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쟁쿠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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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415년, 백년전쟁 중반에 일어난 대규모 전투. 아래 서술된 내용을 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명량 해전의 지상군 버전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비슷하다.
잉글랜드왕 헨리 5세가 자신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 인정이 아니면 푸아티에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던 장 2세의 미납된 몸값과 프랑스 내 잉글랜드령의 영구적인 인정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프랑스 발루아 왕실에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프랑스를 침공하면서 벌어진 전투다. 잉글랜드에서는 국왕이 친정했지만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는 당시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어서인지 샤를 달브레가 대신 지휘했다.
2. 배경
헨리 5세는 10,000여 명의 병력으로 8월 프랑스를 침공, 항구도시 아르플뢰르(Harfleur)의 공성전에서 많은 병력과 시간을 들여 9월 22일 항복을 받아내었다. 하지만 이미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기에[3] 영국군은 아르플뢰르를 벗어나 프랑스 북부의 잉글랜드 거점인 칼레로 퇴각하려고 했다.
프랑스는 연락을 받는대로 병력을 모집했으나 이들이 지원오기도 전에 영국군이 아르플뢰르를 얻어내는데 성공하자 이들이라도 격퇴하고자 그들이 칼레에 돌아가 세력을 회복하기 전에 빨리 섬멸시키고자 했다. 헨리 5세는 불리한 상황임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아질 추격군에게 쫓기기보다는 확실히 정리하는게 낫다고 판단해 샤를 달브레의 시간벌이용 수작[4] 도 무시하며 10월 24일 아쟁쿠르에서 이들을 맞아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3. 전개
사료 대부분이 그렇듯 정확한 내역을 알 수는 없으나 현대 역사가들의 의견으로는 프랑스군이 잉글랜드군보다 '''최소''' 2배 이상 되는 병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5]
또한 병력의 질에 있어서도 여러모로 비교될 부분이 있었는데 이 당시 영국군은 공성전으로 인한 병력 및 사기 저하, 퇴각경로 및 전투 장소의 환경으로 인한 전염병 창궐[6] 등으로 상황이 나빴던 것에 비해 막 모집해 달려왔던 프랑스군은 이런 문제가 하나도 없이 오히려 자기 부대를 선봉에 보내달라며 사기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전장은 주변에 숲이 빽빽한 좁은 개활지에서 벌어졌는데, 이전 영국의 궁병들에게 제대로 데인적이 있었던 프랑스군은 갑옷의 두께를 늘리고 추격을 위한 선발대를 제외하고선 기사들 포함 전군이 '''걸어서''' 진격하는 방법을 택했다. 실제로 이 전략은 제대로 효과를 봐서 말을 타고 갔던 선발대가 아닌, 본대의 기사들은 큰 피해없이 잉글랜드군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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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전장은 병력의 차를 고려하고도 전체적으로 따지면 영국군이 크게 밀리는 형태는 아니었는데, 이는 헨리 5세의 판단 덕분이었다. 상술한대로 군사적으로는 불리했던 헨리 5세는 공성전이 끝난 뒤 퇴각하면서도 단순히 도망치는게 아닌, 프랑스의 후발대를 지연시키면서 동시에 자신들이 유리한 환경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이 노력의 결실이 다름아니라 폭우가 쏟아져 한창 진창으로 가득한 아쟁쿠르였다.
상술한대로 프랑스군은 영국군의 장궁으로부터 피해를 줄이고자 기사들의 갑옷을 두텁게 하며 말을 타지 않는 식으로 기동력을 버리고 안정성을 얻는 것을 택했는데, 안그래도 낮아진 기동성에 둔중한 무게까지 더해지니 이들이 늪지에서 제대로 걸을 수 있을리가 만무했고[7] 프랑스 기사들은 정작 이들을 목전에 두고도 함부러 달려들 수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프랑스군은 초반엔 이를 알고 최대한 견제를 위주로 한 대치로 시간을 끌려 했으나 영국군측의 공격적인 도발을 버티다 못한 일부가 멋대로 진형을 빠져나와 날뛰면서 혼란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이는 프랑스군의 결정적인 패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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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참혹한 도살장
병력의 질로도 양으로도 우세를 점하던데다가 나름대로 영국군의 장궁에 대한 파해법까지 마련해온 프랑스군은 기본적으로 이미 이긴 것이나 다름없다는 자신감에 찌들어 있었고 궁수대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자 무리할 정도의 돌격을 감행하고자 했다.
총사령관(컨스터블)이었던 샤를 달브레는 이들의 폭주를 억제하고자 했으나 영국군의 공격적인 도발에 프랑스군이 열받으며 통제가 되지 못했고 결국 지나치게 몰린 프랑스군은 '''영국군에게 죽은 병력보다 프랑스군이 서로 엉키면서 압사시킨 병력이 더 많을 것이다.'''라는 말까지 내려올 정도로 참담한 상황이 되었다. 심지어 이들이 작전토의도 없이 그냥 어택땅만 해버리는 탓에 본진에 있던 프랑스 궁병대는 아군을 사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나서지도 못하고 진즉에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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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술한대로 중갑을 입은 수많은 기사들이 진창에 모여버리니 프랑스군은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리가 만무했고[8] 이와 반대로 병력의 상태는 좋지 않아도 통제는 제대로 이루어지던 영국군은 보병과 기사들, 그리고 궁수들조차 활이 제대로 통하지 않자 잡다한 것들[9] 을 죄다 집어들고 달려가 일방적으로 프랑스군을 도륙했다. 본진에 남아있던 프랑스의 일부 기사들은 빠르게 지원가고자 말을 타고 달렸으나 애초에 말을 탔다는 점에서 선발대와 같은 노선을 밟을 수 밖에 없었고 오히려 퇴각하는 기사들과 서로 엉키면서 혼란만 가중시켰다.
그나마 본진에 남아있던 또 다른 프랑스군은 잉글랜드군에 혼란을 주고자 후방으로 난입해 군수마차를 불태우고 경비병력을 살해하는, 그래도 나름의 공적은 남겼지만 이에 당황하고 분노한 헨리 5세는 그대로 프랑스 포로를 몰살시키는 것으로 답했다.프랑스의 기병 대부분은 겁을 집어먹고 자기네 전위대 틈으로 퇴각해서 전위대의 전투에 큰 장애를 주었다. 전위대의 대오에 여러 곳 틈을 벌려야 했는데, 그로 인해 밀려 움직이다가 말발굽이 다져놓은 곳을 디뎌 걸음이 흔들리는 병사들이 있었다. 말들도 화살에 상처를 많이 입어서 기수들의 통제대로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런 사정으로 해서 프랑스군 전위대는 혼란에 빠지고 수없이 많은 기병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
프랑스군 전위대가 이렇게 무너지자 영국군은 프랑스군 속으로 더욱더 파고들어 앞의 두 대대를 여러 곳에서 토막내 놓으며,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프랑스군을 쓰러뜨리고 살육했다.
Jehan de Wavrin(1398–1474), ''Recueil des croniques et anchiennes istories de la Grant Bretaigne''
5. 결과 및 영향
결국 프랑스군의 공세는 실패로 돌아가고 최소 4000에서 1만에 달하는 전사자가 발생했다. 전사자의 대부분이 기사였으며 귀족도 많이 죽었다. 알렝송 공작,[10] 바르공 에두아르, 브라방공 앙투안 등 공작 3명, 드뢰백(총사령관 샤를 달브레), 그랑프르백, 느베르백, 루시백, 바르백, 보데몽백, 블라몽백, 포켐베르백 등 백작 8명, 남작 1명이 사망했다. 당시 프랑스는 아쟁쿠르 전투 직전인 1413년 아르마냑 파가 파리에서 정변을 일으켜 부르고뉴 파를 몰아내고 집권한 상황이었는데 아쟁쿠르에서 이렇게 많은 귀족이 죽어버린 까닭에 아르마냑 파는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는다.
이에 반하여 잉글랜드군의 전사자는 100명에서 500명 남짓했으며, 기사와 귀족의 사망자는 10여 명에 불과했다.[11] 헨리 5세는 아르플뢰르에 수비대를 남기고 잉글랜드로 귀환하여 군비를 재정비했으며, 1417년 8월 서노르망디에 상륙하여 캉을 확보하고 점령지를 늘려갔다. 이때 프랑스는 내전 중으로, 부르고뉴 파가 수도 파리 주변의 위성도시를 하나 둘 무력으로 점거하며 파리를 에워싸기 시작하여 아르마냑 파가 궁지에 몰려 있었고, 잉글랜드군의 진출에 대응할 수 없었다. 1418년 부르고뉴 파는 파리를 점령하여 아르마냑 파를 도살하면서 내전에서 승리하였으나, 부르고뉴 파도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별 도리가 없었던 관계로 1419년에는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였던 루앙이 함락되어 노르망디 전역이 영국에 넘어가고 말았다.
결국 부르고뉴 파는 구적과 화해하고 거국일치를 시도코자, 도주한 왕세자(도팽) 샤를이 이끄는 잔존 아르마냑 파와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왕세자가 협상장에서 거하게 통수를 치고 부르고뉴 파의 우두머리인 부르고뉴 공작을 참살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사태로 치달았고, 왕실과 철천지 원수가 된 부르고뉴 파는 아예 헨리 5세와 손을 잡아버린다. 부르고뉴 파가 여전히 파리 정권을 손에 쥐고 있었으므로 나라를 팔아먹는 것은 식은죽 먹기였고, 결국 부르고뉴 파가 이끄는 프랑스 정권은 왕세자를 호적에서 파버렸으며, 헨리 5세와 프랑스 왕 샤를 6세의 딸 카트린 공주의 결혼, 그리고 둘 사이에서 나오는 아들이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이 되는 것을 골자로 한 트루아 조약에 동의하고, 헨리 5세는 승자가 되어 프랑스 공주를 데리고 잉글랜드로 귀환한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파리에서의 얘기였고, 부르주에 있던 왕세자는 스코틀랜드에서 온 부칸 백작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뒤, 그 휘하 7천의 스코틀랜드병을 기반으로 조직적인 저항을 펼쳤다. 잉글랜드로 돌아갔던 헨리 5세는 결국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북프랑스를 정리한 뒤 남진하던 도중 병을 얻어 아들인 헨리 6세를 보지도 못하고 사망했다.
헨리 5세는 죽기 전 자신의 큰 동생인 베드포드 공을 섭정으로 임명했는데, 베드포드 공은 프랑스에서 전쟁을 지휘하느라 잉글랜드에는 잘 들르지 못하고 작은 동생인 글로스터 공이 잉글랜드 내의 권력을 잡으면서 권력이 양분되기에 이르렀다. 베드포드 공과 글로스터 공은 형제간 우애가 깊었기 때문에 권력을 놓고 다투는 관계는 아니었으나, 글로스터 공이 자고 일어나면 사고를 치면서 전쟁수행에 차질이 생길 정도까지 되었다는 게 문제였다. 부르고뉴 공의 영역권이었던 에이노와 홀란트를 침공하여 부르고뉴 파의 뒤통수를 치면서 팀킬을 하기까지 했다. 왕세자 샤를을 잡고 전쟁을 끝내려면 본격적으로 남침을 해야 했으나, 이렇게 수뇌부에 문제가 컸던 탓에 베드포드 공은 대규모 파병을 할 수 없었다.
1428년, 결국 잉글랜드로 건너가서 대대적인 교통정리를 하고 돌아온 베드포드 공은 본격적으로 프랑스 왕세자를 토벌코자 전열을 정비하고 남침했다. 원래는 아키텐 영토와 프랑스를 연결코자 앙주를 공격하려 했으나, 계획을 변경하여 오를레앙과 루아르 일대를 점령, 그대로 부르주까지 진출하여 왕세자 샤를을 추격했다.
그러던 와중 오를레앙에서 한 처녀가 나타나고...
과거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잉글랜드군이 석궁을 사용했고 이것이 판금 갑옷을 관통할 만큼 강력한 투사무기였다는 고증오류, 혹은 왜곡된 내용이 알려져왔다. 실제 영국군의 주력은 장궁이었고, 오히려 석궁은 프랑스와 제노바 공화국의 용병들이 애용했기에 실제 전투 양상은 프랑스/제노바 석궁병 vs 영국의 장궁병이었다. 게다가 석궁도 갑옷을 그리 쉽게 뚫는 무기가 아니고 당연히 그 승패의 여부도 장비 때문이 아니었는데, 오히려 엉망진창인 프랑스군의 지휘 및 명령체계를 대놓고 무시하는 군인, 특히 기사들의 기강 문제가 더 컸다. 상황을 보자면, 사격을 명령하고 기사들이 돌격한다거나, 석궁수들이 제대로 진형을 갖추고 궁시전을 개시하기도 전에 보병들을 내보내서 진형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버린다거나 파비스 같은 필수 방호장비들도 없이 화살비로 내몰고, 화살에 피해가 급증하자 파비스 방패를 장비하러 후퇴하는데, 이를 적전 도주라고 처형하였다.
영국에서 널리 쓰이는 손가락 욕인 '손등이 상대 쪽으로 향하게 브이자를 그려보이는 행위'는 이 전투에서 유래되었다 카더라. 영국군 장궁병들에 의한 피해가 속출하자 프랑스군은 잉글랜드군 포로를 잡을 때마다 활을 쏘지 못하도록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잘랐는데, 이에 대항해 이 전투에서 '나는 아직 두 손가락 멀쩡하다고' 정도의 의미로 조롱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 시초라는 이야기. 확실한 증거는 없다(영문위키).
6. 창작매체에서
셰익스피어의 연극[12] 에서 이 전투를 앞두고 헨리 5세가 하는 대사가 매우 유명하다. 창작물에 나오는 대사인데 사실인 줄 아는 사람도 많을 정도. 아쟁쿠르와 백년전쟁을 논하면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구절이다.
다만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는 전과가 상당히 과장되어 나온다. 프랑스가 1만이 넘는 전사자를 내며 그중 8,400명은 귀족이고 그에 비해 잉글랜드는 고작 25명의 전사자를 낼 뿐이며 귀족 전사자는 한 손으로 꼽는다.
미디블2: 토탈 워에서도 역사적 전투로 나온다. 우선 프랑스군의 기병 돌격과 보병의 진군이 진창에 빠져 저지되고 '''그딴 거 없다.''' 프랑스 병력이 1, 2, 3차 축차투입으로 돌격을 감행해온다. 기병돌격을 막을 병사라곤 하마 잉글랜드 기사대뿐이고, 거기에 후방의 기습이 재현되어 있기 때문에 얘네를 막으려면 유일한 기병전력인 하마기사대를 후방으로 빼기까지 해야 한다. 정말 열심히 하다 보면 어찌어찌 이길 수는 있지만, 프랑스군의 병크가 하나도 재현되어 있지 않아서 어이없는 전투.
사실 전열만 유지한다면 이기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후방에서 치고 들어오는 기사들은 후방에 배치된 미늘창병대로 어느 정도 저지가 가능하며(미늘창병대는 써있기는 중보병이지만 취급이 창병과 비슷해서 기병에 상성이 좋다) 좌측에 위치한 장궁병대로 그들이 아군의 후방으로 진입할 때에 사격하여 수를 줄이는 것도 가능하다. 제1파로 전방에서 들어오는 기사들은 양쪽 장궁병대의 화살 세례로 아군 전위에 도달할 때 쯤이면 이미 절반쯤은 줄어 있다. 그러므로 전열만 유지하고, 헨리 5세만 전사하지 않도록 이리저리 잘만 빼돌린다면 그리 어려운 싸움은 아니다. 무엇보다 기사단은 AI의 한계로 인해 어지간해서 장궁병대가 쳐놓은 말뚝을 못 넘고 알아서 들이박아 박살나준다. 어찌보면 재현에 충실한 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오히려 프랑스의 전 병력이 일거에 들어왔다면 더 어려운 난이도를 보였을 것이다. 당장 전력이 분산되어 축차투입되면 아무리 수적으로 우세하더라도 전투에서 우위를 점할 수 없다. 여담으로 헨리 5세의 근위대는 기병돌격을 맞고도 역으로 기병을 쓸어버리는 위력을 보인다. 뒤쪽에 있는 빌 보병대와 하마기사대까지 합치면 후방 기습도 걱정 없을 정도. 무려 아무것도 안하고 그대로 내버려두고 점심먹으러 간 후 와보니 이겨있을 정도로 알고보면 역대 토탈 워 역사적 전투 사상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쉬운 전투이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정복자의 역사적 전투 캠페인에서도 재현된다. 단 아쟁쿠르 전투 직전 헨리 5세가 아쟁쿠르 지역으로 퇴각하는 부분과, 아쟁쿠르 전투 직후 잉글랜드로 귀국하는 부분까지 모두 한 미션으로 압축된 스케일로 등장하며 정작 메인인 아쟁쿠르는 맵 한 귀퉁이[14] 에 접근하면 대기중이던 대량의 프랑크 기사들이 달려드는 방식으로 간소하게 재현시켜만 놓았다. 미션 자체는 부대를 충원할 수 없고 적지를 주어진 병력만으로 어찌어찌 돌파해야 하는 위험천만한 임무지만, 위와 달리 장궁병으로 쏙쏙 적병을 점사하면 어이없이 쉽게 이길 수 있다. 기사도 점사 앞엔 장사 없다. 아니면 헨리 5세만 목표지점까지 찍으면 혼자서 적들을 요리조리 쏙쏙 잘 피해서 배까지 간다.
다나카 요시키 소설인 아르슬란 전기에 나오는 자카리야 전투에서 이 전투의 요소들 여러 가지를 차용한 듯한 장면이 나온다. 장 보댕이 이끄는 4만 병력에 맞서싸운 기스카르가 이끄는 1만 8천 병력이 중무장을 벗고 가벼운 무장을 한 채로 전투에 임하는데 이를 본 보댕군은 적은 돈이 없어 갑옷도 없다고 비웃었으나 진흙탕이 가득한 곳에서 벌어진 전투라 오래가지 않아 중무장한 보댕군이 처발린다.
영화 더 킹: 헨리 5세의 주요 사건이자 클라이맥스로 등장한다. 헨리 5세의 친구 존 경이 장궁과 소수의 중보병들을 미끼로 프랑스 기사들을 끌어들이고 기사들이 진창에 빠지자 헨리 5세가 매복해 있던 경보병들을 이끌고 공격해 승리하는 것으로 나온다. 진흙탕 속에서 명예와 영광 따위 없이 악착같이 살기 위해 죽이는 전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15]
패색이 짙어지자 프랑스 왕자 루이가 헨리 5세에게 결투를 신청하는데, 헨리 5세는 이를 받아주려 했으나 끝까지 갑옷을 벗지 않고 있던 루이는 진창에 넘어져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등 도저히 결투를 할 상태가 아니었다.[16] 결국 병사들이 넘어진 루이를 단체로 단검으로 찔러 죽이고 전투는 잉글랜드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17][18] 이후 전리품 수거 및 재정비 과정에서 존 경의 시신을 발견하고 망연자실해하던 헨리 5세는 포로가 너무 많아서 관리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장교의 보고에 그럼 다 죽이라고 덤덤하게 말하고 전장을 떠난다.
7. 관련 문서
[1] 영어로는 '애진코트'라고 읽는다. 영국 군함 이름으로도 쓰였다.[2] 샤를 6세의 사망 시, 프랑스 왕위는 헨리 5세가 계승한다는 내용의 조약.[3] 또한 이후 기록을 보면 무리한 공성전 속행으로 인해 최소 20% 최대 '''40%'''가량의 병력 사망 및 군내 전염병 창궐, 물자 부족 등 여러 난점에 맞딱뜨린 상황이었다.[4] 실제로 기병이 상당수있었던 프랑스군은 작정하면 영국군의 꼬리를 잡아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고 시간은 프랑스의 손을 들어주던 상황이었다. 당장 헨리 5세가 더 늘어날 추격병을 우려해 무리를 감수하며 전투를 벌이고자 했는데 저쪽에선 난데없이 협상이나 하자며 시간을 끌려 했으니 받아줄 이유가 없었던 것.[5] 사료에서는 당연히 자기들이 유리하게 서술하려는 구석이 있다보니 영국측 자료에서는 사료에 따라 '프랑스군이 '''10배''' 가량 많았다.'라는 언급도 있었으며 반대로 프랑스 사료에서는 '아일랜드군의 군세보다 아무리 많아도 '''4배''' 가량이었다 정도의 언급만 나온다.[6] 설사가 잦다는 식의 언급을 보면 정황상 이질이나 콜레라 등 수인성 전염병으로 추측된다.[7] 실제로 이 당시 영국군의 전략은 프랑스 기사들이 늪지를 걷느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면 그런 기사들에게 화살빵을 먹여주자는 것이었다. 평지에서라면 이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테고 갑옷의 두께까지 있어 함부러 노리기 힘들지만 진창 때문에 움직이기 힘든 상황이면 말이 달라지기 때문.[8] 이는 다름아닌 화살을 버티고자 더욱더 중갑을 따지게 된 프랑스군의 자충수였던 셈이다. 물론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 두께조차도 움직임에 큰 해가 될 정도는 아니지만 갑옷의 곁은 물론이고 틈새를 통해 내부까지도 진흙이 차게 되면서 무게나 무게중심이 망가지게 된 것.[9] 검이나 도끼같은 냉병기는 물론이고 진지구축용 망치까지도 들고 왔다고 한다.[10] 알렝송 공작은 전투 도중 헨리 5세에게 돌진하여 이를 저지하려는 글로스터 공작을 쓰러트린 뒤 헨리 5세와 결투를 벌였다. 헨리 5세의 왕관에 달린 작은 꽃무늬 장식을 쳐내는 등 사자처럼 용맹하게 싸웠으나 결국 제압당했는데, 그는 포로로 사로잡힌 뒤 면갑을 열자마자 한 광포한 영국군 기사 한 명이 휘두른 도끼에 맞고 사망했다.[11] 전사자 중 이름 있는 인물로는 헨리 5세의 당숙인 '뚱보' 요크 공작(그는 전투 도중 넘어졌다가 또다른 시체에 깔려 질식사했다고 한다)과 서퍽 백작 정도이다. 헨리 5세의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또한 헨리 5세를 죽이려 달려든 알렝송 공작을 막다가 허벅지 뒷쪽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12]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헨리 5세>를 포함해 여러 영국 왕들을 주제로 한 드라마가 바로 BBC에서 방영했고,지금도 방영 중인 유명한 드라마인 텅 빈 왕관(영어 제목은 할로우 크라운)이다.[13] 전투 당일.[14] 맵 가장 오른쪽에 진창 비슷한 매우 더러운(?) 지형이 등장하며, 이 부분에 접근하면 헨리 5세가 상기한 셰익스피어가 창작한 대사의 일부를 읊는다.[15] 당장 '''왕'''인 헨리 5세도 처음에 들고 있던 워픽도 잃어버린 채 단검과 죽은 자의 무기, 심지어 맨손으로 진창을 뒹굴면서 처절하게 싸워나간다.[16] 이 꼴사나운 모습을 지켜보는 영국군과 헨리 5세의 표정이 일품이다.[17] 왕족 대 왕족의 1:1 결투였는데 헨리 5세는 주변에 있는 기사들도 아닌 평민 병사들한테 죽이라고 시킨다. 정황상 자신이 죽일 가치도 없다고 여긴 듯.[18] 실제 샤를 6세의 아들 루이는 아쟁쿠르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그해 12월 파리에서 이질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