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필

 

1. 중기의 명장
1.1. 초기
1.2. 안록산의 난
1.3. 사사명의 난
1.4. 안사의 난 이후
1.5. 평가
2. 고려시대의 화가
3. 대한민국가수기업인, 생명운동가


1. 중기의 명장




당 제국 사공
전임 곽자의

이광필
757년~760년

후임 왕사례
당 제국 태위
전임 이예

이광필
760년~761년
761년~764년

후임 곽자의
[image]
李光弼, 708~764
당 중후기를 살아간 장수들 중 유일하게 그 공적이 곽자의와 대등했다고 말할 수 있었던 인물. 안사의 난 진압에 있어서 곽자의, 복고회은과 함께 최고의 공로자라 할 수 있는 인물로, 곽자의와 함께 이곽(李郭)이라는 존칭으로 일컬어졌다.
여러모로 곽자의와 대비되는 인물인데, 곽자의가 너그러움으로 이름을 날렸다면 이광필은 엄격함으로 유명했고, 노년이 되어서야 출세길로 접어든 곽자의와는 달리 이광필은 당현종 천보 6년에 이미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었다. 한족이나 그닥 이름없는 가문 출신인 곽자의와 거란족 수장의 아들이었던 이광필은 민족이나 가문의 명망도 크게 달랐다. 이광필은 57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이 또한 85세까지 살아간 곽자의와의 차이라 하겠다.

1.1. 초기


이광필은 당에 부용하던 거란족 추장이었던 이해락의 아들이다. 그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무려 4개 절도사직을 겸직하면서 천보 연간에 가장 강력한 군사지휘권을 쥐었던 왕충사(704~749)의 휘하에서였다. 왕충사는 가서한과 이광필을 중히 여겨 주요 부장으로 삼았고 이 둘은 뛰어난 능력으로 대 토번 및 대 돌궐 전역에서 활약하였다.
이후 왕충사는 당 현종의 석보성 공격 명령을 거절하여, 이림보의 참소를 받게 되자(747) 이광필은 직접 왕충사에게 찾아가 선물을 뿌려서라도 주변의 참소를 막으라고 권했지만 왕충사는 이를 듣지 않았다.[1] 이후에도 이광필은 북방의 주요 무장으로 활동하여, 749년에는 하서절도부사직을 맡았고 754년에는 당시의 삭방절도사였던 안사순의 천거로 삭방절도부사직에 올랐으며 안사순과 혼인으로 인척관계에 오를 뻔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광필은 병이라는 핑계를 대고 잠시 장안으로 귀환했다가 돌아와 병마사 직을 맡았다.

1.2. 안록산의 난


안사의 난이 발발하면서 당시 삭방절도사였던 안사순이 중앙으로 불려가게 되었고,[2] 공석이 된 삭방절수직의 후보로는 곽자의, 이광필이 물망에 오른다. 그리고 당현종은 곽자의를 선택하였다. 사실 이광필의 관직 경력은 위에서 보다시피 이 당시(755)까지는 만년 병마사 인생이었던(...) 곽자의와 대등하거나 오히려 우위에 있었고, 곽자의보다 훨씬 일찍 주요 인물로 주목받았으며,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도 충만했기 때문에 이에 불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3]
물론 곽자의도 이광필의 능력은 잘 알고 있었으며, 태원으로 진격해 오는 사사명군을 격파하여 하동번진이 온전히 당의 손에 되돌아온 후 당현종이 곽자의에게 삭방으로 되돌아가 더 많은 병력을 모아 낙양을 공략하고, 동시에 다른 장수 한명을 뽑아 하북을 평정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곽자의는 이광필을 하동절도사(또는 하동절도부사)로 천거하였고(756), 이후부터 이광필은 한 명의 절도사로 활동하게 된다.[4]
이광필은 이후 1만 3천의 병력을 규합, 정형을 넘어 상산으로 진입했고 상산의 단련병 3천을 추가로 규합한다. 이에 사사명은 요양의 포위를 풀고 2만의 기병과 5천의 보병을 규합해 상산으로 진격하여 이광필과 맞붙었으나, 패배한다.
사사명은 상산이 지켜지지 못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요양의 포위를 풀었고, 다음날(16일) 해가 아직 뜨기 전에 선봉부대가 이미 이르렀고 사사명 등이 뒤를 이었는데 합처서 2만여 기병이 곧바로 성 아래에 이르렀다. 이광필은 보졸 5천 명을 파견하여 동문으로 나가 싸웠는데, 적이 문을 지키며 물러나지 않았다.
이광필은 500명의 노수들에게 명하여 성 위에서 나란히 쇠뇌를 발사하도록 하자 적이 조금 물러났다. 이에 노수 1천 명을 내보내 네개의 대열로 나누고 그들이 화살을 발사하는 것이 서로 이어지게 하니, 적들은 당할 수가 없어서 군대를 길 북쪽으로 거두어들였다.
이광필은 병사 5천을 내보내 길 남쪽에 창성을 만들고서 호타수를 끼고서 진을 첬는데, 적이 자주 기병을 가지고 맞부딪치며 싸워왔지만, 이광필의 병사는 그들을 쏘았고, 사람과 말 가운데 화살에 맞은 것이 절반을 넘자 이내 물러나 조금 쉬면서 보병이 오기를 기다렸다.
어떤 마을의 백성이 적의 보병 5천이 요양으로부터 오는데, 낮과 밤으로 배의 속도로 170리를 와서 구문 남쪽의 봉벽에 이르면 숨을 돌릴것이라 하였다. 이광필은 보병과 기병 각기 2천을 파견하여 깃발과 북을 숨기고 나란히 물속으로 가게 하여 봉벽에 이르렀는데, 적이 바야흐로 막 밤을 먹으므로 병사들을 풀어서 뜻하지 않은 사이에 처서 남김없이 살해하였다. 사사명이 이 소식을 듣고 대세를 잃자 물러나 구문으로 들어갔다.- 자치통감
이후에도 양측의 교전은 40여 일을 이어졌다. 사사명의 군세는 한차레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성했으며 채희덕의 군대가 추가로 가세하였다. 또한 이광필은 상산의 여러 현들을 지키기 위해 약간씩 병력을 나누어야 했으므로[5] 전체적인 전력은 사사명측이 우위에 있었다. 사사명은 전력상의 우위를 살려 식량 보급로를 끊으려 들었고 이광필은 엄중한 수비병력을 붙인 보급대를 운용하여 이를 저지하였다. 이광필은 곽자의에게 구원을 청했고, 곽자의는 이에 응하여 삭방번진의 대군을 이끌고 상산의 이광필과 합류, 사사명, 채희덕과 구문성 남쪽에서 교전하여 대파한다. 이후 상산으로 귀환하면서 안록산측이 장악했던 조군을 탈환. 여기서 이광필은 사졸들이 약탈한 재화를 모두 주민들에게 돌려주는 미담을 남겼다.
이후 이광필과 곽자의는 따라붙는 사사명을 행당에서 다시한번 격파하고, 안록산의 지원군을 받아 5만여의 군세를 다시 꾸려 공격해온 사사명을 행당에서 수비와 자잘한 교전을 거듭하여 지치게 한 후 가산에서 전면전을 벌여 거의 괴멸시킨 후 박릉으로 도주한 사사명을 포위한다.
그러나, 양국충의 무모한 공격주장에 결국 이기지 못한 가서한이 동관에서 출격하였다가 20만에 육박하는 대병력이 괴멸되고 장안까지 점령당하는 참사가 벌어지면서 상황은 반전한다. 이광필과 곽자의는 삭방번진의 처소가 있는 병력을 이끌고 귀환해 새로이 즉위한 당숙종의 조정에 합류하였고, 이후 곽자의는 이민족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광필은 하북을 재석권한 사사명의 서진을 막기 위해 태원으로 파견된다.
이때 사사명은 태원을 공략하기 위해 채희덕, 고수암, 우정개 등과 함께 하북에서 10만에 달하는 군대를 모았고, 이광필에게는 새로이 징집한 단련병 1만여 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광필은 미리 해자를 파서 방어용으로 활용했고, 또한 벽돌 수십만 장을 만들어서 성이 부서질 때마다 이를 보수하였다. 또한 이광필은 포상을 내걸고 작은 재주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채용하여 능력에 따라 이를 사용하였다. 여기에 더해 하북에 남겨놨던 이광필의 부장 모용일과 장봉장이 사사명이 운송하던 공성무기들을 기습, 파괴하는 데 성공하자 태원 공방전은 1개월이 넘게 이어진다. 이광필은 여기에 더해 군 내에서 땅굴을 잘 파는 사람들을 모아 외부로 땅굴을 파서 적들을 기습했고 심지어 새로 만든 공성무기나 토산마저 이 땅굴을 통해 부셔버리고 무너뜨렸다고 한다. 동시에 대형 투석기를 만들어 방어에 나서 사사명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사사명은 군을 수십리 뒤로 물리고 아예 태원을 봉쇄하여 물자부족을 유도해 항복을 받아내려 했고 이광필의 항복 약속까지 받아냈으나 사실 이광필은 그 사이에 땅굴을 사사명 진채까지 파서 거짓 항복을 하는 척 하다가 땅굴로 사사명의 군영을 붕괴시키는 데 성공, 그 혼란속에서 기습을 감행하여 1만에 이르는 적을 전사시켰고, 안록산 사망 소식까지 들리자 사사명은 채희덕을 남겨두고 자신은 범양으로 돌아간다. 이후 이광필은 결사대를 이끌고 채희덕군을 기습, 7만여의 적을 전사시켜 태원의 포위를 풀어낸다.
이후 이광필은 태원을 지키다가 하북의 안경서를 공격하는 데 합류. 또한 사사명의 귀부에 대해 사사명은 믿을 수 없으니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사명은 이에 분개하여 이광필을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내 사사명의 난을 일으키게 된다.

1.3. 사사명의 난


사사명이 재차 봉기하고, 곽자의와 이광필이 포함된 9명의 절도사들의 연합 군세가 상주 안양하 전투에서 사사명에게 참패하면서 상황은 다시끔 혼돈으로 돌아간다. 당숙종은 이에 곽자의를 전군의 총사령관으로 삼으려 했으나 어조은의 참소에 의해 곽자의를 파직, 장안으로 불러들이고 그 대신 이광필을 삭방절도사·병마원수로 임명한다.
이광필은 이에 우선 곽자의에게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었던 삭방번진 군대를 장악하기 위해, 자신에게 반항하려는 기미가 보이는 병마사 장용제를 처형하여 군 기강을 다잡는다. 이후 사사명이 병력을 모아 낙양으로 진격해오자 이광필은 과감히 낙양을 포기, 하양(河陽)으로 향한다. 하양은 낙양과 업을 동시에 노릴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이 지역을 잡아놓고 있으면 사사명이 설령 낙양을 점령한다 하더라도 추가적인 서진은 막을 수 있기 때문. 이광필의 예상대로 사사명은 낙양을 장악한 후 하양으로 군을 되돌렸고, 하양에서 이광필과 재차 전투를 벌이기 시작한다.
사서에 기록된 몇 안되는 드문 일기토와 군마 탈취 에피소드, 하양의 남북을 잇는 부교를 불태우기 위한 화공을 시도하는 사사명과 이를 저지한 이광필의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던 하양의 전투는 결국 최종 결전으로 이어졌고, 여기서도 이광필이 승리하면서 사사명의 난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투였던 하양 공방전은 이광필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주지[6]는 다시 병사들을 수습하여 북성으로 향하였다. 이광필은 재빨리 병사들을 거느리고 북성으로 들어가서 성 위에서 도적들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말하였다.
"도적들의 병사들이 비록 많지만, 왁자지껄하고 정돈이 되어 있지 않으니 두려워할 것이 없다. 정오를 지나지 않아서 보증하건대 여러분들이 그들을 격파하게 될 것이다."
마침내 제장들에게 명령하여 나가서 싸우도록 하였다. 기약한 시간이 되어도 결판나지 않자 이광필은 제장들을 불러서 물었다.
"근래 도적들의 진지 중에서 어느 쪽이 가장 견고하던가?"
말하였다
"서북쪽 구석입니다."
이광필은 그 장수인 학정옥에게 명령하여 그곳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학정옥은 기병 500을 요청하였으나, 그에게 300을 주었다. 또 그 다음으로 견고한 곳을 물었다. 대답하였다.
"동남쪽 구석입니다."
이광필은 그 장수인 논유정에게 명령하여 그곳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논유정은 철기 300을 요청하였으나, 그에게 200을 주었다.
이광필이 제장에게 명령하였다.
"너희들이 멀리서 나의 기를 보면 나가 싸우는데, 내가 기를 느리게 흔들면 너희들이 임의로 유리한 것을 골라 싸우라는 것이고, 내가 급히 기를 흔들며 세 번 땅에 닿게 하면 모든 병사들은 일제히 들어가야 하는데, 죽기 살기로 하고 조금이라도 물러나는 자는 목을 벨 것이다."
또 짧은 칼을 가죽신 안에 두며 말했다.
"전투는 위험한 일이고 나는 나라의 삼공[7]이므로 적의 손에 죽을 수 없는데, 만약 싸우다 불리해지면 여러분은 앞에서 적에게 죽고, 나는 여기서 스스로 목을 베어 여러분에게 혼자 죽게는 하지 않을 것이다."
제장이 나가 싸우는데, 잠시 후 학정옥이 달아나 돌아왔다. 이광필은 그 광경을 보고 놀라 말했다.
"학정옥이 물러나면 우리 일이 위험해진다."
좌우에 명해 학정옥의 머리를 베라고 했다. 학정옥이 말했다.
"말이 화살을 맞은 것이지 감히 물러난 것은 아니다."
사자가 달려와 보고했다. 이광필은 말을 바꾸어주도록 그를 보내었다.
복고회은과 그 아들 개부의동삼사 복고창이 조금 물러나자, 이광필이 또 명령하여 그들의 머리를 베라고 했다. 복고회은 부자는 사자가 칼을 들고 달려오는 것을 뒤돌아보고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 결판을 내려 했다.
이광필이 연달아 그의 기를 흔들자, 제장들은 일제히 죽기를 한하고 전진했고, 고함소리가 천지를 움직이자, 적병은 크게 무너졌는데, 참수한 것이 1천여 급, 잡은 것이 500이며 물에 빠져 죽은 자가 1천여 명이었다. - 자치통감
이 전투 후 이광필의 위상은 이 당시의 곽자의와 맞먹거나 그 이상으로 올라섰다. 곽자의가 조정에서의 지속적인 견제로 인해 실권을 누리지 못하고 허송세월하는 동안 이광필은 태위, 중서령, 천하병마부수, 지제절도행영, 삭방절도사, 시중, 사공직을 모두 겸임하였고, 높은 권한을 바탕으로 사사명과 서로 공격과 방어를 주고받으면서 전황을 당에게 기울도록 노력한 것.
그러나 이는 망산에서의 참패로 다시 흔들린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당 조정은 단기간에 끝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았고, 결국 낙양을 직접 공격하라는 명령을 이광필에게 내린 것이다. 이에 따라 이광필은 낙양 탈환을 위해 망산으로 움직였고, 수비에 적합한 진채를 꾸리려던 것조차도 복고회은과 어조은에 의해 방해받아 제대로 진채도 꾸리지 못하고 사사명의 공격을 받아, 대패한 것. 이에 하양도 상실하고, 당은 다시 위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사사명은 직후 아들인 사조의에게 사망하고 반란은 기묘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 속에서 이광필은 허주, 동주를 수복하도 동하지역을 완전히 당의 것으로 안정화시켰으나 태주의 원조가 20만에 달하는 사람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움직일 것을 명령받으면서 사사명의 난의 최전선에서 이탈하게 된다.
원조의 반란은 사사명의 난이 진압된 직후 진압되었다.

1.4. 안사의 난 이후


안사의 난이 종료되었을 당시 이광필은 임회왕이라는 봉작과 그에 걸맞는 직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의 공적은 초상화가 능연각에 걸리기까지 할 정도로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안사의 난으로 군왕의 봉작을 받은 인물은 곽자의, 이광필, 복고회은의 단 셋 뿐으로 이 셋은 그야말로 반란 진압의 최고의 공로자로 대접받았다. 특히 이광필은 곽자의와 군공이 대등하다 할 정도로 후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가장 어려운 지역에서 분투한 이광필의 공로가 그만큼 크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안사의 난이 종료되면서 이광필과 당 조정은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이는 곽자의를 제외한 여타 절도사들도 마찬가지였는데, 그 이유는 정원진이라는 권신이 당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정원진은 주요 절도사 중 한명이었던 내진을 속여서 끌어들인 다음 처형해 버렸는데, 이 일은 절도사들로 하여금 당 조정에 대해 크게 불신하고 두려움을 가지게끔 하였다.
이로인해 토번의 장안 침공이 있었던 당시 이광필은 당 조정을 구원하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곧 엄정하고 상명하복에 철저했던 이광필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 되었다. 이광필의 힘이 어려움에 빠진 당 조정을 구원하기에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이지 않자, 부하들 또한 이광필의 이런 모습을 핑게로 명령에 불복종하기 시작한 것. 부하들의 불복종이 심해지자 이광필은 분노하였고, 그것이 울화병이 되었는지 764년 7월, 사망한다.
후대 사람들은 이광필의 죽음에 대해 정원진과 어조은의 참소와 정치공작에 분하고 억울하여 그것이 병이 되어 죽었다고 생각했다.

1.5. 평가


나라에 가장 소중한 것은 정승과 장수이다. 내가 먼저 장수의 일로 말하겠다. 곽자의(郭子儀)는 복장(福將)이고 이광필(李光弼)은 지장(智將)이었다. 광필의 용병(用兵)은 귀신 같아서 때때로 자의도 따를 수 없었으며 호령이 한 번 내려지면 진중(陣中)에 광채가 더하였으니, 어찌 참으로 위대하지 않은가. 그러나 벼슬이 한껏 높고 공이 천하를 덮으면서도 일신에 탈이 없고 집안이 온전한 사람으로는 1천 3백 62년 동안 오직 자의 한 사람 뿐이었다. 그래서 지모가 복의 힘을 덮을 수 없음을 비로소 알았다. - 조선왕조실록 정조 17년 6월 22일, 정조의 발언.
관군용사 어조은이 학정옥이 진을 잘 치는 것으로, 그 교열하는 것을 보려 했다. 학정옥이 이에 영내에서 부오를 배열하고, 북과 피리를 울려 나가서, 나누어 진을 이루었는데, 기장(양 측방을 늘어 벌려 키와 같은 형태로 진을 취함)의 진으로 익측을 펼쳐, 잠깐 사이에 흩어놓았다 모았다 하면서, 앉아서 진퇴를 지어내니, 그 무리가 한 사람 같았다.
어조은이 탄식해 말했다. “내가 군대 사이에 있었던 것이 10여년인데, 처음으로 학 장군의 훈련을 보았다. 치융(군대를 지휘함)하는 것이 이와 같다면, 어찌 앞에 적이 있겠는가?”
학정옥이 쓸쓸하게 사례하고는 말했다.
“이는 말교(말단 군교)[8]가 장기로 하는 바가 아니고, 임회왕(이광필)께서 남기신 병법입니다. 태위께서는 군대를 통어하는 데에 능하셨고, 상벌이 공과에 맞았습니다. 매 교기[9]하는 날에는, 군사들이 작은 것이라도 영과 같이 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를 참하여 조리돌렸으니,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스스로 공효를 내었고, 부도(달려 나아감)하고 치돌하니, 심장이 깨지고 쓸개가 찢어지는 자도 있었습니다. 태위께서 훙변하신 이래로, 다시 교기한 일이 없으니, 이는 군용이 견상(칭찬받음)하기에는 족하지 않습니다.” - 신당서 학정옥전
당대에도, 후대에도 이광필은 곽자의와 맞먹는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특히 실질적인 군 지휘에 있어서는 때로는 곽자의보다도 낫다는 평가까지 받을 정도로 뛰어난 지휘능력을 자랑한 명장이었다. 곽자의는 후반으로 갈수록 수하 장수들에게 실 지휘권을 위임하고 자신은 연합군으로 참전한 여타 절도사들이나 외국(위구르 제국 등)의 군대 지휘관들을 잘 어르고 달래어 전력을 다하게 만드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했던 반면 이광필은 자신이 직접 군사 지휘를 할 때가 많아서 군 지휘라는 측면에서는 이광필이 고평가될 측면이 많기도 했다.
다만, 공적은 곽자의와 맞먹었던 반면 인품 측면에서는 너그럽고 후했던 곽자의가 이광필보다 더 민심을 얻었다고 일컬어지는 것이나, 군사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도 곽자의는 너그럽고 이광필은 엄격하다는 평가가 많았다. 그래서 정조의 발언처럼 '지모가 복의 힘을 덮을 수가 없다'는 말까지 나오는 것.
그러나 어쨌든 이광필은 당대에 최고의 군 지휘능력을 갖춘 인물 중 하나였으며, 따라서 조금 더 오래살았다면 당나라가 재기하는 데 큰 보탬이 되었을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57세에 사망했으니 오래 살지 않은 것도 아니긴 하지만.

2. 고려시대의 화가


李光弼. 전주(全州) 사람이며 이녕의 아들이다.

3. 대한민국가수기업인, 생명운동가




[1] 당시 왕충사는 석보성을 지금 공격하면 아군이 큰 피해를 입는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는데, 그 말대로 거절 후에 후임인 가서한이 명령을 수행하자 수 천 정도만이 지키고 있던 석보성을 수만의 피해를 입으면서 점령하게 된다. 왕충사는 후에 '태자를 황제로 세우려 들었다' 는 참소까지 엮여서 관직을 박탈당하고 국문을 받았으며, 결국 가서한이 현종을 직접 만나 무죄를 청원하여 간신히 한양태수, 한동군태수직을 맡다가 749년 사망한다. [2] 안사순은 안록산의 사촌동생이라는 이유로 결국 죽임을 당한다.[3] 당의 문인 두목이 쓴 <번천문집>에 실린 '장보고정년전'에 따르면 안사순의 막하에서 곽자의와 이광필 두 사람이 함께 아문도장으로 있었을 때, 어쩌다 서로 같은 상에 앉아서 식사를 하게 되면 식탁에서 서로 째려보기만 할 뿐 말 한 마디 꺼내는 일도 없었다고.[4] 처음에 이광필은 안사순의 뒤를 이어 자신과 사이가 나쁜 곽자의가 삭방절도사 즉 자신의 상관이 되자 도망치려고 했지만 처자식 때문에 결정을 못 내리고 망설이다가 곽자의에게 나아가 "나는 네가 날 싫어하고 날 죽이려고 하는 걸 안다. 나야 죽어도 상관없는데 내 처자는 제발 좀 살려주면 안 되겠나"라고 빌었는데, 이미 이광필을 하동절도사로 천거해 두고 조정의 허락까지 받아논 상태였던 곽자의가 "그게 무슨 소리냐. 지금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우리 사이 나쁜 거 따질 겨를이 어디 있냐"며 조정에서 보낸 하동절도사 임명의 조서를 이광필에게 읽어 주고 그를 부임지로 보냈다고 한다.[5] 상산에는 9개 현이 있는데 이 중 7개 현이 다시 이광필에게 항복했다. 이를 지키기 위해 각 현마다 300명씩의 수비병력을 나누어야 했다고 한다.[6] 사사명 세력의 재상[7] 이광필은 이때 사공직에 올라 있었다.[8] 학정옥 자신에 대해 겸손하게 말한 것[9] 장수가 기를 휘둘러 군진을 치는 것을 연습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