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왕조

 



'''장기 왕조'''
아랍어: ‎زنكيون
''Zangīyūn''

존속기간
1127년 ~ 1250년
수도
알레포, 모술
공용어
아랍어, 쿠르드어, 오우즈어[1]
종족구성
아랍인, 쿠르드인, 오우즈
종교
이슬람
정부형태
군주제(아미르국)
주요 군주
이마드 앗딘 장기(1127~1146)
누르 앗딘(1146~1174)
면적
478,000km2(추정치)
인구
2,000,000명~2,300,000명(추정치)
국교
이슬람교(수니파)
통화
디나르
이전 국가
셀주크 제국
에데사 백작국
이후 국가
일 칸국
아이유브 왕조
1. 소개
2. 배경
3.1. 알레포 접수
3.2. 위기와 극복
3.3. 이슬람의 영웅
4. 암살과 승계
5. 누르 앗 딘
5.1. 다마스쿠스 정복
5.2. 살라딘의 등장
5.3. 갈등과 사망
6. 쇠퇴: 살라딘의 통합
7. 연표
8. 여담


1. 소개


십자군의 에데사 백국을 멸한 것으로 유명한 이마드 앗 딘 장기(عماد الدین زنكي‎)와 시리아를 통일한 누레딘(누르 앗 딘, نور الدين)의 왕조. 알레포, 모술을 중심으로 1127~1222/1250년 사이에 존속. 12세기 중반에 전성기를 맞아 십자군에 대한 항쟁을 주도했다.

2. 배경


당시 레반트(시리아, 메소포타미아, 팔레스타인)의 정세는 실타래처럼 꼬여 있었다. 11세기 말에 잠시나마 호라산서아시아를 통일했던 셀주크 제국말리크 샤와 명재상 니잠 알 물크의 사후 공중분해되었고 12세기 초에 이르자 옛 명성에 기댄 명목상의 권위만 남아 있었다.[2]
그 틈을 절묘히 노리고 쳐들어온 십자군은 레반트 해안에 4개의 국가를 세워 놓았고, 무슬림 국가들은 그 와중에도 서로 싸우기에 바빴다. '''서아시아 역사상 이렇게 개판으로 찢어져 싸우던 적이 없다''' 굳이 찾자면 14세기 중반 정도?
아르투크 왕조가 1104년의 하란 전투, 1119년의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에 승리하며 일단 십자군의 팽창은 정지시켜 놓았다. 그러나 그 후 분열하며 또다시 무슬림 국가들 간의 골육상쟁이 이어졌고, 십자군 국가들과 동맹을 맺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바그다드의 민중들은 1111년에 대규모 집회를 열고 제3의 성지 예루살렘(무슬림은 무함마드가 예루살렘에서 하느님(알라)을 접견했다고 믿는다)의 탈환을 위한 대책과 무슬림의 단결을 요구하였다. 다만 칼리파의 관심은 십자군의 위협보다는 셀주크 제국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에 있었다.

3. 이마드 앗 딘 장기



3.1. 알레포 접수


이마드 앗 딘 장기는 본래 이라크 남부 바스라의 총독이었는데, 1127년에 바그다드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 알 무스타르시드(المسترشد)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셀주크 술탄 마흐무드 2세에 의해 모술의 태수로 임명되었다. 십자군이 기세를 올리던 때였다. 그는 재빨리 인근 튀르크 부족들을 규합하고 1128년에 아르투크 왕조의 잔당으로부터 알레포를 접수하여 십자군에 비견할 만한 세력을 형성했다.

3.2. 위기와 극복


장기는 무슬림 국가들과의 내전에 휩싸였지만 이라크의 티크리트에서 시르쿠(شيركوه)와 나짐 앗 딘 아이유브(نجم الدين أيوب) 형제의 도움을 받아 재기에 성공한다. 아이유브의 아들이 바로 그 유명한 살라딘(살라흐 앗 딘)이다. 서남아시아사에서 기념비적으로 중요한 인연의 시작인 것이다.

3.3. 이슬람의 영웅


'''الملك المنصور , 알 말리크 알 만수르''' (승리왕)

'''عبد المومن ناصر , 나시르 알 무민''' (신앙의 보호자)

재기한 장기는 십자군 중에서 터키 동남부로 튀어나와 있어 교두보 역할을 하던 에데사 백국을 포위 끝에 1144년에 함락시킨다. 십자군 4대 국가 중 하나를 멸망시킨 것으로 모든 이슬람 세계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이었다(십자군에 대한 무슬림의 승리는 1101년, 1104년, 1119년 등 없진 않았으나 십자군의 영토를 빼앗아 무슬림 영역으로 회복한 것은 처음이다).
이 승리 하나로 장기는 일약 이슬람 세계의 스타로 부상하였으며, 쿠트바(خطبة, 이슬람교 금요일 예배의 설교)에서 셀주크 술탄의 이름과 함께 언급되기에 이르렀다.

4. 암살과 승계


그러나 영광도 잠시, 평소에 엄격한 군율을 유지하던 장기는 불만을 품은 부하에게 암살당하면서 명성에 비해 허무한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다.
장기 사후 그의 넓은 영토(알레포, 에데사, 모술)는 두 아들에게 분배되었다. 장남 사이프 앗 딘 가지(سيف الدين غازي)는 이라크의 모술, 차남 누르 앗 딘은 시리아의 알레포와 에데사를 차지했다. 그중 누르 앗 딘(이상 누레딘이라 칭함)은 아버지 장기를 빼닮았다는 평을 들었다. 다만 아버지보다 좀 더 신중한 편이었다.

5. 누르 앗 딘



5.1. 다마스쿠스 정복


모술을 상속받은 형 사이프 앗 딘이 죽자, 쿠트브 앗딘 마우두드(قطب الدين مودود)가 모술의 지배권을 승계했지만, 곧 누레딘의 종주권을 인정하여 누레딘은 장기 왕조의 영토 전역에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다.
십자군과의 전쟁에서도 성과를 거두었다. 누레딘은 1149년의 이나브(اناب) 전투에서 푸아티에의 레몽(Raymond de Poitiers, 안티오키아 공국의 왕자)을 전사시키고 명성을 쌓았다.
한편 이슬람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친 십자군 노선을 취해 백성들의 인기를 상실한 다마스쿠스의 지배 세력을 1154년에 축출하고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평화적으로 다마스쿠스에 입성했다.

5.2. 살라딘의 등장


누레딘은 원대한 구상이 있었다. 바로 이집트의 이름뿐인 파티마 왕조를 정복하여 시리아와 이집트 양면에서 십자군 세력을 압박하는 것이었다(당시 파티마 왕조의 와지르, 즉 재상이자 실세였던 샤와르(شاور)는 친 서방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다.).
시리아와 이집트의 통일된 반 십자군 무슬림 세력의 구축을 위하여 누레딘은 아버지 대부터 장기 왕조의 충신이었던 시르쿠와 살라딘을 이집트에 파견하였다(1163년).

5.3. 갈등과 사망


시르쿠는 몇 차례의 전쟁 끝에 이집트를 차지했지만 곧 죽고, 시르쿠의 조카 살라딘이 이집트의 실권을 장악했다. 살라딘의 권력이 강해지자 시리아(누레딘)와 이집트(살라딘)와의 관계는 갈수록 악화되어 갔고, 결국 누레딘이 대군을 이끌고 이집트로 출병하려고 했으나 병사하고 말았다. 그 직후 장기 왕조는 아이유브 왕조를 창건한 살라딘에게 다마스쿠스를 빼앗기고 오히려 멸망할 위기에 놓였다.

6. 쇠퇴: 살라딘의 통합


1183년 살라딘은 알레포의 누레딘 혈통이 끊기자 그곳을 접수하고 알레포의 아미르를 겸했다. 이렇게 해서 장기 왕조는 사실상 망했으나 누레딘의 바람대로 레반트와 이집트에 걸쳐 십자군에 대항할 이슬람 통일 정권이 구축되었다. 장기 왕조의 잔당들은 누레딘의 형이 상속받았던 모술과 이라크 북부에서 아이유브 왕조가 망할 때까지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다.

7. 연표


1128 장기, 알레포 접수
1130 안티오키아의 공작부인 알리스와 동맹
1138 다마스쿠스의 왕비 주무루드와 정략적 혼인
1132 티그리트 피신, 아이유브와 시르쿠의 도움
1137 십자군-비잔틴 동맹을 와해시킴
1140 다마스쿠스(우누르)-예루살렘(멜리장드) 동맹이 장기 왕조에 대항
1144 에데사(샨르우르파) 점령
1146 장기 암살, 2차 십자군 전쟁 발발
1154 누레딘, 다마스쿠스 접수
1163 이집트에 시르쿠와 살라딘 파견
1170 누레딘, 모술 입성
1174 누레딘 사망
1183 알레포 장기 왕조 단절
1234 모술 장기 왕조 단절

8. 여담


누르 앗 딘은 모술 입성 후 도시 서안에 알 누리 모스크를 지었는데(1170년), 이는 45미터의 높은 첨탑으로 유명하여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에도 상술되어 있다. 16세기 사파비 왕조 시절 보수되었지만 이란-이라크 전쟁을 거치며 명물인 미나레트가 기울어져 4미터 짧아졌다. 2014년 다에시의 지도자 알 바그다디가 칼리파 선포를 한 곳도 이 사원이었다. 이후 모술 탈환 작전에서 다에시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스스로 폭파시켜 버렸다. 이 사건으로 알 누리 모스크(마스지드)의 원형이 사라지게 되어 전 세계 무슬림과 유네스코의 공분을 사고 있다. 여담으로 장기 왕조의 영토는 훗날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지배 영역과 거의 일치한다.
한편 중세 장기 왕조의 멸망 후 그 후손들 중 일부는 알레포에서 직물 공업을 통해 부를 축적, 19세기 오스만 당국으로부터 봉토를 하사받기도 했다. 다만 그들의 막대한 부는 시리아 공화국 수립 이후 몰수되었다. 무함마드 장기 그럼에도 장기 가문은 21세기까지 시리아에서 정신적인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1] 터키어, 아제르바이잔어, 투르크멘어의 조상어[2] 일시적으로 산자르가 재건하긴 하였으나 사후 멸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