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7세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유명한 헨리 8세의 부왕이다. 원래 신분과 본명은 제2대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이다. 섭정이었던 요크 공작 리처드가 어린 조카를 폐하고 스스로 리처드 3세가 되자, 리치먼드 백작이 2년 만에 반정에 성공하고 선대 왕의 공주와 결혼하면서 튜더 왕조를 개창한다.
동족상잔으로 귀족들의 반이 사라진 상태여서, 잉글랜드 어느 역대 왕조보다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다. 잉글랜드는 그의 아들 헨리 8세와 손주 엘리자베스 1세 대에 제 1의 전성기를 열고 대영 제국의 토대를 놓게 된다.
당대에는 음험하고 인색한 성품이라는 평을 받았으나, 후대에는 왕권을 안정시키고 국고를 충실히 한 왕으로 재평가된다.
2. 등극 배경
튜더 가문은 원래 웨일스의 최고 귀족 출신으로 에드워드 1세의 웨일스 정복 이후에도 영지와 특권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잉글랜드 전체로 치면 하급 귀족에 불과했는데 헨리 7세의 조부인 오언 튜더가 헨리 5세의 미망인 카트린 드 발루아[1] 과 결혼하면서 가문의 격이 올라갔다. 카트린의 전 남편 헨리 5세는 헨리 6세만 남기고 1421년 프랑스 원정에서 전사한다. 따라서 오언과 카트린의 장남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는 헨리 6세의 이부 동생이 된다.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는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인 보퍼트 가문의 마거릿과 결혼해[2] 헨리 튜더를 낳았다. 부계로는 전혀 왕실과 관계가 없지만 할머니의 혈통을 거슬러가면 까마득하게 헨리 3세와[3] 모계로는 에드워드 3세[4][5] 까지 거슬러가야 왕의 혈통과 닿는다. 그러니 혈통으로만 치면 왕이 될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그러나 장미전쟁 이후 왕족들의 골육상잔으로 인해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이 차례로 몰락하면서 끊어진 랭커스터 가문을 대신해 어머니의 가문인 보퍼트 가문[6] 이 잉글랜드 왕위를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며 전쟁을 일으켰다.
요크 가문이 번성할 때는 부각되지 않은 채 브르타뉴나 프랑스 궁정을 떠돌면서 살았으나, 리처드 3세가 즉위해 조카 에드워드 5세를 살해하며 요크 가문이 분열되고 왕의 신망이 추락하면서 기회를 포착, 프랑스의 지원을 얻어 잉글랜드에 상륙한 뒤 리처드가 신망을 잃은 것을 이용해 망설이던 주요 대귀족들의 방관과 자세력 규합을 이루어냈고 결국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를 전사시켰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면 리처드 3세는 자신의 형 에드워드 4세의 장남 에드워드 5세를 폐위시키고 에드워드 4세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우드빌과의 혼인을 무효화 시켜 두 사람의 자식들, 즉 리처드 3세 본인의 조카들마저 사생아로 선언한 상황이었다.[7] 이로 인해 요크 가문 내부에서도 욕을 엄청 먹게 되었다. 조카를 폐위시킨 것만으로도 여론이 좋지 않았는데 급기야 리처드 3세가 에드워드 5세와 그의 아우 리처드 왕자(에드워드 4세의 차남)를 런던탑에 감금해 무참히 살해해버리자 기존의 지지자들도 실망을 내비치고 권력기반이 분열되었다. 헨리는 리처드 3세에게 동생을 잃고 서출로 격하된 요크의 엘리자베스[8] 와 결혼해 분열된 요크 가문의 지지세력을 얻어냈다. 에드워드 4세는 신분이 떨어지는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하여 반발을 부르긴 했지만 명군으로 불릴만큼 통치는 잘 했기 때문.
정통성이 다소 떨어지긴 하지만 어쨌거나 랭커스터 가문의 핏줄을 이어받았고 혼인을 통해 에드워드 4세의 딸과 결혼하여 요크 가문과 결합했다. 헨리 7세의 후계자인 헨리 8세는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의 핏줄을 모두 이어받은 셈이라서 정통성을 갖추게 되었다.
게다가 장미 전쟁 동안 귀족들이 수없이 죽고 다치면서 아예 단절된 가문도 많았다. 자연스레 세습직인 의원들도 숫자도 줄어 29명밖에 남지 않았다.(튜더 왕조가 종결된 제임스 1세 때에도 잉글랜드 전역의 귀족 가문이 30개의 오등작의 가장 아래인 남작 가문을 포함해 50개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는 국정을 논의하기엔 너무 적은 수였고 왕권을 견제할 수 있는 힘도 약해지게 된다. 그렇게 150년 가까이 튜더 왕조는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강한 전제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3. 치세
3.1. 초기
초기에는 혈통으로 정통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치세 내내 반란시도에 시달려야 했다. 구체적으로 요크가의 리처드 3세와 에드워드 4세의 조카인 링컨 백작 존 드라폴(de la Pole)[9] , 워릭 백작 에드워드[10] 가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링컨 백작은 10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직접적인 위협은 안되지만 힘으로 왕위를 차지한 헨리에게 잠재적인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즉위 후에 정통성을 강화하고 반대파인 요크 지지자들을 누그려뜨리고자 에드워드 4세의 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했다. 또한 에드워드 5세를 죽여서 민심을 잃은 리처드 3세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워릭 백작 에드워드는 죽이지 않고 런던탑에 감금했다. 결혼하고 다음 해에 에드워드 4세의 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의 사이에서 적장자 아서가 태어나자 권력기반은 탄탄해졌다.
요크 가문의 공주 사이에서 적장자가 태어나긴 했지만 헨리 7세는 이후에도 10여년간 리처드 3세의 잔당들에게 시달리게 된다. 이들은 런던탑에 갇힌 워릭 백작을 가짜라 주장하고 램버트 심넬이라는 야심가 소년을 허수아비를 만들어서 왕으로 선언한다. 이후 리처드 3세의 누이 부르고뉴 공작의 미망인에게 자금을 지원받아 아일랜드에서 6천명의 병력을 구하고 2천명의 독일용병을 잉글랜드에 상륙시키기까지 했다. 헨리 7세는 이 반란을 막기 위해 직접 런던탑에서 워릭 백작을 꺼내서 시민들에게 보여주며 인증(?)까지 여러번 하는 헤프닝까지 벌였다. 어쨌든 당시의 잉글랜드는 내전으로 지쳐있는데다가 워릭 백작의 정체도 의심스러웠기 때문에 호응이 적었고 요크셔 부근 스토크에서 가볍게 격파하며 수괴(?) 램버트 심넬까지 사로 잡았다. 심넬은 가짜 워릭 백작임을 인증하기 위해 죽이지 않고 궁전의 부엌데기로 삼았다고한다. 링컨 백작 존 드라폴은 전투중에 사망했다.[11]
이후에도 계속 또 다른 반역 시도가 이어졌다. 이번에는 리처드 3세에게 형 에드워드 5세와 같이 살해당한 에드워드 4세의 차남 요크공이 살아있다며 플랑드르 출신 퍼킨 워백이라는 야심가를 내세웠다. 이 사람이 죽은 요크 공작이라고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반란의 규모는 이전보다 더 컸다. 이번에는 앞서 가짜 워릭 백작을 지원한 부르고뉴 공작부인뿐만 아니라 잉글랜드가 시끄러울수록 매우 즐거워하는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4세와 프랑스의 왕 샤를 8세의 지원까지 같이 받아냈기 때문.
가짜 요크 공작의 무리는 세 차례에 걸쳐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전투를 벌였는데 모두 격퇴당했다. 하지만 가짜 요크공은 도주하여 아일랜드를 거쳐서 스코틀랜드로까지 도망쳐서 제임스 4세의 보호를 받으면서 호시탐탐 헨리 7세의 왕위를 탐냈다.[12]
1497년에는 콘월 지방에서 가혹한 징세에 항의하는 농민반란이 일어났는데 중앙에 불만을 가진 귀족들까지 합세하여 1만 5천의 반란군이 런던을 향해 진격했으나 오합지졸이라 진압당했다. 그 와중에 가짜 요크공 워벡은 이를 기회로 여겨 3~4000명의 병력을 콘월에 상륙시키고 스스로를 리처드 4세로 선포하지만, 소식이 늦게 갔는지 '''이미 오합지졸 병력들이 진압당한 지 세 달이 넘어서였다.''' 이번에 워백은 사로잡혀서 비참하게 처형 당한다.
이 이후로는 소소한 음모들은 있었어도 직접적인 무력 반란은 잦아들게 된다. 이 과정에서 헨리는 귀족과 군대를 통솔하며 통치력을 인정받았고 반대파들에겐 가혹한 진압보다는 관대한 회유책을 쓰면서 귀족들에게 환심을 샀다. 덕분에 얼마 못 갈 것 같던 왕위는 점차 탄탄해졌다.
3.2. 노랭이 왕
사실 헨리 7세는 무력으로 왕관을 얻고, 즉위 후 10여년간 반란에 시달렸지만 군인이라기 보단 장사꾼 기질이 농후했다.[13] 알려졌듯이 아들 헨리 8세와 대비되게 극도로 절약을 했으며 재정문제를 최우선으로 생각할 정도, 치적이라면 당시 잉글랜드에서 프랑스 보르도 지방 포도주 수입을 하는 선박을 잉글랜드 국적 선박으로만 강제하는 항해조례를 발표하여 장사꾼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재정도 확보하고 민심도 얻는 꿩먹고 알먹고 계책 알다시피 항해조례는 잉글랜드의 기본적인 입장이 되었다.[14] 이렇게 해서 상인들에게 환심을 샀기에 신하들은 의회에서 통치의 기반이 되는 턴세와 파운드세를 치세내내 국왕이 마음대로 걷을수 있도록 보장해주기 이른다. 이는 스튜어트 왕조 시대까지 국왕의 주 수입원이 된다.[15]
왕이라고 치기엔 매우 얍삽한 짓도 했는데 에드워드 4세의 장녀 엘리자베스 공주와 결혼하고서 돈이 아까워 대관식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요크 지지자들의 엄청난 반발을 샀다가 결국엔 대관식을 치뤘다. 또한 장남 아서와 약혼한 아라곤의 캐서린은 장남이 죽고서도 20만 크라운이나 되는 지참금을 반환하기 싫어서 잡아두었고, 나중엔 캐서린을 차남인 헨리와 결혼시키려고 사돈인 페르난도 2세에게 지참금을 새로 요구했지만 그가 주지 않는 바람에 결혼을 계속 미루며 캐서린을 가난하게 살 정도로 푸대접했다. 그래도 나중에는 페르난도 2세로부터 지참금을 받아 차남 헨리가 형수와 결혼하게 된다. 그런데 장남 아서가 죽은지 2년후에 장남의 기사 서임세를 때리기도 하고, 과거 사문화된 선박세를 해군 재건 명목으로 부활시켰으며, 의회에서 가결한 전쟁을 위해 세금을 때리고 자기가 먹어버리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법학자들을 동원하여 연구를 거듭(?)... 이미 없어진지 오래된 여러 봉건의무를 세금으로 발굴(?)하고 징세관들을 임명하여 강제적으로 과세를 때리자 귀족들과 백성들로부터 심해도 너무 심하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나. 어쨌든 이런 행위는 오랜 내전으로 재정여력이 없던 잉글랜드 왕실을 지탱하게 했고 후임자들이 잘 써먹었다.
사실 헨리 7세의 재정은 장미전쟁으로 플랜태저넷 혈통 대귀족들이 알아서 죽어줘서 랭커스터 영지를 차지했고, 전쟁중에 요크 가문 영지도 꿀꺽한데다가 그 밑의 귀족들도 전쟁에서 죽거나 헨리 7세에게 추방, 몰수되면서 왕실 토지가 엄청나게 늘어났기에 풍족했다.
3.3. 말년의 악재
1501년 장남 아서를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시켰지만 이듬해 아서가 죽고, 그 이듬해인 1503년에는 왕비 요크의 엘리자베스가 8번째 아이인 캐서린을 낳다가 캐서린과 같이 죽는 악재가 겹쳤다. 이후 새장가를 가고 싶어했으나 지참금만 밝히는 결혼이었기 때문에 나폴리 왕비에겐 퇴짜 맞았고, 죽은 맏아들의 아내 아라곤의 캐서린의 언니인 카스티야의 후아나에게 청혼해서 큰 웃음을 끌었다. 후아나는 심각한 정신병으로 유폐된 상태였고, 근친혼이 잦은 당시에도 아버지와 아들이 동서지간이 되는 개족보에다가 지참금만 밝히는 결혼이기에 상대에서 거부.
1509년 결핵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말년까지 세금 징수를 잘해서 총애받은 두 신하, 에드먼드 더들리[16] 와 리처드 엠프슨은 백성들에게 증오받았는데, 이들은 헨리 7세가 죽자마자 민심 안정과 정의 구현을 구실로 아들 헨리 8세에게 처형당한다.
4. 가족
- 아버지 : 에드먼드 튜더 : 1430년 6월 11일 ~ 1456년 11월 3일 - 헨리 7세는 유복자이다.
- 어머니 : 마거릿 보퍼트 : 1441년 / 1443년 ~ 1509년 6월 29일[17]
- 장인 : 에드워드 4세 : 1442년 4월 28일 ~ 1483년 4월 9일
- 장모 : 엘리자베스 우드빌 : 1437년 ~ 1492년 6월 8일
[1]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딸로 잉글랜드 왕 헨리 5세와 결혼해서 헨리 6세를 낳았다.[2] 랭커스터 가문의 시조였던 곤트의 존의 증손녀였다.[3] 어머니가 프랑스 공주였는데 당시에는 프랑스와 잉글랜드 왕가와 귀족 사이에 혼인이 잦았다.[4] 에드워드 3세의 아들 곤트의 존의 증손녀가 헨리 7세의 어머니일 정도로 왕통에서 멀었다.[5] 사실 랭커스터 가나 요크가도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다. 문제는 에드워드 3세의 장손 리처드 2세를 폐위하고 찬탈한 에드워드 3세의 4남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이 랭커스터 가문의 시조고, 5남인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가 요크 가문의 시조인데, 랭커스터 가문이 왕위 찬탈로 정통성이 취약한데다가 요크가는 에드워드 3세의 2남 클래런스 공작 라이어널의 딸 필리파 엔트워프와 혼인하여 혈통으론 더 정당성이 있었다. 잉글랜드는 여계승계도 인정하기 때문에 요크가에선 자신들이 리처드 2세의 적법한 후계자란 명분이 있었다.[6] 장미전쟁 이후 보퍼트 가문도 단절돼서 헨리 7세의 어머니인 마거릿 보퍼트만이 유일한 보퍼트 가문의 후손이었다.[7] 에드워드 4세와 결혼한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신분이 왕족이 아니었음에도 그녀의 미모와 재산에 눈독을 들인 에드워드 4세가 덜컥 결혼해버렸다. 당시에는 왕이 결정한 일이니 그냥 넘어갔지만 추밀원에서도 비판 받았고, 아무래도 신분이 처지는 배우자를 두면 그 배우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손들의 지위가 약해지는게 그 당시 풍속이었다.[8]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딸.[9] 리처드 3세의 외조카. 리처드 3세의 누이인 부르고뉴 공작부인의 아들이다.[10] 리처드 3세의 친조카. 리처드 3세의 둘째 형 클러렌스 공작 조지의 아들이다.[11] 존의 동생 서퍽 공작 에드먼드는 헨리 8세 시절까지 살아남지만 헨리 8세 시절 반란으로 몰려 처형당한다. 존과 에드먼드의 동생 리처드는 대륙으로 도망.[12] 가짜 요크공은 무슨 신통력이 있었는지 아일랜드 추장들에게 환심을 샀고, 제임스 4세와도 친해져서 정체가 가짜인줄 알았어도 친구처럼 지냈다고 한다. 심지어 제임스 4세는 헨리 7세와의 합의에 따라 가짜 요크공에게 잠시 지원을 끊게 되자 자신의 배를 내주어 그를 유럽으로 무사히 보내주었다고 한다.[13] 보스워스 전투 때도 본인이 지휘하지 않고 삼촌에게 지휘를 맡기며 후방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14] 크롬웰이 한 걸로 알지만 크롬웰'도' 한 것이고 잉글랜드의 국력이 부족할 경우 무시당하다가 다시 항해조례를 반포했다 포기했다 연속이었지 계속해서 잉글랜드의 기본적인 입장이었다.[15] 턴세는 술통 단위로 부과하는 관세이고, 파운드세는 물류 무게당 부과하는 세금으로 보통 왕이 등극하면 의회에서 왕이 치세내내 걷으십쇼 하며 승인해주는게 관례였다. 그런데 찰스 1세 시기에는 즉위후 의회에서 고작 1년 6개월치만 허가해주자 왕과 의회의 갈등이 깊어지게 된다.[16] 이 에드먼드의 아들이 에드워드 6세 시절 에드워드 시모어(에드워드 6세의 외삼촌)를 몰아내고 사실상 영국을 통치하다가, 에드워드 6세 사후 메리 1세의 즉위를 막고 제인 그레이를 옹립하려다가 반역으로 참수당한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다. 그의 손자는 엘리자베스 1세 시절 총애 받은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17] 만약 1443년생이 확실하다면 헨리 7세를 우리 나이로 겨우 중2때 낳았다는 것이 된다. 당시 조혼이 흔했다고는 하지만 조혼을 해도 신부가 어느 정도 자란 다음에 합방하고 아이를 갖는 편인 점을 감안하면 너무나 이른 나이에 초산을 겪은 셈. 더구나 그렇게 빨리 초산을 겪고도 장수하는 건 드문 경우다. 다만 헨리 7세를 낳을 때 어린 몸으로 출산하느라 말 그대로 죽다 살아날 지경으로 고생했고, 이 난산으로 불임이 됐다는 견해가 있다. 실제로 재혼한 남편과의 사이에서는 자녀를 낳지 못했다.[18] 제임스 5세 등[19] 메리 1세 등[20] 엘리자베스 1세[21] 에드워드 6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