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대 국회의원 선거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
1948년 5월 10일

1950년 5월 30일

1954년 5월 20일
제헌 국회의원 선거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민주국민당'''
'''대한국민당'''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한청년단
대한노동총연맹
일민구락부
사회당
기타 정당
'''무소속'''
'''24석'''
'''24석'''
14석
10석
3석
3석
2석
4석
'''126석'''
'''11.4%'''
'''11.4%'''
6.7%
4.8%
1.4%
1.4%
1.0%
1.9%
'''60.0%'''
'''제2대 국회의원'''
1. 개요
2. 배경
3. 과정
4. 결과
5. 이후


1. 개요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로 투표율은 91.9%를 기록했다. 임기는 1950년 5월 31일부터 1954년 5월 30일까지였다.

2. 배경


제헌 국회를 대부분 자신의 계파로 채운 이승만 정권은 불과 2년 만에 민심을 잃고 여론이 대단히 악화되었다. 1949년 벌어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무산 사건으로 인해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이 좌절되고 김구암살이 이승만과 연관되어 있다는 여론이 확산되어 2대 총선에서는 여당의 패배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이승만 정부는 선거일을 12월로 미루고 시간을 두어 민심을 수습하려 했다.[1] 그러나 딘 애치슨 당시 미국 국무장관의 강력한 경고로[2] 1950년 5월 30일에 치러졌다.

3. 과정


'''소선거구제'''를 유지했고, 선출의석 수는 '''210석'''으로 200석에서 10석 늘어났으며 경쟁률은 10.5대 1로(후보자가 2,209명) 역대 총선 중 가장 높았다. 이는 의회 민주주의의 맛을 본 국민들이 "우리도 마음만 먹으면 권력을 쥘 수 있다"라는 생각이 작용했기 때문. 대한민국이 처음 수립될 때는 아무리 선거가 실시된다지만 나라를 이끄는 자들은 감히 넘볼 수 없는 분들이라는 봉건적 관념이 만연했었지만, 2년 간의 민주주의를 경험한 후에 치러진 2대 총선에서는 각 지방의 유지들이 앞다투어 출마하게 된다. 다만 정당정치가 아직 뿌리잡지 못했던 터라 무소속 후보가 많았고 선거 결과에서도 무소속 의원의 비율이 대단히 높았다.

4. 결과


[image]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제1당

24석[3]
제2당

24석
제3당

14석
제4당

10석
제5당

3석
제6당

3석
제7당

2석
제8당

1석
제9당

1석
제9당

1석
제9당

1석
-

'''126석'''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지역
민주국민당
대한국민당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한청년단
대한노동총연맹
일민구락부
사회당
민족자주연맹
대한부인회
중앙불교위원회
대한여자국민당
노농청년연맹
'''무소속'''
서울
2
2
1
0
1
0
1
1
1
0
0
0
7
경기
4
2
0
0
1
0
1
0
0
0
0
0
17
강원
2
0
2
1
0
0
0
0
0
0
0
0
6
충남
1
3
3
0
0
1
0
0
0
0
0
0
11
충북
2
3
0
0
0
0
0
0
0
0
0
0
7
전남
9
2
3
3
1
0
0
0
0
0
0
0
12
전북
3
2
0
0
0
0
0
0
0
0
1
1
15
경남
2
0
2
2
0
0
0
0
0
0
0
0
26
경북
2
3
1
4
0
1
0
0
0
1
0
0
21
제주
2
0
0
1
0
0
0
0
0
0
0
0
2
합계
27 (9.8%)
17 (9.7%)
13 (6.8%)
10 (3.3%)
2 (1.7%)
3 (1.0%)
2 (1.3%)
1 (0.5%)
1
1
1
1
124 (62.9%)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와는 달리 남북협상파의 선거 참여가 두드러졌으며 최종 투표율은 91.9%였다.
이 선거에서 '''무소속이 총 210석 중 126석'''[4]을 얻어 초강세를 보였고, 한민당의 후신세력인 보수야당 신익희민주국민당(24석)이 제1당을 차지했다. 반대로 '''친 이승만파는''' 대한국민당(71석->24석),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잔당(48석->12석->14석), 대한청년단(19석->10석), 대한여자국민당(1석)를 더해도 '''단 57석'''에 그치는 참패를 당했다.
의원들도 대부분 물갈이되어 기존 국회의원 중 재선된 의원의 비율은 불과 31명뿐이었다. '''제1당이 야당에게 넘어간 최초의 선거.'''[5]
얼마나 무소속이 강세였는가 하면 무소속이 차지하는 비율이 62.9%(...). 참고로 제1당은 신익희가 이끄는 민주국민당, 제2당은 여당 격인 윤치영이 이끄는 대한국민당이었으나 이 두 당을 합쳐도 의석의 20%가 안 될 정도였다. 사실상 제1당 같은 걸 따지는 의미가 없는 상황. 지난 선거의 제1당이었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대한국민당으로 대부분의 의원이 빠지면서 제3당을 유지했다. [6]
6월 10일 개회된 국회는 보수야당과 중도파가 크게 신장되면서 초대 국회의장은 신익희가 되었지만, 의장선거에서 사회당의 조소앙이나 무소속 오화영도 큰 지지를 받았다. 이승만은 여소야대로 끌려다니며 탄핵설까지 대두되었으나, 전쟁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임시수도 부산에서 위헌적인 발췌 개헌(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저질렀다.

5. 이후


선거 직후 6.25 전쟁이 발발하여 국회도 피난을 가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정부로부터 정보를 늦게 받거나 수도 사수 등의 명분으로 붙잡혀 납북된 의원'''(일부는 자진 월북)'''도 있다. 대표적으로 납북된 의원은 민세 안재홍.[7] 휴전 협정의 결과 일부 의원들의 지역구는 북한령이 되거나 지역구 대부분이 북한령이 되었다. 옹진군 '갑' 선거구는 백령도, 대청도만 남았고 옹진군 '을' 선거구는 연평도만 남았으며, 연백군, 개성시, 개풍군은 완전한 북한령이 되었고 장단군 선거구도 남은 지역이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어 주민이 없었다. 옹진군의 경우 선거구를 개편하여 단일 선거구로 다음 선거를 치르는 안도 논의되었으나 무산되고 이들 지역의 국회의원은 자리가 없게 되었다. 결국 제3대 국회의원 선거를 치를 수 없는 이들 지역의 국회의원의 임기를 연장하는 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으나 헌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거부권이 발동되었다.

[1] 이승만도 당시 민심이 자신에게 매우 불리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일부러 선거를 뒤로 미루려고 했었다.[2] 이승만이 국회의원 총선을 연기한다면, 한국에 대한 모든 경제 원조를 끊겠다는 강력한 압박이었다. 당시 한국 경제는 정부수립 이후로 일단 물가폭등이 일상이었던 미군정 시기에 비해 안정된 모습을 보이나 이러한 안정된 경제상황에는 미국의 원조가 큰 역할을 했기 때문에, 미국이 정말로 원조를 끊어버리면 그 즉시 한국 경제는 망할 수밖에 없었다.[3] 의석수가 동일한 경우는 비례대표 득표율로 정당 순서를 구별하는데, 2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에는 비례대표제가 없었으므로 이 문서에서는 정당득표율대로 순서를 구별했다.기사[4] 무소속 의원들 상당수가 김구, 김규식과 노선을 같이한 중도우파 세력이 주축이었다. 대표적으로 안재홍, 조소앙, 조봉암, 장건상 등등 거물급 인사들.[5]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는 야당 제1당인 한나라당이 선거 전에도 1당이었고, 제1당이 바뀐 선거는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가 기록을 깼다.[6] 사실 1946년 인민위원회 선거에서 조선로동당은 꼴랑 31%의 득표를 올리는데 그쳤고 1948년 북한 최고인민회의 선거에서는 대다수 지역구에서 단일후보를 내기는 했지만 조선로동당이 과반수의 후보를 내지 못했으며 덕택에 조선로동당이 과반수를 점하지 못하고 오히려 무소속과 기타정당이 강세였던 상황이었다. [7] 당시 지역구는 경기도 평택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