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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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眞卿
(709-785)
중국 당나라 시대의 명필, 관리.
좀 특이사항이 있다면 삼국지의 장수 중 하나인 안량이 안진경의 직계조상이라 한다.
705년 하남도 낭야군 임기현에서 출생하여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쳤다. 그러나 이임보가 병사한 후 실권을 잡은 양귀비의 오빠 양국충에게 밉보여서 평원태수로 좌천되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양국충이 안진경을 평원태수로 좌천 보낸 게 나중에 큰 도움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겠지만….
평원태수로 지내면서 근방의 절도사인 안록산의 동향이 수상하다는 걸 간파한 안진경은 안록산을 주시하면서 그의 모반가능성에 대비했다.
755년, 안진경의 예상대로 안록산이 난을 일으켰다. 근방의 모든 수령들이 항복했지만 안진경과 사촌인 안고경만이 항복하지 않고 저항했다. 그러나 안록산은 안진경을 '''백면서생'''쯤으로 여기고 무시했다. 이게 화근으로 돌아왔지만.
안진경은 위장항복한 안고경과 긴밀하게 움직이면서 기회를 엿보았고 하북에서 안록산의 군대들을 격파하는 데 공을 세웠다. 안진경이 하북에서 안녹산 세력을 몰아낸 탓에 안록산은 '''낙양에 갇히는 신세'''가 돼버렸다. 그러나 양국충의 뻘짓으로 다시 전세가 역전되어서 사사명에게 하북 대부분을 뺏기긴 했지만. 그러나 불리한 상황에서도 안진경은 안록산에 대한 저항을 멈추지 않아서 난의 진압에 공을 세웠다.
이후 당숙종이 그를 헌부상서로 중용하며 무너져가던 당나라를 일으켜 세워보려 애썼지만 황제의 곁을 싸고돌던 환관들과 실권을 쥔 신료들에게 맞선 탓에 번번히 먼 지방으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중앙으로 돌아오는 크리를 반복해야 했다.
그러다가 당대종때에 회서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희열을 설득하러 갔다가 되려 이희열이 그를 감금시켰고 3년 후 그를 옥중에서 살해했다.(…) 사실 이렇게 된 데에는 안진경을 미워한 신료들의 탓이 컸다.
서예가로서 안진경은 그때까지 유행하던 왕희지의 부드럽고 우아한 서체에서 남성적이고 강건한 서체로 흐름을 바꿨다. 당대에 유공권과 더불어 유명한 서예가였는데 당대 사람들은 안진경과 유공권의 서체를 "안근유골", 즉 안진경의 서체에는 힘줄이 있고 유공권의 서체에는 가 있다라고 평했다. 실제로 그의 글씨를 보면 남성적이면서 굳건하고 탄탄한 힘줄같다는 느낌을 준다. 시대적으로 비교적 안정되었던 남조 육조시대와 전란의 시대를 살았던 안진경의 시대의 차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해서, 행서, 초서에 모두 능했고 대표적인 그의 명필로 장안 천복사의 다보탑을 위해 써준 "천복사 다보탑비", "동방삭 화상찬비"가 그의 해서체의 걸작으로 꼽히며 행서체의 걸작으로는 "제질계명문고", "쟁좌위첩","유중사첩" 등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