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레나(가수)
1. 소개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모델, 배우, 패션 디자이너. 라틴 아메리카에서 선풍적인 인기와 사랑을 받았고, 미국 텍사스 지역과 멕시코의 음악을 혼합시킨 테하노(Tejano)음악의 여왕으로 불리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3천만장의 앨범 판매고를 올렸으며, 샤키라와 함께 가장 영향력 있는 라틴 아티스트 중 한 명으로도 꼽힌다.
2. 생애
셀레나 킨타니야는 1971년 미국 택사스의 멕시코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음악가 출신이었던 그녀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막내딸의 천재적인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보았고, 맏아들에게 베이스를, 둘째인 딸에게 드럼을 가르쳐 남매 밴드를 결성하였다. 남매가 처음 공연했던 장소는 가족이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가게의 매출이 날로 떨어져 가고, 이내 운영이 어려워지자 남매의 아버지는 사업을 접고 딸 셀레나를 리드 보컬로 한 밴드의 매니지먼트에 모든 것을 걸었다. 멕시코계 미국인이 영어 곡으로 현지 활동을 하기는 쉽지 않았으므로, 자연스레 밴드의 음악 장르는 히스패닉을 대상으로 한 텍사스 기반 멕시코 퓨전 음악인 '테하노'가 되었다. 이 때의 밴드명은 Selena y Los Dinos였다.
오랜 기간 커버곡 및 기성 작곡가의 곡을 부르던 셀레나의 밴드는 데모 음반 제작을 계기로 오빠인 베이시스트 에이비의 프로듀싱 체제로 거듭난다. 뛰어난 라이브 실력과 곡 퀄리티로 테하노 장르에서 스타로 부상한 셀레나의 밴드는 이내 CBS와 EMI, 대형 레코드사 두 곳에서 데뷔 앨범 계약을 제안 받고, 리드 싱어인 셀레나를 아이코닉한 스타로 홍보하고자 하는 소속사의 제의에 따라 활동명을 솔로 프로젝트인 '셀레나'로 바꾸게 된다. 세부 조율이 끝나고 EMI의 라틴 레이블에서 발매된 밴드의 데뷔 앨범 'Selena'는 제 2의 글로리아 에스테판을 예감했던 소속사의 기대에 부응하듯 바로 차트 상위권으로 뛰어오른다.
이윽고 대형 음반사의 홍보를 등에 업은 히트곡이 터진다. 중독성 있는 리듬의 Baila Esta Cumbia가 미국의 라틴계 팬층의 수요를 넘어 멕시코 및 스페인어권에서도 크게 호응을 얻으며 셀레나는 테하노의 대표 가수로 등극하게 된다. 2집 앨범은 첫주에 골드 인증을 받았는데, 이 장르의 여성 아티스트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라틴 음악을 방송하는 라디오에서 가장 많이 방송되는 아티스트가 된 것은 물론이고, 오랜 기간 쌓아온 라이브 능력에 대한 평판은 갈수록 높아져 투어에만 6만명을 동원할 정도였다. 가죽 자켓을 입고 모히칸 헤어스타일을 한 앨범 커버의 모습은 촬영 직전에 소속사와의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으로, '착한 여자'가 되기 싫다는 그녀의 소망을 반영하고 있다.
세 번째 앨범을 낼 때쯤 셀레나는 이미 동종 업계 최고 지위에 올라 있었다. 이 시기에 그녀는 새로 영입한 기타리스트 크리스 페레즈와 사랑에 빠지는데,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 때문에 도피 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이후 결혼과 함께 '셀레나 페레즈'로 이름이 바뀌지만 연애가 인기에 지장을 미칠거라는 아버지의 우려와는 달리 그 명성은 갈수록 높아져 갔다. 아름다운 멜로디의 메가히트 싱글 Como la Flor는 콘서트를 마친 그녀의 오빠 에이비가 어느날 밤 조화를 파는 가난한 노점상의 모습을 보고 감흥을 얻어 만든 곡이다.
정규 앨범 발매가 없었던 이듬해에 셀레나는 팬들을 위한 라이브 앨범을 냈다. 1993년 2월 7일 텍사스의 메모리얼 콜로세움에서 열린 공연 실황을 담은 이 음반으로 셀레나는 첫 그래미 상을 받는다. 테하노 뮤지션으로는 첫번째 수상이었다. 이 때부터 장르 내에서 그녀의 위상은 마돈나와 비교되기 시작한다.
1994년은 셀레나의 커리어에서 정점과 같은 해였다. 그동안 쌓아온 대중적 호감도와 라이브에 대한 호평, 차근차근 다져온 음악적 내실이 결실을 이루며 셀레나의 4집은 기존의 테하노 가수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성공을 낳는다. 여러 곡의 초대형 히트 싱글을 낸 이 앨범으로 셀레나는 빌보드 라틴 차트 1위를 거머쥐며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테하노 가수가 된다. 멕시코 차트에서는 무려 97주간 1위를 차지하여 가히 비견될 존재가 없을 정도였다. 댄스팝과 하드록, 흑인 음악을 넘나드는 다양한 음악을 수용한 이 앨범은 지금도 라틴음악 최고의 명반이며, 비평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여성 가수의 작품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롤링 스톤에서 선정한 명반 5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95년 초, 셀레나는 휴스턴의 아스트로 돔에서 단독 공연으로 6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팝 시장 전체에 충격을 안긴다. 이 시기의 라틴 차트는 가히 셀레나의 독무대라고 할 만했다. 기존 1위 싱글을 본인 앨범의 후속곡이 갈아치우는 식으로, Bidi Bidi Bom Bom은 정점에 오른 가수가 메가 히트곡을 연발할 경우 어느 정도의 파급력을 보여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와도 같았다. 이 곡은 현재까지도 가장 인기있는 라틴음악 중 하나인데, 히스패닉의 앤섬과도 같은 대접으로 결혼식이나 행사 같은 흥겨운 장소에서 자주 연주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셀레나의 오랜 목표는 영어 앨범을 내는 것이었다. 영어권에서 자란 미국 시민으로, 오랫동안 마돈나 같은 팝스타가 되기를 꿈꿨던 그녀는 멕시코계 출신의 장벽을 넘고 드디어 영어 앨범 제작에 착수, 여러 유명 작곡가들을 동원한 첫 크로스오버 앨범을 완성해 간다. 하지만 그렇게 염원하던 첫 영어 앨범이 출시되기도 전에 그녀는 불의의 사건으로 사망하고 만다. 팬클럽 회장이자 셀레나의 굿즈 판매를 담당하고 있던 여성인 욜란다 살디바르의 자금 횡령을 발견한 것이 발단이었다. 셀레나 측은 살디바르를 해고하였고, 이내 앙심을 품은 살디바르의 총에 맞아 쓰러진 셀레나는 병원으로 이송되지만 결국 숨진다. 1995년 3월. 당시 그녀의 나이 23살이었다.
셀레나가 몇 곡의 영어 신곡을 녹음해 두었던 미완성 영어 앨범은 그녀의 미공개곡과 기존 곡을 섞어 'Dreaming Of You'라는 타이틀로 공개되었다. 유작이자 그녀의 마지막 앨범인 'Dreaming of you'는 발매 첫날 17만장 판매라는 위업을 세우며 여성 가수 판매 기록을 경신하였다. 그녀의 우상이었던 마돈나나 3대 디바도 세우지 못했던 대기록이었다. 지금까지도 가장 많이 팔린 라틴 앨범 중 하나인 이 음반에서는 낭만적인 노랫말의 발라드 곡 'I Could Fall In love'가 세계적 인기를 얻었다. 오랜 기간 그녀의 대표곡으로 꼽히며 웨딩 송으로도 사랑받은 이 곡이 싱글 차트에 오르지 못했던 이유는 이 곡의 지나친 인기가 앨범 판매를 떨어뜨릴까 우려했던 소속사의 방침 때문이었다.
라틴 음악의 신화인 그녀의 일대기는 영화로, 뮤지컬로, 드라마로 계속해서 만들어졌다. 97년에 제작된 영화에서는 무명의 신인이었던 제니퍼 로페즈가 불꽃같은 연기를 펼쳐 크게 호평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편견으로 가득차 히스패닉 출신들이 제대로 진출하지 못했던 영어권 음악계에 셀레나의 존재는 큰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라틴음악 아티스트로 히스패닉의 희망이자 아이콘이었던 그녀의 이름을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붙여주어, 셀레나는 90년대 중반에 가장 많은 여자아이의 이름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 중에는 멕시코계 혼혈 가정에서 자랐던 셀레나 고메즈도 포함되어 있다.
3. 기타
- 도나 서머, 마돈나, 마이클 잭슨, 자넷 잭슨, 폴라 압둘, 글로리아 에스테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밝혔다.
- 가수활동 뿐만 아니라 배우, 싱어송라이터, 디자이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보이는 멀티 엔터테이너였다. 그래서 그런지 별명이 멕시코의 마돈나 였다.
- 특히 패션 디자인에 탁월한 감각을 드러냈는데, 모든 무대의상을 스스로 디자인하기로 유명했다.
- 사후 20년이 넘어간 지금까지도 라틴 문화권에서 자주 회자되며, 히트곡들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1] 미국의 기타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