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더 왕조

 




'''Tudor Dynasty'''
[image]
'''국가'''
잉글랜드
'''본가'''
랭커스터 왕조
'''존속'''
'''창건'''
1485년 (헨리 7세)
'''최후'''
1603년 (엘리자베스 1세)
'''종교'''
가톨릭영국 국교회
'''성립 이전'''
요크 왕조
'''멸망 이후'''
스튜어트 왕조
1. 개요
2. 상세
2.1. 정통성 관련
2.2. 시대상
3. 왕가
3.1. 주요 인물
3.1.1. 국왕
3.1.2. 왕비
3.2. 그 외
4. 계보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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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역대 왕조 중 하나이자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 가문. 영국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절대 왕권'''이었다.
1485년, 헨리 튜더가 장미 전쟁을 끝내고 헨리 7세로 즉위하면서 시작되었다가 엘리자베스 1세 이후로는 직계 후손이 없어 단절되었다.

2. 상세



2.1. 정통성 관련


튜더 가문은 본래 웨일스의 미미한 가문이었다. 웨일스 공작가[1]의 방계후손이라곤 하는데 이미 몰락해서 한미한 가문이었고, 중앙정계에선 듣보잡에 가까웠다. 그런데 헨리 7세의 조부였던 오언 튜더가 프랑스 발루아 왕조 샤를 6세의 딸이자 랭커스터 왕조 헨리 5세의 미망인인 케서린을 부인을 맞이하며 듣보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헨리 7세의 아버지 에드먼드 튜더는 그의 이부 형이었던 헨리 6세로부터 공식적으로 형제임을 인증받았다.
무엇보다 헨리 7세가 왕위를 주장한 근거가 '넓게 보면 나도 플랜태저넷'[2]이라서 모계로 봐도 상당히 좀 거리가 있는 상태였지만[3] 헨리 7세는 요크 왕조에드워드 4세의 장녀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두 가문의 융합을 이뤘다. 이미 왕위에 등극할 무렵은 플랜태저넷 혈통들이 서로 죽이는 바람에[4] 그 후손들이 많이 도륙나 있었고 왕위에 위협을 끼칠 만한 왕족은 리처드 3세의 조카 워릭 백작과 링컨 백작이 남았는데 그나마도 철없는 소년들이라 큰 위협은 되지 않았다.[5]

2.2. 시대상


종교적으로는 헨리 8세가 가톨릭-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6]-청교도의 삼자 구도를 짜면서 아주 피곤한 시기였다.
경제적으로는 젠트리와 요크 세력이 성장하면서 상업이 발달하여 근대 자본주의 경제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대외적으로는 네덜란드스페인 세력을 물리쳐 해상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할 기초를 쌓았다.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대영제국의 시작을 알리면서 영국 정부의 재정이 건실해지던 시기였다.[7]
문화적으로는 토마스 모어, 존 던 등 지금도 영국에서 손꼽히는 문학가들이 활동했으며, 무엇보다도 영문학계의 본좌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이 시기 사람이다. 활발하고 진취적인 분위기의 튜더 왕조의 문화는 엘리자베스 1세의 이름을 따서 '엘리자베탄(Elizabethan)' 문화라고도 이름 붙여졌다.[8]
대체로 영국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시기'로 꼽힌다. 헨리 8세의 경우 막강한 왕권을 제멋대로 휘둘렀으나 복잡한 사생활과 결혼을 6번이나 한 덕에 대중적으로 많은 관심을 끌고있고 오늘날까지도 대중매체의 인기 소재로 자주 다뤄진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경우 영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왕 중 한 명이다. 이 탓에 영국에선 지금도 여왕이 즉위하면 나라가 잘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권리장전과 하노버 왕조 이후엔 왕이 정치에 큰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정치적으로는 영국 역사상 유일하게 왕이 의회를 권력으로 찍어누른 시대였다. 장미 전쟁은 오랫동안 권세를 누린 귀족간의 내전이었다. 전쟁후 귀족의 힘이 엄청나게 줄고 왕권은 아주 강해졌다. 헨리 7세부터 엘리자베스 여왕까지의 권력은 튜더왕조 이전에도 이후에도 꿈도 못 꿀정도로 막강했다. 당연히 프랑스보다 크지 않았지만 그래도 절대왕정이라 불릴만했다. 이때 국왕은 의회을 재정/돈, 군사 등으로 찍어누르고 마음대로 국정을 주도했다. 심지어 헨리 7세/헨리 8세, 그리고 엘리자베스 여왕 때 의회는 사실상 없는 것과 마찬가지었다.
이렇게 강력했던 절대왕권이 사라지기 시작한 건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된 후, 제임스 1세 시대의 중기부터였다.[9] 그리고 완전히 사라진 건 의회에게 완벽하게 패한 찰스 1세 때이다.

3. 왕가



3.1. 주요 인물



3.1.1. 국왕



3.1.2. 왕비



'''왕비'''
'''헨리 7세'''
요크의 엘리자베스
'''헨리 8세'''
아라곤의 캐서린 (이혼)
앤 불린 (참수)
제인 시모어(산후 사망)
클레페의 앤 (이혼)
캐서린 하워드 (참수)
캐서린 파(헨리 8세 사후 사망)

3.2. 그 외



4. 계보


헨리 7세
마거릿 튜더
제임스 5세
메리 1세(스코틀랜드)
제임스 1세(스튜어트 왕조)
헨리 8세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
에드워드 6세

5. 여담


유난히 극적인 일생을 살다간 인물이 많아 창작물의 소재로 자주 활용된다. 대표적으로 드라마 튜더스.
희고 붉은 꽃잎의 문장 유래는 다음과 같다. 1455년부터 1485년에 이르기까지, 잉글랜드는 두 가문의 왕좌 다툼으로 시끄러웠다. 붉은 꽃잎을 문장으로 삼은 랭커스터 왕조와, 흰 꽃잎을 문장으로 쓰던 요크 왕조의 싸움이었기 때문에 '장미전쟁'이라 불렸고, 이 30년의 전쟁으로 국토가 피폐해질 무렵, 흰 꽃잎과 붉은 꽃잎이 섞인 장미가 피어 결국 싸움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다만 장미전쟁이라 이름 붙인 건 후대 작가 월터 스콧이 처음이었고, 실제 시기엔 장미전쟁이니 하는 타령도 않았다는 게 통설이다.

[1] 에드워드 1세 시기부터 웨일스 공작이 왕세자의 직위가 되지만 그 전에는 웨일스 공국이 별도로 존재했었다.[2] 할머니는 프랑스 공주인데 영국과 프랑스 왕가는 혼인이 잦았기에 헨리 3세의 후손이며, 외가로는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인데 랭커스터 가문요크 가문 모두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다.[3] 그의 외가 가문인 보퍼트 가문은 에드워드 3세의 4남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후손으로 세 번째 결혼이었지만 리처드 2세 시절 적자로 인정받았다. 다만 적자이나 왕위 계승권은 주지 않았는데 랭커스터가가 거의 절멸하면서 세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후손들까지도 랭커스터가로 치게 된다. 어디까지나 헨리 7세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이 장미전쟁으로 계승자들이 죽어나갔기 때문이었다.[4] 요크나 랭커스터나 플랜태저넷의 방계다. 가문명이 요크나 랭커스터가 아니라 작위인 요크 공작, 랭커스터 공작에서 유래한 것이지, 원래 성은 플랜태저넷이다. 리처드 2세 이후, 플랜태저넷 본가는 절손. 그 삼촌들이 랭커스터, 요크 가문 시조. [5] 런던탑에 가두었다가 반란에 연루되어 처형하긴 하는데 이 반란들은 리처드 3세가 죽인 요크 공작 이름으로 내세울 정도로 명분이 시덥잖았다. 애초에 요크 왕조가 분열된 게 리처드 3세가 에드워드 4세의 아들들, 즉 에드워드 5세와 요크 공작을 죽인 거에 반발해서 망한 거라..[6] 당시 성공회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잉글랜드 국교회가 19세기에야 성공회로 명칭을 변경한다.[7] 이 시기를 영국의 전성기로 아는 사람들이 있으나, 정확히는 전성기로 향하는 토대가 쌓이는 시기였다. 앤 서머싯의 엘리자베스 1세 전기를 보면 재정 때문에 늘 노심초사하고, 강대국 스페인과 (펠리페 2세 시절) 프랑스를 되도록이면 자극하지 않으려는 여왕의 모습이 보인다.[8] 반면 18세기에 들어 스튜어트 왕조가 옹립되었는데, 제임스 1세가 통치를 막장으로 하자 꿈도 희망도 없어하고 현실에 절망하는 어두운 분위기의 문화는 제임스 1세의 이름을 따서 '자코뱅(Jacobean)' 문화라 불린다.[9] 엘리자베스 1세는 본인도 검소하고 드레이크가 막대한 자본을 가져다주긴 했지만 후에 스페인과의 전쟁 등으로 거대 자본이 필요하자 왕실 부동산을 처분하기 시작했다. 이후 드레이크가 죽고 사치가 심했던 제임스 1세가 즉위하자 왕실 금고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 때부터 엘리자베스 1세 말기부터 조금씩 힘을 회복하던 의회가 금전적으로 압박하면서 왕권이 축소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