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기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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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친일파 논란


1.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가이자 삼양그룹 창업주로, 1896년 8월 25일 출생, 1979년 12월 4일 사망. 중앙고등학교, 경성방직, 동아일보, 고려대학교를 설립한 인촌 김성수의 남동생이다. 호는 수당(秀堂)이다.

2. 생애


전라북도 고부군의 대지주이자 갑부였던 지산 김경중의 5남으로 태어났으며, 친형 김성수가 아들이 없던 백부 원파[1] 김기중의 양자로 들어가며 김연수가 사실상 장남 역할을 했다. 와세다대학에 유학 간 김성수는 김연수를 일본으로 데려왔는데, 항구에서 철도를 타고 도쿄로 가면서 보았던 공업단지의 모습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야자부 중학교에 입학 당시 성적은 최하위권이었으나 곧 상위권으로 발돋움했고, 교토 제3고등학교(구제고등학교)와 교토제국대학 경제학과[2]를 거쳐 귀국했다. 형이 경영하던 경성직뉴와 경성방직에서 근무를 시작한 뒤 경영까지 맡게 되었다. 히로시마사범학교를 마치고 귀국한 김용완을 데리고 일하며 경영인으로 육성하였다.[3]
1924년 삼수사(三水社)를 설립했고 삼수사를 드나들던 문관산의 제안으로 이름을 삼양사로 개칭한다. 사장, 회장직을 역임하며 삼양사의 사세를 키웠고 2세들인 장남 김상준[4], 3남 김상홍, 4남 김상돈, 5남 김상하[5], 7남 김상응[6] 이 물려받았다.[7]
1961년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이었던 경제협의회 회장을 맡기도 했으며, 훈장을 서훈 받기도 했다.
고려대학교에 많은 돈을 기부했으며, 현재 물가로 치면 약 1,000~1,500억원 규모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의 호를 딴 수당장학회가 설립되었으며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LG-POSCO 경영관에 역시 그의 호를 딴 수당학술정보관이 설치되었다.[8] 교수회관으로 수당·삼양 Faculty House도 있다.

3. 친일파 논란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에 속한다. 그는 일제 말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및 만주국 명예총영사,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 재직 경력 등 친일 경력이 있어서 논란이 되고 있다. 김연수 본인이 쓴 일대기 <한국 근대기업의 선구자>에서는 중추원 참의 임명과 관련해 1940년 5월 조간신문에 자신이 칙임참의에 임명됐다는 기사를 보고 내무국장 우에다키에게 항의하러 갔지만 결국 그의 완력에 굴복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 ‘설사 내가 지녔던 일제치하의 모든 공직이나 명예직이 스스로 원했던 것이 아니고 위협과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일단 그런 직함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국과 민족 앞에 송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며 나름대로 자기 반성의 글을 썼다.
삼양그룹 측도 대응을 자제한 채 침묵하고 있지만, 한 관계자는 서울신문 기사에서 "일제의 압제에 항거하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민족자본을 형성한 공적도 있으며, 창업주는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해명했다.

4. 가족 관계



보다 자세한 가계도는 동아일보 가문 문서를 참고할 것.
김연수의 아들들의 호는 남(南)으로 시작한다. 1남 남계(南溪) 김상준, 2남 남제(南齊) 김상협, 3남 남령(南嶺) 김상홍, 4남 남온(南溫) 김상돈, 5남 남고(南皐) 김상하. 선대로부터 고향을 잊지 말라는 가르침을 따른 것이라고 하며 그래서 남쪽 고향 따뜻한 물가 언덕’을 아호로 삼았다.

[1] 그의 호를 딴 원파기념관이 중앙고등학교 캠퍼스에 있다.[2]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학사 타이틀을 가지게 된다.[3] 1904~1996. 김성수-연수 형제의 막내여동생 김점효의 남편이다. 중앙고보 졸업생이며 당시 교사였던 김성수의 눈에 띄어 혼인을 올렸다고 한다. 유학 후 수학교사를 꿈꿨으나 김연수의 제의로 기업인의 길에 들어섰다.# 경방 대표이사 취임 후 김용주와 함께 한국 방직업계의 중흥을 이끌었으며 경방의 3대 경영은 김용완의 아들인 김각중, 손자인 김준-김담 형제로 이어진다.[4] 前 삼양염업사 명예회장. 고려대학교 체육부의 대부로 통한다. 차범근(축구), 박한(농구) 등 유망주 스카우트에 공을 들였고 고려대 아이스하키부 창설에 기여했다. 고려대 아이스링크에는 그의 흉상이 있다.[5] 3남 김상홍과 함께 삼양사 경영에 참여했으며 회장직까지 역임했다. 현역에서 물러나면서 김상홍의 장남인 김윤에게 회장직을 넘겨주었다. 경복고등학교 재학 시절 농구선수로 활약했고 그 인연으로 대한농구협회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구평회의 서울대 정치학과 동기생이다.[6] 형들이 경복고등학교로 진학한 것과 다르게 경기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재학 도중 도미하여 유타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삼양사를 위해 많은 일을 했으나 60대도 안 된 나이에 작고했다.[7] 2남 김상협은 교육자의 길을 걸었으며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6남 김상철은 언론에 보도된 활동이 없다.[8] 수당의 장남인 김상준과 3남인 김상홍이 모두 고려대학교 상과대학(경영대학 전신) 출신이다. 김상홍의 장남인 김윤 역시 경영학과 졸업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