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례
'''王思禮'''
(? ~ 761)
1. 개요
당나라의 군인으로, 고구려 유민 출신이다.
당나라 절도사 중 하나였던 가서한의 심복으로 주로 활동하였는데, 무예와 지략이 뛰어나 많은 활약을 했으며, 특히 755년에 일어났던 안사의 난을 진압할 당시에 큰 공을 세웠다. 덕분에 이후로 그 벼슬이 사공(司空)에 이르었다.
전해지는 일화로 보자면 '''독한 놈'''이라는 한마디로 평할 수 있는 인물. 그야말로 독기와 오기가 넘치는 인물로, 굉장히 엄중하고 원칙주의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2. 생애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왕사례의 가문은 고구려의 유민들이 모여 살던 당나라의 영주지방(營州地方)으로 이주하여 옮겨 살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였던 왕건위(王虔威)는 당나라 삭방군(朔方軍)의 장수가 되었는데, 전투에 능하여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왕사례 역시 아버지처럼 소싯적부터 전투를 익혀 군인이 되었는데, 절도사 왕충사[1] 를 따라 하서로 갔다가 가서한[2] 과 더불어 왕충사의 압아(押衙)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왕사례와 가서한의 길고 긴 인연이 시작되었다(...). 이후에 가서한이 농우절도사가 되자 그의 압아가 되었다가 석보성을 함락한 공으로 우금오위장군이 되어 비로소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이후 752년에는 운휘장군이 되었다.
이듬해인 753년, 가서한이 구곡(九曲)을 정벌했을 때에 늦게 도착한 죄로 참수당할 위기에 처하였다. 가서한은 늦게 도착한 왕사례를 군법대로 참형에 처하려다가 뒤늦게 마음을 돌렸는데, 왕사례는 이에 '''"죽이려면 빨리 죽일 일이지 왜 다시 불러냄? 일처리가 엉망이네."'''라고 답하였다. 이에 가서한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은 왕사례의 담대함에 감탄하였다고 한다(...).[3]
754년, 토번의 소비왕(蘇毗王)이 당나라에 복속하자 당나라 조정에서 가서한에게 조서를 내려 마천환에서 소비왕을 응접하도록 하였다. 이때 왕사례는 말에서 떨어져 다리에 중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서한과 함께 하였다고 한다.
755년에는 금성태수를 지내다가 당나라의 역사를 뒤바꿔놓은 '''안사의 난'''이 터지고 말았다. 당시 원수(元帥)가 되어 토벌작전을 지휘하던 가서한은 당현종에게 청하여 왕사례로 하여금 태상경동정원과 원수부 마군도장을 겸하도록 하였다. 이후로 가서한은 오직 왕사례하고만 일을 의논할 정도로 왕사례를 신뢰하였다.
756년 2월에는 양귀비의 오빠인 간신 양국충[4] 을 죽이자고 가서한에게 말하였으나 가서한은 이를 듣지 않았다. 그해 6월에는 동관을 지키지 못했다하여 사형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사람들이 구명을 청하여 목숨을 건졌다.
757년에는 명장 곽자의와 함께 섬성, 곡옥, 신점 등지에서 적군과 싸워 격퇴시키고 잃었던 동경을 되찾았으며, 강군(絳郡)에서 6천 명의 적군을 격파하여 많은 무기와 군마를 빼앗았다. 한편 759년에는 곽자의를 포함한 9명의 절도사와 함께 상주에서 적군과 맞섰다. 그러나 이때 60만이나 되는 당나라군이 사사명과 안경서의 5만 군대에게 참패하여 많은 절도사들이 병력을 잃었으나[5] 왕사례와 이광필이 지휘하던 군대는 아무 탈 없이 무사하게 빠져나왔다고 한다.[6]
이후 이광필이 하양을 지키자 당나라 조정은 조서를 내려 왕사례의 공을 치하하며 태원윤 북경유수 하동절도사 겸 어사대부로 삼았다. 이후로 왕사례는 군량을 모으고 무기를 정밀하게 수리하여 예리하게 만드는 등 군대를 돌보는데 열중하였으며, 사공(司空) 벼슬을 받았다. 이는 당 역사상 최초로 '''재상을 거치지 않고 삼공에 임명된 사례'''이다.
몇년이 지나 761년에 병으로 죽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왕사례를 태위로 추증하였으며, 시호를 무열이라 하였다.
3. 평가
구당서 왕사례 열전에서는 마지막에 왕사례에 '''"윗사람의 뜻을 받들고 계책을 꾸미는 것에는 능했으나 군사들 다루는 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라고 평하였다.[7] 어째 살짝 미묘한 평가(...). 사실 단독으로 싸울땐 잘만 싸우는데 연합해서 싸울땐 패전도 많다. 동관이라든가, 상주에서라든가...
그러나 또한 '''"법을 엄중히 하여 병사들이 함부로 이를 어기지 못하게 하였으니 사람들이 이를 칭찬하였다."'''라고도 하였는데, 이런 점이야 말로 왕사례의 진정한 장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한마디로 엄중하고도 원칙을 잘 지키며 때로는 독하고 끈질긴 면모를 드러내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가서한이 군법에 따라 자신의 목을 베려다가 말았을 때 왜 군법에 따르지 않고 말을 번복하면서 따졌던 일화나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었음에도 조서의 명을 따랐던 일화는 이러한 왕사례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애초에 당은 물량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었고, 당 정부군은 그 물량을 착실하게만 운용해도 이길 수밖에 없었다. 그 물량으로 야매를 부리면 망하는 것이고..[8]
그에 대한 또다른 일화에 따르면 동관에서의 패전 당시 장광성이란 자가 말을 건네주어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 왕사례는 고마워서 그에게 이름을 물었으나 알려주지 않았다. 후일에 태원윤으로 있을때 왕사례에게 밉보인 신운경이 걱정하고 있는데 그때 이 장광성이 '자기가 가서 일을 해결하겠다' 고 말하고 찾아가 그를 만났다. 그런데 왕사례가 이름도 모르고, 동관 이전엔 안면도 없었던 장광성을 곧바로 알아보고는 '''어찌하여 서로 만나보는 것이 이렇게 늦었는가''' 하면서 환대했고, 장광성이 신운경을 용서해 줄 것을 청하자 기꺼히 용서해준 후 이전까지 일개 하사관급이였던 장광성을 '''병마사'''로 올리고 후대했다. 이를 보아 확실히 보답하는 인물이 아닌가 싶다.
고선지나 이정기 등과 마찬가지로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활약했다는 점이 돋보이는 인물. 특히 세 사람 모두 안사의 난과는 관련이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 재미있다.[9]
[1] 인맥이 대단한 인물로, 당나라의 어지간한 장수와 절도사는 왕충사와 인연이 있었다. 전략적 안목이 뛰어난 명장이었으며 절도사를 4개나 겸직한 걸로도 유명하다. 당나라 군대의 거의 절반을 지휘했던 셈. 그야말로 당나라 군부의 보스, 큰형님이다. 참고로 그 안록산이 절도사 3개를 겸직하고 있었다.[2] 훗날 당나라의 절도사가 되는 인물로, 안사의 난 당시에 왕사례와 함께 활약하였다.[3] 자신의 생명보다 군법을 엄중히 행하는 것을 중히 여긴 왕사례의 용기와 그 독한 성격(...)에 감탄한 듯 하다. [4] 당현종의 총애를 받던 양귀비의 오빠로, 황제의 최측근이었지만 동시에 제멋대로 정권을 휘두른 간신이었다.[5] 어찌나 크게 졌던지 최고의 명장이였던 곽자의 마저 모함을 당할 지경이었다.[6] 이때 마찬가지로 피해가 적었던 건 곽자의의 군대였는데, 이는 후위에 있었기 때문. 그외에 노경이라는 절도사가 이끌던 군대가 가장 피해도 크고 행패도 많이 부렸는데, 덕분에 후에 책임감을 느끼고 자살한다.[7] 이는 왕사례의 원리원칙주의자 기믹 + 독한 성격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한 마디로 말해서 왕사례의 성격은 상관으로 치면 완전 빡빡하게 군기잡는 상관(...)이니 맡은 일은 잘 할지언정 아랫사람들이 정 붙이긴 좀 힘든 타입일 듯.[8] 그러나 왕사례의 후임으로 온 사람은 왕사례의 철저한 원칙주의자 + 규범준수 + 독하고 끈질긴 면모 중 어느 하나도 지니지 못했다. 외려 상당히 헐거운 성품의 사람이어서(...) 왕사례가 다 잡아놨던 군사들의 군기가 이 사람 때문에 다 해이해진다(...) 게다가 왕사례가 살아생전 알뜰살뜰하게 모아두며 철저히 관리했었던 군량미도 왕사례 사후 후임이 온 뒤 군사들이 다 밑장빼기(...)해버렸고 후임 관리는 이를 봐줬기에 나중에 심각한 군량미 문제가 오게된다.[9] 고선지는 안사의 난으로 인해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반면, 이정기는 혼란을 틈타 절도사가 되어 강력한 지방 세력가로 성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