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이자르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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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38년 4월 28일부터 5월 21일까지 샤이자르 토후국을 상대로 벌어진 동로마 제국을 위시한 기독교 연합과 이슬람 세력의 공방전. 이에 대한 패배로 동로마 제국은 안티오키아 공국에 대한 패권을 다음으로 미루어야 했다.
2. 배경
2.1. 요안니스 2세의 원정
안티오키아는 요안니스 2세 치세의 제1수복 목표였으나, 그의 치세 초반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그는 안티오키아 공국이 독립적인 삶을 영유하는것을 그냥 수수방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1137년, 아나톨리아의 투르크인들과 발칸의 페체네그족이 잠잠해지자, 요안니스 2세는 염원했던 안티오키아 수복을 실행에 옮겼다. 황제는 먼저 아르메니아의 대공을 자칭하며 제국에 반기를 들었던 킬리키아의 레본 1세의 군대를 패퇴시키고, 타르수스, 아다나, 모프수에스티아를 정복해 레본을 타우루스 산맥으로 밀어내었다. 레본은 근 1년간 저항했으나, 결국 동로마 제국의 대군을 견디지 못하고 붙잡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다. 안티오키아 공국과 거의 맞닿은 모프수에스티아에 2000여 명의 병력을 주둔시킨 요안니스 2세는 수만에 달하는 군대를 이끌고 안티오키아를 공성하기 시작했다. 이미 황제는 예루살렘의 풀크 왕에게 서신을 보내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 1세가 선제 알렉시오스 1세와 맺은 데볼 조약을 정중히 상기시키며 안티오키아의 영유권 양도를 요청했고, 장기 왕조를 견제하기 위해 로마인들의 힘이 필요했던 풀크는 그의 주장을 시인할 수 밖에 없었다.
2.2. 짧은 성공
안티오키아 공성은 제국의 주력 타그마가 아직 아르메니아 왕국의 영토에 있었음에도 금방 끝이 났다. 풀크가 안티오키아의 봉신 이동을 허가한 상태에서 안티오키아 공작 레몽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동원할 병력과 동맹도 로마인들보다 적었던 안티오키아 공작은 결국 황제의 무혈 입성을 허가했다. 안티오키아 공작은 에데사 백국의 조슬랭 2세와 함께 요안니스를 알현했다. 황제는 안티오키아에 들어서자 마자 먼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를 정교회로 바꿀 것을 지시했고, 제국의 행정 체계를 복귀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이미 들어선 라틴 귀족들을 함부로 쫒아내기에는 그들의 너무 세력이 컸다. 레몽을 위시한 노르만, 라틴 귀족들은 안티오키아를 완전히 종속시켜 제국의 영토로 만들기 전에 알레포, 홈스, 샤이자르를 라틴 귀족들에게 봉토로 준다면 순순히 떠날 의향이 있다고 협상을 제시해 왔다. 어차피 이들을 그냥 내쫒는다면 안티오키아의 치안을 다시 위협할 것이 분명했던 데다가, 알레포와 샤이자르를 잇는 무슬림의 공세에 완충지대를 두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 황제는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하지만 이 선택은 요안니스 2세의 최대 오판이 되고 말았다. '''
2.3. 샤이자르 공성전
2.3.1. 전초전
거의 평생을 야전에서 보낸 황제는 세심하게 공성을 준비했다. 먼저 그는 그해 1월부터 노르만 귀족들을 움직여 안티오키아와 에데사를 지나는 모든 상인과 여행자들을 체포하고, 무슬림들이 진격 준비가 되었음을 알지 못하게 하였다. 3월에서야 무슬림들은 로마인들의 군대가 진공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때는 이미 수만의 대군이 킬리키아의 야영지를 넘어 안티오키아, 에데사를 지나 장기 왕조와 알레포 토후들이 난립하는 시리아 북부의 영역까지 당도해있었다. 병력의 구성은 로마인들의 땅 전역에서 모은 정예 타그마와 페체네그족 용병, 최근 정벌한 알바니아족 군대, 변절한 투르크 부족들로 이루어진 투르코폴레스, 그리고 황제의 개인 친위대인 바랑기안 가드 등 실전 경험이 풍부한 병력들이었다.[1] 거기에 더해, 킬리키아와 안티오키아를 경유하는 동안 성전 기사단의 병력도 로마인의 황제를 따라 북시리아 전역에 참가했다. 물론 타의이긴 했지만, 에데사와 안티오키아의 군대도 황제의 원정에 종군했다.
순식간에 국경 요새인 발랏이 함략당하고, 그후 닷새만에 인근의 비자아 시까지 점령당했다. 무슬림 세력들은 연합군이 시리아 북부를 공격하는 것에 당황했다. 그도 그럴것이 요안니스에게 겨우 비빌만한 장기 왕조의 아미드 앗 딘 장기는 같은 무슬림인 다마스쿠스 토후의 영토인 하마를 공성하는 중이라 즉각 대처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장기는 기독교도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알레포 인근 적재적소에 방어 병력을 배치해놓았고, 황제가 알레포를 공성하러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수천의 방어군이 결집해 있을 수 있었다.
알레포 성채가 강력하게 방어되고 있는 것을 눈치챈 황제는 병력을 틀어 덜 방어되고 있는 요새들을 먼저 공략해 다음 목표인 사이자르를 포위하기로 결정했다. 아트렙, 마라트 알 누만 등의 요새들은 로마군의 공격에 순식간에 함략되었고, 지원군이 들이칠 새도 없이 사이자르는 로마인들에 의해 고립되었다. 마지막 보급선인 카파텝이 함략당하는 동안에도 장기 왕조는 사이자르에 어떤 지원을 할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이는 아직 로마인들에게 대적할 병력이 다 모이지 못했던 점도 있지만, 사이자르가 아랍 토후인 문키드 왕조의 반독립 지역이었기에 구원 순위에서 멀어졌기 때문도 있었다. 결국 문키드가 이끄는 수천 병력은 혼자서 동로마 제국과 십자군 연합을 상대해야 했다.
2.3.2. 공성의 시작
황제는 자신의 타그마를 속한 종족별로 재편하며 사이자르 앞에서 무력 시위를 시작했다. 이는 로마인들의 군대를 이루는 각 부대의 장점을 극대화시키기 위함도 있었지만 사이자르 방어군들을 압박해 항복시키려는 계산도 들어있었다. 하지만 사이자르의 토후 문키드는 언젠가 장기가 자신을 구원하러 올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항복을 거부했다.
4월 28일, 공성이 시작되었다. 황제는 금장을 한 투구를 쓰고 전투를 진두지휘하였다. 공격군과 방어군 모두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 그 공세가 어찌나 치열했는지 동로마군의 트레뷰셋 공격이 한번 시작되면 사이자르 성곽 내의 마을 한 구역이 전부 파괴되었다고 목격자들은 증언했다. 황제는 직접 바랑기안 가드와 함께 전투의 선두에 서기도 했고, 부상자들을 나르거나 공성 병기를 끄는 등 이를 지켜본 무슬림 역사가들조차 존경할 만큼의 솔선 수범을 보였다. 결국 보름이 넘는 공성 끝에 사이자르의 성벽은 붕괴되었고, 로마군은 성내로 물밀듯이 쳐들어왔다. 성내에서의 전투는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황제의 총신이자 메가스 도메스티코스[2] 인 요안니스 악수흐마저 부상을 입을 정도였다.
그러나 사이자르의 방어군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사이자르의 내성은 절벽 위에 지어져 전혀 피해 없이 공성을 버티는 중이었고, 외성이 함략된 상태에서도 사이자르의 아미르와 가신들의 사기는 꺾이지 않았다. 야간까지 계속된 공성에도 이들이 버티자, 로마군은 한 발짝 물러나 재공격을 준비했다.
2.3.3. 십자군의 태업
공성이 거의 끝나갈 무렵, 가장 초조한 사람은 바로 안티오키아의 공작 레몽과 라틴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요안니스 2세에게 약속을 했지만 안티오키아를 두고 다른 도시에 정착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고, 바로 옆에 장기 왕조가 똬리를 틀고 있는 사이자르에 정착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안티오키아 군대는 일부러 잔치를 벌여 식량을 축내고, 조슬랭과 레몽은 주사위 놀이를 하면서 시간을 끄는 등 [3] , 황제의 공성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끌면 장기 왕조의 구원군이 사이자르에 도착해 황제의 군대를 몰아내고, 조약을 무효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거의 한달 가까이 이어진 공성 끝에 아미드 앗 딘 장기의 구원군이 사이자르 근교로 당도했다. 동로마군의 공성 병기가 철거되고, 구원군이 다가오는 것을 본 사이자르의 방어군은 환호했다. 요안니스 2세는 십자군의 배신에 역겨워하며 로마군만으로 장기 왕조를 상대하고자 했다. 장기의 군대가 연승을 벌이고는 있었으나 로마군에 맞서기에는 질적으로도 숫적으로도 열세인 것은 마찬가지었으므로, 사이자르 방어군과 장기의 협공을 받는 위험보다는 장기군과의 1대 1 회전을 상정한 기동이었다.
2.3.4. 상처뿐인 승리
아미드 앗 딘 장기의 군대는 후방으로 기동하는 동로마군을 몇 차례 공격했지만, 병력 차이가 너무 커 피해를 줄 수 없었다고 요안니스 2세도 후방에 장기 군대를 두고 사이자르 공성을 계속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교착 상태가 계속되자 결국 5월 21일, 사이자르의 술탄 이븐 문키드는 직접 내성을 나와 황제에게 평화 협정을 제안했다. 그 내용은 사이자르와 이븐 문키드가 다스리는 모든 영토의 토후들이 황제의 봉신이 되고, 봉신이 된 증거로 매년 엄청난 양의 연공을 바치는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문키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절에 찾았다고 알려진 십자가의 조각과 보석으로 장식된 커다란 식탁, 각종 성유물 등 값진 물건들을 바쳤다.
그러나 시리아 북부에 실효적 지배권을 확립하고 싶었던 황제에게 이는 아무것도 아닌 장난감에 불과했다. 어차피 사이자르를 점령해 라틴인들에게 넘기지 못한다면 안티오키아의 실질적 통치자는 계속 레몽으로 남을 것이고, 우트르메르의 주요 거점인 안티오키아가 라틴인들 손에 있는 한 샤이자르던, 알 누만이던 봉신으로써 컨트롤 할 수 있는 행정력이 닿지 않을 터였다. 안티오키아에서는 허울 뿐인 승리에 대한 개선식이 있었지만, 그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2.4. 심판이 유예되다
안티오키아로 복귀한 공작 레몽과 에데사 백작 조슬랭은 황제를 도시에서 몰아내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이미 황제가 자신의 근위대와 개선하며 내성에 머무르는 중이었기에, 무력을 동원해 그를 쫒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그들은 라틴계, 노르만계 주민들을 선동하여, 황제가 도시를 토착 그리스인 공동체들에게 넘기려 한다고 선동했다. 가만히 있으면 황제의 노예가 될 것이라는 말에 혹한 안티오키아의 주민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소수의 근위대만을 데리고 성내에 있었던 황제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도시 바깥에 주둔한 로마군의 막사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레몽에게는 다행히도, 황제에게는 폭동 말고도 여러 걱정거리가 있었다. 룸 술탄국의 마수드가 다시 흥기하기 시작한 데다, 트레비존드의 둑스 가브라스가 다니슈멘드 왕조와 내통하여 반란을 일으키려는 움직임도 포착된 상태였다.
결국 황제는 주력군을 끌고 다시 아나톨리아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요안니스 2세는 레몽과 조슬랭의 봉신 서약을 재확인하고 다시 킬리키아를 거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 원정에 동참했던 노장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는 원정 중 풍토병을 얻어 곧 사망하고 만다.
요안니스는 다시 안티오키아로 돌아올 수 없었다. 1142년, 각지의 반란과 투르크족을 정리한 황제는 킬리키아를 지나 안티오키아를 다시 공성하려 했지만, 사냥 중 유시에 맞아 사망하면서 유서 깊은 총대주교구의 탈환은 그의 아들, 마누일 1세의 공으로 넘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