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
1. 개요
2. 백년전쟁의 원인
3. 경과
3.1. 시대 구분
3.2. 개전(1336)
3.3. 제1기(1337~1360)
3.4. 제2기(1369~1389)
3.5. 양국의 내전과 전쟁의 재개(1390~1415)
3.6. 제3기(1415~1453)
5. 봉건적 군사제도의 종결
6. 여담
1. 개요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 사이에서 1337~1453년, 116년 동안 벌어진 전쟁. 보통 가스코뉴 지방에서 벌어진 전면전을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근대 유럽의 프롤로그'''. 중세 유럽의 역사구분을 간단히 나누었을 때, (서로마 멸망)-프랑크 왕국-바이킹 지배-십자군 원정에서 이어지는 큰 변환점이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분리를 시작으로 유럽 국가들의 국경선과 민족성이 확고히 정립되기 시작하여, 서로 다투는 과정에서 자본의 이동을 통하여 여러 가지 발전을 일으키는 대대적인 변혁의 시작점으로 평가받는 전쟁이다.[1]
이름은 저렇지만 진짜로 양국이 116년 동안 계속 싸우지는 않았고, 단지 처음 선전포고를 한 1337년 이래 완전한 종전 선언이 발표되기까지 116년이나 걸렸을 뿐 중간에 몇 차례 휴전과 종전이 있었다.
비슷한 개념으로 17세기 말엽부터 19세기 초엽까지, 9년 전쟁(일명 팔츠계승전쟁)-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미국 독립전쟁-프랑스 혁명-나폴레옹 전쟁 등으로 이어진 양국 간의 충돌을 제2차 백년전쟁(1701~1815)[2] 으로 부르기도 하나, 잉-프 만이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들도 주도적인 역할을 차지하는 전쟁들은 잘 통용되지 않는다.
'정면승부를 고집하는 프랑스 기사단 vs 온갖 얍삽한 방화 & 노략을 자행하는 잉글랜드 약탈군들'이 이 전쟁 초기의 이미지였다. 프랑스는 흑사병 이전을 기준으로 인구수 1600만 이상의 엄청난 강대국이었고[3] , 잉글랜드는 4~500만 명인 데다 이웃 왕국인 스코틀랜드한테도 털리고 자신들끼리 싸우느라 분열을 반복했으나, 이때의 실전 경험으로 쌓은 용병술을 통하여 프랑스 내부를 휘저으며 돌아다녔고, 프랑스의 도시들을 잿더미로 만들며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프랑스군도 비교적 빠른 시기인 장 2세 치세부터 군제개혁을 시작해서 1360년대 이후에는 오히려 기동전술을 잉글랜드군보다 잘 구사했고, 대규모 야전군을 편성해서 한타를 걸어오는 잉글랜드군을 청야전술과 게릴라전으로 괴롭혔다. 1370년 퐁발랑(Pontvallain) 전투에서는 크레시 전투 이후 24년간 지속된 잉글랜드군의 야전 무적 신화를 종결시켰다. 반세기 뒤 아쟁쿠르 전투에서 다시 폭망하는 바람에 돌격만 할 줄 아는 바보 이미지는 결국 떨쳐내지 못했지만.
이때의 잉글랜드-프랑스 대립이 근세기 유럽의 분쟁의 대부분으로 이어지는 것은, 잉글랜드-프랑스 통합 왕조라는 집단이 분리되는 것을 시작으로 유럽이 각자의 국경선과 민족 성향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지속적인 분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결과는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분리, 두 라이벌의 외교 싸움에서 촉발되는 유럽의 각종 분쟁, 그리고 이탈리아 도시들이 양 국가를 지원하면서 얻은 엄청난 황금으로 일으키는 르네상스라는 거대한 발전의 시대, 그리고 두 세력이 다투면서 약해지는 동안 독일이라는 신흥강자의 부상으로 이어진다. 다만 독일은 카를 황제가 독일 영내에 동군연합 스페인군을 끌어들이며 영주들의 분노를 유발, 사상 초유의 콩가루 국가를 이루는 자폭을 터뜨린다.
한마디로 십자군 전쟁 이후 근대 유럽이 보여주는 거의 모든 변화의 프롤로그를 장식하는 첫 번째 사건이라고 평할 수 있을 정도이다.[4]
2. 백년전쟁의 원인
전쟁의 단초는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2.1. 왕위 계승권
프랑스 왕위 계승권 다툼은 기존 카페 왕조의 왕인 샤를 4세(재위 1322~1328, 단려왕)가 직계 없이 6년 만에 사망하면서 시작된다.
샤를 4세의 뒤를 이을 후보로 큰형의 외손자이자 나바라의 왕인 샤를(카를로스 2세), 여동생의 아들이자 잉글랜드의 왕인 에드워드 3세, 그리고 사촌인 발루아 백작 필리프가 있었다. 현재의 관점에서는 나바라의 샤를이 상속권자지만, 살리카법에서 여성이 포함된 가계로의 상속을 부정함으로써[5] 결국 필리프가 필리프 6세로 즉위, 왕위를 계승하여 발루아 왕조를 열었다.
살리카법을 무시하고 여성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더라도 에드워드 3세의 계승권은 나바라의 샤를 다음이었지만, 어쨌든 그가 프랑스의 왕위를 주장할 약한 명분이라도 존재하기는 했다.[6] 그리고 이는 13세기 동안 꾸준히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을 시도하면서 잉글랜드뿐 아니라 변경의 자치적인 귀족들과 왕국에 인접한 독립세력들의 어그로를 끈 데다 14세기 초의 대기근으로 사정이 많이 나빠진 프랑스 왕실에는 무시하지 못할 위협이 되었다.
2.2. 가스코뉴 지배권
노르망디 공작이던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의 국왕이 된 이후 잉글랜드의 국왕은 왕이긴 한데 프랑스 왕의 신하기도 하다는 기묘한 위치였다.[7][8] 여기에 가스코뉴가 더해졌다.
가스코뉴 지방은 아키텐 영지의 일부로 플랜태저넷 왕조의 창시자인 헨리 2세가 아키텐의 상속녀 엘레오노르와 결혼하면서 이 지방을 가져갔다. 1307년 세입은 약 17,000파운드스털링(10만 투르리브르)였다. 이런 노른자위 땅을 두고 양국이 치고박은 건 당연히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서 1201년 ~ 1259년, 1226년 ~ 1243년, 1294년 ~ 1298년, 1324년 ~ 1327년에도 이미 전쟁이 있었다. 특히 존엄왕 필리프 2세가 벌인 첫 전쟁은 프랑스가 부빈 전투로 잉글랜드를 관광보내고 1215년 왕세자 루이(후의 루이 8세)가 런던을 일시 점령해 대관식을 목전에 둘 뻔도 했다. 이는 존 왕의 급서와 헨리 3세의 즉위로 저지되었으나, 훗날 헨리 5세가 파리를 점령하고 프랑스의 왕이 되려고 한 것을 생각하면 프랑스는 200년 만에 되갚음을 당했던 것이다.
갈등의 핵심은 프랑스 왕이 아키텐 공작의 상위영주로서 가진 사법권이었다. 이론상으로 프랑스 왕의 신하인 가스코뉴인들은 왕의 대관이 주재하는 지방의 국왕법정이나 파리 고등법원에 항소를 제기할 권리를 가졌고, 프랑스의 왕은 항소를 수리하고 봉신인 아키텐 공작을 법정에 소환할 권리를 가졌다. 그러나 아키텐의 공작일 뿐 아니라 잉글랜드의 왕이기도 한 그들에게 프랑스 왕의 법정에 출두하는 것은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피해야 하는 굴욕이었다.
한편 가스코뉴인들도 헨리 3세 이후로 외국인이나 다름없어진 잉글랜드의 국왕에게 절대적인 충성심을 가진 것은 아니라서 13세기 동안 이미 수 차례 반란을 일으켰지만, 그럼에도 가까운 곳에 있는 프랑스 왕의 편에 완전히 붙는 대신 먼 곳에 있는 잉글랜드 왕의 신하로 남은 채 줄타기를 함으로써 자신들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알고 있었다.
1294년 에드워드 1세는 필리프 4세의 소환 명령에 불응했고, 결국 소환을 취소하는 대가로 필리프의 다른 권리들을 인정하고 그의 여동생 마르그리트와 혼인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필리프는 곧바로 통수를 쳐서 권리만 인정받은 채 에드워드를 재소환했으며, 결국 같은 해 전쟁이 벌어졌다. 플랑드르와 스코틀랜드 독립전쟁까지 엮이게 된 이 전쟁은 1302년 코르트레이크 전투에서 프랑스 기사들이 플랑드르군에게 예상 밖의 대패를 당하면서 정체 국면에 빠졌다. 1303년 평화조약이 맺어지면서 에드워드는 마침내 대륙 영토가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은 상태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프랑스에 비해 인구와 자원이 부족한 잉글랜드의 왕의 입장에서 최선의 방어는 공격. 즉 끝없이 밀려오는 프랑스군을 방어하다가 말라죽는 것보다는 사방에서 동맹을 끌어들이고 자신도 직접 프랑스 북부를 침공해서 파리와 일드프랑스를 위협함으로써 프랑스의 전력을 분산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어 전략이자 대전략이었다. 앞서 이 전략을 사용한 에드워드 1세는 간신히 현상을 유지하는 것에서 그쳤지만 손자인 에드워드 3세에게는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통해 단련된 군사들과 발루아 왕조의 비교적 약한 정통성, 그리고 나바라의 왕 샤를의 내부 트롤링이라는 변수가 있었다.
2.3. 플란데런 지배권
플란데런은 지금의 벨기에 지방으로 북부 유럽 상권의 중심지로 유명한데 일단 필리프 4세 이후 프랑스가 이 지역에 세력을 갖고 있었지만 잉글랜드는 워낙 경제적으로 밀접한 지방이라(잉글랜드는 양모 수출국이었고 플란데런은 유명한 모직물 제조 지역이었다) 항상 대립이 존재했다. 결국 1300년 플란데런은 프랑스에 합병되었지만 플란데런 도시들은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대항하여 1302년 코르트레이크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해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긴장은 지속되고 있었다.
과거엔 플란데런 상인들이 전쟁을 조장했다는 배후 상인설이 잠시 반짝했지만, 백년전쟁은 원인이 한두 개가 아닌 데다 정치에 대한 상업의 우위를 주장하는 이론은 군산복합체 음모론에 기반한 음모론일 뿐인지라 결국 묻혔다.
2.4. 스코틀랜드 문제
여기에 더 불을 붙인 건 스코틀랜드 문제였다. 잉글랜드는 샤를 4세가 죽은 다음 해 바로 로버트 1세가 죽자 스코틀랜드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로버트 브루스의 아들인 데이비드 2세(1329 ~ 1371)가 1334년 프랑스로 도망치자 잉글랜드는 데이비드 2세의 송환을 요구했지만 프랑스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잉글랜드는 맞불을 놓는 식으로 필리프 6세(1328~1350)의 이복동생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3세의 망명을 받아주었고 이에 프랑스가 반발하면서 양국의 갈등은 최고조로 치달았다.
3. 경과
3.1. 시대 구분
대부분의 시기 구분에서 1360년의 휴전까지를 1기로 두는 건 합의가 이루어진다. 가끔 1380년대로 두는 케이스도 있는데 이런 경우엔 간헐적인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흑태자 에드워드의 사망을 휴전기의 기준으로 한 것.
그러나 이후 구분이 문제인데, 심재윤의 <서양중세사의 이해>는 1420년 트루아 조약으로 2기(잉글랜드 우위)와 3기(프랑스 우위)를 가르고 있고, 위키피디아와 Osprey 출판사는 1429년 잔다르크의 활약을 계기로 2, 3기와 4기를 가른다.[9] 끝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은 1396년[10] 과 양측의 왕이 모두 사망한 1422년을 기준으로 나누고 있다. # 뒤에 보듯 휴전으로 취급되는 여러 기준도 1340년~1355년도, 1375년, 1396년도 등이 있어 그야말로 엿장수 마음대로다.
3.2. 개전(1336)
이런 저런 갈등이 씨앗으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필리프 6세는 아비뇽 유수를 통해 확립한 프랑스 국왕의 기독교 군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십자군을 준비한다. 그 과정에서 십자군 원정에 대한 교황의 인가를 기다렸으나 필리프 6세의 십자군 준비에 대해 과도한 부담(...)을 느낀 교황이 오히려 십자군 원정을 인가하지 않았다. 과거에는 종교적 열정 하나만 가지고 교황이 십자군을 가라고 부추겼다면 이제는 교황이 십자군을 말리는 시대가 온 것이다.
덕분에 자신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것에 대해 과도한 빡침을 느낀 필리프 6세는 일종의 무력 시위를 위해 마르세유에 집결시켰던 함대를 자신의 본거지인 북부 프랑스 지방으로 이동시키려고 했는데 문제는 이들 함대에는 프랑스와 함께 잉글랜드의 앙숙이었던 스코틀랜드 소속의 함선들이 동맹 명목으로 포함되어 있었고 지중해에 있는 함대를 북부 프랑스로 이동시키려 하자면 바로 잉글랜드의 앞마당인 도버 해협을 통과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언제든지 한 번은 싸우게 될 것 같아 노심초사하던 차에 코 앞에서 대규모의 프랑스 함대를 구경하게 된 잉글랜드의 입장은 당연히 '''"전쟁이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필승의 일념으로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명목으로 의회의 동의를 얻어 1336년 프랑스 왕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때 보낸 선전포고의 시작 문구가 걸작인데 "자칭 프랑스 왕이라는 발루아의 필리프는 봐라..." 안 그래도 말 안 듣는 교황 때문에 빡쳐 있었던 필리프 6세는 난데없는 잉글랜드 왕의 어그로에 눈이 뒤집히고 만다. 결국 필리프 6세는 1337년 무력으로 아키텐 영지를 점령하고서 자신의 신하인 노르망디 공작 에드워드 3세의 아키텐 영지를 적법한 프랑스 왕으로서 몰수한다고 선언했다.
3.3. 제1기(1337~1360)
모두들 프랑스로 가자. 말거머리처럼 그 피를 빨고 또 빨기 위해
ㅡ 전쟁 초기 잉글랜드에서 유행하던 어구.
3.3.1. 잉글랜드의 프랑스 상륙(1338)
선전포고 후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에 양모를 수출하는 것을 금지했다. 모직산업으로 먹고 살던 플랑드르에게 이것은 심각한 타격이 되었고 결국 플랑드르 도시들은 살기 위해 프랑스에 맞서기로 결심했다. 1337년 야콥 반 아르테베르테가 겐트 강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래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나 결국 플랑드르 백작이 쫓겨나고 1338년 에드워드 3세가 앤트워프에 상륙하면서 1340년 플랑드르 도시들은 에드워드 3세에 충성을 맹세하게 되었다.
플랑드르는 프랑스에 충성을 맹세했던 터라, 에드워드 3세는 그 김에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노르망디의 영주로서 프랑스 국왕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던 것을 파기하고 스스로 프랑스 국왕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혹은 플랑드르의 핸트 시장이란 이야기도 있다. 율리우스력 1340년 1월 26일.)
플랑드르를 확보한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 루트비히 4세와 동맹을 체결했고 에노 백작 등 네덜란드 저지대 지역의 귀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북부 프랑스로 침공해 들어갔다. 하지만 에드워드 3세가 전쟁자금을 조달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동안 필리프 6세는 전면전을 피했고 용병으로 고용한 귀족들도 밍기적거려서 전쟁은 지지부진했다.
3.3.2. 슬로이스 해전(1340년): 잉글랜드의 승리 → 2년간 휴전
교착 상태에 빠진 전쟁을 타개하기 위해 필리프 6세는 바다로 눈을 돌렸다. 프랑스는 잉글랜드의 남부해안 지역을 습격하여 가스코뉴를 약탈하고 보급로를 차단하려 했다. 곧 영국과 프랑스는 잉글랜드 해협의 제해권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이게 되었다.
프랑스는 플랑드르를 봉쇄하기 위해 슬로이스 항을 함대로 포위했다. 이에 1340년 6월 24일 프랑스 함대 및 잉글랜드, 그리고 플랑드르 간의 대규모 해전이 발생했다. 슬로이스 해전에서 플랑드르의 도움을 받은 잉글랜드군은 프랑스 함대 190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프랑스 해군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11]
슬로이스 해전 이후 육상에서 프랑스군이 잉글랜드군에 승리를 거두면서 잉글랜드의 진격을 가까스로 저지하였다.[12]
이때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2세가 스코틀랜드로 돌아가면서 에드워드 3세가 스코틀랜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고 결국 1340년 9월 25일 양국은 2년 동안 휴전하기로 결정했다.
3.3.3. 브르타뉴 계승 전쟁(1341년~1364년)
하지만 휴전은 1년 만에 깨졌다.
1341년 4월 브르타뉴 공작 장 3세가 사망하면서, 브르타뉴 공작령에서 후계 문제가 불거졌다. 당시 브르타뉴 공작령은 프랑스 왕가, 잉글랜드 왕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적인 지역이었다. 장 3세의 조카인 잔느(팡테블 여백작 - 계승순위가 우선됨)와 장 3세의 배다른 동생인 장 드 몽폴(몽폴 백작 - 어머니의 여백작 지위를 승계)의 후계대결이 발생했다. 프랑스 왕실령과 달리 브르타뉴에서는 자체 관습법에 의해 살리카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할 때 프랑스는 살리카법을 옹호하지 않았는데, 이때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는 살리카법을 옹호하면서 장 드 몽폴과 손을 잡게 된다. 에드워드 3세의 지원을 받은 몽폴은 반대하는 대다수의 제후를 무찌르고 브르타뉴의 수도인 낭트를 손에 얻었다.
그러자 프랑스는 정전협정에도 불구하고 브르타뉴에 공격을 가했고, 잉글랜드가 이에 맞서 개입했다. 프랑스는 10월 몽폴을 포로로 잡았으나 아내 잔느(후계자 잔느 여백작과 이름이 같다)가 몽폴의 아들인 장(장 4세)의 후견인을 자처하면서 서부 브르타뉴의 에느본에서 강경하게 농성했다. 그래서 "두 명의 잔느가 싸웠다"라고 일컬어진다.
1342년에 벌어진 브르타뉴의 일련의 전투는 무승부로 끝나며 다시 한번 일시 정전이 체결되었다.
정전이 종결되고 1346년 에드워드 3세와 잉글랜드군의 군대가 노르망디에 상륙하면서 다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에드워드 3세는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돈을 꾸어가면서 전쟁을 벌였고 이 여파로 이탈리아에서 잘 나가던 가문 하나[13] 가 파산하기도 했다. 잉글랜드군이 노르망디에서 플랑드르까지 가는 동안 프랑스군은 거의 저항을 하지 않았으며, 잉글랜드군은 비용을 자체 조달하고 프랑스군을 끌어내기 위해 약탈 행렬(chevauchee)을 자행했다. 가는 길에서 돈이 되는 건 다 약탈하고 불 지르고 다니면서 농촌을 황폐화시키는 방식으로 이런 약탈은 중세 전쟁에선 기본이었으나 잉글랜드군은 아예 싸그리 털어먹고 불 질러버린다는 점에서 한층 더 악독했다(...). 또한 프랑스 북부의 중요한 항구이자 양모 가공업이 발달한 산업 도시인 칼레를 1347년에 함락했다. 이때 '칼레의 시민들'이란 유명한 야사가 있다. 이 부분은 칼레 문서를 참고할 것.
3.3.4. 크레시 전투(1346년): 잉글랜드 승리
결국 프랑스군은 약탈 행렬을 더 두고 보기도 그렇고 충분한 군대도 모으고 해서 1346년 8월 26일 프랑스 크레시에서 잉글랜드군과 격돌했다. 하지만 중세 전쟁사에 유명한 크레시 전투는 1만 명의 잉글랜드군이 '''3만 명의 프랑스군을 패퇴시키며''' 잉글랜드군의 승리로 끝났다. 단, 이 전투에 투입된 병력은 사료마다 다르다. 잉글랜드군은 6천~1만 2천, 프랑스군은 2만~10만으로 나온다. 잉글랜드군은 1만~1만 2천, 프랑스군은 3만~4만으로 보는 게 중론. 중기병 수로는 잉글랜드는 2300~4천 대 프랑스는 최소 2/3에서 대부분이 기병으로 추정된다. 나머지 4~6천 명이 제노바의 석궁병들. 여하간 프랑스가 압도적으로 수가 많았다.
3.3.4.1. 잉글랜드 승리의 원인분석
이에 대해서는 장궁을 이용한 강력한 투사 무기를 이유로 드는데 사실 좀 더 복합적이다. 이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잉글랜드군이 언덕 위에서 좋은 자리 잡고 있음.
- 롱보우를 이용해서 상대를 투사 무기로 압도함.[14]
- 잉글랜드군이 계속 화살을 퍼붓자 프랑스군이 어쩔 수 없이 언덕 위로 올라옴.
- 잉글랜드군이 양 날개에서 화살비를 쏟아붓고 프랑스군은 화살비를 피하느라 중앙으로 밀리는 바람에 과다 밀집 상태에 빠짐.
- 프랑스 기마대는 일단 말뚝과 목책에 저지되고 지친 프랑스군을 언덕 위에서 쉬고 있던 잉글랜드 하마(下馬) 기사[15] 가 격퇴.
- 프랑스군이 퇴각하면 잉글랜드의 하마기사들이 다시 말을 타고 프랑스군을 추격.
3.3.4.2. 사상자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1만~3만으로 추정되며 제후 11명과 기사 1,200여 명이 포함된 수치라고 한다. 그리고 사망자 중에는 필리프 6세(당시 프랑스 왕)의 동생인 알랑숑 백작 샤를 2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4세의 친부인 룩셈부르크 백작 요한 1세 등 화려한 인사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3.3.4.3. 전쟁 이후 → 잉글랜드의 프랑스 국토 유린
스코틀랜드 왕 데이비드 2세는 이 전투가 끝나고 2달 후인 10월에 프랑스의 부름[16] 으로 1만 2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했으나 네빌스크로스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대에 패해 포로로 잡히는 굴욕을 당했고 1357년 풀려났다.
결국 크레시 전투에서 승리한 잉글랜드군은 이제 프랑스 북부뿐만 아니라 프랑스 사방 천지로 약탈 행렬을 자행하기 시작, 프랑스 전역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는다. 프랑스군은 모롱 전투(1352년 8월) 등 몇 차례 똑같은 방식으로 덤볐지만 잉글랜드군의 필승 패턴에 막혀 군대만 꼬라박기 일쑤.
3.3.5. 교황의 중재로 휴전(1346 ~ 1355, 10년간), 흑사병 창궐
이런 가운데 양측은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중재로 1355년까지 휴전 협정을 맺는 문제를 협상했고, 그 와중에 흑사병이 널리 퍼지자 아예 영구적인 평화 협정을 맺자는 이야기도 나오게 되었다. 휴전 협정 교섭 중 필리프 6세가 사망했고(1350) 그 뒤를 이어 장 2세(1350~1364, 선량왕)가 즉위했다.
1354년 아비뇽에서 영구적인 평화 협정을 맺는 문제를 논의하는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는 장 2세에게 프랑스 왕위를 포기하거나 그 대신으로 아키텐 영토의 인정 및 투레인, 앙주, 메인 등의 영토를 할양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장 2세는 이를 거부했고 이듬해 1355년 다시 전쟁이 재개되었다.
3.3.6. 흑태자 에드워드와 푸아티에 전투 (1356년): 잉글랜드 승리
전투가 재개되자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인 흑태자 에드워드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은 프랑스를 약탈하며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나아갔고, 마침내 율리우스력 1356년 9월 19일, 푸아티에에서 흑태자의 잉글랜드군과 장 2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의 일전이 벌어졌다. 당시 프랑스군의 병력이 잉글랜드군보다 세 배나 많았기 때문에 장 2세는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그 후로는 통치 질서가 붕괴되고 따라서 국방이 약화되어 프랑스인들에게 끊임없이 재난과 불행, 그리고 위험이 다가왔다.
14세기 중반 프랑스의 연대기 작가
그러나 아버지 못지않게 무능했던 장 2세는 기사들에게 말에서 내리고 각종 장애물이 가득한 언덕을 향해 개돌하도록 지시하는 짓을 저지른다. 미리 정찰병을 보내서 '넝쿨과 가시덤불 등 자연 장애물 때문에 진입로가 제한돼 있고, 정면에 뚫린 진입로는 기병 4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데다 잉글랜드 기사들이 집중적으로 배치돼 있다'는 상세한 보고를 받고 이에 대한 대책을 준비한 것은 좋았으나, 내놓은 작전이란 것은 기병이 진입하기 어렵다면 두 발로 걸어서 화살비를 맞아가며 가시덤불을 헤치고 산울타리를 통과해서 언덕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적과 교전하는 것이었다. 결국 프랑스군은 세 배나 많은 전력에도 불구하고 참패하고 말았고, 장 2세를 비롯한 프랑스군 지휘부가 대거 포로로 사로잡히고 만다.
흑태자는 장 2세를 극진히 대우하긴 했지만 결국 몸값은 다 뜯어냈고, 심지어 프랑스가 몸값을 지불할 돈이 없자 장 2세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직접 잉글랜드로 건너가 스스로 포로(!)가 되는 모습을 보여줬다. 좋게 말하면 대인배지만 왕으로서는 확실히 글러먹었다.
프랑스에선 왕까지 사로잡히자 장 2세의 아들인 샤를 왕세자(뒤의 샤를 5세, 현명왕)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삼부회의 평민 의원들은 에티엔느 마르셀을 중심으로 ''''국왕이 국정 운영하지 못하게 하자''''라는, '시대를 너무 앞서나간 제안'을 하는 바람에 1년여에 걸쳐 협상을 끝에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결국 평민 의원들과 협상을 포기한 샤를 왕세자는 자신을 국왕 섭정으로 선포하고 1358년 프로방스와 콩피에뉴에서 별도의 삼부회를 소집해 군자금을 확보했다. 농민들에 의한 자크리의 난이 일어나자 샤를 왕세자는 이를 평정하고 파리로 쳐들어가 파리를 포위하고 파리 내에 내분을 유도해 에티엔느 마르셀을 척살하는 데 성공했다.
곧 휴전 기간이 끝나면서 전쟁이 재개됐지만, 프랑스군이 결전을 피하고 지연전을 벌이는 동안 잉글랜드군 진영에 전염병이 도는 바람에 에드워드 3세는 어쩔 수 없이 협상에 나서게 되었다. 1360년 에드워드 3세는 확장된 아키텐과 칼레(Calais), 퐁티웨(Ponthieu)와 푸아투(Poitou)를 보장받는 대신 프랑스 왕을 칭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렇게 해서 전쟁이 끝났다.
한편 장 2세는 1364년 런던에서 죽었다.
3.4. 제2기(1369~1389)
3.4.1. 끝나지 않는 전쟁과 프랑스의 재기(1360~1366)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 북부에는 잉글랜드, 가스코뉴, 에스파냐, 나바라, 독일, 스코틀랜드 등 온갖 지역에서 몰려온 자유계약 용병들[17] 이 프랑스의 마을과 요새를 점거하고 주민들에게서 보호비를 갈취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1360년 브리타니 조약으로 전쟁이 종결되면서 이들은 모두 일자리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동시에 프랑스인들에게서 돈을 뜯어낼 명분도 잃어버린다. 그러나 이들은 얌전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신, 그랑드 콩파니(Grandes Compagnies)라고 불리는 대군세를 이루어서[18] 남동쪽으로 행군하며 프랑스 동부를 초토화시키기 시작했다. 결국 브리네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는 교황이 거주하고 있던 아비뇽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교황에게서까지 보호비를 뜯어내는 업적을 달성한 다음, 유명한 잉글랜드인 용병 존 호크우드를 비롯한 군대의 절반 가량은 아비뇽의 교황에게 고용돼 이탈리아 등지에서 교황의 적들과 싸우게 되었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프랑스 각지로 흩어져서 이전처럼 계속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프랑스 민중과 지방 중소귀족들의 미래는 여전히 암울해보였다.
하지만 이는 프랑스 왕국과 샤를 5세에게는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 약탈을 일삼는 이들 용병 무리를 진압할 정규군을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1363년부터 마침내 주민세(fouage)가 시행된 것이다. 1363년 11월 아미엥에서 소집된 삼부회는 그랑드 콩파니라는 국가적인 재앙에 맞서 "우리 왕국을 방어하는 데 필요한 6천 명의 전사(맨앳암즈)를 상시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의 몫을 부담하며(le fort portant le foible) 가구 소득에 따라 최하 1프랑에서 최고 9프랑까지 평균 3프랑의 주민세를 부과[19] 한다는 데 동의했다.
샤를 5세와 6세 시기 프랑스 왕실의 연간 조세수입은 이전의 3~5배인 200만 프랑 내외에서 최대 240만 프랑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0] 참고로 전신갑옷과 각종 무기와 2~3필 이상의 군마를 소유한 맨앳암즈 6,000 + 준마나 조랑말을 탄 경기병과 승마궁수 18,000 + 조랑말을 탄 종복 6,000으로 구성된 기병대 3만의 365일치 봉급이 186만 프랑이었다. 샤를 5세는 이후 10년 이상 잉글랜드와 전쟁을 벌였음에도 1380년 사망했을 때 아들인 샤를 6세에게 상당한 액수의 유산을 남겨줄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는 프랑스 역사상 최초로 통일적이고 정기적인 조세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프랑스 재정사의 한 전환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처음 2~3년 동안은 프랑스군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었던 용병 도적떼들은 현지 주민들의 비협조와 방해, 내부 분열을 겪으며 서서히 프랑스군에 매수되거나 진압됐다.
3.4.2. 프랑스의 반격과 재정복(1366~1389)
1366~1369년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 분쟁에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둘 다 끼어들면서 전쟁이 재개되었다.
푸아티에 패전 이후 잉글랜드군이 프랑스 전역에서 깽판을 치고 다니던 시기에 게릴라 전술로 전공을 세워서 명성을 얻었던 기사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때부터 프랑스의 총사령관으로서 활약했다. 브르타뉴의 최하층 신사 집안 출신 용병대장이었던 게클랭은 탁월한 게릴라 전술을 바탕으로 약탈 행위를 거듭하는 잉글랜드군을 기습하여 격파했다.
물론 그 상황에서도 먼치킨 유닛 흑태자 에드워드는 각지에서 프랑스, 카스티야군을 쳐바르면서 다녔지만[21] 건강이 악화되어 후기에는 가스코뉴 지방에만 웅거했고 그 사이에 게클랭은 다른 잉글랜드 군대를 청야전술과 게릴라전으로 괴롭히는 한편 착실히 잉글랜드군이 점령한 프랑스 성채를 회복했다.
장 2세의 뒤를 이은 샤를 5세와 게클랭의 노력으로 프랑스는 1380년대에 이르러서는 '''노르망디와 가스코뉴를 제외한 기존 영토를 거의 다 회복했다'''. 이런 와중에 때마침 흑태자 에드워드가 병에 걸려 죽었다(1376).
브르타뉴는 1364년 올레 전투에서 결국 친영인 몽폴 세력의 승리로 끝났다. 최후의 결전에서 샤를 드 브로와가 사로잡히고, 게클랭이 포로가 되면서(!) 잔느 여백작은 승계를 포기했고, 결국 몽폴의 아들 장 4세가 브르타뉴의 공작으로 프랑스와 화해했다. 그러나 장 4세가 몰래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으려고 했던 것이(1372년) 발각되면서 장 4세는 다음해 추방되고 브르타뉴는 프랑스의 직속영지(1378년)가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자 잔느 여백작까지 브르타뉴의 독립을 위해 들고 일어나면서(!) 샤를 6세의 즉위에 따라 1381년 장 4세가 다시 복귀했다.
전황이 불리한 가운데 재정적자에 시달리던 잉글랜드 의회는 극빈자를 제외한 왕국의 모든 신민에게 인두세를 부과하는 조치를 취했고, 결국 1381년 5월 분노한 평민들(농노나 하층 임노동자들만 들고 일어난 것이 아니라 자유민 부농과 도시 장인들, 그리고 자의든 협박에 의해서든 젠트리 계층도 많이 가담했다)로 구성된 수만 명의 반란군이 런던으로 진격했으나(와트 타일러의 난) 지도자인 와트 타일러가 협상 자리에 나갔다가 런던 시장에게 살해당함으로써 진압되었다.
1385년 5월에는 장 드 비엔느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군(맨앳암즈 1,000명, 그리고 전원이 기병으로 추정되는 궁수 500명과 나머지 보조병들)이 스코틀랜드에 상륙했고, 그해 가을 스코틀랜드군 4,000(맨앳암즈 1,000명, 경기병 3,000명)과 연합해 잉글랜드 북부 노섬벌랜드를 침공했다. 대륙 영토를 대부분 상실한 데 이어 본토를 공격당한 것에 위기감을 느낀 잉글랜드는 맨앳암즈 6,000, 장궁병 6,000으로 주력 전투병만 12,000, 보조병 포함 2만 명 이상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반격에 나섰고,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를 포함해 로우랜드 지방의 대부분을 약탈하고 불태웠지만 연합군이 결전을 회피하고 지연전을 벌이는 동안 겨울이 다가오자 결국 보급 문제로 회군했다. 하지만 삼촌인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이 왕위를 노리지 않을까 우려하던 리처드 2세가 공작을 견제하기 위해 원정을 일찍 중단한 것이라는 소문이 당대에 돌았다.[22]
한편 스코틀랜드 측에서는 이 잉글랜드 원정이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닌 프랑스의 이득을 위한 전쟁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원정군의 지휘관으로 온 귀족들을 강제로 억류한 채 프랑스 왕실에 피해 보상금을 요구했고,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의하면 이 사건으로 프랑스에서는 "잉글랜드와 2, 3년 정도 평화조약을 맺고 스코틀랜드를 침략해서 완전히 파괴하자"는 여론이 생겼을 정도로 동맹국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1392년의 아미앵 회의와 1393년의 루랑쟝 협상, 1396년의 아르들 회의로 잉글랜드와 프랑스 양국은 적대행위를 종결하고 이후 1415년까지 평화가 이어졌다. 그러나 이 화평을 빌미로 잉글랜드는 내전이 벌어지니...
3.5. 양국의 내전과 전쟁의 재개(1390~1415)
3.5.1. 잉글랜드의 내전 → 랭커스터 왕조의 설립(1399)
흑태자의 요절에 이어 에드워드 3세도 사망하자(1377) 흑태자의 아들 리처드 2세가 즉위했으나, 인두세 문제로 잉글랜드는 내전에 휩싸인다.[23] 화평이 대강 종결되고 나자 리처드 2세는 반격에 나서 글로스터 공과 알란델 백작을 처형(1397년)했으나, 아일랜드 원정에 빈틈을 보이며 결국 패배해 런던 탑에 유폐되었다. 그렇게 랭커스터 공작 헨리 4세가 왕위에 올랐다(랭커스터 왕조, 1399년). 잉글랜드 중부의 노섬벌랜드와 웨일즈, 웨일즈 근처의 변경 영주들이 헨리 4세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헨리 4세는 치열한 전투 끝에 이들을 제압했다.
3.5.2. 프랑스의 내전(1407~1435)
한편 프랑스는 샤를 5세(재위 1364~1380)의 아들인 샤를 6세(재위 1380~1422, 친애왕)가 발작으로 미쳐버렸다.
결국 부르고뉴파[24] 와 아르마냑파[25] 가 섭정 후견의 실권을 두고 박터지게 싸우기 시작했다. 부르고뉴 공작과 오를레앙 공작은 모두 왕의 방계 후손이었다.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와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는 숙부와 조카 사이였다.
두 파벌의 정쟁은 결국 극단으로 치달아, 1407년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 1세[26] 가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재무장관 겸 아키텐 총독)[27] 를 살해하면서 내전이 터지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전이 발생한 주된 원인은 샤를 5세가 지난 세대 동안 공들여 이룩한 중앙집권화된 왕권이었다. 당시 부유한 백작령이나 공작령의 연간 조세수입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2~30만 프랑 전후에 불과했던 반면에, 프랑스 왕실의 수입은 200만 프랑을 넘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 유력한 파벌이 정권을 장악하고 국고를 전용하기 시작하면 반대 파벌과 어마어마한 격차가 벌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마음만 먹으면 모든 경쟁상대를 간단히 말려죽일 수 있었다.
실제로 1404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가 죽은 직후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가 각종 연금과 증여 수익을 독점했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르고뉴 공작이 된 장 1세는 중앙 권력에서 밀려나면서 심각한 재정위기를 겪었다. 이런 이유로 장 1세는 사촌을 암살한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오를레앙 공작의 심복들은 수사 끝에 암살자들이 부르고뉴 공작과 접촉한 정황을 밝혀냈다. 오를레앙 공작의 시종이 회의에서 저택 수색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자, 부르고뉴 공작 장 1세는 자신이 '악마의 꾐에 빠져서' 사촌의 암살을 지시했음을 자백하고는 자신의 영지인 플랑드르로 달아났다.
이후 벌어진 내전의 초기 전황은 아르마냑파에 유리하게 흘러갔다. 1414년 아르마냑파는 부르고뉴를 침략해서 장 1세를 끌어내겠다고 공언할 정도로 기세가 올랐다. 하지만 바로 그때 잉글랜드의 헨리 5세가 아르마냑파에 선전포고를 해왔다.
3.5.3. 교황청의 분열
같은 기간엔 교황청마저도 분열되었다(...). 1378년 로마로 돌아간 교황의 후계가 누가 정통이냐는 문제가 불거져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의 아비뇽 교회(친프랑스)와 교황 우르바노 6세의 로마 교회(반 프랑스)로 대립되었다.[28] 자, 이제 대체 누가 화해를 주선할 것인가?
전쟁은 다시 시작되었다.
3.6. 제3기(1415~1453)
3.6.1. 아쟁쿠르 전투(1415년): 잉글랜드 승리
헨리 4세(재위 1399 ~ 1413)의 뒤를 이은 헨리 5세(재위 1413 ~ 1422)는 의회의 지지를 끌어내고 세력 정리도 할 겸 이 기회에 다시 내분에 빠진 프랑스를 공격했다. 1415년 부르고뉴 공작파와 친교를 맺고 또 노르망디에 상륙한 헨리 5세는 칼레까지 진군했고 샤를 6세(정확히는 샤를 달브레 장군의 대행)도 여기에 맞서서 응전을 준비했는데 에드워드 3세가 처음에 겪었던 일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지친 잉글랜드군을 향해 프랑스군이 집결해 공격한 것...까진 좋은데 1415년 벌어진 이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크레시 전투처럼 처절한 삽질을 거듭하다 패한다. 안 그래도 점성 높은 아쟁쿠르의 진흙탕(뻘밭)+장마비에 병목지형으로 프랑스군이 우르르 밀려드는데 잉글랜드군이 장궁으로 반격하자 밀려난 부대가 뒤로 '''후퇴하다가 뒤섞여버린 것'''. 그래도 프랑스군은 어떻게 잉글랜드군 본진까지 밀어붙이긴 했는데 프랑스 하마 기사들이 잉글랜드 하마 기사들과 싸우다가 잔뜩 지친 가운데 경무장한 잉글랜드군 궁수들이 측면을 쳐서 프랑스군을 격파해버렸다. 총사령관인 샤를 달브레도 여기서 전사했다.
3.6.2. 파죽지세 잉글랜드군 →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의 급사(1422)
부르고뉴파의 도움까지 얻은 잉글랜드군은 베르네유(Vernile)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29] 이어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1세[30] 의 지원군을 격파하며 승기를 확실히 잡았다. 1418년 부르고뉴 공작 장 1세가 파리를 점령하자 샤를 황태자는 파리에서 도망쳤다.
1419년 샤를 황태자의 계책으로 부르고뉴 파는 잠시 이탈했으나, 당사자인 부르고뉴 공작 장 1세가 거리에서 오를레앙 파에 암살되었다. 그의 아들인 선량공 필리프 3세는 잉글랜드에 확실히 달라붙게 되었고 결국 1420년 프랑스 왕비 이자보가 샤를 6세가 죽으면 자기 아들인 샤를 황태자 대신 사위인 헨리 5세에게 계승권을 준다는 트루아 조약을 체결했다. '''헨리 5세가 골골한 샤를 6세에 이어 프랑스의 앙리 2세가 될 수 있던 순간이었다'''. 프랑스는 당시 앙리 1세만 있었으니까. 헨리 5세가 샤를 6세보다 18살이나 어렸고 완전 무골이라서 두 말 할 것 없이 건강했었기 때문에 이 점을 확신했다.
그러나 1422년 헨리 5세가 35살의 나이에 이질로 급서하고 '''9개월 젖먹이''' 헨리 6세(재위 1422~1461)가 왕위에 오른 것이었다. 그리고 샤를 6세는 그로부터 정확히 2개월 후에 사망했고, 그 후 프랑스 왕위는 1429년에 샤를 7세가 즉위할 때까지 잠시 공석이 되었다. 샤를 6세도 사망하면서 외손자 헨리 6세가 조약에 따라 최초의 잉프 공동왕이 되었지만 트루아 조약 자체도, 그러고 무엇보다 11개월짜리 아기가 잉프 공동왕이 된다는 건 현실성이 떨어졌다.
3.6.3. 풍전등화의 프랑스: 잉글랜드군의 루아르강(프랑스 왕의 본거지)까지 남하(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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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잉글랜드 프랑스 전황 지도.
하지만 잉글랜드는 아직도 여러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잉글랜드는 언플로 샤를 황태자가 샤를 6세의 친자가 아니고 오를레앙 공작과의 스캔들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퍼트렸다. 그렇기에 트루아 조약이 성립이 가능했다는 논리였고 또 오를레앙 공작의 땅에 있는 샤를 도팽의 세력을 약화시키기에도 매우 적절한 선전이었다.
거기에 잉글랜드는 또 하나의 정통성의 이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랭스였다. 프랑스 왕은 대대로 파리가 아닌 대성당이 있는 랭스에서 대관식을 했는데 샤를이 정식으로 프랑스 왕권을 주장하려면 파리뿐만 아니라 랭스까지 회복을 해야 할 판이었다. 덧붙이면 프랑스는 아비뇽 교회마저도 교황이 난립하는 반면 잉글랜드는 어떻게든 한 명의 로마 교황이 있었다. 게다가 오늘날 가톨릭에선 분열시대의 아비뇽 교황은 정통 교황이 아닌 대립 교황으로 본다.
게다가 잉글랜드군은 아직 건재했다. 쐐기를 박기 위해 섭정인 랭커스터 공작 베드포드 존과 글로스터 공 험프리는 남진을 계속했으며 기어이 1428년에는 샤를의 본거지가 목전인 루아르 강까지 남하했다.
잉글랜드군의 다음 목표는 오를레앙이었다. 오를레앙은 앞서 말했듯 샤를을 돕는 마지막 대영주의 요충지로서 함락될 경우 루아르 강을 건너 황태자인 도팽[31] 샤를(샤를 7세, 재위 1422~1461, 도팽 즉위는 1417년)의 본거지인 시농까지 점령이 가능했다. 말 그대로 여기까지는 프랑스 왕국의 사망 플래그였다.
하지만 그렇게 잉글랜드군이 주변 요새를 전부 다 무력화 시키고 오를레앙을 꿀꺽하려던 순간 '''한 인물이 등장하였으니...'''
3.6.4. 잔 다르크의 오를레앙 전투(1429): 프랑스 승리
바로 그 유명한 '''잔 다르크'''. 잔 다르크와 프랑스군은 성공적으로 오를레앙에 입성한 뒤 '''농성이 아닌 야전으로''' 잉글랜드를 몰아내버렸다(1429년 5월). 오를레앙 공방전의 승리 이후 잔 다르크는 1429년 6월 파타이 전투에서 전설적인 명장 탈보트 경의 군대마저 아쟁쿠르와 똑같은 방식으로 역관광을 시켰고 심지어 '''트루아와 랭스까지 함락시키면서(1429년 7월)''' 부르고뉴를 관광시켜버리고 샤를을 정식 프랑스 왕 샤를 7세로 즉위시키면서 전장의 추를 프랑스 쪽으로 돌려놓는다.
3.6.4.1. 잔 다르크 사로잡힌 뒤, 화형(1431)
잔 다르크 자신은 파리까지 수복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일단 왕위에 오른 뒤 상황을 안정시키려던 온건파 샤를 7세와 기존 프랑스 귀족의 견제를 받다 파리 탈환의 기회를 놓쳐버린다. 더불어 잔 다르크는 1430년 5월 콩피에뉴 전투에서 사로잡혀 1431년 루앙에서 화형당했다. 잔 다르크(1412~1431)가 '''활약한 시간은 채 2년이 되지 않지만 백년전쟁에서 잔 다르크의 역할은 지대하다.'''
잔 다르크의 승리 요인으론 역시 프랑스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다는 것. 잔 다르크의 추종자 중 한 명이었던 뒤노아 경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군 1,000명이 잉글랜드군 200명만 만나도 튈 정도로 심각한 모랄빵 상황이었는데 잔 다르크의 등장 이후 이것이 사라졌다고 한다. 아마 성처녀라는 이미지에 스스로도 몸을 사리지 않고 싸우는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여기에 장 뷔로를 비롯한 유수의 대포 전문가의 활약도 들긴 하는데 대포가 활약하려면 좀 더 시간이 지나야 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이유는 아닐 것 같다.
3.6.5. 프랑스의 승리(1435 ~ )
3.6.5.1. 부르고뉴 공작과 프랑스왕의 화해(1435)
1435년 아라스 조약으로 그동안 앙숙이던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3세가 프랑스왕 샤를 7세와 화해하고 잉글랜드의 동맹을 단절하면서 더이상 프랑스 내에서의 친 잉글랜드 세력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 조약에 따르면 샤를 7세는 마콘 백작령, 폰티우 백작령, 오세르 백작령 및 아미앵, 기타 도시의 영유권을 필리프 3세에게 양도하고 왕에 대한 종속의 예를 평생 면제하였다. 반면 필리프 3세는 잉글랜드의 동맹관계를 정식으로 파기하였으며 그 결과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냑파의 다년간에 걸친 항쟁에 종지부가 찍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잉글랜드는 프랑스 내 동맹을 잃었기 때문에 백년전쟁 종결을 위한 조건이 정비되었다. 그리고 잉글랜드를 손절하며 독립각을 잡던 부르고뉴는 용담공의 전사로 프랑스에게 합병당한다.
3.6.5.2. 파리 수복(1436)
이후 프랑스군은 아르튀르 드 리슈몽 경과 라 이르 같은 장수들의 활약으로 1436년 파리를 수복하고 1437년 파리를 다시 프랑스의 수도로 삼았다. 이후 전세를 역전해 본격적으로 잉글랜드군을 몰아내기 시작했는데 당시 잉글랜드군은 설상가상으로 요크파와 랭커스터파의 대립이 슬슬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어서 제대로 전력 투입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32]
3.6.5.3. 프랑스의 영토수복(1441 ~ 1453)
프랑스군은 1441년 상파뉴를 수복하고 1450년 포미니(폴미니) 전투에서 대포를 이용하여 잉글랜드군을 격파했다. 사실 대포 자체가 살상력이 어마어마했다기보다는 프랑스군이 대포로 포격하자 잉글랜드군이 장궁으로 언덕 위에서 버티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그 상황에서 우세한 프랑스 병력과 기마대에 쳐발리는 식이었다. 포미니 전투를 끝으로 오랫동안 잉글랜드령이었고 잉글랜드 왕의 근거지였던 노르망디[33] 마저 프랑스 손에 떨어졌으며 앙주 일대 멘까지 수복했다.[34] 뒤이어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서 장 뷔로가 이끄는 군대가 마지막으로 탈보트 경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의 분전을 분쇄하고 보르도 시를 포함한 가스코뉴를 점령,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전역에서 잉글랜드군을 몰아내버렸다.
3.6.5.4. 백년전쟁의 끝(1475): 노르망디와 아키텐의 영유권 포기
나약한 헨리 6세가 칼레를 지키기 위해 잃어버린 노르망디와 아키텐 영지의 영유권을 포기하면서(1475년) 잉글랜드는 더 이상 프랑스에 전쟁을 걸 명분을 상실했고, 이것이 백년전쟁의 끝이었다. 샤를 7세는 나라를 구원한 승리왕으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칼레[35] 는 1558년까지 잉글랜드의 영토로 남아 있으면서 잉글랜드산 양모를 집산하는 항구로 기능하면서 재정 수입의 35%를 담당하는 노른자 땅이었지만, 이후 잉글랜드의 메리 1세가 남편 펠리페 2세를 도와 스페인과 함께 프랑스와 전쟁했다가 이 지역을 빼앗기고 만다. 이후 되찾지 못하면서 잉글랜드는 진짜로 섬나라가 되었다가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을 계기로 지브롤터를 차지하면서 유럽 개입 교두보를 다시 확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4. 의의: 중세 봉건시대의 종언과 절대왕정의 시작
백년전쟁을 통해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분화가 완료되었다.
13세기 이전에는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왕도 다르고 정치 체계도 달라도 딱히 서로를 구분하지 않았다. 예컨대 프랑스 귀족이 잉글랜드 귀족이기도 했고 잉글랜드 왕의 측근이 프랑스에 영지를 갖고 있고 프랑스에 영지를 갖던 귀족도 잉글랜드 국왕 편을 드는 등.
존 왕이 프랑스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하고, 잉글랜드의 상인들이 어느 정도 자본을 축적하고 이탈리아, 플랑드르의 외국 상인들과 본격적인 무역분쟁을 시작한 헨리 3세 시절부터 잉글랜드인의 국민 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1세는 고대에 브리튼섬 전체를 통치했다는 전설적인 브루투스 왕과 아서 왕의 후계자를 자칭하며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지배권을 주장했고, 필리프 4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영어 사용을 금지시킨다는 '주님께서도 눈을 돌리실 혐오스러운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전시 프로파간다를 퍼뜨리며 잉글랜드의 신민들의 지지를 요구했다. 이렇게 싹트기 시작한 국가의식은 백년전쟁이 시작되고 에드워드 3세와 헨리 5세의 크레시, 푸아티에, 아쟁쿠르에서의 기적적인 대승으로 주입된 국뽕과 그럼에도 결국 자신들을 패배시킨 프랑스인들에 대한 적개심에 의해 가속화되었다.
잉글랜드인의 호전성과 국뽕은 이후에도 유럽 전역에서 유명했고, 헨리 7세 치세에 잉글랜드인들은 '외국인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있으며 외국인들이 그 섬나라로 들어오는 것은 오로지 그 섬을 지배하고 자신들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고 일컬어졌다.
필리프 2세 이후 프랑스 왕들은 중앙집권을 시도하며 왕권을 강화해갔다. 푸아티에 전투에서의 삽질 때문에 흔히 보수적이고 무능한 이미지로 알려진 장 2세도 군대의 지휘계통을 왕권 아래로 통합하는 군제개혁을 시도했다. 이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백년전쟁을 프랑스 왕권의 영향력 확대에 위협을 느낀 독립세력들의 최후의 저항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14세기 초의 대기근과 14세기 중엽의 흑사병을 극복하고, 백년 동안 간헐적으로 이어진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이후 프랑스는 본격적으로 왕권을 강화해갔다. 샤를 7세는 정부 조직을 재편하고 고등법원을 일부 지방에 설치했으며, 1438년의 부르주 칙령으로 프랑스의 교회가 교황청이 아닌 왕의 직속에 가깝게 되면서 왕권(특히 세금)이 증대되었다. 또 1448년에는 새로운 상비군 조직이 완료되었다. 루이 11세(재위 1461 ~ 1483) 때에는 부르고뉴 공의 군대가 먼치킨 스위스 용병대에게 쳐발리자 프랑스는 부르고뉴·오를레앙·브르타뉴에 이어 앙주, 프로방스를 차례로 직속으로 흡수했다. 프랑스군은 스위스 용병을 적극적으로 고용하고 포병 전력을 증강시켜 1500년대 초에는 유럽 최강국으로 떠오른다.
잉글랜드는 잉글랜드대로 카스티용 전투에서 탈보트 경이 전사하자 더이상 요크 가문을 견제할 세력이 사라졌고 나약한 헨리 6세하에서 양 세력은 장미전쟁으로 격돌한다.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을 거쳐 잉글랜드도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게 되고 그렇게 하여 등장하는 왕가가 바로 튜더 왕조다. 추가로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프랑스 내의 영토를 상실하게 된 잉글랜드는 대륙국가에서 완전한 섬나라/해양국가화 하게 되었고, 잉글랜드가 본의 아니게 해양진출에 목매게 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36] 이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면서 잉글랜드는 섬나라의 특성을 살려 맹활약, 이 과정에서 산업혁명을 이루어내며 막강한 해군력과 식민지를 통해 얻은 풍부한 자원으로 전 세계의 패권을 쥐어나갔다. 백년전쟁의 패배가 잉글랜드에게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된 셈이다. 물론 잉글랜드가 이 시기에 프랑스 영토 정복에 성공했었더라면, 혹은 애초에 존 왕이 원래 물려받았던 프랑스 영토들을 잃지않고 유지만 했었더라면 그 풍족한 생산력을 바탕으로 유럽 및 세계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는 또 몰랐겠지만 말이다.
결국 백년전쟁은 양국 모두에게 중세 봉건시대의 종언과 절대왕정의 시작을 알리는 심대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19세기 초엽[37] 까지 가는 오랜 라이벌 대결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우연히도 같은 1453년에 동쪽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게 함락당하면서, 1453년은 중세와 근세를 가르는 분기점이 된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사이가 극도로 안 좋아지게 된 역사적인 계기라고 볼 수도 있다. 하긴, 백 년도 넘어가는 기간 동안 전쟁을 했으니 과연 국민감정이 좋을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건 전쟁을 했던 수많은 국가들의 외교관계가 다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20세기에 들어오면서 2번의 세계대전 때 공공의 적인 나치 독일을 상대로 같이 싸웠던 연합국으로 동맹관계였고, 19세기까지에 비하면 사이가 많이 좋아졌다.
그래도, 부분적으로 축구 국가대항전 A매치나 국제 스포츠대회라도 열리게 되면 '''"딴 새끼들은 몰라도 저 새끼들만큼은 우리가 무조건 꺾어야 된다!"'''라면서 서로를 강하게 비방하고 싸우는 것이 현실이다.[38] 그래서, 아직도 영불관계에서 설문조사를 해보면 아니나다를까 '''"영국과 프랑스가 가장 싫어하는 국가"'''로 여전히 서로를 지목하는 경우도 간간이 있다.
5. 봉건적 군사제도의 종결
12세기 말부터 시작된, 군복무를 대가로 특권을 누리는 전사귀족으로서의 기사의 몰락 역시 백년전쟁에서 본격화되었다. 상업과 화폐 경제가 발전하면서 고전 장원제는 12세기부터 해체되기 시작했고 장원의 수익은 계속 감소해왔지만, 14세기 이후에는 그 부족한 수익마저도 중앙집권화된 왕권의 정책에 좌우되기 시작했다.
중무장 전사는 여전히 전쟁의 주역이었고 명예로운 지위로 여겨졌으며 상당수는 귀족출신이었지만, 이전과 달리 귀족신분과 동일시되지는 않았다. 예를들어 1393년 샤를 6세의 칙령은 "전쟁에 복무하며 귀족다운 삶(중무장 전사로서 참전하는 것)을 사는 귀족이 아닌, '''상업에 종사하는 귀족 가계 출신의 귀족'''은 조세에 관한 한 비귀족과 동등하게 취급하여 세금을 면제받지 않는다"고 포고했다. 군인이 아니더라도 국왕과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봉사할 수 있으면 덜 명예로운 방식이기는 하지만 귀족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 자체는 적어도 12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었고, 더 넓게 보면 11세기에서도 기원을 찾을 수 있지만 백년전쟁이 없었더라도 기존의 역사와 같이 진행되었을지는 불확실하다.
1350년대 프랑스의 유명한 궁정기사였던 조프루아 드 샤르니(푸아티에 전투에서 전사)는 저서인 <마상창시합, 토너먼트, 그리고 전쟁에 대한 질문들>(Demandes pour la joute, les tournois et la guerre)에서, '개인의 영광을 좇아 지휘관의 명령을 어긴 군인이 계약상의 급료를 요구할 자격이 있는가?'를 '''좋은 토론 주제'''로 보았다. 그러나 1380년대 법학자 오노레 보네는 군인은 왕이나 왕이 임명한 지휘관의 명령에 반드시 복종해야 하며 목숨을 걸고 군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1374년 샤를 5세가 제정한 군사법령에도 이러한 인식이 반영돼 있었다.
잉글랜드의 하층 신사 집안 출신인 존 찬도스는 흑태자의 최측근이자 푸아투의 사령관이 되었고, 브르타뉴의 가난한 최하층 신사 집안 출신 용병대장이었던 베르트랑 뒤 게클랭은 프랑스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출신이 불명확한 용병대장 로버트 놀리스는 기사작위를 받기 전부터 기사들을 부하로 거느리고 있었다. 심지어 백년전쟁을 끝낸 프랑스의 영웅은 잔 다르크라는 시골 소녀였다.
6. 여담
- 각종 중세배경의 게임, 소설에 수많은 영감과 이미지를 제공하는 전쟁이다.
- 이전에도 용병들의 비중이 낮지는 않았으나, 특히 유럽내에서 용병들이 대활약을 시작하는 전쟁이다.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중세시대 최고의 사치품이었던 플랑드르 지방을 지배하면 얼마든지 돈을 뽑아낼 수 있었기에 앞다투어 용병들을 고용하고, 이로 인하여 십자군 전쟁 이후 호황을 맞이한 용병들이나 가뜩이나 발전한 이탈리아 공국들의 은행업이나 유럽의 자본이동이 더욱 크게 발달한다.
[1] 같은 시기 동유럽에선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튀르크에 의해 멸망하면서 큰 변화를 겪는다.[2] 루이 14세 시절부터 나폴레옹 1세가 프랑스에서 쫓겨날 때까지 114년의 기간을 자랑한다.[3] 1328년 프랑스 왕실 재무부는 과세 대상 가구 조사에서 세금이 면제된 대귀족과 왕족들의 영지를 제외하고 2만 4천 개 교구의 247만 가구를 집계했다[4] 근대까지도 이 둘의 자존심 대결은 유럽 분쟁에서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이후로도 잉글랜드는 백년전쟁의 초반처럼 약탈대와 해적을 보내서 깐족거리며 유럽에 분란의 씨앗을 뿌리고, 대륙 국가인 프랑스도 비슷한 짓을 하지만 뭘 해도 명분을 찾아내서 대규모로 몰려다니는 모습을 보인다.[5] 살리카법은 애시당초 필리프 5세가 조카이자 정당한 왕위 계승자인 잔의 계승권을 빼앗으려고 1316년에 확대해석을 한 결과물이었다. 살리카법 참조.[6] 다만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의 왕위를 계승했다고 해서 백년전쟁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백년전쟁 자체가 후술할 다른 원인들도 작용했고, 당시 프랑스인들 사이에서는 잉글랜드 왕국이 낙후된 나라라는 생각이 보편화된 상태라서 에드워드 3세를 낙후된 나라의 군주로 취급해서 굳이 살리카법이 아니어도 에드워드 3세의 즉위에 반대했을 가능성이 높다.[7] 이는 프랑스 왕국의 봉작인 노르망디 공작으로서 프랑스의 봉신인 것이며, 잉글랜드 국왕이라는 작위가 프랑스의 국왕보다 하위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8] 오늘날에 비유해보자면, 프랑스라는 건물이 있고 잉글랜드라는 건물이 있다고 치자. 잉글랜드 국왕은 노르망디를 비롯한 프랑스 건물 내 상점에서는 임차인으로서의 권리만 행사할 수 있지만, 잉글랜드에서는 건물주로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단 이 건물들은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이 지켜지다못해 건물주가 잘못하면 임차인들에게 털릴 수도 있다.[9] 이는 중간기를 길게 잡았기 때문이다. 위키피디아는 1369년부터 1389년까지를 프랑스가 영토를 탈환하는 2기, 이후 잠시 휴전기를 두었다가 1415년부터 1429년을 잉글랜드 재우세의 3기로 보고 있고(즉, 사실상 다섯 국면의 구분이다), Osprey 출판사는 헨리 4세의 즉위년인 1399년을 기준으로 2기와 3기를 가르고 있으나 이는 잉글랜드적인 기준에 가깝다.[10] 아르들 회의가 있던 해.[11] 잉글랜드가 제노바에게 보상금을 주고 프랑스 해군을 지원하지 말라고 한 게 영향을 끼쳤다.[12] 묘하게 '''바다에서 강한 잉글랜드'''와 '''육지에서 강한 프랑스'''라는 구도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때에도 이어졌다. 사실 프랑스 육군은 통일 상태의 독일을 제외하면 맞붙을 만한 규모의 상대가 별로 없다.[13] 이탈리아의 바르디와 페루치 가문이다. 잉글랜드 양모 수출 독점권과 여러 혜택을 조건으로 하여 에드워드 3세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 이를 통해 에드워드 3세는 전쟁 자금을 얻었고 두 가문은 막대한 이익을 얻고 다른 경쟁자들을 압도했기 때문에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었지만 에드워드 3세가 돈을 갚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엄청난 타격을 받아 두 가문 모두 몰락하고 만다.[14] 프랑스군은 제노바 용병 석궁병들이 석궁을 썼다. 먼나라 이웃나라의 대표적인 오류 중 하나다.[15] 말에서 내린 기사를 뜻한다. 절대 동물 하마를 타고 다니는 기사가 아니다![16] 필리프 6세는 크레시 전투 2달 전부터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동안 씹고있었다.[17] 프리컴퍼니(free company:자유부대) 또는 루티에(routiers:부대원들)라 부른다. 둘 다 그냥 용병대라는 뜻이지만, 루티에는 특히 백년전쟁 중기에 프랑스에서 악명을 떨친 잉글랜드 용병들(다양한 지역 출신들이었지만 주로 잉글랜드인들이 중심이 된)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자주 쓰였다. 루티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존 호크우드는 초기에 잉글랜드군 소속으로서 프랑스에서 프랑스인들을 털다가, 1360년 브리타니 평화 조약 이후에는 그레이트컴퍼니라 불리는 비적떼의 일원으로서 아비뇽의 교황을 털었고, 화이트컴퍼니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간 뒤에는 콘도티에레로서 이탈리아인들을 털었다. 결국 비스콘티 가문의 사생아를 아내로 얻고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살다가 평화롭게 생을 마감했다.[18] 단순히 머릿수만 많은 오합지졸도 아니고, 기사 등 맨앳암즈 3,000명과 보조병 9,000이 포함된 정예부대였다[19] 걸인이나 날품팔이 등 극빈층은 가구 수 산정에서 제외되었다.[20] 성백용, <14세기 후반~15세기 초 프랑스 왕정과 북부 도시들의 반란: 국가 재정의 문제를 중심으로>[21] 게클랭도 정면 대결에선 흑태자를 못 이겼다. 아니, 게클랭 자체가 정면 대결에서 승률이 영...[22] 결국 14년 뒤 존의 아들 헨리가 반란을 일으켜 리처드 2세를 끌어내리고 헨리 4세로 즉위한다.[23] 1380년 와트 타일러의 난이 일어나 일시적으로 런던이 점령되었고, 1387년의 라드콧 브릿지 전투로 국왕에 동조하는 화평파 귀족들이 반대파에게 크게 졌다.[24] 장 2세의 막내아들 호담공 필리프 2세로부터 시작된 가문이다.[25]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의 아들 샤를이 결혼한 아르마냑 백작가의 이름을 땄다. 후에 부르봉 왕가가 되는 부르봉도 이 파에 협력한다.[26] 플랑드르 백작을 겸임한 필리프 2세의 아들이었다.[27] 샤를 5세의 아들로 샤를 6세의 동생이었다.[28] 아비뇽 유수 문서의 서방 교회의 대분열 대목 참조.[29] 이 전투에서 본격적으로 플레이트 아머vs장궁 대결이 벌어지긴 했다. 일단 승리는 플레이트 아머. 근데 이탈리아 용병들은 잉글랜드군 측면을 공격한 게 아니라 본진을 털러 가다가 반격크리 먹고 달아나버렸다... 가우가멜라도 그렇고 라피아, 마그네시아 등등에서 발견되는 고전적인 패배 플래그인 듯 싶다.[30]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와는 다르다.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선 제임스 6세였다.[31] 직역하면 돌고래지만 여기서 사용되는 의미는 도팽 공작위를 뜻한다. 잉글랜드의 황태자에게 주어지는 작위인 웨일스 공과 마찬가지로, 도팽 공작의 칭호는 프랑스의 황태자에게 주어졌으므로 도팽은 프랑스 황태자를 일컫는다.[32] 나중에 둘이 본격적으로 격돌하는 게 장미전쟁이다.[33] 그런데 노르망디는 사실 필리프 2세 시절 프랑스가 잉글랜드의 존 왕으로부터 무력으로 빼앗았다가 100년전쟁 때 다시 잉글랜드에게 빼앗긴 땅이다.[34] 전통적으로 노르망디의 일부였던 채널 제도는 프랑스가 빼앗지 못해서 프랑스 본토 코앞에 있는 이곳은 영국의 영토로 확정된다. 조그만한 섬들이라 영국이 이곳까지 다스리긴 하지만 채널 제도는 노르망디 공작을 겸하고 있는 영국 왕실 영토이다.[35] 영국 본토에서 가장 가까운 프랑스 땅.[36] 돈이건 병사건 여유만 생기면 프랑스 영지 확대에 꼬라박던 것에서 벗어나 해양산업에 투자하기 시작한 것. 비슷하게는 전근대사회에서 돈 벌면 땅 사고 땅 사고 땅 사고 해서 땅값만 올릴 뿐 별 효과 없던 것에서, 공장을 짓건 주식을 사건 해서 돈을 불리는 것이 있겠다.[37]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후 1802년 아미앵 조약이 맺어지면서 영국 왕의 문장에서 백합이 삭제되었다. 물론, 충돌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다시 이어졌지만...[38] 물론, 축구판에는 사이가 좋은 국가들이 거의 없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