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프락치 사건

 



1. 개요
2. 전개
3. 사건 이후
4. 의문점
5. 관련자료
5.1. 사건공판 관련
5.2. 1990년대 이후
6. 미디어에서


1. 개요


1949년 5월, 북한 김일성 또는 박헌영대한민국 제헌국회에 침투할 목적으로 북한의 공작원 정재한을 급파해 공작을 하다가 포섭된 의원 명단의 암호를 발견하며 관련 의원들을 구속한 사건.

2. 전개


1949년 5월 하순, 서울지방검찰청은 '''북한 공작원 정재한에게 포섭된 의원 명단의 암호를 발견'''하여 관련 의원들을 구속하였다. 일명 '국회 프락치 사건'이라고 한다. 국회의원 이문원(익산 을구), 최태규(정선), 이구수(고성), 황윤호(진양) 등을 전격 구속한다. 이어 6월에는 '제2차 국회 프락치 사건'이라 하여 노일환, 서용길 등 반민특위 위원과 독립운동가 출신 국회 부의장 김약수를 비롯한 8월까지 총 국회의원 13명이 구속된다.
구속된 의원들 중 일부는 반민특위에서 활동하거나 '평화 통일 방안 7원칙' 등을 제시하던 반정부 성향의 소장파 의원이었다. 5월 23일 임시 국회에서 구속된 의원들의 석방 결의안을 놓고 이틀간 격론한 끝에 끝내 88 대 95로 부결된다. 그리고 서울 시내에서는 관제 데모가 기승을 부렸다.
남로당은 이 사건이 발각되자 남로당도 분주히 담당 검사와 수사관 암살을 여러 차례 계획했다. 이 과정에서 남로당 행동대원 이용운에 의해 1949년 8월 12일 김호익 총경이 피살되었다.
반민특위에서 친일파로 지목된 전봉덕 헌병 사령관, 김정채 헌병 사령부 수사 정보 과장, 서울지검 검사 오제도, 서울시경 국장 김태선, 서울시경 사찰 과장 최운하 등이 중심이 되어 이 사건을 수사한다. 11월 17일 첫 공판이 열린 이후 3개월간 심리가 계속되었고, 구속된 의원들에게 최고 10년에서 최하 3년까지의 실형이 선고된다. 그러나 2심 계류 중 6.25 전쟁이 터지고 관련 의원들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전쟁의 와중 북한군에 의해 출옥하여 사라졌다.
후일 북한에서 1997년 5월 26일 성시백의 공로가 보도된 로동신문 기사까지 나와 북한 자신들이 대한민국 제헌국회에 공작이 있었음을 시인했지만, 일부 진영에서는 반민특위와 친일 세력 간 대립이 심화되어 반민특위 활동이 위축되었다고 보기도 한다.[1]

3. 사건 이후


관련 의원들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의 정치범 석방에 의해 모두 풀려났다. 이들 중 서용길을 제외한 나머지 12명은 '''인민군 치하에서 그들에게 협조하다가 월북하였다.''' 서용길의 경우 숨어지내다가 수복 이후 수사당국에 자진출두한다.
월북한 12명은 여러 남로당계 숙청시기인 1958년 말과 1959년 초 쯤 대부분 숙청되었고, 나머지는 행방불명 상태이다. 몇몇은 북한에서 묘지까지 만들어주었다.

4. 의문점


서울지방검찰청에 따르면, 1949년 3월 경 소장파 의원들에 대해 특별사찰반을 편성해 내사하던 중 남로당원 전우겸의 진술을 받아 5월 20일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를 구속했고, 6월 10일 개성에서 광주리 장수로 변장한 여자 남로당 특수공작원 정재한의 음부 속에서 비밀보고문을 찾아내 6월 20일 노일환, 김옥주, 강욱중, 박윤원, 황윤호, 김약수, 서용길, 신성균, 배중혁, 김병희 등 의원들과 변호사 오관을 구속했다.법조계에 큰 파문이 일었다고...
혐의자로 조사받은 어떤 의원은 체포되지 않았는데 도주 중이라는 신문 기사를 봤다고 한다. 그의 일갈 '내가 공산당 잡아서 국회의원 되었는데 내가 공산당이라니. 공산당이라니..!' 이 사건의 가장 중요한 증인인 남로당 특수공작원이라는 정재한은 피고인들과 변호인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도 법정에 나타나지 않다가 그 해 12월 총살당하여 이 사건에 대한 의문만 크게 만들었다.[2] 사안의 중대성 때문에 심지어 미국 대사관에서도 정재한의 신병 및 공개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정여인의 옷을 샅샅이 수색해도 단서가 나오지 않았는데 용변을 보게 하니 변소에서 자신의 음부를 주무르며 주춤하다가 이를 수상히 여긴 경찰에게 암호문을 뺏겼다고 하는데(이때 나온 문서가 당시의 종이로 50페이지 가량이었다고 한다.), 마치 경찰들이 여인의 음부 속에 보고문이 있는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느낌을 줬다. 또한 박헌영에게 보내려 한 보고문이라는 것도 평양의 박헌영이 매일 신문을 보면 알 수 있는 내용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졌다. 국회프락치 사건의 주요 증인을 다른 혐의로 먼저 처형했다는게 의문.
이 사건에 연루된 의원들 중 유일하게 남한에 남아있는 서용길씨에 따르면 북한으로 간 연루 의원들은 대부분 숙청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서용길은 서울 수복 후 부역죄 혐의로 잠깐 옥살이를 하다 석방 후 당시 검사였던 오제도를 찾아가 국회 프락치 사건에 대해서 따진 적이 있었는데, 이때 오제도한테서 '''"나도 당신 무죄인거 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연장선상에서 서용길은 전쟁 후 다시 상위법원에서 무죄를 받기 위해 소송 속개를 주장하였으나, "법원재난에 기인한 민·형사사건 임시조치법"(1950년 3월 22일 제정)에 따라 백지화된 사건에 더이상의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박명림 교수가 90년대 논문 자료 조사차 오제도를 방문했을 때 사건에 대한 상기의 의혹을 제시하고 답변을 요구했다. 이에 오제도는 여러 가지 무리수를 인정하지만 "공산당을 잡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답변으로 마무리. [3]

5. 관련자료



5.1. 사건공판 관련


(당시의 신문기사) 당시 정국을 뜨겁게 달군 사건이라 공판도 매우 오랫동안 진행되었다.
국방부, 국회에서 국회프락치사건 전모를 발표
국회프락치사건 제1회 공판
국회프락치사건 제2회 공판
국회프락치사건 제3회 공판
국회프락치사건 제4회 공판
국회프락치사건 제5회 공판
국회프락치사건 제6회 공판
국회프락치사건 제7회 공판
국회프락치사건 제8회 공판
국회프락치사건 제9회 공판
국회프락치사건 제10회 공판
국회프락치사건 제11회 공판
국회프락치사건 제11회 공판
국회프락치사건 제12회 공판
국회프락치사건 제14회 공판
국회프락치사건 제16회 공판
제16회 공판때 변호인단의 변론
국회프락치사건 제18회 결심공판, 피고인들이 최후 진술
국회프락치사건 최종언도공판에서 전원 유죄 판결(당시 판결)

5.2. 1990년대 이후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가 1998년 입수한 '중앙고등군법회의 명령'(제164호 - 49.11.28, 제180호 - 49.12.1) 자료에서 '국회프락치사건'을 촉발시킨 여자 공작원 정재한(鄭載漢.당시 42세)은 실존 인물이 맞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녀는 국회프락치사건 첫 공판이 열린 49년 11월 28일 국방경비대법 위반(이적행위)으로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공판 사흘 뒤(12.1) 육군총참모장 대리 신태영(申泰英) 소장 명의의 사형집행 명령을 받고 그해 12월 6일 총살됐다.'국회 프락치사건'도화선 정재한은 실존인물이었다.
이외에도 1997년 5월 26일자 북한 로동신문은 남파 공작원 성시백(成始伯, 1905~1950)의 공로를 보도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성시백이 남한 국회의원들을 배후에서 포섭했다는 것도 들어 있어 북한 스스로가 프락치 사건이 자신들이 한 공작임을 시인한 바도 있다.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 뒷담화] 간첩의 원조, 명동백작 성시백"

6. 미디어에서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서 오제도 검사로 나온 배우 권성덕은 무풍지대에서 이기붕으로 나오고 야인시대서울 1945에서 이승만으로 나온다.
70년대 박근형을 오제도로 한 특별수사본부 영화가 바로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1] 반민특위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은 6월 6일 친일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같은 달 26일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되면서 반민특위는 붕괴하고 만다. 특히 야당인 한국민주당 세력이 반민특위를 이승만과 같이 반대했는데, 왜냐하면 하필이면 당시 한민당 창시자들이 대다수 친일민족반역행위자들이었고, 이후 반민특위를 없애버린다. 물론, 나중에 이승만이 농지개혁법으로 친일세력을 뒤통수를 쳐버린다.[2] 여담으로 후술되어있듯 당시 성시백처럼 진짜 대남 공작원이 있던 것은 사실이었다. 대북 공작원도 마찬가지.[3] 이에 박명림은 당시 집권층의 상태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고 기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