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6세
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국왕. 발루아 왕조의 4대 왕이며, 샤를 5세의 아들이다. 왕비 이자보 드 바비에르와의 사이에 딸 카트린과 아들 샤를, 루이, 장, 샤를 7세가 있었다.
발작성 정신병을 가지고 있었던 왕으로 미치광이 왕이라고 불리었다.
2. 치세
1380년 12세의 나이로 왕이 되었기 때문에 세 숙부와 외삼촌 등 총 4명이 왕의 권한을 나눠가지게 되었다.
1388년에서야 샤를 6세는 친정에 나서게 되었으나, 1392년 발작성 정신병이 발병되었다. 급기야 자신의 이름까지 잊어버린 그는 남은 여생을 카드놀이를 하는 데에 허비하는 신세가 된다.
1393년 1월, 우울증에 걸린 왕을 위로하기 위해 측근들이 짐승으로 분장하고 부인들의 무도회장에 뛰어드는 여흥을 준비했다. 왕은 이에 동의했고, 왕과 다섯 명의 젊은 귀족이 튜닉 위에 송진을 바른 후 솜과 삼베 뭉치 등을 덮어 짐승 흉내를 내었다. 무도회장은 어두컴컴했기에 이들의 계획은 훌륭하게 실행되어 귀부인들을 공황에 빠뜨리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오를레앙 공작 루이가 그들을 자세히 보려고 횃불을 들이댔고, 이것이 화재로 이어져 이들 가운데 넷이 타죽는 참사가 벌어진다. 왕은 베리 공작부인 잔이 망토로 덮어주어 무사했다. 이 사건을 '발 데 아르당'이라고 부른다. 왕의 짐승놀음을 오를레앙 공작 루이가 미리 알았다는 정황이 있기에 이것이 루이의 암살 시도라는 추측이 있다.
아무튼 그의 그러한 증세로 인해 왕의 권한은 다시 약화되게 되었고, 왕의 숙부인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와 남동생 오를레앙 공작 루이간의 권력다툼이 가시화되었다.
샤를 6세의 병세가 심화되던 1404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가 병으로 죽자, 그의 아들인 장과 오를레앙 공작 루이와의 권력다툼은 더 심화하였고 그 가운데 오를레앙 공작 루이가 1407년 살해당했다. 그리고 새로이 오를레앙 공작에 오른 샤를은 여러 제후 세력과 힘을 합쳐 아르마냐크 파를 구성하였고, 이에 대항하여 부르고뉴 공작은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와 동맹을 맺었다. 이에 아르마냐크 파 역시 아키텐을 넘기는 조건으로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고자 하였다.
1414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가 본격적으로 부르고뉴파의 손을 들어주고, 프랑스의 왕위를 요구하며 적극적인 개입에 나서 백년전쟁이 다시 재개되었다.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이 대승을 거두고, 1418년 부르고뉴파에 의해 파리가 함락되었다.
3. 사망
전쟁의 승기가 사실상 거의 잉글랜드쪽으로 넘어간 상황에서 1420년 샤를 6세는 헨리 5세가 자신의 뒤를 이어 프랑스 국왕이 된다는 트루아 조약에 서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헨리 5세는 샤를 6세보다 먼저 1422년 8월에 죽었으며, 이후 왕위계승에 대해 확실하게 정해놓지 않은 상황에서 샤를 6세 역시 그 해 10월에 죽었다.
트루아 조약을 위해 헨리 5세와 결혼한 그의 딸 카트린은 헨리 6세를 낳았고, 오웬 튜더와의 사이에서도 사생아 에드먼드 튜더를 낳았다. 에드먼드 튜더는 헨리 6세의 이부형제로, 적출로 인정받아 리치먼드 백작위를 받았고 랭카스터 가문의 방계였던 마거릿 보퍼트와 결혼하였으며, 그의 아들인 제2대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가 후일 헨리 7세가 되어 튜더 왕조를 개창하게 된다.
4. 여담
루브르 박물관 입구의 유리 피라미드를 설치하기 위해 땅을 파던 도중 유적이 드러났고 그중 황금 투구가 발굴되었는데 샤를 6세의 투구라는 것이 밝혀졌다. 현재 유물은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