 당에 귀부했다는 소식을 들은 하북의 군현들은 대부분 당에 항복해 공로가 적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사사명과 오랫동안 싸운 이광필을 필두로 해서 당 조정 내에는 사사명의 진의를 의심하는 자들이 많았고, 당숙종 또한 사사명 제거에 동의하여 뒷공작을 벌이다가 사사명에게 발각되자 분노한 사사명은 이광필을 제거할 것을 당 조정에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당은 곽자의와 함께 안록산의 난 진압의 양대 공로자인 이광필을 제거할 생각이 없었고, 여기다 안록산에게 항복했던 대신들에 대해 엄벌을 내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사명은 758년, 13만 병력을 모아 범양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킨다.
이때 당의 주력군은 업성에서 안경서를 포위해 완전 진압 직전까지 몰아붙이고 있었기에 사사명의 재반란에 대해 즉각적인 대응이 불가능했으며, 일단 진압군 지휘관 중 한 명인 하남절도사 최광의가 휘하 병력을 이끌고 위주까지 북진해 보았지만 11월에 사사명에게 격파당한다. 이에 안경서는 사사명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된다.

3. 759년



3.1. 사사명의 남하와 이광필의 대응



3.1.1. 상주 안양하 전투


759년 초, 당군은 업성의 안경서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에 안경서는 필사적으로 사사명에게 구원요청을 했고, 위주에서 충분히 후방을 다졌다 생각한 사사명은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업성 근교로 남하, 당군의 후방을 교란하기 시작한다. 이에 당군을 지휘하던 9명의 절도사들은 날짜를 정해 안양하 북쪽에서 진을 치고 사사명과 일전을 벌이기로 한다.
이때 당군은 보병과 기병을 합처 60만에 달하는 규모를 자랑했고, 이 군대를 지휘하는 곽자의, 이광필, 왕사례, 노경, 허숙기 등은 모두 내전에서 실적으로 스스로를 증명한 유능한 장수들이였다. 반면 사사명군은 총병력이 13만이였으니 단순히 생각하면 당이 질 싸움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군에는 심각한 약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9명의 절도사들을 총지휘하는 '''최고사령관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지휘통제가 제각각이였던 셈. 거기다 총병력이 60만에 달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당군이 처음에 진압군으로 편성한 것은 20만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중 2/3은 전력을 딱히 기대하기 힘든 투항병, 단련병, 의병이였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장비류에서도 나타나는데, 전투마가 1만 필, 갑옷과 병장기가 10만 벌 정도 있었다고 한다. 이것의 수량도 많은 편이긴 하지만 60만이라는 대병력의 장비라기엔 많이 부족한 수량이다. 즉, 당군의 상당수 병력은 전투력을 기대하기 힘들었던 것. 훈련도나 장비 등을 볼때 당군과 사사명군의 전력은 엇비슷한 수준이였다고 짐작이 가능하다.
그리고, '''전투 결과는 당의 대패.''' 이광필, 왕사례, 허숙기, 노경이 지휘하는 당군 본대는 사사명의 맹공에 의해 붕괴했고, 후방에 있던 곽자의가 황급히 달려나왔으나 기세를 탄 사사명의 급습에 의해 제대로 전열을 구축하지도 못하고 밀려났다. 결국 곽자의마저도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삭방군만을 건져 철수, 하양교(河陽橋)를 다시 끊고 낙양 방위에 나섰으며 지휘를 맡았던 다른 절도사들 또한 자신의 직속군만을 건져 임지로 돌아간다. 사사명의 남진을 저지할 병력이 사라진 것이다.
사사명은 일단 업에 입성, 자신을 구원하는 것으로 착각했던 안경서를 죽이고 남은 세력을 모두 흡수한 다음 자신은 범양으로 돌아가고 휘하 병력을 하북에 풀어 후방 다지기에 들어간다. 이는 이전 안록산의 난 당시 하북에서 안록산에 반대하는 의병들이 일어났고, 자신도 이들 때문에 한때 진격로와 퇴각로가 막혀서 고생한 것을 기억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끔 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3.2. 곽자의의 퇴진과 이광필의 대두


상주의 참패가 전해지자 동경(낙양)은 대혼란에 빠졌으며, 당 조정은 상주 패배의 책임과 대책마련을 위해 부심한다. 우선 곽자의를 동기·산동·하남제도원수이자 권지동경유수로, 하서절도사 내진을 행섬주자사이자 섬·괵·회주절도사로 충임, 허숙기를 활·변등칠주[1] 절도사로 삼고 시여주자사 유전을 활주자사·활·변등칠주 절도부사로 임명했으며, 노경을 진·정·박 절도사로 충임하나 노경은 상주에서의 패전 당시 자신이 지휘하던 군대가 가장 추태를 부렸다는 이유로 자살.(...) 거기다 실상 상주 패전의 가장 책임이 큰 인물인 어조은이 곽자의를 참소해 버리는 바람에 결국 곽자의 또한 자신의 군권을 내려놓고 장안을 돌아가야만 했다.
당 조정이 이렇게 속편하게 당시 최고 위상을 자랑하던 곽자의를 뒤로 뺄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에 맞먹는 인물인 '''이광필'''이 존재했기 때문. 759년 7월. 당숙종은 이광필로 하여금 '''삭방절도사·병마원수'''를 맡겨 곽자의가 지휘하던 삭방군을 인수하고 전면에 내세운다. 그리고 이전까지 이광필이 맡고 있었던 하동절도사직은 왕사례가 맡도록 한다.
이광필은 하동의 기병 500여 기를 이끌고 밤중에 삭방군의 군영에 들어가 이를 인수하는데, 곽자의가 워낙에 군심을 사로잡고 있었던지라 이광필의 명령에 반항하려는 기미가 보이자 이광필은 좌상병마사 장용제를 잡아다 처형해 버리는 강경책으로 군을 통제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7월 7일, 조왕 이계를 천하병마원수로 삼고 이광필을 보좌로 붙이는 지휘부를 편성해 사사명 세력 평정을 위한 총사령부를 구성한다. 여기에 당숙종은 삭방군의 군심을 달래기 위해 이시기 삭방절도부사·전중감이였던 복고회은에게 태상경을 겸임하도록 하고 '''대녕군왕'''직을 제수한다. 복고회은이 군왕직을 받은 것은 곽자의, 이광필보다도 빨랐다.
8월 29일, 당숙종은 이광필에게 유주장사·하북절도사등사직을 더한다. 이는 '''하북을 평정하라'''는 명령이였다. 그러나 상주의 패배로 인한 피해가 컸기에 당장은 공허한 말로 들릴 뿐이었던 것도 사실.

3.3. 사사명의 칭제


759년 4월, '''사사명은 스스로 대연황제를 칭한다.''' 연 세력을 완전히 흡수한 그는 이러한 칭제를 통해 '''안록산의 뒤를 잇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당장 안록산 또한 스스로를 대연황제라 칭했고, 사사명은 안록산을 '태상황'으로 모셨다. 또한 그는 아들인 사조의를 회왕으로, 주지(周摯)를 재상으로, 이귀인을 장군으로 삼고 범양[2]의 이름을 고처 연경이라 했으며 모든 주를 군으로 명칭을 변경한다.

3.4. 사사명의 남하와 낙양의 포기


759년 9월, 사사명은 총애하는 아들인 사조청에게 범양을 지키게끔 하고 상주에서의 승리 이후 자신에게 복속시켰던 모든 하북의 태수들에게 군사 3천씩을 거느리고 자신을 따라 하남을 향할 것을 명령한다. 안진경의 패배 이후 '''하북의 당 세력은 이미 뿌리뽑힌''' 상태였고, 하북 지역을 담당하는 대부분의 태수들은 사사명에게 복종했기에 이 명령은 충실히 시행되었다.
사사명은 영호창을 여양으로, 사조의를 백고로, 주지를 호랑으로 보내 황하를 건너게끔 하고 그 자신은 복양에서 황하를 건넜으며, 변주에서 모두 모이게끔 했다. 이는 황하를 건넌 후 낙양의 서쪽 지역인 '''하남'''을 제압한 후에 서진해 낙양을 탈취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방어책임을 맡은 것은 당연히 이광필이였다. 곽자의를 대체한 후 그는 황하 연안의 여러 군영을 순시하고 있었는데, 사사명이 남하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사명군의 집결지인 변주로 달려가 변·활 절도사인 허숙기에게 '''15일만 지키면 지원군을 끌고오겠다'''고 약속해 1차 저지 시도를 한다.
그러나 허숙기는 며칠 지나지 않아 사사명에게 항복해 버리고 사사명은 그런 그를 중서령에 임명함과 동시에 가족들을 인질로 삼았으며, 비록 저지되었지만 남덕신·양포·유종간·전신공 등 여러 장수들을 서쪽, 남쪽으로 파견해 강·회 지역까지 제압을 시도하기도 했다.
사사명은 하남 평정이 대충 마무리되자 그대로 서진, '''낙양에 육박'''한다. 허숙기의 때이른 항복으로 인해 하남에서의 저지에 실패한 이광필 또한 군을 이끌고 낙양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이광필은 이미 '''낙양은 지킬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지 오래였다. 대신 그는 오히려 군을 이끌고 '''북상'''해 하북, 업성 근방인 '''하양'''(河陽)으로 군을 이동시켜 사사명의 배후지라 할 수 있는 '''하북'''을 위협하는 전략을 구상한다.
이광필은 무리를 정비하여 천천히 나아가서 낙양에 도착하여 유수 위척에게 말하였다.
"도적들이 승리의 기세를 타고 오는데, 승리는 병사를 어루만지는 것에 있으니, 성급한 싸움은 이롭지 않습니다. 낙성은 지켜낼 수가 없는데, 공의 계책은 무엇입니까?"
위척은 섬주에 병사들을 머무르게 하고 동관으로 물러나 지키면서 험요한 곳을 점거하고 그들의 예봉을 꺾도록 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광필이 말하였다.
"두 적이 서로 균형을 이루면, 진격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후퇴하는 것을 꺼리는데, 지금 연고도 없이 500리의 땅을 내버리면 도적들의 세력이 더욱 커지게 됩니다. 하양으로 군대를 이동하여 북쪽으로는 택로와 연결하여 유리하면 전진하여 빼앗고, 불리하면 물러나 지키면서 겉과 속이 서로 응하게 하여 도적들에게 감히 서쪽으로 나아가서 침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만 못하니, 이것이 원숭이의 긴 팔 같은 형세라 하겠습니다. 무릇 조정에서 예의를 분별하는 데에는 저 이광필이 공보다 못하지만, 군대의 일을 논한다면 공께서 저 이광필보다 못할 것입니다."
위척은 응답하지 않았다. 판관 위손이 말하였다.
"동경은 황제의 집이 있는 곳인데, 시중(이광필)께서는 어찌하여 지키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까?"
이광필이 말하였다.
"그곳을 지키려면 사수·악령·용문에 모두 응당 병력을 배치하여야 하는데, 그대는 병마판관이니 이를 지킬 수 있는가?"
마침내 이광필은 첩서를 동경유수 위척에게 보내어 동경의 관속들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나아가서 도오간으로 들어가도록 하였고, 하남윤 이약유에게도 첩서를 보내어 이민들을 거느리고 성을 나와서 도적들을 피하게 하라고 하여 그 성을 텅 비워놓았다. -자치통감
이광필이 낙양을 비우고 하양으로 들어가자 사사명은 9월 27일 낙양을 점령한다. 그러나 낙양 대부분이 비워져 사실상 얻을 것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광필이 하양에서 하북으로 진격해 사사명의 배후를 찌를 것이 우려되어 결국 궁궐에는 들어가지 않고 백마사 남쪽에 군을 주둔시킨 후 하양의 황하 이남지역에 월성을 쌓아 이광필과 대치국면에 들어간다.

3.5. 하양의 격전


사사명은 하북, 하남을 제압하고 그 기세를 몰아 낙양까지 점령했으나 그 기세는 안록산의 그것만 못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이광필이 하양을 거점으로 삼고 이를 통해 사사명의 측후방을 위협하는 위치를 선점했기 때문.
하양(河陽)은 이때의 전황구도상 최고의 요충지로 손꼽을 만한 지역으로, '''하북의 중심'''인 업성 근처, 황하 이북지역에 위치하면서도 동시에 하양교, 석교를 통해 '''황하 이남, 그중에서도 낙양'''으로도 바로 통할 수 있는, 사실상 '''낙양과 하북 사이에 박힌 쐐기'''와 같은 위치에 있었다. 거기다 서북쪽으로 택로지역을 통해 당의 손에 있는 '''하동, 삭방'''지역에서 지속적인 지원까지도 가능한 지역이기까지 했다.
따라 사사명의 입장에서는 전력을 다해 하양을 함락시키지 않으면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입장이였고, 전 병력을 이끌고 하양에 접근한다. 물론 이광필 또한 자신이 모을 수 있는 최대한의 병력을 모아 방위에 나선다.
이때 하양은 상주에서의 패배 이후 곽자의가 이쪽으로 철수하면서 성을 증축해 강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성이 쌓여져 있었으며, 강 한가운데에는 모래섬이 있었다. 각각 남성, 북성, 중단이라 불렸다고 한다.

3.5.1. 전초전


사사명과 이광필의 햐양에서의 격전은 초전부터 상당히 화려했다. 역사상 기록을 찾기 힘든 일기토도 이 시기에 나온다.
사사명은 군대를 이끌고 하양을 공격하는데 용맹한 장수인 유룡선으로 하여금 성 아래까지 가서 도전하도록 하였다. 유룡선은 용감함만을 믿고 오른쪽 다리를 들어서 말 갈기 위에 얹어서 오만스럽게 이광필을 욕하였다. 이광필이 제장들을 뒤돌아보면사 말하였다.
"누가 저 자를 잡을 수 있겠는가?"
복고회은이 가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이광필이 말하였다.
"이것은 대장이 할 바가 아니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말하였다.
"비장 백효덕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광필이 그를 불러서 물어보니, 백효덕은 가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중략)
유룡선은 그가 혼자 오는 것을 보고는 그를 대단히 쉽게 여겼다. 점점 가까이 오자 곧 움직이려 하는데, 백효덕이 손을 흔들면서 그에게 보이는데 마치 와서 대적하지 않으려는 사람 같아서 유룡선은 헤아릴 수가 없어서 멈추었다. 그와 10보 떨어지자 마침내 그에게 말을 걸었더니, 유룡선은 오만하고 모욕하는 태도가 처음과 같았다. 백효덕은 말을 오랫동안 휴식시키고서 이어서 눈을 부릅뜨고 말하였다.
"도적놈이 나를 알겠는가?"
유룡선이 말하였다.
"누구냐?"
말하였다.
"나는 백효덕이다."
유룡선이 말하였다.
"이건 무슨 개돼지냐?"
백효덕은 크게 호통을 치고, 창을 움직이면서 말을 뛰게 하여 그를 첬다. 성 위에서 북소리와 함성을 내자 50기가 잇달아 앞으로 나아갔다. 유룡선은 화살을 쏘지도 못한 채 제방 위에서 빙빙 돌았다. 백효덕이 추격하여 따라잡아 그의 목을 베고 그것을 가지고 돌아왔다. - 자치통감
...뭔가 소설같지만 이건 엄연히 자치통감에 박혀있는, 하양성 공방전의 첫 시작이다. 또한 사사명의 난 당시의 유명한 에피소드인 '암말 500여 필을 활용한 군마 탈취'도 이때의 일이다.
사사명은 좋은 말 1천여 필을 가지고 있었는데, 날마다 황하의 남쪽 강물에 말들을 목욕시키면서 말들을 순환시키는 일을 쉬지 않아서 많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광필은 군대 안에서 암말을 찾아서 500필을 얻자, 그 중에서 망아지를 성 안에 잡아매어 놓았다. 사사명의 말들이 물가에 이르기를 기다렷다가 그것들을 모두 내어놓으니, 말들이 울기를 그치지 않았고 사사명의 말들은 모두 물에 떠서 황하를 건너지, 한꺼번에 그것들을 몰아서 성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자치통감
이광필의 이러한 대응에 거듭 피해를 입은 사사명은 황하에 전선을 늘여세우고 이를 하양성 가운데로 내려보내 남성과 북성을 잇는 부교를 태우기 위한 '''화공'''을 시도했으나, 이광필이 중단의 섬에서 이를 철차(쇠로 만든 쇠스랑 같은 고정기구)로 붙잡아 놓고 투석기를 동원해 전선들을 격침시켜 또다시 실패한다.
이에 사사명은 하양성에 대한 직접적인 공세 대신 하양성으로 들어가는 군량수송로를 끊고자 하청으로 이동한다. 이에 이광필 또한 야수도에 진을 치고 이를 막아선다. 이에 사사명은 야습을 시도하나, 이광필에게 읽혀서 오히려 장수들이 투항하는 손해를 입고 만다.
사사명이 이일월에게 말하였다.
"이광필은 성에 의지하여 싸우는 것이 장기인데, 지금 나와서 들판에 있으니 이는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너는 철기를 데리고 밤에 건너가서 나를 위하여 그를 잡도록 하라. 그렇게 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마라."
이일월이 50의 기병을 거느리고 새벽에 목책 아래에 도착하였는데, 옹희호는 참호로 막혀 있어서 병사들을 휴식시키니, 그들은 시를 읊거나 휘파람을 불면서 서로 보고 있었다. 이일월이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물었다.
"사공께서는 계시느냐?"
말하였다.
"밤에 가셨다."
"병사들은 몇 명인가?"
말하였다.
"천 명이다."
"장수는 누구인가?"
말하였다.
"옹희호이다."
이일월은 한참동안 말없이 헤아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부하에게 말하였다.
"지금 이광필을 놓치고 옹희호만 잡아가지고 돌아가면 우리가 죽는 것은 분명하니 투항하는 것만 못하다."
마침내 항복을 받아달라고 청하였다. 옹희호는 그와 함께 이광필을 찾아뵈니, 이광필은 후하게 그를 대우하고 관직에 임명하여 심복으로 삼았다. 고정휘가 그 소식을 듣고 역시 투항하였다. - 신당서, 자치통감
다시 한번 실패를 맛본 사사명은 햐앙으로 돌아와 재차 공격을 시도한다. 이에 이광필은 이포옥에게 남성을 맡기고 자신은 중단과 북성을 맡아 적을 방어한다.

3.5.2. 결전


하양성으로 다시 돌아온 사사명은 자신이 세운 재상인 주지로 하여금 중단과 북성을, 그 자신은 남성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이에 이광필은 이포옥을 남성으로 보내 '''3일만 지켜라'''고 명령하고, 스스로는 10월 12일부터 시작된 주지의 공격을 중단에서 방어해낸다.
중단의 공격에 실패한 주지는 북성쪽으로 자신이 지휘하는 전 병력을 집중시키고, 이광필은 이에 맞서 자신이 이끄는 본대 병력을 이끌고 성을 나선다.
이광필이 제장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이 멀리서 나의 기를 보면 나가 싸우는데, 내가 기를 느리게 흔들면 너희들이 임의로 유리한 것을 골라 싸우라는 것이고, 내가 급히 기를 흔들며 세 번 땅에 닿게 하면 모든 병사들은 일제히 들어가야 하는데, 죽기 살기로 하고 '''조금이라도 물러나는 자는 목을 벨 것이다'''."
또 짧은 칼을 가죽신 안에 두며 말했다.
"전투는 위험한 일이고 나는 나라의 삼공[3]이므로 적의 손에 죽을 수 없는데, 만약 싸우다 불리해지면 여러분은 앞에서 적에게 죽고, 나는 여기서 스스로 목을 베어 여러분에게 혼자 죽게는 하지 않을 것이다."
제장이 나가 싸우는데, 잠시 후 학정옥이 달아나 돌아왔다. 이광필은 그 광경을 보고 놀라 말했다.
"학정옥이 물러나면 우리 일이 위험해진다."
좌우에 명해 '''학정옥의 머리를 베라고 했다.''' 학정옥이 말했다.
"말이 화살을 맞은 것이지 감히 물러난 것은 아니다."
사자가 달려와 보고했다. 이광필은 말을 바꾸어주도록 그를 보내었다.
복고회은과 그 아들 개부의동삼사 복고창이 조금 물러나자, 이광필이 또 명령하여 '''그들의 머리를 베라고 했다.''' 복고회은 부자는 사자가 칼을 들고 달려오는 것을 뒤돌아보고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 결판을 내려 했다.
이광필이 연달아 그의 기를 흔들자, 제장들은 일제히 죽기를 한하고 전진했고, 고함소리가 천지를 움직이자, 적병은 크게 무너졌는데, 참수한 것이 1천여 급, 잡은 것이 500이며 물에 빠져 죽은 자가 1천여 명이었다. - 자치통감
어쨌든, 이 전투로 인해 주지는 패배했고, 남성을 공격하던 사사명 또한 이 소식을 듣고 퇴각하면서 하양에서의 격전은 이광필의 승리로 끝났다.
사사명은 이 공방전에서의 패배로 인해 발목이 잡혔다. 하양성에서 이광필이 버티고 있는 한 서진하면 배후가 위태로워질 것이 뻔하기 때문. 따라서 이 전투는 사실상 사사명의 난의 운명을 결정지은 '''결정적인 전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6. 그 외


이시기에 당의 통치가 느슨해지고 토번이 계속 당의 영역을 잠식해 들어오자 현재의 사천성에 있던 공주, 간주, 미주, 융주의 이민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또한 강초원이라는 인물이 8월에 별도의 반란을 일으켰으나 그 규모는 매우 작아 거의 도적떼 수준으로, 얼마 안 가 토벌되었다.
또한 동평장사로써, 1년 전에 어사중승 시절 소금 전매제를 건의, 실행했던 제오기가 건원증보와 쌍중륭변전을 통화시켜 통화량을 크게 늘리자 위조화폐가 대규모로 증가해 화폐가치가 급하락하는 일도 있었다.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제오기를 충주장사로 좌천시켰으며, 제오기를 추천했던 하란진명도 어사대부에서 파면되어 진주 원외사마로 좌천되었다. 거기다 제오기에 대해 원망을 가진 사람이 많아 제오기는 결국 계락에 걸려들어 결국 다음해 1월에 아예 관직에서 재명되고 유배되고 만다.

4. 760년



4.1. 교착상태


사사명은 하북, 하남 일대를 장악하고 낙양에 걸터 앉아서, 이광필은 하양을 기점으로 하동 및 섬주지역을 방어하고 하북, 하남을 노리는 형국으로 서로 대치한다. 1월에 사사명이 이귀인으로 하여금 철기 5천으로 섬주를 공격하게 파견하자 신책병마사 위백옥이 격파하고[4] 2월에 이광필이 회주를 공격하자 사사명이 이를 요격하는 등 서로 주고받는 형국이 지속된 것. 이 과정에서 이광필은 태위 겸 중서령 직위를 받으며 그 위세를 더하게 된다. 이 당시 이광필은 태위, 중서령, 천하병마부수, 지제절도행영, 삭방절도사, 시중, 사공직을 '''모두 겸임'''한다. 이는 후의 곽자의가 누린 것과 비교해도 크게 뒤처지지 않을 정도다.
또한 이 틈을 타서 당항족이 변경을 침략하면서 경기지역[5]을 압박하자 빈·녕등주 절도사의 관할구역을 나누어 부방·단연지역을 '위북절도'로 명명하고 상여규에게 빈녕절도사직을, 두면에게 부방절도사직을 내린 후 한가롭게 지내던 곽자의에게 이를 장안에 머물면서 이를 관장하게끔 한다. 이는 곽자의가 이시기에 누린 높은 위엄과 명성을 빌리기 위함이다.
이러한 교착상태는 1년 내내 지속되었고, 하양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크고작은 교전이 이어진다.

4.2. 어지러워지는 기본질서


사사명이 비록 낙양을 점령하고 그 기세가 한창 강성하긴 했으나 사실 안록산의 전성기 시절에 비하면 약한 편이었다. 기본적인 지지기반도 협소하고 군사력도 적었다. 물론 피해 자체는 만만치 않았지만 이는 장안으로 돌진하는 데 집중했던 안록산과 일단 거점을 제대로 확보하는 것을 우선시한 사사명의 차이로 보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은 사사명을 쉽게 제압하지 못했다. 이는 물론 '''60만이 한큐에 날라간''' 상주 안양하 전투의 참패 때문이기도 하고, 안록산의 난 시기에 이미 당의 힘이 크게 훼손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또한, 이는 '''간신 이보국의 전횡'''과 '''내지절도사들의 전횡''' 때문이기도 하다.

4.2.1. 이보국의 전횡


이보국은 당숙종이 태자시절부터 따르던 환관으로, 분조를 세우고 영무에서 황위에 오르는 것을 주도하는 등의 공적을 세워 신임받던 인물이였다. 그러나 이때에 이보국은 건녕왕 이담을 참소하여 죽게 만들었으며, 전중성의 장관으로 황제의 의복, 음식, 거주, 출행 등 일상적인 생활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였기에 고작해야 종 3품의 관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직으로 대우받은 전중감이란 직책을 역임하면서 '''군사관련 인사를 대부분 주관'''하며 그 세를 강화하고 있었다.
여기에 당현종과 당숙종 사이의 미묘한 관계로 인해 이보국의 권세는 더욱 커진다. 사실 처음부터 당숙종은 당현종에게 어느정도 굽히고 들어갈 수밖에는 없었다. 왜냐하면 당숙종은 '''정식으로 황제위에 오른 것이 아닌''', 영무에서 자의적으로 즉위하고 당현종이 나중에야 이를 허락했기 때문이다. 즉, '''만약 당현종이 후에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면 바로 반역죄로 몰릴만한 행동'''이었던 것. 이로 인해 당숙종은 어떻게 해서든 장안을 탈환하고 당현종을 모셔오는 데 노력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비록 상황으로 물러났지만 당현종의 영향력은 여전히 매우 컸다. 거기다 천보 연간 양귀비에게 빠져 이림보, 양국충 등에게 정치를 상당부분 위임할 정도로 무기력해졌던 당현종은 '''양귀비가 죽은 후 오히려 의욕이 살아난 게 아닌가''' 싶은 모습도 보여주었다. 이는 장안, 낙양을 수복한 다음 안록산에게 붙었던 대신들을 처벌할 때에 확연히 나타난다.
이에 당숙종 및 당숙종 옹립파들은 '''당현종이 복귀해서 자신들을 처벌하려 들지 않을까''' 우려하기 시작한다. 과감한 정변을 통해 위황후나 태평공주를 제압했던 일이나 개원 말엽에 당숙종 이전에 태자로 내정되었던 황태자 및 그 형제들을 죽게 했던 당현종의 전적을 생각하면 이는 충분히 타당한 우려라 할 수 있다. 거기다 당현종이 장안으로 돌아온 후 흥경궁에 거주하면서 그 일대의 주민들과 가깝게 교류하면서 지내자[6] 불안감은 더더욱 커진다. 이때에 대한 자치통감 기록을 찾아보면 '실제로 흥경궁 내의 장경루에 당현종이 올라갈 때마다 지나가던 부로들이 왕왕 우러러보며 절을 하고 만세를 불렀으며, 상황은 항상 장경루 아래에 음식을 준비해놓고 이것을 그들에게 하사하였고, 또 일찍이 장군 곽영예 등을 불러서 장경루에 올라오도록 하여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고 한다. 흥경궁은 당현종이 왕이었던 시절에 머물면서 정변을 성사시켰던 장소라는 상징성을 지닌 곳인 데다 당현종에게 이런 호의적인 민심은 당숙종 및 당숙종 옹립파에게는 적지 않은 불안요소라 할 수 있다.
이보국은 이 틈을 노렸다. 당숙종으로 하여금 당현종을 유폐시키게끔 충동질하고, 이것을 자신의 큰 공적으로 삼아 권세를 굳히려 한 것이다.
"상황께서 흥경궁에 계시면서, 날마다 외부인들과 교통하고 있으며 진현례와 고력사가 폐하께 불리하도록 꾀합니다. 지금 금군의 장사들은 모두 영무에서 공훈을 세운 사람들인데, 모두 몸을 뒤척이면서 불안해하고 있고, 신은 환히 깨닫고는 있으나 해결할 수는 없어서 감히 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황상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성황(현종)께서 자비롭고 어진데,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받아들이시겠는가?"
대답하였다.
"상황께서는 진실로 이런 마음이 없으시겠지만, 그 여러 소인배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천하의 주인이 되시니, 마땅히 사직의 큰 계획을 만들어 아직 싹이 트지 않았을 때에 반란을 없애야지, 어찌 필부들의 효도만을 주창할 수 있겠습니까. 또 흥경궁은 황궁 밖 민가와 서로 섞여있고, 담이 얕아서 들여다보이므로 지존께서 거주하시기에 마땅한 곳이 아닙니다. 대궐 안은 깊고 경비도 삼엄한 데다가 받들어서 영접하여 그곳에 거주하시게 한다면 그곳과 무엇이 다르겠으며, 또 소인배들이 성청을 헷갈리게 하는 것을 막고 끊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면, 상황께서는 만세의 안녕을 누리게 되고, 폐하께서는 삼조의 즐거움이 생기니, 어찌 무슨 손해될 일이 있겠습니까?" - 자치통감
당숙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이보국의 권력은 황실까지 압박할 수 있을 정도로 강성했으며, 황제라면 모를까 상황인 당현종의 처지를 압박하는 데에 크게 무리가 없었다.
결국 이보국은 당현종의 호위병을 지속적으로 줄이고 자신의 영향력 하의 금군들을 움직여 압박하여 결국 고력사, 왕승은, 진현례, 여선원, 옥진공주 등을 당현종에게서 떼어내 귀양보내거나 다른 지역에 거주하게 한 다음 당현종의 거주지를 서내의 감로전으로 옮기게 한다. 이는 사실상의 유폐나 다름없었다.
이에 형부상서 안진경을 필두로 하는 조정의 백관들이 상황(현종)을 문안하게 해달라 하자 이보국은 곧바로 안진경을 좌천시켜 봉주지역의 장사로 보내버려 입을 막는다.
당숙종 또한 이러한 상황을 좋아하지 않았고 이보국을 숙청해 정국을 되돌릴 생각도 한다. 그러나 이미 이보국은 '''황제인 당숙종마저도''' 함부로 터치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권세를 가졌으며, 특히 군대의 인사를 관장하면서 군권을 장악해버린데 대해 당숙종은 두려움마저 느끼고 이를 처내지 못했다고 한다.

4.2.2. 내지절도사들의 전횡


당 조정 내에서 이보국이 횡포를 부려댔다면, 조정 밖에서는 내지절도사들의 횡포가 심각한 문제가 된다. 이들 내지절도사들은 안록산의 진격을 막기 위해, 그리고 사사명의 진격을 막기 위해 설치되었으나,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자신의 강역을 지키기 위해서만 싸우고, 그 이상은 하지 않았다.'''
이는 당 조정의 책임도 일정부분 있다. 내지절도사를 임명하면서 자금과 병력을 준 것이 아니라 대신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주어 '''해당 지역을 통치하면서 그 지역을 기반으로 군대를 조직해서 반란군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 군대를 만들어내기 위해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소모시키면 평시에도 반발을 살 수 밖에 없다. 하물며 난세에 폐허가 된 지역에서 아무 지원도 없이 그렇게 하라고 내보낸 꼴이니 그 과정이 대체 어땠겠는가? 온갖 고생을 겪어가며 휘하 병력을 만들어 낸 입장에서는 자신의 사병과 그 근거지를 지키면 족할 뿐, 공연히 '남의 땅'에 들어가 금쪽같은 병력을 까먹고 싶지 않았던 것.
이러한 문제의 대표적인 예가 760년 11월부터 761년 1월까지 벌어진 유전의 반란. 유전은 송주자사이자 영회서절도부사로써 강·회지방의 군대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요참설이 나돌기 시작하는데다 때마침 절도사 왕중승이 그를 죄주기를 청하자 유전을 회남동·강남서·절서 삼도절도사로 삼고 올려보내면서 몰래 회남동도절도사였던 등경산과 이환에게 유전을 제거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유전은 이를 눈치채고는 오히려 이환을 방심시켜 그의 부절을 얻어낸 다음 곧바로 격문을 돌려 반란을 일으켰다. 이 유전의 반란은 사실 작은 에피소드로 끝날 수 있었으나, 인망이 있었던 유전에 대해 각지의 군대가 독자적으로 호응하거나 호응할 것을 계획하면서 강·회지역의 혼란이 커졌다. 결국 진압되었으나 이는 군권을 가진 절도사 한명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정도의 반란이 일어날 수 있고, 또한 호응 정도에 따라서는 사소한 일이 크게 커질 수 있다는 데서 상당히 의미심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여기다 내지절도사들이 지방 대부분을 장악하면서 당 조정으로 들어가는 세수가 부족해졌고, 그에 따라 토벌군의 핵심이 되어야 할 금군 및 중앙군들이 대부분 간판만 내건 상태로 전략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물자와 자금이 부족해졌는데 그 이유는 대운하가 진작에 활용이 불가능한 상태로 전략하면서 강남의 물자를 장강을 통해 형북까지 거슬러 올라오게 한 다음 거기서 많은 인력을 동원해 옮겨야만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전의 당에는 여러 금군이 존재했으나, 이때 이후에는 사실상 '''신책군'''만이 의미있는 군대로써 존재하게 되며, 이 신책군의 군권을 장악하는 것이 중요하게 된다. 당헌종 이후의 환관들의 횡포 또한 이 신책군의 지휘권을 장악하면서 이루어진다.

4.3. 그외


당의 지방방위력이 급감하면서 토번의 침략활동은 계속되었다. 거기다 토번 외에도 여러 이민족들이 거듭 공격해와 당의 영토 상실은 가속화된다. 이에 당 조정에서는 곽자의를 다시 일선으로 내보내 이러한 이민족들을 막게끔 한다.

5. 761년



5.1. 망산의 패배


상황이 위급했던 759년의 사사명의 공세를 이광필의 활약을 통해 막아내고, 이후 한해에 걸처 대치국면을 유지하면서 전력을 증강한 당은 반격의 기회를 노리게 된다.
특히 이때에 누군가가 "낙양에 있는 장사(반란군 병졸)는 모두 연인인데 오래 수자리를 서서 고양에 돌아갈 생각을 하여 위아래가 마음이 떨어져 있으니 이를 치면 격파할 수 있읍니다."는 건의를 했고, 섬주 관군용사 어조은이 이를 믿고 당숙종에게 건의해 이광필로 하여금 낙양을 수복하라는 칙령을 내리게 한다. 그러나 전선에서 군을 총지휘하던 이광필의 판단은 달랐다. 이광필은 이에 대해 "도적들의 칼끝은 아직도 예리하니, 아직 가볍게 나아갈 수 없습니다."고 주문을 올리며 아직 때가 이름을 고했다.
그러나 예상 외의 공격 동조자가 나타난다. 바로 '''복고회은'''이 공격론에 가담한 것이다. 복고회은은 이전부터 이광필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거기다 이광필이 엄하게 군율을 세우자 이광필을 꺼리게 되었는데, 결국 이때에 어조은의 공격론에 동조하여 조정에 '''낙양을 탈환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결국 이로인해 조정에서 거듭 공격명령이 내려왔고, 이광필은 하양을 이포옥에게 맡긴 후 낙양을 공격한다. 이때에 어조은의 신책군과 신책절도사 위백옥 또한 이광필과 합류해 진격했다.
2월 23일, 낙양성 북쪽 망산까지 전진한 당군은 여기서 다시한번 논쟁이 벌어진다. '''어느곳에 진지를 세울 것인가'''를 가지고 이광필과 복고회은이 서로 대립한 것이다. 이광필은 방어에 유리한 험지를, 복고회은은 공격에 유리한 평야에 진을 치자고 했던 것.
원칙적으로 하북절도사등사이자 천하병마부원수인 이광필의 의견에 따라야 했다. 그러나 복고회은은 어조은과 손을 잡고 이에 반대했으며, 이로인해 당군은 진영을 확정짓지 못하고 이리저리 이동한다.
사사명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당군의 진지가 아직 확정되지 않은 틈을 타 공세를 가한 것. 이에 당은 패배하여 수천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고, 군사물자와 병기들 대부분을 상실, 이광필과 복고회은은 황하를 건너 문희(산서성 문희현)로 몸을 피했고 어조은과 이백옥은 섬주로 달아났다. 하양 방위를 맡았던 이포옥 또한 하양을 버리고 달아난다. 이후 이광필은 표문을 올려 그 자신에게 패전 책임이 있으니 벼슬을 깎아 달라 요청했고, 당 조정은 이광필을 개부의동삼사·시중, 하중절도사로 벼슬을 깎는다.
이 전투는 '''뛰어난 두명의 명장보다 한명의 평범한 장수가 낫다'''는 격언대로 진행된 것. 이광필이나 복고회은 둘 다 명장이라 불리기 부족함이 없는 장수들이였지만 결국 둘이 지휘권을 다투다가 대패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로써 사사명은 배후를 위협하던 하양을 기여코 획득하고 다시 서진할 기회를 잡게 된다. '''그러나...'''

5.2. 사사명의 죽음


보통 무장들은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피튀기는 사투를 벌이는 생활을 하다 보니 성격적 측면에서 '포악하다'는 평을 받을 때가 많다. 이는 물론 기록하는 사람들이 보통 문인이기에 무인들을 낮추어 보기 때문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무인들의 생활환경 자체가 성격을 거칠게 만든다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사사명 또한 마찬가지였다. 기록에 따르면 사사명은 '시기하고 잔인하며 죽이기를 좋아하여 여러 밑에 있는 사람들이 조금만 뜻대로 되지 아니하는 경우에 움직였다 하면 족멸시키기에 이르러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보장하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사사명이 반역자인데다 이민족이고, 천시받는 무인이라는 점 등을 고려한다고 해도 성격적 측면에서 꽤 난폭한 인물이였다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거기다 사사명은 맏아들인 사조의보다는 어린 아들인 사조청을 더 사랑했으며, 여차하면 사조의를 죽이고 사조청을 후계자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사조의는 나름 군심을 사고 있었고, 사사명의 이러한 의도를 사조의가 눈치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망산의 싸움에서 이광필, 복고회은을 대파한 후 사사명은 사조의로 하여금 장안을 공격할 수 있는 진격로를 확보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섬성을 지키던 위백옥이 훌륭한 수비를 보이며 이를 막아서자 사사명은 이참에 후계자를 바꿀 생각으로 사조의를 겁쟁이라고 크게 질책하면서 참수하려고까지 한다. 좌우에서 이를 말리자 사사명은 사조의로 하여금 삼우성(삼면만 성을 쌓고 한쪽은 산에 기대어 쌓은 성)을 하루만에 쌓으라 명령했고, 일을 진행하던 도중에 갑자기 또 불쑥 나타나 성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책망하면서 스스로 감독해 마무리지은 다음 사조의에게 "섬주에서 이길 때까지 기다렸다가 끝내 이 도적놈을 참수하겠다."는 폭언을 내뱉고, 사사명의 성격과 의도를 짐작한 사조의는, 결국 사사명을 죽일 생각을 가지게 된다.
사사명의 심복이자 호위부대 소속이였던 마열, 채문경, 허숙기의 아들인 허계상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 사조의는 녹교역에서 머물던 사사명을 급습, 눈치채고 달아나던 사사명을 체포했으며, 사조의는 일단 사사명을 살려놓은 상태로 재상이자 후군을 이끌던 주지에게서 복종을 받아낸 다음 사사명을 목매달아 죽여버린다. 사사명이 안경서를 죽일때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라는 명분을 내세웠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사조의는 사사명의 뒤를 이어 스스로 칭제했으며, 연호를 현성으로 고첬다. 비밀리에 범양에 사람을 보내 사조청과 그 생모인 신씨, 그리고 사조청의 주변 인물들을 제거할 것을 명했고 사조청을 따르는 일파가 이에 저항하여 범양에서 내전이 발발, 몇달에 걸처 수천명의 사망자를 낸 끝에 사조청을 제거하고 범양을 확보한다. 사조의는 가장 중요한 핵심적 근거지인 범양을 이회선에게 맡기고 범양윤·연경 유수로 삼았다.
사조의는 이렇게 사사명의 뒤를 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안경서보다 더 심했다. 사사명의 수하 절도사들은 대부분이 안록산이 거느렸던 옛날 장수들로, 사사명과 동급이였다. 그런 그들은 사사명이라면 또 모를까 그 아들의 명령을 받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으며, 사조의가 여러차례 불렀으나 오지 않고 형식적인 예속관계만을 유지했고, 사조의의 연은 그 세력이 빠르게 와해되기 시작한다.
여기에 10월에 이광필이 다시 하남부원수 직에 복귀하여 사조의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반란은 진압 기조로 들어섰으나 당 또한 국력 소모가 심각했기에 전황은 소모전으로 치달으며, 사사명의 통제를 벗어난 절도사들, 그리고 당의 통제력 약화를 틈탄 절도사들의 독립적인 행보로 인해 정국은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5.3. 혼란 속의 전황


당은 망산에서의 패배의 충격을 최소화했고 연은 사사명의 죽음으로 인해 그 세력이 와해되었으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당이 다시 밀어붙이는 정국이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이는 각지의 군대와 이를 지휘하는 지휘관들이 독자적인 행보를 걸었고, 추가적인 반란이 거듭 이어지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4월 28일, 재주자사 단자장은 동천절도사 이환과의 불화 끝에 사천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단자장은 본래 당현종이 촉으로 피란갔을때 공을 세웠고, 날래고 용감하다는 평을 들었는데, 이환이 그를 교체하려 들자 반란을 일으켜 이환을 성도로 쫓아내고 사천지역의 광범위한 영역을 장악했으며, 수주자사 괵왕 이거를 살해하고 난 후 스스로 양왕을 칭하며 독자적인 연호(황룡)을 세우는 등 독립세력으로 성장하고자 했다. 이에 서천절도사 최광원이 개입하여 이환과 함께 단자장을 공격해 5월 16일 이를 진압한다. 그러나 평온한 것으로 여겨졌던 사천지역에서도 이러한 반란이 일어난 건 그만큼 사회가 불안정했다는 표시이다.
또한 사사명을 따르던 절도사(활·정·변 절도사)였던 영호창이 사조의에 반대하여 당에게 귀순하자 당은 영호창을 활·위등육주(활주, 위주, 상주, 패주, 위주[7], 박주) 절도사로 삼아 세력을 유지시켜 주었다.
평로절도사 후희일은 사사명의 난 기간동안 범양번진과 거듭 싸워 이기고 지고 했는데, 이해 12월 사조의측이 해족을 움직여 평로번진의 배후를 공격하자 군을 총동원해 범양을 지키던 이회선의 전선을 뚫고 해당 주민 대다수와 함께 남하, 발해만을 건너 등주에 상륙한 후 황하를 건너 연주까지 내려간다. 평로번진에는 고구려 유민들이 많이 존재했다 알려져 있고, 이정기가 유력 인사로 존재했는데, 이러한 남하 결정에 이정기가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 또한 '''조정의 명령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판단해 남하한 걸''' 사후승인한 것이다. '치정'이라는 이름을 받게 된 것은 762년의 일.
10월에는 강·회도통 초원이 이장용을 초주자사로 임명했는데, 장기간의 전쟁으로 인한 혼란 속에 관야의 물자가 많이 사라지자 이장용이 그걸 가지고 책망할 것을 두려워했으며, 마침 그의 아장이였던 고간이 이걸 가지고 이장용이 물자를 빼돌려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참소하자 이장용이 관직을 버리고 달아나다가 잡혀 죽는 일도 발생했다. 이에 최원은 물자 부족 상황을 파악하고 이장용에게 책임을 돌려버리는 일도 있었다.
11월에 어사중승 원재가 호부시랑으로 전임하고, 탁지·주전·염철 겸 강·회전운등사에 임명하여 당 조정의 재정상황을 살피고 조운하는 일을 전담했는데, 8년에 걸친 전란기간동안 부족한 조운을 일일히 찾아 징수하는 등 가혹한 수탈을 저질렀고, 이로인해 도적떼가 번성하여 후에는 수십만에 달하는 일도 발생했다.
이런 식으로 상황이 혼란스러워지자 당숙종은 10월에 이광필을 하남부원수·태위·겸시중으로 삼고, 하남, 회남동·서, 산남동, 형남, 강남서, 절강동·서 지역의 팔도행영절도(절도사 소속 군 타 지역으로 파견나간 군영을 '행영절도'라 칭한다.)를 총괄하는 중책을 맡겨 군을 통솔하게 하여 통제력을 회복하려 하기도 했다.

5.4. 조정 내 : 이보국의 전횡과 당숙종의 견제


이 와중에도 당 조정 내에서는 이보국이 거듭 전횡을 저지르며 조정 내를 어지럽혔다. 거기다 이보국은 황후였던 장후와 손을 잡고 황실 내에까지 강한 영향력을 끼첬는데, 당숙종이 황궁 내에 유폐되다시피 한 당현종을 알현하려 했으나 장후가 두려워 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에 기고만장한 이보국은 병부상서를 겸하여 군권을 더욱 확실히 쥔 후 재상직까지 노린다.
그러나 당숙종은 이미 이보국의 전횡을 억제하고자 생각하고 있었으며, 기존의 재상들을 동원해 이보국의 재상 취임을 막는 등 여러 수단을 동원하여 이보국을 견제한다. 그러나 이보국의 세가 너무 강해 그를 제거하지는 못했다.

5.5. 그외


9월 21일 당숙종은 자신에게 바쳐진 존호를 없애고 또한 연호도 없앴다. 따라서 '''원칙적으로는''' 그냥 원년이 되는 것. 그리고 음력 11월을 매해의 첫째 달로 하고 사면령을 내렸으며 인재를 천거할 것을 명했다. 이는 이런 혼란스런 정국을 수습하기 위한 '''자기반성'''적 성격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의 혼란상을 보면 알 수 있듯 '''그게 잘 되진 않았다.'''

6. 762년~763년



6.1. 하동의 폭동와 진압


삭방번진, 하동번진, 진서번진, 북정번진의 네 번진은 안사의 난발발 이래 당군의 주력 부대로써 오랫동안 활약해왔다. 특히 하서, 농우번진이 동관에서의 대패와 거듭되는 토번의 침구로 인해 그 세가 거듭 약해지면서 그 중요도는 갈수록 더해갔고, 그 병사들도 그들이야말로 나라를 지탱하는 버팀목이라는 자긍심이 높아졌다.
그러나 전란이 길어지면서 국고는 차츰 바닥을 드러내고, 그로인해 군사들에게 줄 월급마저 부족해지기 시작하자 이 네 번진의 병사들에 대한 대접이 소흘해지게 되고, 이에 불만을 품기 시작한다.
특히 엄격한 군기와 능숙한 일처리로 하동진을 꽉 잡고 있던 왕사례가 병으로 사망(761년 사망 추정)하면서 군기가 해이해지고, 이들이 가지고 있는 높은 자부심과 결합하여 이들은 결국 '''자신들을 지휘하던 절도사들을 죽이고 스스로 절도사를 세우며, 자신들의 관할 구역을 약탈하는 폭거'''를 저지르고 만다.
시작은 하동번진부터였다. 왕사례는 하동절도사를 역임하면서 물자를 많이 비축해 군대에 쓰일 것을 제하고도 쌀만 100만여 곡을 모았고, 심지어 이중 50만여 곡을 식량부족으로 고생하던 장안에 보내겠다 할 정도였다. 그러나, 왕사례가 죽고 나서 그를 대신한 관숭사은 왕사례처럼 엄격한 인물이 아니었고, 거기다 부하들을 너무 믿고 일을 맡기다 보니 결국 몇달만에 50만여 곡에 달하던 곡식이 고작 1만여 곡만 남아버렸다.
이에 당 조정은 등경산을 하동절도사로 임명하고 유출된 곡식들을 찾으라는 명을 내렸고, 등경산은 이를 철저히 수행하려 들어서 식량을 빼돌린 장병들이 두려워했는데, 어떤 비장을 사형시키려던 등경산이 그만 말을 받고 죄를 감해주는 일이 생기자 '''"우리들의 값어치가 한 필의 말에도 미치지 못하는가?"'''를 외치며 봉기해 등경산을 죽여버린다.(2월 3일)
이에 당황실은 이 일은 등경산이 잘못한 일이라고 무마하면서 봉기을 일으킨 병사들이 원하는 절도사였던 신운경(이전까지 도지병마사이자 대주자사였다.)을 절도사로 세워줬다. 그러나 이로인해 여타 번진에서도 비슷한 일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하동번진 다음엔 삭방번진이였다. 이전부터 이국정은 군사를 다루는 것이 엄격하여 병사들에게 그리 인기가 없었는데, 비축한 식량이 떨어져 병사들이 배를 주리게 되자 난을 일으킬 생각을 한 돌장(돌격부대 지휘관) 왕원진이 병사들을 선동해 봉기, 삭방 등 여러도의 행영도통인 이국정을 죽여버리고 성을 점거했으며, 이 소식을 들은 진서, 북정행영의 병사들도 절도사 여비원례를 죽이고 비장 백효덕을 추대하여 절도사로 삼고 주변을 심하게 약탈하였다.
오랫동안 당군의 주축이 된 이들 번진의 병사들이 이렇게 대대적으로 봉기를 일으키자 당 조정에선 비상이 걸린다. 사조의측과 합류한다면 말 그대로 '''완전히 끝장'''날지도 모르기 때문. 때문에 당 조정에선 곽자의를 분양왕으로 삼고 이런 봉기가 일어난 지역 전체를 관장하는 임무를 맡기고 지삭방·하중·북정·노택절도행영 겸 흥평·정국등군 부원수로 삼고 국고를 털어 비단 4만 필·포 5만 단·쌀 6만 석을 마련해 곽자의에게 맡겨 이들 지역에 가서 병사들을 위무하고, 봉기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곽자의는 '''언제나처럼''' 이 일을 깨끗하게 해결한다. 곽자의가 삭방번진에 도착하자 왕원진은 '나 덕분에 복귀했으니 곽자의는 나를 칭찬해 주겠지' 하는 착각을 하면서 곽자의에게 나왔지만 곽자의는 "너는 적의 접경에 있으면서 번번이 주장을 죽이니, 만약에 도적이 그 틈을 탄다면 강주(사서성 신강현)를 없애겠다. '''내가 재상이 되어서 어찌 한 졸병의 사사로움을 받겠는가?'''"라고 일갈하면서 왕원진, 그리고 그와 함께 모의한 40명을 체포한 다음 모두 사형에 처했다. 이 소식을 들은 하동절도사 신운경은 곧바로 등경산을 죽인 사람들을 조사했고, 연관된 사람들을 처형했다. 이에 진서, 북정행영 또한 겁을 먹고 복종했으며, 한때 위기의식을 불러왔던 봉기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이 또한 곽자의의 여러 공로 중 하나로 손꼽힌다.
7월, 새로 즉위한 당대종은 곽자의를 도지삭방·하동·북정·노·의·택·심·정등절도행영 및 흥평등군 부원수로 삼았다. 이는 곽자의로 하여금 하동지방 전체를 총괄하여 사조의를 제압하라는 명령이였다. 그러나 새로이 권력을 잡은 정원진이 곽자의를 참소했고, 결국 곽자의는 자신이 맡은 부원수 및 절도직을 모두 포기하고 만다.

6.2. 혼란스러운 전황과 통제를 벗어나는 절도사들


병사들의 폭동으로 곽자의가 나서야 했던 하동을 제외한 여타 지역의 전황은 '''이전해와 마찬가지로 혼란스러웠다.''' 각지의 절도사들은 당과 연(사조의) 중 어디 한쪽 할 것 없이 독자적으로 움직였으며, 안록산의 난 당시처럼 일관된 전략은 보여주지 않는다. 거기다 이 절도사들은 조정의 말도 무시하기 일쑤였기에 더더욱 전체적인 전황은 살피기 어렵다. 그나마 이광필이 홀로 분투했지만 전황은 '''그 군략이 곽자의에 버금간다는 평을 받는 명장인 이광필마저도 혼자서는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6.2.1. 이광필의 분투


전해에 하남부원수로 복귀한 이광필은 다시 전역을 주도하기 위해 활발히 활동했다. 1월에 허주(하남성 허창현)을 저령하고 영천태수 이춘을 사로잡은 이광필은 구원을 위해 달려온 사조의의 장수인 사참을 성 아래에서 다시 한번 격파한다.
5월, 사조의가 직접 군을 이끌고 송주(하남성 상구현)을 포위공격했다. 마침 식량이 다 떨어졌기에 송주자사 이잠은 항복 여부를 고민했는데 민간에서 징집한 군대의 부지휘관 직책인 과의였던 유창이라는 인물이 "창고 안에는 누룩이 수천 근이 있으니 청컨대 이것을 갈아서 먹게 하면 스무 날이 지나지 않아서 이 태위(이광필)가 반드시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성의 동남쪽 귀퉁이가 가장 위험하니, 저 유창이 청컨대 이곳을 지키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하며 전의를 북돋운다.
소식을 들은 이광필이 임회(사주의 처소, 강소성 웉현 회하의 북안)에 도착했을때 휘하 제장들은 사조의의 군대가 강하니 남쪽으로 가서 양주를 지키자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광필은 "조정에서는 나에게 의지하여 편안하거나 위태로워 하고 있는데 내가 다시 물러낫 위축되면 조정에서는 무엇을 바라보겠소? 또 내가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곳으로 나가면 도적들이 어찌 우리가 많은지 적은지를 알겠소?"라고 하면서 병사들을 독전해 연운절도사 전신공과 함께 서주로 나아가 사조의를 공격, 대파한다. 이후 이광필은 서주에 머물며 군령을 내리고 여러 주의 군대를 통솔하여 동하(중원의 동부)를 안정화시켰다.
그러나 동하 지역은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역의 일부일 뿐이였다. 거기다 8월에는 태주(절강성 임해시)의 도적떼 두목이던 원조가 '''20만'''에 달하는 무리를 모으고 여러 주를 함락시키며 연호까지 고치는 등 결코 적지 않은 규모의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광필이 진압 책임을 맡으면서 연 세력과의 전투에서 이탈한다. 원조의 반란군은 결코 약한 세력이 아니었으며, 이광필이 직접 평정에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신주, 온주, 명주를 함락시키는 등 그 세가 강성했다. 이 반란은 사조의가 죽은 후에야 끝이 났다. 이로인해 이광필은 사조의와의 싸움에서 한발 물러설 수밖엔 없었으며, 10월의 당-회흘 연합군 편성 이전까지 사실상 전선에서 이탈한다.

6.2.2. 평로치청번진의 등장


이광필 외에 활동적으로 움직이며 격전을 벌인건 평로절도사 후희일이였다. 전해 12월에 2만여 명과 다수의 유민들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남하한 후희일은 전신공[8]과 내원호[9]과 연주에서 합류해 활동에 들어간다. 2월 18일 회서절도사 왕중승이 사조의군에게 사로잡히자 회서 일대가 사조의에게 넘어갈 뻔 했는데 이들 셋이 변주(하남성 개봉시)를 공격하여 사조의로 하여금 병사들을 물리게 함으로써 구원하는 데 성공한다. 이런 후희일의 전공을 높이 산 당 조정은 5월 6일 후희일을 평로·청·치등육주(청주, 치주, 제주, 기주, 밀주, 해주)절도사로 임명한다. 이후 청주번진은 '평로' 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것이 후의 평로치청번진의 시작이다.''' 또한 이런 작전활동 중에 평로번진 내에서 병마사였던 이회옥(후의 이정기)는 적지 않은 전공을 세우며 발언권을 강화하게 된다.

6.2.3. 절도사 내진의 죽음


이시기엔 여러 절도사들이 사실상 독자적인 행보를 걸었다. 이에 당 조정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이들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려 했다. 그러던 와중에 산남동도절도사였던 내진이 사망하는 일이 터진다.
내진은 양국충이 추천한 인물로, 영천태수 시절 '내작철'('작철'이란 쇠붙이를 씹어먹는다는 말이다. 즉 그만큼 용맹하다는 것.)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용맹스런 맹장 중 하나였다. 이후 그는 회남서도절도사직을 역임하며 영왕 이린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고, 양경 탈환 후 하남·하동지역을 평정하는 데 행동을 같이했으며, 섬·획·화주절도사직을 거처 산남동도절도사직에 부임(760년)했다. 이런 그의 경력은 여타 절도사들에 비해 딱히 앞서진 않지만 크게 뒤처지지도 않는다 할 수 있다. 또한 산남동도절도사는 오늘날의 호북성 일대에 위치해 있으며(치소는 양주), 대운하가 전란으로 막힌 동안 장강을 거슬러 올라 장안으로 물자를 공급하는 중간지점에 있어 매우 중요한 지역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762년, 당숙종은 내진을 장안으로 부른다. 그런데 이 내진이라는 인물은 2년여동안 자신의 관할구역에서 생활하는 것을 즐겼고 휘하 장졸들과도 매우 친밀한 관계였기 때문에 결국 장안으로 올라가다가 '''등주에서 되돌아온다.''' 불렀는데 오지 않자 조정에서는 내진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는 건 당연한 일. 거기다 인접한 지역의 절도사였던 형남절도사 여인, 회서절도사 왕중승에 사신으로 갔던 환관까지 내진을 참소한다.
결국 당 조정은 일단 내진에 대한 처벌로써 산남동도번진에서 상주·금주·균주·방주를 나누어 별도로 관찰사를 내고, 대신 한개 주(영주 또는 복주)를 추가하여 여섯 주만을 관장하게끔 한다. 이전까지 산남동도번진은 양주, 등주, 수주, 당주, 안주, 균주, 방주, 금주, 상주의 9개 주를 관장한 것을 생각하면 단순계산으로도 1/3의 영역이 날아간 셈. 이에 내진은 불만을 품었고, 때마침 왕중승이 사조의의 장수였던 사흠양에게 포위공격을 당하자 내진은 왕중승을 구원하지 않고 패해 죽게끔 내버려두고 만다. 이로인해 당 조정의 의심은 한층 더 깊어졌다.
여기에 내진의 행군사마였던 배융이 내진의 지위를 빼앗고자 획책하면서 몰래 표문을 올려 참소하자 결국 당숙종은 배융의 의견을 받아들인다. 때문에 내진에게 회서와 하남의 16개 주(신주, 안주, 기주, 황주, 광주, 면주,진주, 예주, 허주, 정주, 변주, 조주, 송주, 영주, 사주, 여주, 다만 이중 몇개 주는 사조의가 장악한 지역이다.)를 관장하게끔 하여 안심시키고는 비밀리에 칙령을 내려 배융으로 하여금 양·등등주 방어사로 삼고 내진을 대체하게끔 한다.
그러나 내진은 자신이 승진했다는 소식을 반기지 않았다. 엄청난 바보가 아닌 이상 난세에서 절도사까지 오른 인물이 형식적으로 승진한 척 하고 실제로는 영향력을 축소시키려는 공작을 모를리가 없다. 그래서 그는 회서에 양식이 없다는 이유로 옮기는 것을 연장해 달라고 하면서 동시에 휘하 장졸들에게 넌지시 일러 자신을 머물게 해달라고 요청하도록 했다. 때마침 당현종, 당숙종이 모두 죽고 당대종이 즉위함과 동시에 조정 내에서 정변이 일어났기에 그의 요청은 쉽게 받아들여졌다. 이후 이 사실을 모르는 배융이 병사 2천여 명을 이끌고 내진의 지위를 빼앗고자 도착하자 내진은 이를 공격해 배융을 사로잡아 장안으로 보냈고, 배융은 얼마 못가 처형당했다.
그러나 어쨌든 조정이 불렀는데 가지 않았다는 것은 잘못임에는 분명했고, 내진은 딱히 독립 세력화할 생각도 없었기에 2개월 후인 762년 8월, 내진은 조정에 들어가 조현하고, 오지 않은 죄를 용서를 빌었다. 당대종은 그를 환영했으며 9월에는 병무상서·동평장사·지산남동도절도사로 삼아 후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해 1월, 내진은 당대의 간신이자 권신인 정원진의 손에 걸려들고 만다. 정원진은 이전의 권신인 이보국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으며, 이보국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 있던 군사 분야도 손에 넣고 싶어했는데 그만 내진이 걸려든 것. 정원진은 내진이 사조의측과 짜고 왕중승을 구원하지 않았다고 참소했으며, 결국 1월 28일, 내진은 관직이 깎이고 파주로 유배가다가 도중에 처형당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절도사들이 조정에 가지는 신뢰도가 크게 떨어졌고, 특히 정원진에 대해 분노하게 되었다. 그들과 동격인 내진이 '''속아서 장안에 갔다가 죽임을 당했다''' 여긴것. 반대로, 당 조정에서도 절도사들이 잘 통제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호 불신은 이후에 절도사 난립시대를 조성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6.3. 조정 내에서의 혼란


하동에서는 병사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여타 지역에서도 복잡다단한 전황이 계속 이어지는 동안 당 조정 내의 상황도 또한 혼란스러웠다. 당현종, 당숙종의 죽음과 그 후의 정변, 권신들의 권력 암투가 이어졌던 것.

6.3.1. 당현종의 죽음


5월 3일 당현종이 신룡전(혹은 태극궁 감로전)에서 사망한다. 나이는 일흔 여덟살로 장수한 편. 어찌되었건 치세 초반에는 명군이었으므로 당태종이 사망했을 때도 그랬지만 당현종에게 호의적이였던 조정대신들 및 백성들은 그에게 애도를 표했으며, 이민족 관리들 중에는 애도의 뜻으로 얼굴을 베고 귀를 자르는 사람이 4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또한 귀양갔던 고력사는 당현종의 사망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다가 피를 토하다 죽었다고 한다.
당현종의 죽음과 중병에 걸려 드러누운 상태였던 당숙종의 병환은 피튀기는 정변의 시발점이 된다.

6.3.2. 장황후의 정변시도와 당숙종의 죽음


장황후는 영무에서 출산 후 사흘만에 일어나 병사들의 옷을 바느질했다는 미담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나, 또한 권신이자 간신이였던 환관이보국과 손을 잡고 건녕왕 이담을 죽게 만들거나 정사에 관여하여 청탁하는 등 악행이 더 많은 인물이였다.
그러나 당숙종 말년에 장황후는 이보국과 사이가 좋지 않게 된다. 이미 이보국은 자신의 권세가 컸기 때문에 딱히 장황후가 필요하지 않았고, 장황후 자신 또한 권세를 휘두르는 데 이보국이 방해가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때 이보국은 같은 환관이며 궁궐 내의 궁수들을 지휘하는 직책인 내사생사 직위에 있는 정원진을 자신의 패거리로 끌어들여 군부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고 있었으며, 장황후가 권력투쟁에서 밀리는 경향이 역력했다.
여기에 당숙종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급해진 장황후는 정변을 시도한다. 처음에는 태자(이숙)을 자기 편으로 삼아 군사력을 동원하려 했으나 태자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는 사이가 좋았던 형제인 이담을 죽인 것도 있고, 태자 자신도 장황후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꿩 대신 닭이라고 궁녀 손씨 소생인 월왕 이계를 끌어들인 후 사병 200여 명을 동원, 태자를 불러들여 억류하고 정권을 잡고자 시도한다.(5월 16일)
그러나 정원진과 이보국은 이를 눈치채고 있었다. 태자에게 장황후가 정변을 시도하려 한다는 것을 태자에게 알린 이보국은 자신의 영향력 하에 있는 금군을 동원해 장황후와 월왕 이계, 그리고 그 수하였던 단항준과 주광휘 등 100여 명을 체포하여 정변을 사전에 제압해 버린다.
병들어있던 당 숙종은 정변과 진압 기간에 있었던 혼란 와중에 황후를 억류당하는 등 심적으로 많은 충격을 받았고, 결국 2일 뒤에 사망한다.(5월 18일) 항년 52세. 이후 이보국은 장황후와 이계, 그리고 연왕 이현을 죽인 후에 태자를 궁궐로 데려와 황제로 즉위시킨다.(당대종 즉위, 5월 20일) 이 일은 '''당나라에서 환관이 황제 즉위를 주도한 최초의 사례'''로 여겨진다.

6.3.3. 정원진의 정권 탈취와 이보국의 몰락


이보국은 영무에서 당숙종이 황제로 즉위하는 결단을 내리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이후 군부의 인사 업무에 깊이 관여하면서 그 세력을 키워나갔고, 장황후의 정변을 조기에 진압한 후 당대종을 즉위시켰다. 두 황제의 즉위에 큰 공이 있었던 것.
그러나 이로인해 이보국은 교만해지고 또한 횡포함이 더욱 심해진다. 당대종은 이보국을 처음부터 위험인물로 적대시하고 있었으나 이보국이 금군의 지휘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때문에 일단 이보국을 '''상부'''라 부르며 이름을 부르지 않고, 모든 업무에 있어 자문을 듣는 등 그를 추켜세우는 모습을 보여 안심시킨다.
또한 이보국이 꿈에 바라마지 않던 삼공의 지위(사공)과 재상직(중서령)까지 주기도 했다.(6월 4일) 이보국은 정말 재상이 되고 싶어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당숙종이 죽기 전인 3월에는 전해에 자신이 재상이 되는 것을 반대했던 소화를 파직시켜 버릴 정도였다.
그러나 이보국은 오래가지 못했다. 자신과 한패였던 정원진이 이보국이 자리를 노리고 비밀리에 정치적 공세를 지속했던 것. 정원진은 금군 중에서도 궁궐을 직접 방비하는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권을 바탕으로 권력을 휘둘러온 이보국도 이런 정원진의 공세에 밀려날 수밖엔 없었다. 결국 6월 11일 이보국은 행군사마와 병부상서직에서 파직되어 군권을 상실했고, 정원진을 대판원수 행군사마로 삼음과 동시에 이보국을 황궁에서 내보내 밖에 있는 집에 살게 만들었으며, 13일에는 중서령에서도 파직시켰다.
또한 이와 동시에 당대종은 이보국이 자신의 영향력을 총동원해 일을 벌이는 것을 막기 위해 작위를 올려 박육왕직을 내려줌으로써 달래기도 하는 신중한 행보를 보였다. 이보국은 자신이 권력을 상실했음을 파악했고, 또한 영향력을 동원해 금군을 움직여 본다 해도 정원진을 이길 수 없으리라 생각했기에 조용히 물러났으며, 정원진이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된다.
762년 10월 17일, 이보국은 자기 집에서 암살당한다. 배후에는 당대종이나 정원진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당대종은 이 소식을 듣고 겉으로는 후하게 장례를 치뤄 주었다. 이로써 한때 정국을 주도하던 이보국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보국이 사라진 후에도 조정 내의 상황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정원진은 이보국에 못지 않은 간신이였으며, 이보국의 위상을 자신이 모두 흡수하기 위해 여러모로 무리수를 많이 두었다. 위에서 언급된 절도사 내진의 죽음은 정원진에 의한 것이였으며, 곽자의 또한 정원진의 거듭된 참소에 해를 입을까 두려워하며 지금까지 자신이 받은 조서 전부를 바치고 직위또한 내려놓게 된다.

6.4. 회흘의 개입과 전쟁의 종결


당 조정 내에서는 환관들의 권력투쟁이 일어나고, 또한 당의 국력은 기나긴 전란으로 인해 바닥이 나기 시작했으며, 사조의의 연 세력은 정국을 주도할 능력이 없고, 각지에서는 절도사들의 국지전이 일어나지만 큰 변동은 없는 꽉 막힌 정체상태가 해소된 것은 10만여 병력을 동원한 회흘(위구르 제국)의 개입 때문이였다. 당과 연 모두 회흘의 지원을 얻기 위해 발벗고 나섰으며, 결국 회흘이 당의 편을 들면서 이 기나긴 전란은 종지부를 맺게 된다.

6.4.1. 회흘의 개입


전황이 정체된 것을 해결하기 위해 당과 연 양측이 모두 회흘에 눈을 돌린 것은 762년 9월여였다. 이미 힘이 거의 다 빠진 양측은 급성장한 회흘을 무시할 수가 없었던 것.
이때 당시 회흘은 무서운 기세로 급성장하고 있었다. 안록산의 난 때의 참전시까지만 해도(757년) 회흘은 비록 북방 스텝초원지대의 가장 유력한 세력이긴 했어도 완전한 통일 유목제국이라 하기엔 모자랐었으나, 당의 편에서 참전하면서 막대한 재물과 권위(당황실의 공주를 가한이 아내로 맞이했다.)를 획득하고 그 힘을 토대로 5년여 만에 완전한 통일 유목제국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를 인식한 양측은 회흘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그 힘을 토대로 전국을 뒤집을 시도를 하게 된다.
손쓰는 것은 사조의측이 빨랐다. 당대종이 중사 유청담을 사신으로 보냈을때는 이미 사조의측이 회흘의 뵈귀 가한을 설득해 출병을 한 상태였던 것. 유청담은 회흘측에게 당 대종이 예전에 회흘과 함께 싸웠던 적이 있는 전우라는 점을 강조하며('''"바로 예전의 광평왕이었으며 엽호와 함께 양경을 수복한 분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안록산의 난 참조) 회유를 시도해 보았지만 당의 국경선 근방 주와 현들의 군사시설들이 폐허가 된 것을 본 회흘측은 당을 가볍게 보고 사조의측의 의견쪽으로 기울어졌다.
회흘이 10만여 군대를 동원해 국경선을 넘었다는 소식을 들은 당은 비상이 걸렸다.[10] 당대종은 전중감 약자양을 파견해 회흘측을 접대하게 하였고, 약자양의 접대를 받은 회흘측은 복고회은을 만나보기를 요청했다. 과거 회흘의 비가월 가한[11]이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아내를 요구했을때 당숙종이 복고회은의 딸을 보내 등리가돈(회흘측의 황후)로 삼게 한 적이 있었기 복고회은은 회흘과 무리없이 교섭을 진행할 수 있었고, 결국 '''회흘을 회유하는 데 성공한다.''' 이때 당대종은 복고회은에게 면책특권장인 철권을 손수 손에 쥐어줘가면서까지 복고회은을 격려했다고 한다.
복고회은이 회유하는 데 성공하여 당의 편으로 돌아선 회흘은 그러나 사조의측과 무리해가며 싸울 생각 대신 막대한 재물을 획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거기다 당은 힘이 거의 빠졌기 때문에 회흘을 억제할 수가 없었고, 또한 회흘이 재물을 탐하는 것과는 달리 당은 회흘과 사조의를 싸우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였기 때문에 진격로를 협의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가한은 스스로 포관(섬서성 대협현 동쪽 황하나루)에서 들어와서 사원(섬서성 대협현 남쪽)을 거처 동관의 동쪽으로 나오고자 하였는데, 약자앙이 그에게 유세하였다.
"관중은 자주 병란으로 황폐한 일을 만나서 주와 현은 쓸쓸하고 공급하여 줄 것이 없으니 아마도 가한께서 실망하실까 두렵습니다. 도적의 군대는 모두 낙양에 있으니 청컨대 토문(하북성 녹천시 서쪽)에서부터 형·명·회·위주를 경략하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그들의 재물을 얻어서 군대의 장비를 채울 수 있습니다."[12]
가한이 좇지 않았다. 또 청하였다.
"태행에서 남쪽으로 내려가서 하음(하남성 정주시 서북쪽 도화곡)을 근거지로 삼으면 도적은 목구멍을 꽉 죄는 것입니다."[13]
역시 좇지 않았다. 또 청하였다.
"섬주(하남성 삼문협시)대양진에서부터 하(황하)를 건너서 태원창에 있는 곡식을 먹으면서 여러 도와 함께 나아가십시오."[14]
마침내 이를 좇았다. - 자치통감
이런 우여곡절끝에 진격로가 정해지면서 사조의에 대한 당-회흘 연합군의 공세계획은 구체화된다.

6.4.2. 당-회흘 연합군의 진격


762년 10월, 당대종은 아들인 옹왕 이괄(후의 당덕종)을 천하병마원수로 삼고 겸어사중승인 약자양과 위거를 좌우상병마사로, 중서사인 위소화를 판관으로 삼고 급사중 이진을 행군사마로 삼는다.
처음에 당대종은 이괄의 부사로 곽자의를 붙이고 싶었지만 정원진과 어조은이 반대하자 이를 취소하고 대신 삭방절도사 복고회은에게 동평장사 겸 강주자사를 덧붙여 주고 영제군절도행영으로써 형식적으로는 이괄의 보좌지만 당의 지휘부 구성 경향을 볼때 사실상의 총사령관을 맡기는 것으로 당측 지휘부 인선을 마무리짓고, 군을 편성해 회흘이 기다리는 섬주로 파견한다. 이때 당대종은 복고회은으로 하여금 어머니와 처를 동행하는 것을 허가해 주면서 신임을 드러내 보였다. 또한 어조은으로 하여금 사실상 금군의 대부분인 신책군의 지휘권을 맡겨 파견하고, 여러 절도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섬주에 집결명령을 내렸다.
옹왕 이괄이 섬주에 도착했을때 이당시의 당-회흘 관계를 나타내는 유명한 사건이 발생한다. 회흘(위구르 제국)을 이야기할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당나라 황족에게 춤추라 요구하고, 이에 응하지 않자 당의 신하들을 매질해 죽여버린''' 사건이 그것.
가한이 이괄에게 절하고 춤추지 않는 것을 책망하자[15] 약자양이 예로써는 마땅히 그러한 것은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회흘의 장군인 거비가 말하였다.
'''"당의 천자와 가한은 약속하여 형제가 되었으니 가한은 옹왕에게는 숙부인데 어찌하여 절하고 춤을 출 수 없는가?"'''
약자양이 말하였다.
"옹왕은 천자의 맏아들이고, 지금은 원수입니다. 어찌 중국의 저군[16]이 외국의 가한에게 절하고 춤추겠소? 또 양궁(당현종과 당숙종)이 빈소에 있으니 응당 무도를 해서는 안 되오."
힘껏 다투며 오래 가자, 거비(가한)가 드디어 약자양·위거·위소화·이진을 이끌어다가 각기 채찍 100대를 때리고 이괄은 나이가 아직 어려서 일을 모른다 하여 보내어 행영으로 돌려보냈다. 위거와 위소화는 하룻저녁 만에 죽었다. - 자치통감
이때의 일은 옹왕 이괄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회흘이라면 이를 갈게 되었다. 당대종 사후 당덕종으로 즉위한 후 토번을 억제하기 위해 회흘과 동맹을 맺어야 할 상황에서도 '다른건 몰라도 회흘과 동맹맺자는 건 못하겠다'면서 고집을 세울 정도. 결국에는 이필(당숙종의 친구였던 그 이필이 맞다.)이 열심히 설득하여(그런데 설득 과정에서 고인드립성 발언도 있었다.) 겨우겨우 동맹을 맺는데 동의하게 된다.
10월 23일, 당-회흘 연합군은 섬주를 출발한다. 복고회은과 회흘의 좌살[17]이 선봉에 서고, 섬서절도사 곽영예와 신책관군용사 어조은이 전군(후위군)이 되어 면저로 진격, 노택절도사 이포옥은 하양으로 진격하고 하남등도부원수 이광필은 진류에서 진격했으며, 옹왕은 섬주에 남았다. 10월 26일, 연합군은 동궤(하남성 낙녕현 동쪽)에 진을 친다.
이 소식을 들은 사조의측은 휘하 제장들과 대응책을 논의한다. 안록산때부터의 숙장이던 아사나승경은 "당이 만약에 홀로 한족 군사와 더불어 온다면 의당 무리를 모두 모아서 싸워야 할 것이지만, 만약에 회흘의 군사들과 함께 온다면 그 예봉은 감당할 수 없으니 의당 물러서서 하양을 지키면서 이를 피해야 합니다."는 현실적인 건의를 했지만 사조의는 이를 좇지 않고 일전을 결심한다.
10월 27일, 연합군이 낙양의 북쪽 교외에 도착해 군을 나누어 회주를 공략, 함락했고 30일에는 횡수(낙양 북쪽의 강)에 진을 친다. 사조의는 이곳에 수만에 달하는 병력을 배치해 목책을 쌓고 방어를 시도했는데, 복고회은은 서원에서 진을 치고 이를 맞섬과 동시에 교기와 회흘로 하여금 남산을 돌아 목책의 동북쪽으로 돌아 사조의군의 배후를 공격하여 이를 대파한다. 이를 본 사조의는 낙양 내의 병력을 모두 끌어모아 10만여에 달하는 군을 편성하고 패배한 부대의 구원을 위해 나아가 소각사에 진을 치자 당-회흘 연합군 또한 병력을 결집하여 이를 공격한다.
소각사에서의 전투는 상당한 격전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조의측은 연합군의 맹공에 막대한 피해를 입어가면서도 진지를 유지하며 버텼고, 연합군측은 패배의 위기에 몰리기도 했으나 진서절도사 마린이 돌격해 적군의 전열에 균열을 만드는 데 성공하면서 승리를 쟁취한다. 이에 퇴각하던 사조의군은 석류원(하남성 심양시 북쪽), 노군묘에서 재차 반격에 나섰지만 이미 전세가 기울어졌기에 또다시 패배, 6만에 달하는 전사자와 2만에 달하는 포로를 내면서 군 전체가 붕괴하고 사조의는 수백명만을 이끌고 도주한다.
이 여세를 몰아 복고회은은 하양성과 낙양을 함락했으며, 허숙기와 왕중을 포로로 잡고 석방한다. 이후 하양에 머물면서 자신의 아들인 우상병마사 복고창과 삭방병마사 고보성으로 하여금 보병과 기병 1만여를 인솔하고 사조의를 추격하게끔 했으며, 정주에서 싸워 또다시 격파한다. 사조의는 변주로 달아났으나 진류(처소가 변주이다.)절도사 장헌성이 사조의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자 사조의는 복주(산동성 인성현)으로 도주, 장헌성은 당측에 문을 열고 항복한다.
회흘군은 낙양을 함락한 후 심하게 약탈했으며, 신당서에 따르면 낙양 인근의 백성들이 이를 두려워해 백당사로 몰려들었는데 이곳을 불태워 백당사에서 죽은 자만 1만에 달하고, 불은 수십일이 지나도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약탈한 것은 회흘 뿐만은 아니었다. 삭방군, 신책군 또한 낙양·정주·변주·여주 등 함락한 모든 지역이 오랫동안 도적(연)의 영내였다는 이유로 모두 적으로 간주하여 포로를 잡고 약탈을 자행했으며, 이는 석달(작전이 이루어진 전 기간)에 걸처 이루어졌다고 한다.

6.4.3. 사조의의 죽음과 반란의 끝


사조의는 복주에서 황하를 건너 도주했고, 복고회은은 연합군을 지휘해 뒤를 쫓는다. 활주(하남성 활현)을 공격해 함락한 후 사조의군과 위주(하남성 위휘현)에서 조우해 다시 격파했으며, 사조의가 수양(송주)절도사 전승사의 4만여 군과 합류해 반격에 나섰지만 복고창은 이를 격파하고 창략(하남성 남략현)의 동쪽까지 추격한다. 이에 사조의는 위주(하남성 대명현)의 군을 인솔해 재차 싸움을 걸었지만 여기서도 패배해 또다시 도주한다.
연 세력 하의 절도사들은 사조의의 거듭된 패배를 목격하고 나서는 사조의를 버리고 당에게로 귀순하기 시작한다. 업군절도사 설숭은 상주·위주·명주·형주의 네 주를 가지고 택로절도사 이포옥에게 항복했으며, 항양절도사 장충지는 조주·항주·심주·정주·역주의 다섯게 주를 가지고 하동절도사 신운경에게 항복하였다. 이에 이포옥과 신운경은 해당 지역의 통치권을 인수하나 복고회은은 자의적으로 이들의 지위를 회복시켜 그들이 통치하던 지역을 계속 통치하는 것을 허락한다. 이는 이포옥과 신운경으로 하여금 복고회은을 의심하게 만든 한 요소가 된다. 그러나 해당 지역을 빼앗았다가 사사명의 재반란이라는 아픈 기억이 있는 당 조정에서는 이를 인정해 버렸고, 이는 전후의 절도사 난립 시대를 낳는 한 요소가 된다. 11월 22일 당 조정은 장충지를 성덕군 절도사로 삼아 자신이 들고 항복한 조주·항주·심주·정주·역주의 통치권을 그대로 맡겼고 이씨 성과 보신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이때 장충지는 항복을 건의했던 왕무준이라는 인물의 생각이 훌륭했다고 여겨 발탁하고, 자신의 선봉병마사로 삼는다.
복고회은의 승전보가 거듭 날라오자 당 조정에서는 복고회은을 더욱 높이게 된다. 곽자의는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부원수직을 복고회은에게 양보하게 해 달라는 요청을 할 정도였으며, 11월 24일 당 조정은 복고회은을 하북부원수, 좌복야 겸 중서령·선우진북대도호·삭방절도사직을 덧붙여 주어 그의 권위를 더욱 세워준다.
사조의는 패주(하북성 청하시)에 도착해 설충의 등 그에게 아직 충성하는 두명의 절도사와 합류한 후 추격해오는 복고창을 요격하려 시도한다. 형수(하북성 형수시)에서 3만여 병력으로 시도한 사조의의 반격은 그러나 복고창에 의해 다시금 격파당했으며, 회흘군까지 도착해 사조의군을 공격하자 크게 패해 막주로 도주했고, 도지병마사 설겸훈·병마사 학정옥과 전신공, 신운경, 치청절도사 후희일에게 포위당한다.
763년 1월, 사조의측의 절도사였던 전승사는 자신은 막주를 지킬테니 사조의로 하여금 본거지였던 범양번진으로 가서 군을 일으켜 막주를 구원해 달라고 청하고, 사조의는 이를 좇아 5천여 기병으로 포위망을 뚫고 달아난다. 그런데 사조의가 떠나자마자 전승사는 바로 항복했고, 성 안에 있던 사조의의 모친·처·자식을 관군에 압송했으며, 복고창·후희일·설겸훈이 사조의의 뒤를 밟아 다시 한번 격파해 버린다.
사조의는 이렇게 거듭 패하며 쫓기면서도 간신히 범양번진의 처소인 북경에 도착한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사조의측의 범양절도사였던 이회선은 이미 당측에 항복을 받아달라는 청을 한 지 오래였으며, 범양의 병마사 이포충으로 하여금 3천여 명을 이끌고 사조의를 막도록 했기 때문에 사조의는 기껏 도착하고도 범양에 입성하지 못하게 된다. 이에 사조의는 이포충에게 군신의 의를 가지고 책망했지만 이포충은 하늘이 연을 버리고 당실을 부흥시켰으며, 전승사는 이미 배신했다는 것을 깨우처 주고 '일찍 거취를 선택하여 스스로 온전한 길을 꾀하기를 바란다' 면서 사조의의 입성을 막는다. 이에 사조의는 휘하 장병들에게 식사나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해 식사대접을 받고는 범양 출신 장병들을 돌려보내고 호족 기병 수백여 명과 함께 동쪽으로 달아난다. 마지막 피신처로 삼은 광양마저 사조의를 배척하자 결국 해족 및 거란에 귀의하기 위해 북상하나 이회선이 보낸 군대에 따라잡혔고, 사조의는 결국 숲 속에서 스스로 목을 매 자결한다. 그 수급은 1월 30일 장안에 도착했다. 이걸로 '''기나긴 반란이 끝났다.'''

[1] 활주, 변주, 조주, 송주, 서주, 사주, 해주[2] 오늘날의 북경시[3] 이광필은 이때 사공직에 올라 있었다.[4] 이 공적으로 진서·사진행영절도사로 부임.[5] 장안 주변, 즉 관중을 포함.[6] 황급히 몸만 빼내 도망가는 상황에서도 백성들이 음식을 가져와서 끼니를 떼울 수 있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당현종에 대한 당시 백성들의 인식은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의외처럼 들릴지는 모르겠지만.[7] 앞의 위주와 한자가 다르다.[8] 5월에 연운절도사로 부임해 이광필과 함께 송주를 구원한 전신공이 맞다. 이때는 서주자사.[9] 연운절도사였으나 5월에는 그 직을 상실한다.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시는 분이 기술해 주시길 바랍니다.[10] 다만 이 '10만' 은 유청담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과장한 보고라는 주장도 있다.[11] 한자로는 약라갈골력비라가한. 권중달 교수가 통감에 붙인 주석에 따르면 1대 가한이며, 르네 그루쎄 교수의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을 따른다면 대략 2대 가한 즈음 될것이다. '위구르 유목제국사'에는 카를륵 카간이라고 칭한다. 757년 참전 당시의 회흘의 가한이였다.[12] 지명을 보면 알 수 있듯 이 요청은 하북부터 처리해 달라는 것이다. 이 말대로 하면 회흘은 사조의측으로 여겨지는 모든 절도사들과 싸워야 한다.[13] 하북과 하남의 중간지점을 근거지로 삼아 압박해달라는 것이다. 하북의 사조의측 절도사들과 하남의 사조의 양측과 싸워야 한다.[14] 낙양의 사조의를 먼저 처리해달라는 요청. 동시에 회흘 홀로 싸우는 것이 아닌 당측 절도사들과 같이 싸워달라는 것이다.[15] 이때의 춤은 오늘날의 무용이 아니라 일종의 예의표시이다. 손을 흔들고 발로 뛰어 굴복한다는 의미.[16] 제왕의 후계자. 이괄은 아직 태자의 자리를 얻지 못했기에 저군이라 칭한 듯 하다.[17] 동부를 담당하는 친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