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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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평가
4. 자녀


1. 개요


'''金哲'''. 1926년 7월 1일 ∼1994년 8월 11일. (향년 68세)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구 혁신계[1] 정치인이다. 호는 당산 (堂山) . 조소앙·여운형·조봉암의 맥을 이은 사회민주주의자로 평가되고 있다.

2. 생애


1926년 7월 1일 함경남도 경흥에서 태어나 1945년 경성(鏡城)중학교[2]를 졸업하고 도쿄대학 역사철학과에서 공부하였다.
청년시절에는 우익 민족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해방 직후 이범석이 조직한 우익계 정치조직 조선민족청년단(통칭 족청)에서 활동하다가 다시 일본에 건너가서 우익계 민단 활동을 하였다.[3] 1952년 귀국하면서 족청 세력이 이승만을 지지하는 원외자유당 창당에 나서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1954년 자유당내 권력투쟁에서 이범석이 밀려나고 족청계가 대거 숙청되자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 체류 중에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이 민주적 사회주의의 목적과 임무를 밝힌 프랑크푸르트 선언[4]을 읽고 공감하면서 사회민주주의에 눈을 뜨게 된다. 1957년 귀국하여 혁신정당 창당을 시도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고, 1960년 4.19혁명 후 한국사회당에 참여하였다가 총선 참패 후 1961년 통일사회당 결성을 주도하고 국제국장을 맡았다.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 박정희가 정권을 잡자 해외에 있던 김철은 귀국하지 않고 그대로 유럽으로 망명하였다. 유럽에서 여러 사회주의 정당을 돌아다니며 현대적인 사회민주주의를 접했다.
1964년 다시 귀국, 통일사회당 중앙위원장, 당수를 지내고 1970년 중립화 평화통일안을 내세우면서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기도 하였으나 야권 단일화를 위해 사퇴하였다. 1971년 광복절에 발표한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통일 요구 성명 때문에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위반 혐의로 구속되었으며, 1974년 '민주회복국민선언'을 주도하였다가 1975년 긴급조치 위반으로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기도 했다.
1977년은 그에게 상징적인 해였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구명 요구로 석방되었고, 그해 겨울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동경 대회'에서는 한국의 김철을 위하여 빌리 브란트 의장과 프랑수아 미테랑 부의장 사이에 그의 자리를 마련해 두고 있었는데, 이는 고통받는 아시아 민주사회주의 운동의 상징인 그에 대한 특별 예우였다.
1980년 신군부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의원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것이 그의 일생에 오점으로 남게 되어, 그 후 민주화운동가, 노동운동가들은 김철을 변절자로 간주하여 어떠한 연계도 거부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어느 진보정당도 김철을 기리지 않는다.
정작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군부가 고정훈을 혁신계 대표로 선택하는 바람에#, 사회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동작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조종호 후보와 민주한국당 서청원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5년 신정사회당과 연합해 사회민주당을 창당했으나, 1986년 전당대회에서 당수 자리를 내놓았고, 1987년 7월 ‘사회주의민중협의회’를 구성하여 활동하다가 1994년 별세하였다.

3. 평가


사회주의자로서 사회민주주의와 민족주의를 지향하였으며 그 수순에서 1969년 통일사회당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가입시키는 등 국제연대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국내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운동과는 접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몇몇 지식인, 명망가들만의 정당운동에 그쳤다. 특히 1980년대 이후로는 국보위 입법의원 경력에서 보듯이 대한민국에도 진보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군사정권의 마네킹으로 이용되었다.
민주적 사회주의를 투철하게 신봉하였지만 한국사회의 각 발전단계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대중과의 결합을 위한 실천적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당운동을 발전시키고 다음 시기에 계승시키는 과제를 이루지 못하였고, 다만 민주사회주의이론을 보급하는 사상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장상환 교수의 평가

4. 자녀


특이하게 세 아들의 이름을 모두 순한글로 지었다. 당시의 시대상을 감안하면 상당히 앞서간 경우. 첫째는 김밝힘(1948년생), 둘째는 김한길(1953년생), 셋째는 김누리(1960년생) 이다. 장남 김밝힘은 기업가로 살다가 2016년에 사망했으며, 둘째 김한길은 언론인, 소설가를 거쳐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단, 정치노선은 아버지와는 다르게 온건중도보수 정도에 가깝다. 셋째 김누리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중앙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중인데, 진보적 정치성향을 띄고 있다.[5]
[1] 혁신계는 1970년대까지 진보진영, 좌파세력을 가리키던 용어이다. 일례로 1956년 대선에서 진보당 조봉암 후보는 '''혁신만이 살길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당시 진보는 현재의 '발전'의 뉘앙스를 가진 표현이었다.[2] 함경북도 경성군의 명문학교였다. 1938년 이전까지는 경성(鏡城)고등보통학교, 줄여서 경성고보였기 때문에 흔히 경성고보 출신으로 불린다. 당시 구제중학교는 현재의 중학교+고등학교 과정에 해당된다.[3] 당시 재일동포 사회는 좌익계 조총련과 우익계 민단이 연달아 생기면서 이념대결, 남북대결의 대리전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4]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이 1951년 발표한 강령. 이후 유럽의 중도좌파 정당들은 수십년간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사회민주주의/복지국가 노선을 고수하다가 1990년대 중반 이후 제3의 길로 우경화한다. [5] 독일 유학 시절 유시민, 진중권 등과 교류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