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당(1948년)

 




1. 개요
2. 활동


1. 개요


1948년 12월 조소앙한국독립당을 탈당하고 창당한 정당.
창당 준비 과정에서 '한국사회당' 또는 '민족사회당'을 당명으로 하자는 의견이 많았으나, 굳이 '한국'이나 '민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필요는 없다 하여 당명은 사회당으로 정해졌다. 사회당 창당 당시 무려 이승만대통령이 '''"공산당과 싸우는 나라에서는 사회당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우익정당 일색인 마당에 사회당이 생긴다니 반갑고, 더구나 조소앙 선생이 이 당을 한다니 반갑다"'''며 축사를 했다.[1] 그러나 일부 사회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 체포되면서 당의 위상이 흔들리기도 했다.

2. 활동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28명이 입후보하였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선거구에 출마한 조소앙은 우익의 거물 조병옥을 제치고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되었고,[2] 조시원양주군 갑 선거구에서 당선되면서 총합 2석을 얻었다. 조소앙은 6월 19일 실시된 국회의장 선거 1차 투표에서 48표를 얻어 이승만이 민 오화영(46표)을 앞서기도 했다.
그러나 고작 1달 만에 6.25 전쟁이 터지고 조소앙이 납북되는 바람에 해체되었다.

[1] 말하자면 온건한 진보정당을 제어가능한 수준으로 수용함으로써 좌익 성향의 인물들이 아예 공산당 측에 붙어버리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1949년 농지개혁법을 상정하여 농민들의 지지를 얻고 공산주의 동조를 줄이고자 한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2] 조병옥 측은 선거 전날인 5월 29일 '조소앙이 공산당의 정치자금을 받아쓴 것이 탄로나 투표일을 하루 앞두고 월북했다'는 찌라시 벽보와 전단을 성북구 일대에 뿌렸으나 참패하였다. 선거 유세 마지막 날 조소앙이 직접 모습을 보이며 유세하여 자신의 건재를 과시한 게 큰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