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1891)

 


'''역임 지위 및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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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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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13일, 친일행위로 인해 서훈 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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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고려중앙학원
'''창 립'''


초대
'''김성수'''


제2~4대
'''이활'''

[image] '''중앙고등학교''' '''교장'''
제8대
'''류 근'''


제9대
'''김성수'''


제10대
'''송진우'''

제14대
'''박용희'''


제15대
'''김성수'''


제16대
'''현상윤'''

[image]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교장'''
제9대
'''박승빈'''


제10대
'''김성수'''


제11대
'''김용무'''

제11대
'''김용무'''


제12대
'''김성수'''


제13대
'''현상윤'''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
김성수
金性洙 | Kim Seong-su'''
[image]
동아일보 사장 재직 시절
[image]
1951년 부통령 재임 시절
'''출생'''
1891년 10월 11일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
(現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인촌안길 32-1)
'''사망'''
1955년 2월 18일 오후 5시 25분 (향년 63세)[1]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133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길 84-6)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금남리 산 8-1[2]
'''재임기간'''
제2대 부통령
1951년 5월 17일 ~ 1952년 5월 29일
'''서명'''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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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BA6> '''본관'''
울산 김씨
'''부모'''
아버지 김경중(생부)·김기중(양부)
어머니 제주 고씨(생모)·전주 이씨(양모)
'''배우자'''
고광석(사별)
이아주(재혼)
'''자녀'''
김상만[20], 김상옥, 김상기, 김상선, 김상흠
김상숙, 김상오, 김상현, 김상종, 김남
김상석, 김상겸, 김순민
'''학력'''
영학숙 (졸업)[21]
세이소쿠영어학교[22] (수료 / 4학년)
긴조중학교 (졸업)[23]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 / 학사)
'''종교'''
유교 (성리학) → 개신교 (장로회)
천주교 (세례명 : 바오로)
'''신체'''
약 163cm[24]
'''호'''
인촌(仁村)

1. 개요
3. 친일반민족행위와 논란
3.1. 공식적 결정
3.2. 정치적인 논쟁
3.3. 친일파로 몰기 어렵다는 반론
5. 여담
6. 대중매체에서
8. 소속 정당
9. 관련 문서
10.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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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제2대 부통령.
일제강점기의 언론인으로서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경영했다. 1915년 '''중앙학교''', 1932년엔 이용익에 의해 1905년에 설립된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경영하였고, 광복 후인 1946년엔 보성전문학교를 개편하여 '''고려대학교를 창립'''하는 등[3] 교육사업가로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정계에서도 제2대 '''대한민국 부통령'''을 역임하였으며, 한국민주당을 창당했다. 호는 인촌(仁村).
'''독립유공자'''였으면서[4]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고 대한민국 정부가 인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기도 하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지원하는 등 친일보다는 항일의 공이 더 큰 인물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결국 선항일 후친일의 변절자이다. 해방 후에도 활발하게 교육 사업을 펼쳐 평판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명목상이기는 하나 1947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환국 이후 만든 국민의회 국무위원에 취임하기도 했다.[5] 각계의 신망을 얻어 제2대 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승만 장기독재에 실망하여 부통령직을 내던지고 '''반독재투쟁'''에 나서는 등 나름의 업적도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다.
1962년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건국공로훈장[6]이 추서되었으나, 2018년 문재인 정부에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결과에 따라 국무회의 의결로 '''서훈을 취소'''하였다. 1991년부터 경기 과천 서울대공원 한마당광장에 그의 동상이 제막됐으나, 그의 친일 행적을 이유로 민족문제연구소 등 항일독립운동 유관단체들이 적극 철거운동을 벌임으로써 2019년에 공원 측이 안내판을 세웠다. 정부의 서훈취소에 따라 고려대 김성수 동상과 전북 고창의 생가 및 동상, 서울 계동의 인촌 숙소 터 등의 현충시설 등록이 취소되기도 했다. 또 서울 성북구 인촌로가 '고려대로'로 변경되기도 했다.
그의 뜻을 기리는 재단으로는 인촌기념회가 있다. 현재 동아일보채널A 대표이사인 김재호의 증조부이다.[7]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후 미군정기, 제1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언론, 교육,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다방면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대한민국 근대 제조업의 시초격인 '''경성방직''', 근현대 교육의 대표 중 한 곳인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와 '''고려중앙학원'''[8], 또한 '''동아일보''', 대한민국 최초의 정당 '''한국민주당'''과 '''민주국민당'''은 모두 김성수가 창립했거나 핵심 간부로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 곳들이다. 즉 김성수가 친일반민족행위를 하여 비판도 많이 받지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김성수가 남긴 언론, 경제, 교육, 정치 등 사회 각 분야에 대한 거대한 영향력은 당대에는 물론이고 21세기 현대까지도 남아 있다.

2. 일생




3. 친일반민족행위와 논란


“제군이 생을 받은 이 반도를 위하여 희생됨으로써 이 반도는 황국으로서의 자격을 완수하게 되는 것"

매일신보 1943년 11월6일


3.1. 공식적 결정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년 보고서에 포함되었고,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되었다. 이유는 일제강점기 말[9] 친일 기고문과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발기인과 활동했다는 점, 총독부 어용기관지 매일신보, 경성일보, 잡지 <춘추> 등에 학병 권유문을 수차례 기고했을 뿐만 아니라 담화문 및 연설 등을 수백 차례 했다는 점, 국방 헌금을 여러 차례 납부했던 점 등이다. 이 당시엔 심지어 자신의 저택(계동) 앞 철문으로 된 대문을 뜯어내 갖다 바쳤을 정도였다고 한다.[10]
2011년 '친일 경력이 있는 독립 유공자 19명'이 국가보훈처로부터 서훈 취소 결정 내려졌을 때, 김성수만이 보류 결정되었는데 인촌기념사업회가 행정안전부 장관을 상대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한 것을 취소해 달라고 법원에 소송을 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1심과 2심을 거치면서 김성수 친일 행적이 대부분 인정되었다.# [11]
이어, 2017년 4월 13일 대법원은 최종적으로 김성수의 친일 행적을 인정했다.# 대법원 확정 판결에 따라 2018년 2월 13일 국무회의 의결로 건국훈장의 서훈이 취소되었다.#

3.2. 정치적인 논쟁


위와 같은 공식적 결정과는 별개로,[12] 이 논쟁이 좌우갈등 문제에서 정치적으로 심심하면 거론되고 있는 중이다. 객관적 사실보다는 좌우가 서로 정치적으로 따지다보니 문제가 꼬일 때가 많다.
특히 뉴라이트를 중심으로한 극우 세력에선 '같은 친일 기고문 떡밥이 있는 여운형은 안 오르고 김성수는 오르냐.'는 이유로 민족 문제 연구소를 공격하기도 한다. 다만 여운형이 친일인명사전 문제에서 빠진 이유는 일제 말에 국내에서 유일한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고, 중국 옌안의 조선의용군, 중국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고, 광복에 대비하는 등 구체적인 독립운동이 객관적으로 분명하게 밝혀졌고, 학계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일제 말기 국내에서 독립운동 단체는 건국동맹 이외에 거의 전무했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한 건 살아생전 김성수와 여운형이 사상적으론 정반대 관계였지만, 인간적으론 매우 친분이 두터웠다는 점이다. 김성수는 여운형 계열 인사인 조봉암을 많이 밀어주기도 했다.
어느 시사 카툰은 여운형을 번번히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 심사에서 탈락시키면서 일제 말기 징병을 옹호한 전적이 있는 김성수에게 진작에 건국훈장을 추서한 보훈처의 행동에 대해 깠던 적이 있다. # 후에 김성수는 대통령장(2등급) 서훈이 취소되고 여운형은 대통령장에다 대한민국장(1등급)까지 받게 되었지만...
친일인명사전 문제 이후로 사상에 따른 훈장수여 문제가 불거져 나와 뉴라이트를 중심으로한 극우 측에서는 여운형에게 수여한 1급 훈장을 치탈하라고 주장하고 있고 진보측과 역사학계에서는 김성수를 포함하여 친일경력이 있는 자의 훈장을 치탈하라 주장하며 서로 치고 받고 싸우고 있다.

3.3. 친일파로 몰기 어렵다는 반론


반론 측에선 전시체제기간(1943-1945년) 동안 집중적으로 쓴 여러 편의 글이 있긴 하지만 강압이나 조작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있고, 김성수는 적어도 그 전까지 실력양성운동 등 항일활동을 실천으로 보여준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조선일보 사주인 방응모같이 대놓고 친일파라고 분류하는 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주요 근거로 내세우는 가장 대표적인 반론이 매일신보 기자인 김병규라는 자가 인촌 김성수의 명의를 함부로 도용해서 자기 멋대로 실었다는 주장[13]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진위여부를 놓고 실제 재판까지 가기도 했다. 2005년 재판 당시 재판부에서는 '실제로는 김병규라는 매일신보 기자가 친일논설들을 게재하기에 앞서 김성수에게 글의 내용을 보이고, 김성수가 그 내용을 충분히 검토한 이후에 이를 매일신보에 게재하였다는 것인바, 그런 경위로 게재된 글은 김성수 자신의 글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여겨지므로 위 보도는 진실에 부합하거나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라고 결정을 내렸다.#
또 총독부의 창씨개명 요구를 끝내 거부했다는 점[14]에서 신문, 회사, 학교를 살리기 위한 '소극적인 친일'을 한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15] 물론 법원에선 대부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적용을 해야 하는 법원의 입장에서는 행위의 동기, 당시의 정황과 상관없이 외부적으로 표시된 사실만 갖고 판단할 수밖에 없으므로, 정상참작 등의 정책적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외에 각종 독립 운동 가담 제의를 표면상으로는 대차게 거절하면서 뒤로 몰래 도와줬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러 증언 내용을 보면 독립운동가를 방에 남겨둔 상황에서 금고를 열어놓고 밖에 나가는 일을 자주 했다고 한다.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에서 사라진 돈이 동아일보를 통해서 한국 독립군 쪽으로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강훈은 김성수가 송진우를 통하여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4차례나 보내줬다고도 증언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인촌으로서는 자신의 행보에 학교, 언론, 기업과 거기 속한 사람들의 생사가 걸린 만큼 친일을 거부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에, 정상을 참작해줘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한 세대를 넘는 35년의 시간 동안 조선 인민 절대 다수는 일본이라는 국가의 지배를 받아야 했고, 적어도 일제의 행정기관과 군사기관 앞에서 겉으로는 이를 부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항일무장투쟁이 말이야 쉽지, 현실적으로 그러한 시스템 안에서 체제 자체를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학교, 언론사, 기업이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16] 그나마 인촌은 태평양전쟁 전까지 일제에 대한 나름의 저항을 계속 시도했던 사람 중의 1인이었으나, 일본의 통치가 비이성적으로 폭주하게 된 태평양전쟁 말기에 이르러서부터 생존을 위해서라도 상당히 일제에 협력하는 척을 했던 것으로 봐줄 여지가 있다. 백산 안희제 선생이나, 경주 최부자 최준 선생 같은 경우는 뭐냐는 반론이 있는데, 이들은 인촌이 그런 식으로 불복종운동을 했었다면 그의 식솔들 '''수천명'''의 생계는 사실상 풍비박산이 났을 것이라 본다.[17]

4. 평가




5. 여담


  • 역대 대한민국 부통령 중 유일하게 각하 존칭을 사양하였다.

6. 대중매체에서


  • 1981년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선 배우 정욱이 맡았다.
  • 1982년 KBS1 특집드라마 <그 여름의 이틀>에선 배우 김동훈이 맡았다.
  • 1984년 MBC 드라마 <조선총독부>에선 배우 김용건이 연기했다.
  • 1985년 KBS1 대하드라마 <새벽>에선 배우 맹호림[18]이 맡았다.
  • 1994년 2월 20일자 KBS1 <다큐멘터리극장>에선 배우 양영준이 연기했다.
  • 2003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선 배우 허기호가 맡았다.

7. 가족 관계




8.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45 - 1949


1949 - 1955


9. 관련 문서



10. 경력


[1] 심근염, 위장병, 뇌일혈 등의 합병증으로 인해 사망.[2] 원래 묘소는 그가 세운 고려대학교에 있었지만, 학생들에 의한 수모를 겪다가 1987년 남양주시로 이장하였다.[3] 물론 전신은 1905년 개교한 보성전문학교를 근간으로 한다. 실제 고려대 설립시기도 1905년으로 친다. 참고로 보성전문학교는 대한제국 시기 내장원경, 탁지부 대신을 지낸 이용익이 설립했다.[4] 결국 독립유공자 자격은 2017년에 부정되었다.[5] 당시 경향신문 기사[6] 후에 상훈법 개정에 따라 건국훈장 대통령장으로 변경[7] 장증손이다. 김성수의 장남 김상만의 장손.[8] 보성전문학교는 1932년에 인수하였고, 고려중앙학원은 1929년 설립하였다.[9] 특히 중일전쟁 시기부터. 아무리 좋게 넘어간다 해도 태평양 전쟁 말기 1943년 말 이후[10] 강점기 말기 한반도에 거주하던 돈 좀 있거나, 머리에 먹물이 들었다라는 자들 대다수가 하던 '''친일'''행위였으며 , 철문은 생각해 보면 ''엄청난 친일'' 같아 보이기는 한데, 당시 철로 된 물건이라면 종이고 세숫대야고 몽땅 뺏어가던 시대였음을 고려해야 한다.[11] 동아일보에선 인촌의 친일 행적이 인정되었다는 대다수 언론과 달리 같은 사안인데도 불구하고 인정 안 된 부분만을 거론하며 '“仁村 친일 반민족 행위 증거 없어”… 항소심도 정부 결정 부당 판결'이란 기사 제목을 다는 기행을 저지르기도.#[12] 참고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보다 대한민국 정부 대통령 직속에서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진상규명위원회에서의 내용이 훨씬 더 구체적이고 매우 상세하게 기술되어있다. 즉, 민간 연구단체에서 발간한것보다 정부에서 발간한 보고서가 더 구체적으로 정리되었다는 얘기다.[13] 친일반민족행위자이자 헌법학자였던 유진오의 '양호기'를 기초로 나온 내용.[14] 그러나 일본은 창씨개명이 자발적인 것이라고 선전하기 위해 친체제 인사들 중 일부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더라도 별 말 하지 않았다.[15] 실제로, 이를 근거로 들만한 것이 '김승학의 보고서'다. 김승학의 보고서에 '친일기준'에 따르면, '경찰의 박해를 면하고 신변의 안전 또는 지위, 사업 등의 유지를 위하여 부득이 끌려다닌 자'로 김성수는 유억겸과 같은 분류로 기술되어 있다. 유억겸은 1920~30년대까지만해도 나름 '합법적 공간'에서 신간회라든가 변호사 활동으로 꽤나 이름을 날렸으나, 유억겸 역시 1938년, 중일전쟁 발발시점무렵에 터진 흥업구락부 사건을 전후로 변절한 친일파다.[16] 비슷한 사례가 적지 않다. 무어인의 지배를 받던 이베리아 반도 가톨릭 신자들이 표면상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모습을 보였던 게 대표적이다.[17] 이 정도면 웬만한 읍내나 동 수준의 인구다.[18] 한국어 위키백과에선 그렇게 나왔으나, 다른 쪽에선 미상이라 한다.[19] 당시 법인명은 재단법인 중앙학원, 직함명은 주무이사였으나 후임인 이활 주무이사 때 이사장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현재는 김성수를 초대 이사장으로 소급 적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