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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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양그룹의 모기업으로, 전라도 만석꾼의 아들인 김연수에 의해 설립되었다. 넓게 보면 동아일보 가문의 일원으로 동아일보,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경방과 더불어 모두 이 가문에 뿌리를 두고 있다.
흔히 삼양식품과 혼동되는데 서로 뿌리부터 다른 완전히 별개의 기업이다.[2] 현재 전북은행(JB금융지주)의 대주주이기도 하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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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부터 2004년까지 썼던 구 로고. 그 이전인 1931년부터 1984년까지는 마름모 안에 三이 들어간 형태의 로고를 사용했다.
1924년 김성수의 동생 수당(秀堂) 김연수가 가문 소유 농장을 관리하기 위해 세운 '삼수사'가 모태이다. 1931년 현 명칭으로 개칭하고 1934년 합자회사로 전환했으며, 1939년 만주에 남만방적을 세워 만주사업 확장을 주도했다. 그러나 1945년 8.15 해방 후 남북분단으로 만주에서 철수했고, 1948년 전북 고창에 해리염전을 개발했으나 이듬해 김연수 사장이 친일 행적으로 반민특위에 구속되고 1950년 농지개혁법까지 시행되며 농장이 해체되었다.
6.25 이후 1955년 울산 제당공장을 세워 설탕 생산을 시작했고, 1961년 서남수산, 1965년 삼양수산을 각각 합병해 수산가공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1968년 한국증권거래소에 상장한 후 1969년 전북 전주에 폴리에스텔 공장을 세우고 1975년에는 전남 목포에 배합사료공장을 세워 동물사료를 처음 생산했다. 1977년에는 삼양모방을 합병했다. 1988년부터 부문별 대표이사제를 도입했다가 2000년에는 사업부를 'BU'로 조직개편하며 폴리에스텔 사업부를 떼내 SK케미칼과의 합작법인 '휴비스'를 세웠고, 2002년에는 식품 통합브랜드 '큐원'을 런칭하고 2003년에는 베이커리 카페 'Cafe Mix&Bake'를 오픈했다가 2006년 외식부문을 '삼양푸드앤다이닝'으로 분사시켰다. 2011년 기존 법인이 '삼양홀딩스'로 출범하자 물적분할됐다.
2012년 사료사업부문을 아이피드에 팔고 2013년 삼양EMS, 2014년 삼양웰푸드 및 삼양밀맥스, 2016년 삼양제넥스를 각각 합병했으며, 삼양홀딩스로부터 무역사업부문을 이관받았다.
3. 역대 임원
3.1. 구 법인
- 대표이사 회장
- 김연수 (1953~1975)
- 김상홍 (1975~1996)
- 김상하 (1988~2005)
- 김상응 (1996~1999)
- 김윤 (2004~2011)
- 대표이사 부회장
- 김상하 (1986~1988)
- 김상응 (1992~1996)
- 김윤 (2000~2004)
- 김원, 김량 (2011)
- 대표이사 사장
- 김연수 (1924~1953)
- 김상홍 (1953~1975)
- 김상하 (1975~1986)
- 김상응 (1986~1992)
- 김윤 (1996~2000)
- 김원 (2001~2011)
- 박종헌 (2001~2009)
- 대표이사 부사장
- 유제춘 (1992~1997)
- 김윤 (1995~1996)
- 박종헌 (1996~1997)
- 양형진 (1996~1998)
- 주동석 (1996~1999)
- 고인석 (1998~2001)
- 김경원 (1999~2001)
- 이장국 (1999~2000)
- 김원 (2000~2001)
- 대표이사 전무
- 양형진 (1992~1996)
- 김윤 (1993~1995)
- 박종헌, 주동석 (1994~1996)
- 고인석 (1997~1998)
- 김경원 (1997~1999)
- 이장국 (1998~1999)
- 김일웅 (2000~2001)
3.2. 신 법인
- 대표이사 사장
- 김정 (2011~2017)
- 문성환 (2011~2019)
- 대표이사 부사장
- 박순철 (2017~ )
- 송자량 (2019~ )
4. 사업분야
- 식품부문: '큐원' 브랜드로 유명하며, 주로 밀가루 등을 생산함.
- 화학부문
- H&B부문
5. 사건사고
2017년 채용과정에서 전산 오류로 합격자 250명 대신 불합격자 370명에 합격을 통보한 후 이를 번복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취업 카페 사용자들은 삼양 탈락자가 한 명도 없는 것을 보고 2시간 넘게 공포에 떨어야 했다.(#)
6. 친일기업 논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친일반민족위)에 따르면 일본에 국방헌금을 납부하고 학병권유 연설을 한 사실이 알려졌다. 더욱이 김연수 회장은 1941년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인 중추원 참의로 임명돼 해방 때까지 활동했다.
그는 중추원 회의에서 “일본정신의 체득, 황도정신의 삼투를 통해 정신적 방랑자인 반도 민중을 구제·재생시키자”는 취지의 참의답신서를 제출하기도 했으며 총독부 시국대책조사위원, 만주국 명예총영사, 국민총력연맹 후생부장, 조선임전보국단 간부 등의 ‘일제 직함’도 보유했었다. 이 같은 사실이 널리 퍼지면서 삼양그룹은 광복 후에도 ‘친일기업’ 이미지를 달고 있다. 김연수 회장은 1948년 시작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로부터 “상황상 어쩔 수 없다”는 정상참작으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친일반민족위는 2009년 일제에 적극 동참했다는 이유로 김 창업주를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규정했다. 김 회장의 후손들이 친일파 결정을 취소해 달라는 행정 소송을 제기했지만 이듬해 법원은 “김 창업주의 친일행위가 인정된다”며 원고 패소 판정을 내렸다.
7. 기타
- 한국프로야구 창단 비화에 따르면 1982년 프로야구 창설 당시 해태그룹에 앞서 전라도 연고팀의 스폰서 기업으로 고려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양사는 이를 거절했고 그 이후 제의를 받은 해태에서 결국 해태 타이거즈를 창단하게 된다.
- “삼양그룹의 계열사 삼양식품에서 만든 ‘삼양라면’을 먹으면서 입사를 꿈꿨습니다. 누구보다 삼양라면을 많이 먹어 봤기 때문에 잘 판매할 자신이 있습니다.” 라며 신입사원에 지원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런 사람이 꽤 많은지, 이제는 아예 서류를 쓰기 전에 '라면을 생산하는 삼양과는 무관계한 기업임을 인지하셨습니까?'라고 체크를 해야 자소서 작성이 가능하다(...). 또 그룹 홍보용 페이스북에는 허구한 날 '라면 만드는 곳이랑 다르다'라는 식의 게시물이 올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