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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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나라의 절도사, 고구려 유민 출신이다.
본명은 이회옥(李懷玉)으로, 절도사로서 되었다가 안사의 난 이후로 어지러워진 당 말기의 혼란을 틈타 산동 지역에서 사실상 자립했다.
고선지나 왕사례, 고문간 등과 더불어 고구려 유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당나라에서 크게 출세한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2. 생애
2.1. 초기 일생
732년, 고구려 유민들이 대규모로 군집되어 있던 당나라의 영주(요녕성 조양)에서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758년, 안사의 난 당시에 전대 평로절도사인 왕현지가 병사하자 같은 고구려 유민이자 고종사촌형인 후희일(侯希逸)을 평로절도사에 추대하고 자신은 그 부장의 지위에 올라선다. 이후 공격해오는 해족의 군대와 안록산군을 피해 산동지역의 청주를 점령하고 청주 절도부까지 장악하는 기염을 토한다.
이정기는 젊은 나이에 무력이 상당하고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는 위구르 장수와 벌인 결투의 일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여러 활동에서 병사들의 신망을 얻게 되었으며 이를 시기한 후희일이 이정기를 제거하려 하자 오히려 후희일이 역관광을 당하였으며 이 결과 이정기는 병사들이 추대한 최초의 절도사가 된다.
2.2. 세력가가 되다
절도사 취임 후 이정기는 본격적으로 산동 지역에 독자적인 세력의 구축을 개시하였으며 당에게서 절도사의 지위와 발해, 신라 무역 독점권을 획득하여 경제적 부를 챙겼다.[3]
이후 위박절도사 전승사가 기세를 떨치자[4] 이를 토벌하여 세를 강화했고[5] 이령요의 반란 토벌명령을 명분삼아 영토를 확장, 5개주를 추가로 획득해 15개주에 달하는 하남(산동 지역) 최대의 절도사로 성장한다. 이때 이령요 토벌이 중요한 건 단순히 영토를 5개 주 더 넓힌 것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대운하에 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치까지 영토를 팽창한 데 있다.[6] 이에 당나라조정은 이정기의 힘을 빌어 하북, 하남 일대의 절도사들을 통제하고자 노력했고, 이 일환으로 재상에 해당하는 삼공의 지위와 종성을 하사하였다.
이후 이정기는 발해의 법제와 세제를 받아들여 활용하고, 동시에 수도를 운주로 옮겨 당을 위협하려는 듯한 모습도 보이는 등 독립세력으로써의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게 된다.
2.3. 말년과 죽음
이후 779년, 당대종(代宗)이 사망하고 절도사들에게 강경한 입장을 보인 당덕종(德宗)이 즉위하자 위기감이 고조되었고, 결국 절도사 세습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이정기는 주변 절도사들과 함께 당에 대향하는 4진의 난[7] 을 주도한다. 이때에 이정기는 병력을 조주에 집중시켜 전면전을 벌인 끝에 당의 대운하를 차단해 당을 위협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이정기는 숨을 거두고 (765-781,재위 17년, 향년 50세) 이후 그의 아들인 이납(781-793, 재위 12년, 향년 35세)이 15주의 절도사지위를 이어받는다. 이정기 사후 그의 사촌인 서주의 이유李劉, 덕주의 이사진李師眞, 체주의 이장경李長慶이 당에 투항함으로서 12주가 되고, 대운하 등은 다시 당의 통솔로 돌아가지만, 이후 평로치정번진은 지속적인 게릴라성 운하 진출 등으로 최대의 독립적 번진이자 당에 반항하는 하북번진들의 핵심적인 축으로 후희일 때부터 치면 60년간 당의 근심거리가 된다. 그 대는 이사고(793-807,재위 14년, 이납의 아들, 향년 38세), 이사도(807-819, 이사고의 배다른 동생, 재위 12년)까지 4대 55년간 이어졌다.
결국 당헌종이 805년 즉위하면서 나머지 3진을 멸하자 제 역시 강경하게 맞섰는데, 멸망 당시에도 이사도는 하음창을 급습하고 재상 무원형을 암살하고 배도를 중상에 입히는 등의 성과를 보였지만 결국 당 조정과 친당절도사, 신라의 김웅원이 지휘하는 3만 지원군의 연합공격[8] 으로 멸망했다. 이때 장보고가 서주의 무령군 소장으로 참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일시적으로 제라는 명칭으로 독립적인 국가 행세를 하기도 했는데 이는 주변 하북 번진들이 다같이 '위'나 '조', '연' 등의 국호를 내세워 독립적인 국가를 세우는데 행동을 같이한 것이라서 독립적인 '왕조' 라기엔 좀 미흡한 구석이 많다. 황제 드립은 더욱 무리하고 말이다. 더욱이 이는 이정기때가 아닌 이납 때의 일이다. 실제로 하북 번진들이 국호를 내세우는 걸 포기하자 '제'라는 국호를 내세우는 것도 금방 포기해 버렸고.
3. 평가
이처럼 강력한 세력을 떨쳤던 이정기는 고선지, 왕사례와 더불어서 대표적인 고구려 유민 출신 고위 장교며, 동시에 산동 지방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여 반 독립국을 세우고 당 왕조에 도전한 독특한 인물이다.
한편 정통성 확보의 명분으로 당나라의 종성을 하사받는 등 이정기가 고구려 계승의식을 지니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있지만, 그가 세운 치청 번진과 이후의 제 왕조는 발해와 고구려 등의 영향을 받은 문화와 법제, 관제, 세제를 이용하고 있어 어느정도의 계승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 많은 인물이다.
그러나 제나라가 55년동안 존재할수 있었던 것은 이정기의 능력이 아니라 발해가 이정기와 그 가문의 뒤를 봐주었기에 가능했다는 분석도 많다. 당시 당은 안록산의 난을 어느정도 진압을 했고 게다가 곽자의라는 불패의 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당나라가 마음만 먹었다면 토벌할수 있었지만 그당시 이정기에게 발해가 중요 군사물자인 말을 대놓고 지원하는 등의 행보로 이정기를 봐주고 있다는 것을 대놓고 증명했다. 게다가 무왕시기 대둔산전투와 등주성전투에서 발해에게 패한 경험이 있는 당나라 입장에서는 한창 말갈부족들을 복속하며 잘나가던 발해의 심기를 건드릴까 두려워 이정기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4. 같이보기
5. 둘러보기
[1] 이정기 때는 아직 스스로 왕을 칭하지 못했다.[2] 당나라 국성. 이정기가 당대종에게 사성을 부탁해 받은 것.[3] 원래 한중일간의 무역은 8세기까지는 공무역이 대세였지만 9세기 들어 당, 신라, 일본의 왕권과 국가장악력이 동시에 떨어지면서 사무역 위주로 개편되었다.[4] 안록산 시절부터 절도사를 해먹었고 기반도 튼튼해서 주변 절도사들(이정기 포함)을 우습게 봤다.[5] 전승사는 이후 세가 꺾였고 이정기와 곧 결혼동맹을 맺는다.[6] 이령요는 후에 이정기가 보여주는 '대운하 끊고 당 황실 협박하기'를 처음으로 보여준 인물이기도 하다.[7] 치청번진 + 성덕,위박,노룡 하북 3진[8] 하지만 이사도의 난은 819년 2월에 진압되었는데, 신라는 5개월 뒤인 819년 7월에야 구원군 파병 의사를 밝혔다고 되어있기 때문에 실제로 출진은 하지 않았거나, 전화도 없었던 시대의 한계상 정보의 혼선으로 뒷북 허탕을 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젊은 시절의 장보고 등 당군 소속 신라인들은 별개로 이사도 토벌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