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이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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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론테스 강과 샤이자르 성채

1. 개요


아랍어 شيزر
영어 Shaizar
시리아 중북부의 도시. 하마에서 서북쪽으로 20여 km 떨어진 서쪽에 위치해 있다. 청동기 시대부터 도시가 형성될만큼 유서깊은 곳이며, 특히 십자군 시대에 기독교, 이슬람 세력권 양측 모두에게 중요한 요충지였다. 하지만 1157년 대지진으로 파괴된 후로 작은 마을로 전락하였다. 시리아 내전 발발 전의 인구는 대략 6천명이었고 인접한 무르다 (محردة)라는 도시의 생활권에 속해 있었다. 시내 동부, 오론테스 강가의 언덕 위에 십자군 시대 샤이자르 성채 유적이 남아있다.

2. 역사


샤이자르는 기원전 14세기 아마르나 편지에 '센자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등장하였다. 그리스인들은 이를 '시드자라'로 불렀는데 기원전 33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시에 대에 들어 그리스 테살리아 지방의 라리사 출신 기병대가 정착하며 셀레우코스 왕조 때부터는 '시리아의 라리사'로 불리게 되었다. 기원전 64년, 폼페이우스의 시리아 원정으로 로마 영토가 된 도시는 본래 이름을 되찾았고, 동로마 시대에는 '세제르'로 불렸다. 635년, 에메사와 휴전을 맺은 아랍인들이 그 대신 샤이자르를 점령하였고 이후 아랍화와 이슬람화가 진행되었다. 우마이야, 압바스 왕조 하에서 별탈 없이 지내던 샤이자르는 969년 니키포로스 1세의 시리아 원정 때에 함락되었다. 이후 파티마 왕조가 점령하여 요새를 세웠으나 999년 바실리오스 2세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에게 점령되었다. 그는 샤이자르에 주교구를 설치하여 제국의 국경도시로 삼았다.

2.1. 문키드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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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자르 시타델 성문. 난공 불락으로 유명했다
1090년경 시리아의 정세. 연녹색이 바누 문키드의 영토
한편 이슬람 정복을 전후로 시리아 중부와 남부에 정착한 아랍 부족인 바누 칼브 중에 문키드가 이끄는 부족은 오론테스 강 중류 일대에 거주하였다. (10세기 후반) 그들은 함단 왕조에 충성했다가 동로마 제국의 공격을 받아 가문의 유력자 일부가 로마군의 포로가 되기도 하였다. 이후 문키드의 손자인 무칼라드 이븐 나스르는 미르다스 왕조의 알 살리흐가 알레포를 점령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그 대가로 샤이자르 일대의 영지 (이크타)를 하사받았다. (1025년) 하지만 그때까지도 샤이자르 도시 자체는 동로마 제국에 충성하던 상태였고 따라서 무칼라드는 샤이자르에서 북쪽의 마라트 알 누만 방향으로 20km 떨어진 카파르탑을 거점으로 삼았다. 1059년 무칼라드가 사망하자 아들 알리가 계승하였다. 그는 미르다스 왕조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1075년 마흐무드의 아들 사비크를 아미르로 옹립하였다. 그러나 이는 마흐무드의 다른 아들인 와스탑을 지지하는 튀르크 용병들과의 다툼으로 이어졌고 혼란이 지속되던 1080년 셀주크 제국의 모술 태수인 무슬림 이븐 쿠라이쉬가 알레포에 입성하였다.
사비크는 시타델에서 농성하며 항복을 거부하였는데, 이에 알리가 개입하여 협상을 중재하였다. 결국 미르다스 왕실은 알레포 인근의 영지로 은퇴하였고 우카일 왕조가 알레포와 모술을 지배하게 되었다. 한편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동로마 제국의 동방 장악력이 약해지자 문키드 부족은 샤이자르를 노리기 시작하였다. 1076년부터 샤이자르와 오론테스 강 사이에 히신 알 지스르 요새가 지어지기 시작했고 이는 도시의 수자원 취득 및 동로마의 지원을 제한하였다. 1079년엔 셀주크 장군 아프신을 초청하여 샤이자르 일대의 약탈을 자제해 달라고 부탁하였다.[1] 마침내 1081년 12월, 샤이자르의 동로마 지휘관은 주교의 재산을 보호해준다는 조건 하에 알리에게 항복하였다. 이후 우카일 왕조가 남하하여 샤이자르를 포위하는 불상사가 있었지만 알리는 그 아미르인 무슬림에게 막대한 재물을 주어 무마시켰다. 1082년 알리가 사망할 무렵 샤이자르는 문키드 왕조의 확고한 중심지가 되어 있었다. 사디드 알 물크가 계승하였다. 그는 항구도시인 라타키아와 고대 로마 군단기지였던 아파메아를 영토에 포함시켰다.
사디드가 1년의 치세를 뒤로 하고 사망하자 동생인 나스르가 계승하였다. 당시 시리아 지역은 우카일 왕조가 알레포, 말리크샤의 동생 투투쉬가 다마스쿠스를 차지하고 그 중간에 문키드 왕조가 자리한 형국이었다. 그러던 1085년, 룸 셀주크의 쉴레이만샤가 안티오크를 함락시키고 시리아로 남하하였다. 알레포의 우카일 왕조가 그에 맞섰다가 패배하였고 그 아미르인 샤라프마저 전사하였다. 나스르는 부친이 그랬던것 처럼 공물을 바쳐 도시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던 이듬해, 투투쉬가 북상하여 쉴레이만샤를 전사시키며 사태를 진정시켰다. 질풍노도와 같던 룸 셀주크 군대가 일거에 소멸되고 시리아의 패권은 자연히 그에게 넘어갔다. 투투쉬는 더 나아가 주인이 없어진 알레포까지 접수하였고 이에 나스르는 셀주크 군대는 불패한다고 여겨 두려워 하였다. 그에 이어 말리크샤가 친정하여 알레포와 하마를 접수하자 문키드 왕조는 그 사이에 포위되었다.
술탄의 야망을 두려워한 나스르는 샤이자르에 대한 확실한 통치권을 대가로 전대에 얻은 라타키아와 아파메아를 제국에 반납하였다. 말리크샤는 그의 충성심을 인정하였고 1091년 해당 영토를 다시 문키드 왕조에 돌려주도록 하였다. 그러나 1096년 한때 홈스를 다스렸던 아랍 부족인 바누 킬라브의 수장이자 한때 나스르의 수하였던 칼라프 이븐 물라입에게 아파메아와 옛 수도인 카파르탑을 상실하였다. 이에 나스르는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칼라프의 매복에 당하여 패배하였다. 1098년 나스르는 사망하였고 그의 동생인 무르쉬드가 후계자로 지목되었다. 하지만 그는 막내 동생이자 (1097년 10월, 십자군을 틈타 동로마 해군에게 점령된) 라타키야 총독이던 술탄에게 제위를 양보하였고 자신은 어린 동생을 대신하여 실권을 장악하였다. 무르쉬드의 자녀 중에는 십자군 시기 역사가로 이름을 날린 우사마 이븐 문키드가 있다.

2.1.1. 십자군에 맞서서


한편 1099년 1월 중순, 폐허로 변한 마라트 알 누만을 두고 십자군이 남하하자 무르쉬드는 재빨리 레몽 드 생 질에게 특사를 파견하여 샤이자르를 파괴의 위협에서 구하고자 하였다. 십자군이 식량 부족 때문에 누만에서 저지른 일을 알고 있던 그는 프랑크인들에게 식량을 제공하고 그들이 샤이자르 시장에서 말을 구매하는 것을 허락하였으며 심지어 시리아 지역을 무사히 통과하도록 길잡이까지 붙여주었다. 따라서 레몽은 1월 16일 무사히 샤이자르와 하마 사이의 오론테스 강을 도하할 수 있었다. 이후 마시아프의 지배자 역시 비슷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여담으로 부유한 샤이자르를 카파도키아의 카이세리로 오해한 십자군은 도시를 카이사레아로 불렀다. 1103년, 안티오크 공국탕크레드가 부근의 라타키야를 점령하자 십자군이 당도한 후에도 킬라브 부족과 대결하기에 바빴던 문키드 왕조는 드디어 이슬람의 기치가 필요함을 깨달았다.
비록 1104년 칼라프에게 재차 패하고 술탄과 무르쉬드가 둘다 부상을 입는 피해까지 입었지만, 그럼에도 십자군에 대항하기 위한 양측의 동맹이 성립되었다. 1106년, 연합군은 함께 인근의 십자군 요새를 공격했는데 칼라프가 도중에 문키드 군대의 말을 훔쳐 전선을 이탈해버리며 배신을 때려버렸다. 이에 술탄과 무르쉬드 형제는 십자군이고 뭐고 칼라프부터 응징하려 했는데 그럴 필요도 없이 그는 아사신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한편 문키드 조는 십자군에 대항할 새로운 동맹으로 홈스와 하마를 지배하는 튀르크 계열의 이븐 카라자 가문과 친교를 맺었다. 그러나 안티오크 공국의 탕크레드는 호시탐탐 샤이자르를 노렸다. 1108년부터 연공을 바쳐왔음에도 1110년 안티오크 군대는 문키드 왕조의 영토를 약탈하였고 샤이자르로부터 많은 조공을 받아내었다.
마침내 1111년, 탕크레드는 샤이자르를 휘감아 흐르는 오론테스 강 건너편에 텔 이븐 무샤르 성채를 세웠다. 문키드 왕조는 모술의 태수 마우두드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그리고 탕크레드는 예루살렘 왕국과 트리폴리 백국의 기사들을 모아 아파메아를 거쳐 샤이자르로 진군하였다. 그해 9월 마우두드와 십자군은 샤이자르 외곽에서 마주하였다. 그들은 2주간 대치하며 탐색전을 벌였는데, 마우두드가 십자군의 보급을 차단하자 그들은 아파메아로 회군하였다. 마우두드는 후퇴하는 십자군을 습격하여 그들로 하여금 회전에 나서도록 유도하려 했지만 실패하자 그역시 회군하였다. 이 샤이자르 전투에서 우사마 이븐 문키드 역시 참전했다고 전해진다.
문키드 왕조는 12세기 들어 시리아 중부에 파견된 아사신 파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1114년 문키드 왕족들이 휘하의 기독교도들과 부활절 행사에 참가한 틈을 타 샤이자르의 아사신 요원들이 반란을 꾀하였다. 백여명의 아사신이 시타델을 장악하였고 주민들과 대립하였다. 부랴부랴 샤이자르로 돌아온 문키드 왕조는 왕실의 여인들까지 동원하여 그들을 공격하였다. 혈투 끝에 아사신 모두가 전사하며 사태는 종결되었고 아사신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한편 1115년엔 안티오크 공국과 다마스쿠스의 툭테긴, 마르딘의 일가지로 구성된 무슬림-십자군 연합군이 마우두드를 견제하기 위해 그와 막연한 관계였던 샤이자르를 포위 공격하는 일도 있었다.
1127년 문키드 왕조는 신성으로 떠오르던 장기 왕조의 이마드 앗 딘 장기에게 복속하여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 그들은 십자군의 위협을 받던 마시아프를 구매하였다. 한편 장기와 대립하던 부리 왕조의 샴스 알 물크는 1133년 샤이자르를 포위하였다. 한편 1137년 무르쉬드가 사망하자 아불 아사키르 술탄이 친정을 시작하였다. 그 이듬해인 1138년에는 안티오크 공국을 넘겨받는 대가로 십자군에게 새로운 영지를 하사해 주기로 한 동로마 제국의 요안니스 2세가 카파르탑과 히신 알 지스르를 함락하곤 샤이자르를 포위하였다. 문키드 왕조와 시민들은 동로마 제국의 투석기 세례를 받으면서도 포위를 견뎌내었고 장기의 군대가 다가오자 요안니스는 후퇴하였다. 여담으로 이때 새 장기 왕조와 가까운 새 영지를 바라지 않던 십자군은 동로마 군을 돕지 않고 막사에서 주사위 놀이나 했다고 한다. (샤이자르 공방전)
동로마 군대가 물러간 그해 술탄은 그토록 바라던 아들 무함마드를 얻었고 그의 계승을 확고이 하기 위해 우사마을 위시로한 조카들을 추방하였다. 우사마는 장기 왕조의 누르 앗 딘의 궁정으로 피신하였다. 이후로 문키드 왕조는 평화로운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다만 1141년, 아사신은 결국 문키드 왕조로부터 마시아프 요새를 장악하곤 시리아 중부에 제2의 거점을 세웠다. 그리고 1154년 술탄이 사망하자 16세의 아들 타즈 알 물크 무함마드가 샤이자르의 아미르가 되었다. 그러나 1187년 8월, 무함마드가 아들의 할례를 축하하기 위해 일족들과 연회를 즐기던 중 시리아 중부 지방에 대지진이 들이닥쳤다. 시타델을 포함한 샤이자르의 모든 건물이 붕괴되었고 무함마드를 위시로 한 문키드 왕족들도 몰살당하였다.

2.2. 연이은 지진과 쇠락


이후 마시아프의 아사신이 도시를 장악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1158년 십자군에게 패배하였다. 다만 십자군 역시 내분이 일어나 샤이자르를 포위하던 중 회군하였다. 이에 누르 앗 딘은 십자군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하다는 명분으로 샤이자르를 접수하였고 휘하에 있던 우사마 대신 사비크 앗 딘 우스만이란 총독을 임명하였다. 이로써 문키드 왕조는 허망히 멸망하였다. 십자군에 대비하여 도시는 재건되었으나 1170년 재차 지진이 일어나 파괴되었고 이내 살라흐 앗 딘에게 접수되아 재차 복구되었다. 한편 사비크의 다야 가문은 장기 왕조를 넘어 아이유브 왕조 때까지인 1233년까지 도시를 다스렸다. 하지만 두 번의 복구가 무색하게 1246년 샤이자르는 호라즘 용병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비록 1260년 아이유브 왕조가 세번째로 도시를 재건했으나 이전의 명성을 되찾지 못한채 현재까지 작은 마을로 유지되고 있다.

3. 참고자료


https://en.wikipedia.org/wiki/Shaizar
https://en.wikipedia.org/wiki/Banu_Munqidh#Reign_of_Ali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Shaizar

[1] 역사가 케네디는 이러한 그의 외교적 능력이 문키드 왕조의 '위태로운 생존'을 가능케 했다고 평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