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우드 홀

 

Sherwood Hall
1893년 11월 10일 서울 출생. 캐나다인.
선교사인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忽)과 어머니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許乙)[1]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1년 미국 오하이오 주 마운트 허먼(Mount Hermon) 학교를 거쳐, 1919년 마운트 유니언 대학을 졸업하고 1922년 매리언과 결혼했다. 1923년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24년 뉴욕 롱아일랜드의 홀츠빌 서퍼크 결핵 요양소에서 결핵을 전공했다. 1925년 8월 미국 감리회 의료선교사로 임명되어 1926년 4월 19일 부인 매리언 버텀리(Marian Bottomley)와 함께 내한하였다.
1926년 7월 해주구세병원(Norton Memorial Hospital) 원장으로 부임하여, 의창(懿昌) 학교 교장직도 겸임하였다. 운산금광(동양연합광업회사) 담당의사로 환자들을 진료하기도 했다. 1928년 10월 27일 해주시 왕신리에 폐결핵 퇴치를 위하여 한국 최초로 ‘해주구세요양원’을 설립했다.
결핵 요양원의 필요성에 대하여 셔우드는 “결핵은 다른 나라에서는 20명에 한 사람 꼴인데 한국에서는 5사람 중 한 사람 비율로 희생자가 난다. 일단 병균이 침투하면 한국인은 병을 피할 수 있는 희망이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결핵은 불치의 병으로 <부끄러운 병>이며, 악귀의 기분을 상하게 한 사람이 운명적으로 받는 벌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요양원은 치료 뿐만 아니라 계몽과 교육 목적에서도 꼭 필요하다.”고 했다. 이 결핵 문제는 셔우드 개인과도 연관이 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인 박에스더보구녀관에서 셔우드의 어머니 로제타와 함께 활동한 인연으로 인해 셔우드와도 잘 아는 사이였는데, 박에스더는 과로와 이 결핵이 겹쳐서 1910년에 사망했다.
결핵 치료의 재원 마련을 위해 1932년 크리스마스 씰을 도입했으며, 이후 1940년까지 9회에 걸쳐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했으나, 일본 헌병대에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벌금 5,000엔과 함께 국외추방되었다.
한국에서 추방당한 1941년부터 1963년 은퇴할 때까지 인도에서 결핵 퇴치에 앞장섰으며, 1991년 4월 5일 98세를 일기로 별세. 4월 10일 리치먼드 사우스 암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장되어 한국으로 돌아와 1991년 4월 17일 대한결핵협회 장(葬)으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묘비명
캐나다인 셔우드 홀은 1893년 11월 10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자라면서 많은 한국인들이 결핵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 결핵 퇴치에 헌신할 것을 결심, 토론토의대 졸업 후 역시 의사가 된 메리안 버텀리와 결혼하여 1926년 함께 감리교 의료선교사로 해주 구세병원에 부임했으며 한국 최초로 1928년에 근대적 결핵요양원을 설립하고, 1932년에는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했다.
1940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추방 될 때 까지 결핵환자 치료와 실 발행을 계속했으며, 한편으로는 모범농장을 일구어 새 영농기술을 보급하고 의창학교장으로서 교육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2대에 걸쳐 한국인에게 봉사한 공을 찬양해 1984년 한국 정부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서울시에서는 명예시민증을 수여했다.
현재 양화진 제1묘역에는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 홀, 어머니 로제타 셔우드 홀, 셔우드 홀의 딸 필리스와 쌍둥이로 태어난 날 죽은 프랭크, 여동생 이디스 마거릿, 셔우드 홀, 91년 9월 19일 타계한 아내 매리언 버텀리 등 홀家 6명이 잠들어 있다.
셔우드 홀의 일생은 스펀지 60회 방송분에서도 소개되었다.

[1]이화여자대학교의료원의 전신인 보구녀관(保救女館)에서 활동한 여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