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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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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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정치인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이자 한국독립당의 간부이다. 본명은 조용은(趙鏞殷), 호는 소앙(素昻), 본관은 함안."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가 균등한 생활을 하게 하자는 것이 삼균주의(三均主義)다."
2. 생애
1887년 경기도 교하군(현 경기도 파주시)에서 태어났으며 생육신 중 1명인 어계(漁溪) 조려(趙旅)의 17대손으로 어려서 조부로부터 한학을 수학했다. 1902년 상경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는데 성균관 재학시 신채호와 함께 일본에 대한 황무지 개척권 양도에 반대하여 성토문을 작성했다. 성균관 졸업 후에는 황실 특파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904년 일본으로 건너가 학교를 다녔지만 교장의 "한국 학생들은 열등하다"는 조선인 비하 발언에 항의하며 동맹 파업을 주도했다. 이후 1908년 메이지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일본 유학시 조소앙은 공수학회와 대한흥학회 간부로서 유학생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09년 12월 일진회 성토문 기초 위원으로 선정되었으며 1910년 8월 대한흥학회 차원에서 추진한 한일합방 반대 운동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였는데 이로 인해 그는 경찰에 체포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1911년 조선 유학생 학우회 회장이 되기도 했는데 이때 요시찰 인물로 찍혀 경찰로부터 감시를 받았다. 1910년을 전후해 나라를 빼앗기자 조소앙은 실망감에 빠져 불안감과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러한 정신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기독교 입교와 종교 및 철학 관련 서적에 대한 폭넓은 독서와 사색으로 지내게 된다. 이 시기 조소앙은 유교, 불교, 기독교 등 동서양의 모든 종교와 철학을 통합하는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하겠다는 목표를 갖게 되었다. 이 시기 상하이에서 미국으로 가던 이승만이 도쿄에서 강연하던 것을 듣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고 신익희, 윤치영, 여운홍과도 활동했다. 1912년 3월 메이지 대학을 졸업한 뒤 귀국하여 한때 경신학교와 양정학교 교사로 활동했었으나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한다.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등과 함께 '동제사'를 조직해 가입하고 박달학원 교사로 활동했다. 1917년 7월 상하이에서 박용만,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등 14인의 명의로 발표된 대동단결선언을 기초하였다. 이 선언문은 해외 독립 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기관을 수립하기 위해 각 단체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자는 제안이었다. 이것은 제안으로 그치고 말았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관련해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선언문에서 합방 조약은 이민족에게 주권을 양여한 적이 없다는 민족사의 불문율에 의거하여 무효임이 선언되었다. 오히려 대한제국 황제의 주권 포기 선언으로 해석되어 경술국치를 기점으로 주권이 대한국민 전체에 귀속되었다고 선언되었다. 1919년 1월 조소앙은 '2.8 독립 선언'에 커다란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일본 도쿄에 도착하여 재일본 한국인 유학생들을 만나 '신한 청년당 대표 김규식이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되었음'을 알렸다. 본국으로 가는 길에 먼저 일본에 파견되어 도쿄 유학생들과 만나서 2월 8일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정한 통보를 접수하고 일본에서 긴급히 모금한 독립운동 자금 800원을 조소앙에게 위탁하여 상하이로 보내었다. 1919년 2월 지린성으로 가서 여준, 박찬익 등과 함께 '대한 독립 의군부'를 조직했다. 대한 독립 의군부에서는 의열 투쟁 방략을 채택하고 국외 각지에서 동지를 모집하기 위해 '대한 독립 선언서'를 제작하여 배포하였는데 조소앙은 대한 독립 선언서를 기초하는 책임을 맡았다. 지린성에 있던 중에 국내에서 3.1 운동이 일어났다. 조소앙은 국내에서 3.1 운동이 일어났고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로 결집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1919년 4월 초 지린성에서 상하이로 갔다.
1919년 4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창립하였는데 조소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임시 의정원법 기초위원과 임시 헌장 기초위원으로 선정되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한성에서의 기의, 국내의 3.1 운동에 기초하여 임시 정부를 수립했다'고 하였다.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국무총리 선임 문제는 이승만의 '위임 통치 청원 사건' 문제로 진척되지 못하였다. 이에 조소앙은 후보자 3인을 추천하고 3인의 후보에 대한 무기명 투표 방식을 제안하였다. 이 방법이 채택되어 선거가 실시되었고 그 결과 이승만이 국무총리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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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5월,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한 김규식과 한국 대표단.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조소앙 맨 오른쪽에 여운홍이 보인다.)
1919년 5월 조소앙은 유럽으로 건너갔는데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한 김규식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가 런던을 경유하여 파리에 도착한 것은 6월 말로 이미 파리 강화 회의가 종결된 뒤였으며 파리 강화 회의에서는 한국 문제가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후일 그는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는 백지복음에 불과했다'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귀국하지 않고 유럽 각국을 순방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 선전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1919년 7월 스위스에서 개최되는 '만국 사회당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3년 전 조선 사회당 명의로 한국 독립 지원을 요청했던 사실을 말하고 대회 참석과 발언을 요청하는 문서를 보냈다. 만국 사회당 대회 비서장 명의의 참가 승인 전문을 받고 조소앙은 이관용과 함께 한국 사회당 대표로 대회에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서 그는 '한국 독립 승인 결의안'을 제출하였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미국식의 자본주의나 소련식의 공산주의가 아닌 삼균주의와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결의안은 25개국 대표들의 협의를 거쳐 8월 9일 정식으로 통과되었으며 한국의 독립이 국제 회의에서 최초로 승인받은 외교적 성과였다. 1920년 3월 조소앙은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개최되는 제2회 만국 사회당 집행위원에 참석했다. 이후 조소앙은 유럽에서 외교 활동을 벌이며 그의 외교 활동은 상하이의 '독립신문'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20년대 초중반 조소앙은 유럽 각국을 순방하면서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고 사회주의 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나타내기도 했었다. 영국 → 덴마크 → 리투아니아 → 벨기에 → 에스토니아 등을 거쳐 1920년 11월부터 1921년 5월까지 소련을 여행하면서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개최된 '11월 혁명 기념 대회'와 '모스크바 공산당 대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이 무렵 그는 '공산당'을 '독립당'과 함께 주의에 의거하여 수립된 진일보한 정치 세력으로 간주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공동으로 협력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1921년 말 베이징을 거쳐 상하이로 도착하여 다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1922년 6월 임시정부 임시 의정원의 경기도 출신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임시 의정원 의장이 되었는데 당시 임시정부 내부를 비롯해 독립운동 진영은 이념과 파벌 대립으로 극심히 분열되어 지도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타개하고자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국민대표회의에서는 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개조파'와 새로운 임시정부를 구성하자는 '창조파'의 의견이 대립되어 합의된 결론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이때 조소앙은 국민대표회의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면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세력이 통일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1925년 3월 이승만이 탄핵되어 면직되었고 4월에는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바꾸는 개혁이 단행되었다. 그러자 조소앙은 이러한 개혁에 대해 반대하면서 이승만 재집권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고 하와이에 있는 이승만에게 편지를 보내 쿠데타를 건의했다. 1920년대 중반 중국 관내 지역의 독립운동은 침체기에 빠졌다. 이에 이념과 지역 대립으로 분열된 독립운동 진영을 통일하여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자 '민족 유일당 운동'이 전개되었다. 1927년 3월 '한국 유일 독립당 상해 촉성회'가 결성되자 그는 안창호, 이동녕, 김구 등과 함께 이에 참여하여 상임위원에 피선되었다. 좌우익 세력이 연합하여 전개한 민족 유일당 운동은 베이징, 광저우, 우한, 난징 등지로 확대되었지만 이념과 방법상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독립운동 진영은 이념과 정파에 따라 독자적인 독립운동 정당을 결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930년 1월 조소앙은 안창호, 이동녕, 김구 등 민족주의 인사들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는데 한국독립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실질적으로 뒷받침하는 지주적 정당이었다. 조소앙은 한국독립당 결성 초기부터 발기위원으로 참여했고 상무위원으로 피선되었으며 당의, 당강 기초위원으로 선정되어 삼균주의에 의거한 정강과 정책을 기초했다. 1931년 1월 '한국 독립당의 근상'이라는 논문을 통해 삼균주의 이론 체계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이에 따르면 한국독립당은 '정치, 경제, 교육 세 분야에서 균등이 실현된 사회를 추구할 뿐만 아니라 나라와 나라,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의 세 수준에서도 균등을 실현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1932년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로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항저우 → 난징으로 옮겼을 때 조소앙도 항저우 → 난징으로 갔다.[1] 이 시기 조소앙은 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으로 선임되고 내무총장을 맡았다. 이때 그는 김철, 김두봉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1935년 김원봉을 중심으로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자 조소앙은 이에 참여한 뒤 탈당하였는데 평소 민족 유일당 결성을 촉구했었기 때문에 민족혁명당에 참여한 것이었다. 그는 정강, 정책 기초위원으로 참가하여 삼균주의를 민족혁명당의 지도 이념으로 채택하도록 하였으나 3개월 뒤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계가 중심이 된데 불만을 품고 탈당하여 한국독립당으로 다시 입당했다. 그는 김원봉이 삼균주의에 공감했던 것과는 별개로 자신이 주창하는 삼균주의가 '공산주의나 무정부주의와는 다르다'는 점을 크게 강조해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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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한국광복군 수뇌부.
1941년 조소앙은 '대일본 선전 포고문'이나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작성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장으로 독립 외교를 활발하게 전개하여 임시정부를 국제 사회로부터 승인받기 위한 활동을 벌여나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연합국은 임시정부 승인에 소극적[2] 이었는데 특히 영국이 강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승인을 얻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는 한국에 대한 전후 처리 방안으로 즉시 독립이 아닌 연합국에 의한 공동 신탁 통치가 협의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후 한국에 대한 '국제 공관론' 혹은 '신탁 통치안'이 국제 사회에서 거론되자 조소앙은 임시정부 외무부장으로서 연합국의 신탁 통치 방안에 반대하는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그는 한국의 독립운동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점, 영토의 규모와 국민의 역량에서 자주 독립의 자격을 갖추었다는 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일 선전 포고를 통해 교전 단위로 참전하고 있다는 점을 거론하였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담은 외교 공함을 각국에 전달하였으며 외국의 언론사에 기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광복군은 일본군과 교전한 바가 임팔 전투[3] 외에는 없었고[4] 1945년 일본이 항복하는 바람에 한국광복군은 일본과 싸우지도 못해서 김구가 한탄했다.[5]
1945년 광복 이후 김구와 더불어 이승만의 귀국을 도와주고 환영회도 함께 열었다. 1946년 3월 1일 '3.1절 기념행사'에서 한 육성 연설을 디지털로 복원한 것을 '조소앙기념사업회'에서 공개하였다. 이후 한국독립당 요인으로써 국내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해방 정국 동안 조소앙은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46년 4월 28일 소련 군정 보고서에 의하면
1946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중도파 세력들이 주도했던 좌우합작운동에도 참여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일단 신탁통치 문제에서 반탁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조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6] 소련 군정 문서 1947년 11월 25일자에 의하면 스스로 지도자가 될 야망이 있었다고 한다.(차) 지식인 및 학생들과 연계를 확립할 목적으로 신익희와 조소앙은 함경남도에 30명, 황해도에 40명을 파견하였는데 이들 모두는 무장하였다고 한다.
1947년 12월 장덕수가 암살당했을 때 허정이 자신의 회고록 '내일을 위한 증언(샘터사, 1979년)'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허정에 의하면 '왜 장덕수를 죽였냐'고 따지자 너털웃음을 지으며 직접적인 답변을 회피했다고 한다. 1948년 남북 협상을 지지해 처음에는 참여하였으나 이미 남북한 각각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 사실화된 마당에 무의미하다는 것을 느끼고 김구나 김규식과는 달리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단독정부 수립으로 선회한다. 1948년 말 무렵에 한국독립당을 탈당해 자신만의 정당인 '사회당'을 결성한다.한국 독립당 당내에는 두개의 조류-김구 그룹과 조소앙 그룹이 존재한다. 당의 주요 지도자들 중에는 김구의 지지자 3명과 조소앙의 지지자 4명이 존재한다. 김구는 조완구와 함상훈의 지지를 받고 있다. 조완구는 왕정주의자이다. 김구는 이승만과 협력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조소앙은 스스로 지도자가 되려는 목적을 추구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원칙이 없다. 외국 군대의 철수 문제에 있어 김구는 침묵하고 있고 조완구와 엄항섭은 철군에 반대하고 있다. 이에 반해 조소앙은 외국 군대의 철수를 지지하고 있다. 이전에 신간회 운동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정택영은 외국 군대의 철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조소앙의 형도 출세주의적 목적을 추구하며 외국 군대의 철수를 지지하고 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출마해 조병옥을 상대로 극적으로 이기고 당선되었다. 선거 초반부터 조병옥 측은 조소앙 측 선거 운동원 83명을 경찰서에 구금하는 등 경찰을 동원한 테러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소앙 측은 노인들만 선거 운동에 참가하여 기호표를 돌리고 선전문을 나누어 주었다. 특히 선거 하루 전날인 5월 29일 "조소앙이 공산당의 정치 자금을 받아쓴 것이 탄로나 투표일을 하루 앞두고 월북했다."는 사실 무근의 벽보와 전단이 성북구 일대에 마구 뿌려졌다. 당황한 조소앙은 선거 당일 새벽 자동차에 확성기를 달고 지역구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으며 선거 결과 조소앙이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되었다. 5.30 총선거는 중도파 정치인들이 대거 참여해 압승을 거둔 선거로 상당히 의의가 컸다.[7] 5.30 총선거에서 중도파 세력들 가운데 조소앙을 비롯해 장건상, 안재홍, 윤기섭, 원세훈, 조봉암 등이 다수 당선되었다. 반면 민주국민당과 이승만의 지지 정당인 대한국민당은 우수수 떨어졌고[8] 무소속이 126명이나 당선되었다. 그러나 1950년 터진 6.25 전쟁으로 중도파는 거의 박살나버렸는데[9] 특히 조소앙은 북한에 의해 강제로 납치당해 납북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1956년 7월 '재북 평화 통일 촉진 협의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여 최고위원이 되었다.#[10] 납북 인사 중 최고 거물급 인사였기 때문에 김일성과 직접 면담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 같이 활동했던 김두봉과 김원봉이 그를 지원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 정부는 '재북 평화 통일 촉진 협의회'에서 주장하는 '중립화 통일론' 통일 방안이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1958년 9월 엄항섭, 명제세, 노일환 등에게 '반혁명 분자'라는 혐의를 씌운다.#. 조소앙은 이에 항의하여 단식 투쟁을 벌이다가 병을 얻어 1958년 9월 10일 평양 남산에 있는 한 병원으로 이송되어 병사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평양직할시 형제산구역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묻혔는데 아쉽게도 조소앙의 묘를 가까이서 찍은 사진이 없다. 그나마 1989년 흑백 신문에 실린 사진이 실린 적이 있다. 김규식과 조소앙은 사망이라 되어 있고 조봉암은 희생이라 되어 있다. 북한에서도 조봉암의 억울한 죽음을 알고 가묘를 만들었다는 것이다.[11]중립화 통일 방안은 우리 조선의 장구한 역사적 경험과 교훈, 그리고 오늘 우리 조선이 처해있는 상황으로 보아 외부 세력의 침략과 간섭을 배제하고 진정한 자주적 평화 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유일한 방안이 된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중립화만 보장되면 외부 세계의 침략과 간섭은 없어지고 나라의 평화도 보장되며, 민족의 통일과 단결을 이룩하고 통일 위업 달성을 더 앞당길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1954년 6월 김일성과의 면담에서-
대한민국에서는 조소앙이 '납북'된 것을 '월북' 인사로 분류해 제1공화국 정부 때부터 제5공화국 정부 때까지 금기시되는 인물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복권 여론이 나오기 시작해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점과 6.25 전쟁 당시 북한으로 간 것이 자발적 월북이 아니라는 점이 지적되면서 복권 시도가 추진되었다. 본격적으로 복권되기 시작한 것은 1987년 6월 민주 항쟁을 전후로 학계에서 재조명되기 시작했으며 1989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훈장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함으로써 복권되었다.
3. 북한 억류 생활
1962년 내외 문제 연구소[12] 에서 그들의 생활을 알려주는 '죽음의 세월'이 연재되었다. 죽음의歲月(세월) (1),16회,22회,32회,33회,41회,42회,49회,50회,54회,완결... 보면 알겠지만 반공적인 요소들이 많다(...)
4. 음모론
1955년, 방첩대에서는 "'대남 간첩''' 조소앙이 지령을 내려서 한국독립당 간부들이 이승만을 암살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밖에도 독립운동가들이 연루되어서 충격을 줬다. 독립 운동가가 이승만을 암살하려했던 사건은 1952년 김시현의 저격 음모 사건 이후로 처음이다(...) 그 이전에는 1949년 10월 1일 한독당(한국독립당)에서 군부, 정부 요인들의 통행로에 지뢰를 깔아서 암살하려 한 바가 있다.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이건 '''당시 대한뉴스에서도 크게 다루기도 했다.''' 이 사건(1955년)이 일어났을 때 자유당 정권은 조소앙을 배후로 지목했었다. 그러나 조소앙이 배후 조종을 했다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다.(피의자들의 진술이 있긴하다) 참고로 당시 방첩대 대장은 김창룡이니 걸러서 듣자.(앞서나온 1949년에도 한독당에서 암살 기도를 시도했다) 이 음모는 1953년에 조소앙이 대남 공작원 침투 책임자로 임명되었다고 신문 기사로 내보낸걸로 보아, 그때부터 이걸 음모했을 가능성이 높다.(어떻게 간첩을 한두명도 아니고 2만 ~ 3만명이나 보낼수 있는지 따지면 안된다.) 참고로 조소앙의 가족들은 남한에 남아있었는데, 연좌제로 고생했다.
국가 원수 암살 흉계 전모,조소앙 지령으로 음모,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5110200209203021&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55-11-02&officeId=00020&pageNo=3&printNo=10075&publishType=00020,기소장 내용 이 대통령 암살 음모 (2),기소장 내용 이 대통령 암살 음모 (3),기소장 내용 이 대통령 암살 음모 (4)
이 밖에도 자유당 정권에서는 조소앙을 '북한 대남 간첩'이라고 떠들고 다니고 그를 몰아붙혔는데, 대표적으로 뉴델리 밀회 조작사건이 있다.
실제로 북한에서의 조소앙을 비롯한 납북 인사들은 1950년대 중반 무렵부터 '중립화 통일 방안'을 주장하여왔었고, 이들은 김일성 정권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이것만 봐도 자유당 정권 측이 지목한 주장은 설득력이 상당히 떨어진다.
5. 선거 이력
6. 대중매체에서
1981년작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선 성우 황일청이 연기했고, 1982년작 <한: 단재 신채호 일대기>에선 배우 신충식, 1985년작 KBS 대하드라마 <새벽>에선 성우 최흘이 각각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