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당(19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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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결성과정
3. 민주사회당과의 통합시도


1. 개요


1981년 김철이 창당한 사회주의 정당.

2. 결성과정


1980년 12월 3일 김철 전 통일사회당 고문은 종로구 견지동 등용문빌딩 5층에 위치한 구 통일사회당 사무실에서 장수봉 전 부산일보 부사장, 김학락 전 노동청 직업안정과장 등 41명의 발기인이 참석한 가운데 창당발기인 대회를 열었다. 곧이어 1월 24일 한국일보 대강당에서 대의원 350명이 참가한 가운데 중앙당 창당대회를 열고 초대위원장으로 김철 창당준비위원장을 부위원장에는 김정길(나주군, 광산군 지구당 위원장)을 선출했다. 1월 29일에는 37개 지구당의 창당이 완료된 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를 하였다.

3. 민주사회당과의 통합시도


1981년 1월 4일 민주사회당 창당준비위원회에서는 범 민주사회세력의 단결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사회당, 민주사회당, 재야사회의 지도자가 각각 전권대표를 파견하여 통합절차를 논의하자 제의했다. 이에 구익균, 양호민등 혁신계 원로들이 나서서 혁신계 중진, 사회당, 민주사회당대표간 3자회담을 수락하도록 김철 위원장을 설득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또한 고정훈 민주사회당 위원장은 통합후 우선 선택권을 김철 위원장이 가지도록 하는 내용의 공개서한을 보냈으나 이 마저도 일축된다. 2월 후반기부터 다시 양당에서 각각 3인씩 뽑아 통합논의가 진행되기 시작하고, 다음과 같은 4가지 안건이 도출된다.

통합정당의 명칭을 민주사회당으로 한다.

고문과 집행기구는 양당에서 각각 5인씩 선출해 10인으로 구성한다.

사무총장은 민사당이 차장은 사회당에서 맡는다.

당수는 김철 사회당 위원장으로, 고정훈 민사당 당수는 수석고문으로 추대한다.

이에 대해 사회당측은 합의사항이라 밝혔고, 민사당 측에서는 협의 중에 있는 내용이라 하여 의견 갈등이 격화되기 시작했고, 고정훈, 김철 양당의 대표는 단독회담 과정에서 명칭, 당직 배분비율에서는 이견이 없음을 확인했지만 수석고문 명칭에서 영문표기를 Leader로 할지 Chief adviser로 할것인지 갈려 3월 5일부로 양당의 통합시도는 깨어졌다.

4.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와 그 이후


사회당은 3월 25일에 있을 제 11대 총선에서 지역구 14명, 전국구 7명의 후보를 내고 선거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지역구에서는 동작구에 출마한 김철 위원장을 제외하고 10%의 득표율을 넘긴 후보들이 없었고, 전국구에서는 0.7% 득표율을 받아 원내진출에 실패하고 이에 따라 등록이 취소되었다.[1]
이후 1982년 3월부터 다시 한국사회당 창당준비위원회를 만들어 재창당을 시도했지만 7월때 창당작업을 중단한다 밝혔다. 이후 1984년 연말부터 장홍염, 안필수 등과 함께 통합사회당 창당준비위원회를 만들었다. 12대 총선 후 신정사회당, 사회민주당과 통합하여 사회민주당이 되었다.


[1] 2014년 헌법재판소가 득표율 미만 정당 해산 규정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