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홍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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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장병준은 그의 맏형이다.
2. 생애
1910년 전라남도 지도군 장산면(현 신안군 장산면) 대리에서 정6품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낸 아버지 장진섭(張鎭燮)과 어머니 하동 정씨 정치순(鄭致順)의 딸 사이의 네 아들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인동 장씨 함평파 22대손이며 장산도 대리마을 입향조로서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지낸 장인걸(張仁傑)의 6대손이다. 그의 집안은 조부 장도규(張道奎) 대에 이미 장산도 내에서 상당한 규모의 지주로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숙부 장진방(張鎭邦)이 주변 섬들의 간척사업을 주도하면서 일가는 대지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다만 그의 아버지 장진섭은 조부의 셋째 아들이었던 탓에 그리 많은 토지를 물려받지는 못했으나, 평소 신학문에 관심이 많아 네 아들들을 목포와 경성, 일본까지 유학을 보내어 새로운 근대학문을 익히게 했다. 이에 그 또한 상경하여 경성부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진학, 중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휘문고등보통학교 4학년 재학 중이던 1928년 11월 9일, 그는 사숙(社塾) 고학당(苦學堂) 교사 이종률(李鍾律)이 초고를 쓴, 당시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격문을 휘문고등보통학교 내의 여러 학생들을 대상으로 약 40장을 배포하기도 했으며, 또한 이듬해인 1929년 11월 3일, 5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시위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각 학교 대표들과 함께 회합하여 1930년 1월 15일 9시를 기해 궐기할 것을 결의하고 항쟁하다가 결국 학교로부터 퇴학을 당했다.
퇴학당한 후 같은 해 3월 그는 중국으로 건너가 군자금을 조달하다가 일본 경찰에 탐지되어 은신하였으며, 1932년 9월 결국 베이징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구금되었던 그는 1932년 12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4년을 받고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베이징대학 경제과에 진학했지만 4학년 때 중퇴하였고, 이후 귀국하였다. 일제강점기 말기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한국 광복군 전남지구대 참모장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8.15 광복 후에는 우익 정치인으로 한국민주당에 속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민주당 후보로 전라남도 무안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이승만 정권의 독재 정치를 막으려 노력하였으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정계 은퇴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다가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이영준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사회대중당 후보로 전라남도 무안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민주당 유옥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3년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다가 1967년 탈당하였다. 1969년 3선 개헌 반대 투쟁에 참여하였다.
이후 정계를 은퇴하였으며, 1990년 교통사고 후유증을 치료하기 위해 입원해 있던 중 증상이 낫지 않아 결국 그 해 11월 5일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중앙병원(현 서울아산병원)에서 별세하였다.#
199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3.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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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이 호남을 넘어 대한민국 전체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이다. 특히 방계 쪽이 유명한데, 방계 자손으로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인 장하성[4] 과 장하석 등과 장하성 전 정책실장 등 짱짱하기 그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