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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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좁게는 대한민국의 국민,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 넓게는 한반도 거주민 혈통에서 비롯된 이주민 및 한국에 귀화한 외국계 한국인까지 부르는 말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한반도를 중심으로 거주하는 사람들 중에서 한국어를 주로 사용하는 민족을 가리킨다. 여기에 귀화한 외국인과 그들의 후손들도 국적법에 의하여 한국 국적을 가진 한국인에 포함된다. 한민족과는 미묘하게 차이는 있지만 한국인도 한민족(韓民族)의 범위에 포함된다. 이러한 경우에는 주로 한인(韓人)이라고 표현한다.
대한민국만을 한정했을 때 인구 수는 약 5200만 명이며, 헌법 상 영토로 규정된 북한까지 범위를 넓힐 때 도합 7600만 명이다. 여기에 민족으로서의 한국계 외국인들을 모조리 포함하면 8300만 명까지 늘어난다. 전후 베이비붐이 일었던 1950년대 중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빠른 인구 증가를 경험했으나 그 이후로 증가세가 떨어졌고 2000년대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가속화되고 있는 저출산에 의해 2020년 이후 대한민국은 자연감소에 들어섰으며[2] , 제3세계 국가들의 인구 증가로 세계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
2. 상세
귀화인들과 정반대로 국적은 외국으로 등록되어 있지만 한국인의 후손 혹은 혼혈인 사람들도 한국인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경우가 있으나 이들에게는 '해외동포', '한인 X세', '한국계' 라는 표현이 더 자주 사용된다. 일단 국적법상으로 한국은 이중국적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이들은 법적으로 한국인이 아니지만, 태어날때부터 한국과 속지주의 미국 등 국가의 국적을 동시에 취득한 선천적 복수국적자는 복수국적(이중국적)이 예외적으로 허용된다. 즉, 한국국적만 있다가 외국국적을 취득하면 이중국적을 불허하지만, 출생과 동시에 복수국적이 있는 경우에는 합법인 것이다.
1997년 12월 13일 국적법 개정[3] 이전에는 부계혈통주의[4] 로 어머니가 한국인이어도 아버지가 외국인이면 한국에서 오래 사는데도 외국 국적으로 수용되었다. 그래서 국적법 개정 이전에는 외국어 한 마디도 못하는 외국 국적 한국인이 많았다.
북한의 주민들을 해외에 나가서는 같은 한국인이라고 소개하는 경우도 있으나 분단 상황이 장기화 되어감에 따라 이 경우에도 국내에서는 '북한 사람' 또는 '북한인'으로 구분을 하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해외에서의 인지도는 일본인과 중국인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다. 해외에서 외국인이 국적을 물어볼 경우 흔하게 겪게 되는 상황으로, 보통 중국인이냐고 물어보고 아니라고 하면 일본인이냐고 물어보고 역시 아니라고 한 후에야 한국인이냐고 물어보는 경우가 많다. 다만 근래 들어서는 한국인이냐고 먼저 물어보는 경우도 적지않다. 남과 북을 헷갈려 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 편이다. 사실 둘 다 코리안이니 헷갈리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외국인 입장에서는 북한이 여행의 자유가 없는 나라인 걸 모르는 경우가 많을 테니까.
인지도 차이의 이유를 굳이 설명하자면 중국은 세계사에서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는 국가이고, 고대부터 중국의 문물이 세계 각지로 전래되었다. 또한 현재 중국의 인구는 세계에서 가장 많기로 유명하고, 영토 넓이도 모든 국가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이를 바탕으로 경제력과 영향력이 어마어마하여 미국 외에 중국에 비빌 수 있는 국가는 없다. 일본은 G7에 가입되어있는 경제대국이고 선진국이다. 현대에는 일본 문화의 인지도가 상당하다. 근현대사에서도 중국과 일본은 존재감이 매우 높았다. 2차대전에서 중국과 일본은 각각 연합국과 추축국의 한 축을 담당했다. 거기다가 인구도 남북을 전부 합쳐봐야 중화권[5] 의 20분의 1, 일본의 60% 정도이며 사실상 대한민국의 인구만 가정한다면 중화권의 27분의 1, 일본의 43%에 불과할 정도로 격차가 커진다. 단순 인구만 따져도 두 나라 사람들보다 적으니 한국의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2010년대를 기점으로 어디를 가든 대한민국과 북한을 아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다만 한중일 중 인구가 가장 적다보니 해외에 나가는 사람의 비중이 중국인이나 일본인에 비해 적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현지인도 가장 많이 보는 국적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코리안이라고 하면 노스? 사우스? 라고 묻는 것부터가 어찌 됐든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을 안다는 뜻이다.
사실 국가인지도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인간은 본래 자신이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거나 자신의 일상생활에 별다른 관련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관심하며, 고로 외국인 잘 구분 못하는 것은 한국인들도 비슷하다. 이란이 이슬람 국가라는 이유로 아랍어를 쓴다고 생각한다던가[6] , 칠레가 남미 국가라는 이유로 멕시코 옷을 입고 기타를 치고 타코를 먹는다고 오해하는 것처럼.[7] 유럽인만 해도 영국인과 프랑스인, 스웨덴인과 러시아인을 구별하기 힘들다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CNN에서 소개한 한국인이 잘하는 10가지.
2020년 2월에 발표된 2019년 기준의 최신 국가 이미지 조사 내용#에 따르면, 미국, 멕시코, 브라질, 영국, 프랑스, 독일, 남아프리카 공화국, 러시아, 인도, 중국, 일본, 태국, 인도네시아, 호주 16개국 만 16세~65세의 성인 남녀 8천명을 대상의 조사결과 외국인이 느끼는 한국에 대한 전반적 이미지는 5점 만점에 4.01점으로 매우 긍정적인 수준이었다. 한국인에 대한 호감도 평가에서도 긍정이 71.3%, 보통이 22.3%, 부정이 6.3%로 전반적으로 긍정적이었다.[8]
3. 정신 문화
3.1. 공동체·집단주의 문화
개인주의 문화라는 것은 인류 사회에 등장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며, 원래 모든 문화권은 공동체주의 혹은 집단주의 문화에 가까웠다. 전근대에 문명을 이룬 인류의 삶을 크게 농경과 유목으로 나눈다면, 이 두 문화적 요소가 원활하게 지속되기 위해서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이 가장 수월했기 때문이다. 다만 시대가 지나고 수많은 역사적 사건을 겪으며 공동체와 집단보다는 개인을 중시하는 기조가 강해졌고, 대한민국도 이러한 기조가 점점 강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기존 사회와 개인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게 되는데, 현재 한국 사회의 여러 갈등은 상당 부분 여기에 기인한다.
대한민국의 국토는 반도라는 특성과 그 지정학적 위치의 영향으로[9] 대륙이나 해양세력의 침입을 막장동네인 캅카스나 중동, 발칸 반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자주 겪었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국가 혹은 민족 단위의 단합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고려 중기까지 국가 단위로 외세에 맞섰으나 몽골 제국과의 전쟁 때부터 지배층은 정권을 지키기 위해 백성을 버리고 피신하는 일이 많아지자, 백성들은 지배층에 불신과 냉소를 지니며 '나와 내 가족을 지킬 건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고 자각하여 죽창과 낫 같은 날붙이를 들고 거대한 침략 세력에 맞서 싸웠다.
또 조선시대 이후부터 지도층인 사대부가 유교 문화를 국가 통치의 기치로 내세우면서 유교적 가치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일본식 군대 문화, 근대 민족주의(Nationalism)의 확산 등이 더해진 결과 한국인들 사이에는 공동체 정신문화가 강하게 퍼져 있다. 이 같은 공동체 문화는 단결을 통해 단체의 역량을 끌어올리는 데 적합하므로 비교적 짧은 시간인 70여 년 사이에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뤄낸 한국 사회에서 상당히 강조됐다. 그러나 이는 사회생활에서 혈연, 지연 등이 더 강하게 작용하는 연고주의나 조금만 엇나가면 제노포비아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자민족중심주의, 외국과의 지나친 비교로 인한 필요없는 열등감 혹은 비뚤어진 애국심과 같은 국수주의의 단편 등과 같은 부작용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지나친 공동체주의적인 성향은 농경사회의 특징과도 일맥상통한다. 조선시대 시절 두레와 품앗이 문화는 물론이요, 근대에 나타났던 다산풍조[10] , 남아선호사상[11] , 제사문화, 혈연과 지연이 중시되는 풍조 모두 농경사회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내내 한반도의 농가인구비율은 꾸준히 80%내외를 유지하였으나 해방 이후 이촌향도 현상이 심화되자 1960년 56.9%, 1970년 44.7%, 1980년 28.4%로 대폭 감소하였는데, 이는 지금까지의 한국을 이끌어온 기성세대는 유소년기를 농촌사회에서 보내고 청년기 이후에 도시로 나간 사람들이라는 얘기가 된다. 어린시절 확립된 그러한 사고방식과 행동양상이 당연히 직장문화, 인간관계 등에도 나타났고 그것이 전체적인 사회분위기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사람들끼리 공유 부분이 더욱 클수록 관계가 돈독해져 서로의 영역을 오고가도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공유 부분이 너무 부담스러워 이를 거부하면 불이익까지 감수해야 한다.
공동체주의 뿐 아니라 집단주의 성향도 어느정도 가지고 있다. 집단주의는 개인을 집단에 맞춰나가는 주의이다. 공동체주의와 집단주의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공동체주의처럼 집단주의가 가져온 부작용도 존재한다. 개인의 주관을 제대로 피력하지 못하고, 개개인의 개성이 상실하는 등의 부작용을 가져왔다.
그러나 한국인의 세대가 교체되고, 핵가족화가 가속화되고 자유주의, 개인주의와 같은 현대적인[12][13] 가치관이 정착되면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고 있다.
2020년대에 들어 10대와 20대, 30대에 속하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이전의 기성세대에 비해서 집단주의나 공동체주의 문화가 조금 희석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문제라던가 힘든 일이 닥치면 개인이 혼자 해결하거나 헤쳐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아진 게 예전에 비해서는 약간 보이는 편. 덕분에 공동체주의 문화에 익숙한 노인들이나 중장년층들은 간혹 나타나는 이런 현상에 한탄을 하기도 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시대적인 배경에서 상대적인 측면에 그칠 뿐인 거고, 기성 세대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집단주의 사고방식은 뿌리가 깊어 없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특유의 공동체적 문화는 국가에 대한 주인의식과 결합하면 때때로 국가적 사건에 대처하는 데 있어서 엄청난 결집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쥐잡기 운동, 종이절약 운동, 새마을 운동, 월드컵 응원 문화[14] , 금모으기 운동, 태극기 집회, 촛불시위[15] 로 표출되는, 단기간 단합된 단결력에 있어 상상을 초월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농경사회인 계나 두레, 품앗이로 대표되는 공동체 의식이 기원으로 보인다.
2020년 코로나19의 범세계적 확산사태 당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반응#s-6.7문서에서 볼수 있듯 외신들은 한국인들이 합심하여 보여준 사회적 거리두기 실천등의 시민의식과, 선별진료소 등에서 행해진 드라이브 스루 검사등 새로운 검사방식의 개발과 그 폭넓은 시행이 빠르게 이루어진 점을 두고 한국의 공동체주의 문화와 빨리빨리 문화가 긍정적으로 나타난 예라고 호평하기도 하였다.
오지랖 문화도 꽤 강하다. 또한 유행에 민감하며 한번 유행을 타면 엄청난 유행을 타는 민족으로도 유명하다. 이는 더플코트(1990년대) 노스페이스 패딩과 샤기컷(2000년대) 롱패딩 및 남성 투블럭 컷(2010년대)도 마찬가지.
한국의 공교육에서는 사고체계의 다중심성과 상대성, 간주관적 틀의 다양한 존재 가능성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기 보단 단지 1 더하기 1은 2와 같은 정해져있는 답을 이야기하는 것만을 주로 원한다고 보는 시선이 있다. 이 원인을 위에 나온 집단성에서 찾는 사람들도 있는데, 마치 공장에서 어느 물건을 대량생산할 때 조금이라도 모양이나 기타 여러 조건이 좀 다르게 나오면 그걸 불량품으로 간주하고 폐기시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공동체적 장점은 살려야 하지만 집단성만 강하면 안된다는 것을 자각해야 할것이다. 공동체주의와 집단주의는 엄연히 다르다. 몰려서 걱정만 해주는 이들보다는 실질적으로 공익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주는 것이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도 모두에게 이득이다.
이러한 집단성은 본인의 나이로도 나타날 수 있다. 한국은 만 나이가 아닌 세는나이로 따져 전 세계적으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이다. 이는 대학교 학번도 마찬가지다. 상대편이 나와 동갑이면 뭔가 동질감이 크게 느껴지고 같이 친구하기가 매우 쉽다. 당장 연예계에서도 XX(년도, 예를 들면 76, 아니면 91)라인이 존재한다. 상대편이 나와 나이가 다르면 동갑인 사람에 비해 살짝 이질감이 느껴진 것도 없지않아 있다. 상대가 나보다 연상이면 "형, 누나" 혹은 "언니, 오빠" 라고 한다. 서구권은 물론이고 한국 이상으로 집단적인 중동권이나 심지어 같은 동아시아 이웃 국가인 중국, 일본에서조차 혈연이 아닌 연상의 상대에게 형, 누나라는 호칭을 쓰는 경우는 없다.
한국 사회의 집단성 때문에 싸움없이 오래 갈 것 같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 역시 만만치 않은데 그것이 바로 집단간의 갈등이다. 공동체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속성을 지녀 타 집단에 적대적이거나 무관심한 탓에 소속 정당은 물론이고, 밥그릇 싸움, 지역갈등, 세대 갈등, 성갈등 등등 수도 없이 많다. 심한 경우 집단 이기주의로 번지기도 하는데 대표적으로 장애인 시설 확충 움직임 속에서도 '자기 마을에는 안된다'는 식의 지역이기주의가 대표적인 예이다.
3.2. 단일민족 의식
3.2.1. 실재론
단일민족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유전적 동질성을 획득했다'는 의미이지 '한국인의 기원이 하나'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적어도 한국 내에서 한국인의 유전적 동질성이 국경 바깥과 유의미한 차이가 생길 정도로 서로가 비슷해졌다는 걸 뜻한다.
- 1.000에 가까울수록 암내 유전자가 적은 것이다. 한국인은 1.000으로 엄청난 동일성을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인은 본토 주류 민족인 야마토 민족(나가사키시 기준. 가장 적은 곳은 교토부와 기후현이다.)과 나머지 오키나와인, 아이누 등으로 나누었다.# 해당 연구에서 야마토 민족, 오키나와인, 아이누를 각각 비슷한 규모로 표본을 수집하여 모두 Japanese에 포함하고 평균을 내서 그래프 형식으로 표를 만들었는데, 당연하지만 야마토 민족만 따졌을 때보다 암내 유전자 비율이 더 높게 나와 있다. 원래 야마토 민족은 암내 유전자 비율이 몽골인과 비슷하다. 다만 인터넷에는 그래프 형식의 자료가 많이 퍼져 있어 몇몇 오해를 낳았다. 또한 대만인(Taiwanese)은 한족이 아니라 대만 원주민(Aborigine) 기준이다. 동남아시아는 중국계 혈통이 많은 북부 지역이나 화교가 많은 지역에서 암내 유전자 비율이 낮은 것을 알 수 있다.(1.000에 가까움) 동남아시아의 토착 인종(오스트랄로이드, 말레이인 등)은 암내 유전자 비율이 높다.(0.000에 가까움) 또한 아프리카 쪽이 가장 높은 암내 유전자 비율을 보인다.
또한 한국이 단일민족국가라는 것을 부정하는 측에서는 외부에서 여러 혈통이 들어왔고 한민족 원류도 여러 혈통이 섞여 만들어진 집단이라는 근거를 내세우고 있지만 그 들어온 혈통들이 고유의 문화와 정체성을 유지하며 한민족에 버금가는 주류 세력이 됐다면야 근거가 될 수 있지만, 어차피 전부 동화되었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 거기다 민족이란 단순히 혈통만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민족(Ethnic group)이라는 것은 인종, 문화, 언어, 역사적으로 동일한 정체성을 나타내는 인간 집단이란 뜻이므로, 그런 점에서 한국은 명백한 단일민족국가이다. 단일민족이라는 점을 악용하면 안 되는 것이지 애써 부정할 필요는 없다. 애초에 한국이 단일민족국가가 아니라면 대한민국 내부에 한민족의 세력에 버금가는 다른 정체성을 가진 주류 민족 집단이 존재해야 한다.
여담으로 한국인의 기원을 설명할 때 흔히 북방계와 남방계로 나누어 말할 때가 많은데, 어디까지나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지, 명확한 실체가 있는 집단이 아니다. 특히 특정 지역을 두고 북방계와 남방계로 구분하고, 북방계와 남방계의 외모를 구분하는 내용이 인터넷에 많이 떠돌아다니는데, 유사과학이다. 한국인의 조상 되는 집단이 어디에서 어떤 경로를 거쳐 한반도에 정착했는지는 아직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알 수 있다. 또한 북방계니, 남방계니 하면서 외모의 특징을 말하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다. 북방이라고 하니 몽골, 남방이라고 하니 동남아시아가 떠올라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인과 동남아시아인은 유전적 거리가 다른 인종으로 분류될 수 있을 만큼 매우 멀다.#
다른 민족의 예를 들어보자면 유대인들은 사는 지역에 따라서 외부와의 혼혈이 많이 진행되었음에도, 유대교라는 정체성으로 묶였다. 심지어 이들은 서로 인종마저 다른 경우가 있지만[17] 유대인이라는 문화, 언어, 역사, 종교의 동질성으로 묶였다.
인종적인 부분에서 보았을 때 삼국시대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외부에서 중국, 일본, 몽골, 거란, 여진 등 여러 혈통들이 들어왔지만 같은 동아시아인들이 대다수였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던 만주족(말갈·여진), 북방계 한족, 일본 야요이인들은 유전적으로 한민족과 아주 가까운 편이라 완전히 이질적인 외부 세력들이 들어왔다는 주장에도 어폐가 있다.
한국인의 하플로 타입을 조사한 결과 한국인은 지역별 유전적 차이가 매우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한민족의 주변 민족, 한민족의 조상이 되는 국가들을 연구하면서 한민족의 혈통이 고대부터 지금까지 큰 차이가 없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고려 이후의 혈통 유입을 생각하더라도 그 혈통이 한국인의 현재 혈통에 큰 흔적을 나타내지 않고 있으며 그들이 한국에서 정체성을 근래까지 유지하지도 못했다고 본다.[18]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백정 등이 종족적으로 동화가 덜된 집단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이민족이라는 점뿐만이 아니라 신분적인 의미도 강하기 때문에 논란이 있는 상황이며 조선 시대에 이르면 천민층은 다른 지역에서 유입되어온 이민족이 주류였다는 기록은 있다.
한편 근세까지 일본인과 여진족이 유입되었다고는 하나 만주족이 한족에 흡수된 것처럼 이들도 한국인의 압도적인 유전자 풀에 동화하여 개성이 사라졌다. 즉 항왜는 최대 5000~1만 명 정도고 김충선의 우록 김 씨 이외에는 정체성을 잇지 못했고 우록 김 씨조차 1700년경에 이르면 일본의 문화를 기초단계부터 잊어버렸으니 이들은 한국으로 귀화해 지금 우리 민족의 한 갈래가 됐다는 것이다. 다만 이것은 혈통성을 따지냐 문화성을 따지냐의 문제라서 해석에 따라 다르게 볼 여지는 충분하다. 이와 별개로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인 남성과 결혼해 한국에 정착한 일본인 여성들도 많았다. 부용회와 같은 재한일본인여성 모임회가 아직까지 존재하며 가장 많았을 때가 4-5000명 정도의 규모였다고 한다. 대부분이 광복쯤에 결혼하신 분들이라 연령대가 90대 이상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2020년 기준 생존하신 분들은 적은편이다. 다만 이것도 혈통성을 따지냐 문화성을 따지냐의 문제라서 이 역시 해석에 따라 다르게 볼 여지는 충분하다.
한편 여진족은 청의 건국과정에서 동화되지 않았던 집단인 번호가 결국 청에 합류함으로써 소멸하였다고 주장한다. 요동으로부터 도피해온 무리도 있었으나 요동의 거주민은 상당수가 16세기 초까지 종족적으로 조선인과 동일하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그나마도 병자호란 이후 사실상 유입이 멈추었다고 본다. 그 결과 이들은 병자호란 이후 개화기까지 조선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다.[19]
결국 상대적으로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 단일혈통을 유지한 민족이 한국인이다. 다만 이러한 혈통적인 측면은 민족담론에서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하고,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공통된 민족의식인데, 특히 이 부분에 있어서 한국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한반도 거주민들을 한데 묶어 공동체 기틀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1400년에 달하는 긴 세월동안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민족이라는 민족관이 견고히 형성되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매우 이른 시기부터 높은 동질성을 보이는 편이다.[20]
단일민족을 긍정하는 또 하나의 주요 근거는 언어와 문화다. 언어는 민족의 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언어적 동질성이 낮아도 프랑스처럼 연합의 형성이 가능했다. 그러면 한국은 어떠한가? 여기서도 한국은 제주도를 제외하면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다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는다. 심지어 중국에 간 신라사신이 중국어 통역이 없었는데 때마침 와있던 백제사신이 통역을 빌려줬다는 기록과 고대어 연구를 통해 고대 삼국시대부터 서로 동일한 언어계열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제주어의 경우가 예외긴 하지만 본토인 한반도와 비교했을 때, 국력과 인구를 비롯한 총체적인 격차가 워낙 심했기에 민족성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제주어도 근본적인 뿌리는 한국어와 동류인 형제 언어이다. 한국어족 문서 참고) 중국은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중국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여있지만 각 지역끼리의 언어 차이가 심해서 이미 언어학적으론 '뿌리는 같지만 다른 언어들로 갈라졌다'고 정의내려진지 오래고 심지어 각 지역 언어들의 화자 인구수도 수천만명에 달할 정도로 상당한 규모인지라 여전히 언어를 통한 통합된 민족성 형성에 있어서 애를 먹고있는 중이다.
문화적으로는 물론 지역성은 나타났으나 그것이 대표적 단일민족국가인 독일이나 일본의 지역차와 비교해도 적은 정도였으며 민족의식의 측면에서도 고려인, 조선인이라는 공통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여러 면에서 살펴 봤을 때, 민족의 기본적인 정의인 집단 동질성 및 집단 정체성 측면에서 매우 높은 수준의 동질화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인종, 언어, 문화, 역사의 동질성으로 묶여있는 공동체를 민족으로 본다면 한민족은 실재한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대한민국 헌법에서는 민족을 언급하며, 민족문화의 창달을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고 적혀 있다.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
3.2.2. 해체론
단일민족 해체론의 가장 큰 근거로는 '혈통적으로 한민족은 단일민족이 아니다' 라는 점이 흔히 제시된다. 실제로 중국, 여진, 거란, 몽골, 일본 등 다양한 출처의 인적 집단들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가는 데 기여했다. 다만 한반도에 유입된 외부 집단들은 결국 모두 한민족에 완전히 동화되었기 때문에 이걸 근거로 단일민족이 아니라고 하는 건 개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단일민족에 대해 신이 내린 하나의 유전자만을 가진 혈통이라고 오해하는 것 같은데, 그런 식이면 자식은 부모에게 각자 다른 유전자를 받았으니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될 수 없다는 소리와 같다. 또한 유입된 외부 집단은 그 수가 정주민에 비해 많다고도 볼 수 없으며, 절대다수가 한국인과 유전적 거리가 가까운 집단이었다.
근현대 이후 활발한 교류로 한국에 들어오게 된 외국인들도 있다. 이것은 혈통적인 의미 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의미에서도 그러하며 기존의 '내재적 발전에 의한 일직선적인 성장 과정'으로 평가받던 것들이 타자와의 교류에 의한 것은 아닌가 하는 탐구도 활발하다.
더군다나 문화적, 역사적 동질성이 현실에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당장 민족주의적 시각에서는 역사적으로 고려, 조선이라는 왕조 속에서 동질성을 유지했다고 말하지만, 각 지역, 신분 등 여러 이해관계에 따라 당대인이 자신의 시대와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이 판이하게 달랐다. 예를 들어 동학농민운동 때 집강소는 전라도, 경상도 등 지역마다 운영방식, 주도 신분, 방향 등이 첨예하게 달랐다.
반론으로 동학농민운동이라는 한 사건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니 동질성이 강하다고 주장할 수 있으나, 동학농민운동이라는 말 자체도 이 사건을 평가하는 후대인의 관점이 들어간 용어이며, 당대인이 썼던 용어가 아니다. 또한 동질성에 대한 비판은 이념형과 개념화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다만 그게 실제로 그랬는지에 의문을 가지는 것이다.
문화적으로 공통점을 가진다는 것도 의문이다. 개개인마다 향유하는 문화는 서로 다르며, 같은 문화를 공유한다고 할지라도 평가, 판단 등 개인마다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서 한국인은 맵게 먹는다고 하자. 과연 한국인이 그렇게 먹는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맵게 먹지 않는 사람은 한국인이라고 부를 수 없을까? 이건 개인의 성향마다 다른 문제인데, 이를 향유하는 문화적인 '경향성'이 있다고 해서 동질성이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애초에 동질성으로 민족을 설정하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다. 가령 A라는 사람은 매운 것을 좋아하며 한국 역사를 잘 알고 한국 노래를 좋아하며 한국에 거주하지만 유럽에서 태어나 한국 시민권이 없고, B라는 사람은 어릴 때부터 미국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매운 것을 먹지 못하며 한국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하고 한국 노래를 듣지도 않고 한국에 거주하고 있지 않지만 한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을 때 과연 누가 한국인인가? 단일민족의 동질성을 설명하는 혈통적, 역사적, 문화적 동질성이 있는 공동체라는 기준은 지금에 와서 아무 쓸모가 없다. 그 기준대로라면 A도 B도 한국인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동질성을 단순히 '비슷한 정치, 사회, 문화적인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라고 정의해도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것 자체가 단일민족을 부정하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일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단일성을 주장하는 성격이 강한데,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건 결국 다원성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게다가 이런 식의 설명이라면 세계의 어떤 국가도 단일민족이 아닌 국가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며, 다민족 국가와 구분할 기준 자체가 모호하게 된다. 따라서 어떤 기준을 가지고 구분을 해도 결국 단일민족은 실재한다고 볼 수 없다.
3.2.3. 재외동포의 의미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 이래 외국으로 이주한(혹은 이주당한) 동포가 제법 많다. 재중동포인 조선족, 재일동포, 고려인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 외에도 근대와 현대에 집중적으로 형성된 재미동포, 현대에 집중적으로 형성된 남아메리카 이주 동포 등이 있다. 한때는 이와 관련하여 '아이 수출국'이라는 비판을 들을 정도로 해외 입양 문제도 자주 불거졌었다.
한국인은 고유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생각이 강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재외동포 또한 외국으로 이주하거나 귀화하더라도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여기거나 본국의 문화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 때문에 현지 사회에 녹아들어가지 않고 한국인들만 모이는 이들이 있어 반감을 사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한국인만의 특징으로 볼 수는 없다. 중국인은 차이나타운이 있고 일본인도 리틀 도쿄가 있다. 누구나 낯선 환경으로 가면 가까운 사람끼리 뭉치는 법이다.
다만 이 부분은 개인차가 심한 부분인게, 일부 교포들의 경우에는 현지인들과 동화하려는 의지를 보이기도 하며 굉장히 폐쇄적인 성향을 띠는 한국인들을 경계하기도 한다.[21] 한국의 세대 갈등과 마찬가지로 이쪽도 새로 온 이민자들하고 오래 전에 정착한 이민자들 사이의 가치관 갈등이 엄연히 존재한다. 단지 이들이 해외에 있고, 대부분 한국처럼 인간관계에 파묻혀 지낼 필요는 없어 서로 무시하고 사는 경우가 많아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특히 교포 2세, 3세와 어렸을 때부터 해외에서 교육을 받고 자란 1.5세의 경우에는 부모가 특별히 한국 문화를 가르치지 않는 이상 거의 외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있다. 다만 한국계 미국인 문서에서도 볼수있듯 대부분의 경우는 자신이란 존재의 뿌리중 하나라고 볼수있는 대한민국이란 국가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지는 편이긴 하다.[22] 2세, 3세는 이중국적, 1.5세는 원래부터 한국인이기 때문에[23] 법적으로 국적이탈 또는 국적포기를 하기 전까지는 한국인이며, 따라서 남성의 경우 병역의 의무 또한 수행해야 한다.
3.3. 인생관
3.3.1. 한국인과 종교
3.3.1.1. 주요 종교
2015년 통계에 따르면 대한민국 인구의 56.1%는 종교가 없다. 특히 한국이 속한 동북아 지역은 무종교인의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들이다. [24] 종교인 중 가장 많은 19.7%가 개신교를 믿고 15.5%가 불교, 7.9%가 천주교를 믿으며 그 외 소수 종교는 약 0.8%. 개신교는 세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불교는 최근 20여 년 동안 계속 쇠퇴하고 있고, 천주교는 성장세가 약화되었다. 무종교인의 비율이 다시 종교인의 비율을 앞지른 것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다만 무종교 통계를 낼 때마다 깊게 살펴봐야 할 게 있는데, 종교를 가졌다고 해서 종교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나 유럽의 경우에는 종교가 사회적 전통의 일부거나 한국의 유교처럼 집안내력으로 어릴 때부터 세례를 받으며 자연스레 가지는 문화적인 의미로써 종교를 가지는 것이지 실제 종교활동을 하냐 안 하냐로 물어보면 국민의 대부분은 종교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다. 독일의 경우 가톨릭+개신교 신자 비율이 55%가 넘는데 반해 실제 주기적으로 종교활동을 하는 인구는 350만명 가량 뿐이고, 한국의 경우 신자 중의 80%가량이 매주 종교 활동을 하는 데 반해 스페인, 프랑스, 덴마크, 영국에서는 신자 중의 5%만이 매주 종교 활동에 참여하며, 노르웨이의 경우에는 종교의 신자들이 평균적으로 한 해에 단 1회만 예배를 드린다는 기사를 보면 확실히 문화적으로 가지고 있는 경향이 크다는 것을 볼수 있다. 한국으로 따지면 설날, 추석에 제사나 성묘 정도만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한국에서 무교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생활방식이 진정한 의미의 비종교인에 가까운지는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앞서 설명했듯이 종교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서구에서도 적극적인 종교활동을 하는 사람이 종교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 수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종교 유무에 대한 이해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서구에서는 부모로부터 특정 종교의 영향을 받고 해당 종교에 의한 의식을 연 1회, 또는 그것보다 작아도 자신의 생활에서 특정하게 믿는 신이 명확하거나 또는 생활철학에 영향을 주는 종교가 있을 때 그 종교의 신자라고 답을 하지만, 한국인들은 적극적인 종교 활동을 가져야만 신자라고 대답하는 경향이 높다. 보통 유럽이나 서아시아에서 한국인에게 "종교가 무엇이냐"고 물어볼 때 무교라고 대답하면 대부분 놀라고, "한국인 50%가 종교가 없다"고 대답하면, "그런 생활이 어떻게 가능하냐?"며 충격을 받는다. 이는 과거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고 종교 자체가 철학인 시절부터 극단적인 종교 탄압 등의 단절 없이 역사가 지속되었던 서구 유럽의 기독교 문화나 서아시아, 아프리카의 이슬람교문화와 동남아시아의 이슬람, 불교 문화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응인데, 이들의 관점에서 재구성한다면 사실 "종교가 없다"고 말한 한국인 50%의 대부분이 유교가 종교라고 말해야 옳다. 한국에서 "종교가 없다"고 말한 사람들 대부분은 명절이나, 조상의 기일에 정식으로든 약식으로든 제사를 지내며, 어려운 일이 있을때 막연히 조상이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자식들에게는 친구들과 우의있게 지내며, 웃어른을 공경하고 신의를 중요시 하라는 지극히 유교적인 가르침을 주며 유교적인 생활철학을 공유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앞서도 언급되었듯이 이제는 유교가 종교라기보다는 학문이나 관습에 가까워 종교라고 언급하기 어려운 면이 있고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산업화 시대를 겪으며 비효율적이고 체면중시의 유교문화에 반감으로 인해 유교적인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유교적인 철학인지를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유교의 이런 특정들로 인해 타 아시아 국가에 비해 한국에 기독교 등 외래종교의 전파가 용이했던 측면도 있다. 한국인 대부분이 유교적 제사와 생활철학을 가지고 살게 된 데는 당연히 조선왕조 500년의 영향이 크며,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불교를 극단적으로 탄압한데도 영향이 있다. 실제 정치 철학으로 유교를 받아 들인 중국 등의 다른 동아시아 국가에서도 조선 만큼 불교를 탄압한 예는 거의 없으며. 조선은 정도전이 이상적으로 생각한 이른바 유교원리주의 국가에 가까울 정도로 유학의 이상을 가장 현실화한 국가였기 때문에 불교에 대한 탄압이 유독 강했다.[25] 만일 한반도 역사에 조선왕조 500년이 없었다면, 한국인의 90% 이상이 불교신자였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일본의 예를 생각해보면 조선왕조가 없었다고 불교가 국교 수준이 되었을 거라는 건 지나친 해석일 수 있다.
다만 통계마다 개신교와 불교의 순위와 비율이 바뀌는 등 오차가 존재한다. 2012년 경기도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종교 없음이 50.3%, 개신교는 24%, 불교는 15.6%, 천주교는 9.4%, 기타 0.7%로 위 조사와는 차이가 있다.[26] 자료 출처, 통계청.
한국에서 기독교[27] 와 불교 등 메이저 종교들은 기복신앙으로서 기능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종교의 자유가 제대로 보장되어서인지 이상한 종교와 그로 말미암아 벌어지는 다툼이 있지만 다른 나라처럼 피를 보는 대립은 없어 대체로 종교 문제에서는 얌전한 편이다.
그런데 사실 종교 대립이 적은 까닭은 위에 언급한 국가가 명시해 놓은 종교의 자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법치주의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고, 대부분 종교에 과몰입하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믿는 신의 차이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서아시아,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에서 종교 대립이 심한 곳을 보면 종교가 국교 수준이라 과몰입하기 좋은 환경이고, 그 중에는 국가에서 자국 헌법상 종교의 자유를 언급하고 명시하더라도 자국 국민들끼리 종교로 편을 갈라 죽이고 종교로 반군과 정부군이 갈라져 싸우거나 등의 유혈사태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치안이 한국보다 나쁘며 총기 등의 무기를 소지하는 것이 한국보다 쉽다는 면이 커서 그런 것도 있다. 오늘날 서아시아,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서 기독교와 이슬람교(수니파와 시아파), 불교, 힌두교 등 여러 종교끼리 서로 대립하는 나라들을 보면, 국가가 종교의 자유를 명시하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대개 무기 소지가 쉽고 한국보다 국가 공권력과 치안이 약해서 피바다가 되는 경우도 많다. 즉, 국가에서 아무리 종교의 자유를 외쳐도 종교에 과몰입하기 쉬운 환경이고, 치안이 열악하고 개인의 무기 소지가 자유롭고 일일이 제재하기 힘드며 법적 처벌이 약한 나라라면 종교 분쟁은 일어날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반면 한국에서 종교분쟁이 발생하지 않는 원인을 한국인에게 전통적으로 큰 영향을 준 유교와 불교의 영향으로 분석하는 주장도 있다. '유일신'을 섬기는 종교들은 자신만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다른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 되기 쉬운 면이 있고, 이에 따라 종교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에 비해 유교와 불교는 (조상이나 석가모니를 신으로 모시는 샤머니즘적인 기복신앙화 된 측면이 있지만) 원래는 신을 두고 있지 않았으며 종교라기 보다는 삶의 철학에 대한 가르침이 주는 학문적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타 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성향이 강하지 않았고[28][29] , 문화적으로 해당 종교의 영향을 받은 한국인들에게 종교로 인한 분쟁은 생소했을 것이란 점이다.[30] 실제 기독교 성경에 등장하는 '이교도'라는 개념은 불교와 유교에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며, 구약성서에서 여호수아 등이 이교도를 무차별하게 죽이는 내용이 아무렇지도 않게 실리는데 반해, 불교에서는 동물의 살생까지 금하는 등[31] 기본 종교적 철학에 차이가 있다. 이로 인해 한국인들은 타 종교를 배척하는 모습을 안 좋게 보는 성향이 있으며, 특히 일부 개신교인이 행하는 종교테러[32] 에 대하여 민감할 정도로 반감을 가지는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고 분석 할수 있다.[33]
일례로 한국에서는 국민들이 서로 종교 가지고 싸워서 크게 간다 해봐야 어지간해선 모임이나 길거리에서 붙어서 말싸움으로 끝나는 정도고, 좀 심하면 종교 가지고 몇 차례 폭행 시비[34] 이 좀 오가는 정도지만[35] , 이것을 서아시아,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남아시아 등의 제3세계 국가들에게서 일어나는 종교분쟁(사실상 거의 지역구 전쟁급)으로 일어나는 것과 비교해 보면 새발의 피 수준이다.
여기에 인터넷이 발달한 것도 한 몫 한다. 한국의 경우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인터넷 상의 폭력(악플, 온라인상 명예훼손 등)이 발달하여 사회의 폭력 방법이 과거나 다른 나라처럼 과격하게 오프라인에서 때리고 부수는 것을 온라인상의 폭력이 어느 정도 대체하는 면이 크다.[36] 한국에서의 종교 분쟁이나 정치 분쟁이 벌어지는 경우도 현피를 뜨는 경우보다 대체로 편하고 쉽게 상대방에 대한 공격, 싸움,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일종의 배출구가 되는 "인터넷" 상에서 오가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걸로도 모자라서 현실에서도 서로 싸우고 심하면 살인을 하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제3세계 외국에 비하면 빈도수가 적다.
예컨대 정치의 경우도 보면 같은 사안이라도 4.19 혁명처럼 인터넷이 없던 과거 6~70년대라면 국가가 국민을 핍박하면 들고일어나 몽둥이 휘두르고 화염병 던지는 식으로 저항했지만 21세기인 지금은 오프라인상으로 행동한다고 해도 과거와 달리 촛불시위나 평화집회행진 등 수준으로 많이 완화되었으며 나머지 저항욕구와 비판여론과 분노표출 등의 사회에서 쌓인 불만을 (반대댓글, 반대 서명 운동 등의 방식으로) 인터넷을 활용하여 저항한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까닭 또한 과거와 달리 선택지가 하나 더 늘어 인터넷이라는 또 다른 분노와 저항의 표출 통로가 있기 때문에 오프라인에서 표현하던 방식이 인터넷으로 일부 이전, 분산된 것이며 또 과거와 달리 요즘엔 길거리마다 있는 CCTV 블랙박스 등과 같은 형사처벌용 증거 수집도 더 쉬워져 과거에는 잘하면 들키지 않을 수도 있는 폭력이나 도둑 등의 형사처벌이 더 쉽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만일 가정해서 한국도 제3세계 국가들처럼 총기와 로켓포 등의 개인 무기 휴대가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을 정도로 보편화되거나 자율화되고 경찰과 공권력의 형사처벌이 지금보다 많이 약해져서 사람들이 처벌을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면 외국만큼은 아니어도 한국에서도 종교나 정치 등의 민감한 이슈로 유혈사태(서로 총질)가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개신교[37] 와 달리 한국의 불교와 천주교는 함께 행사를 치르거나 종교계 거물끼리 함께 사회운동을 하는 등 나름 꽤 사이가 좋은 편이다.[38] 다음과 같은 식으로 부처님 오신 날을 천주교가, 성탄절을 불교가 축하해주는 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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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종교적으로 분리된 이유를 박정희 정권으로 꼽기도 한다. 옛날만 해도 집집마다 신주단지가 있고, 마을마다 서낭당이 있는 전통적인 기복신앙이 대표 종교였다고 한다. 이것을 미신을 없애고 근대화를 한다는 명목하에 전 국민적으로 배척을 하였고 전두환 정권 시절에 전통문화에서 기복신앙이 축제나 놀이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다시 살리려 했지만 이미 많이 사라진 상태. 그래도 일제강점기를 버티고, 6.25피난길에도 신주단지를 챙겨가며, 박정희 정권을 넘어 현재는 서낭당 대신 교회에 모여 빌고 노래하고 춤추고 음식을 나눠먹는걸 보면, 여전히 전통기복신앙이 대표 종교라 분석되기도 한다.이 세상이 부처님께서 설파하신 '자비'가 넘치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며 특별히 우리의 가정이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터전이 되기를 기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많은 이들에게 진정한 삶의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 2014년 부처님 오신 날 축하메시지>
3.3.1.2. 유교
전근대부터 현재까지 한국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던 것은 유학이다. 가장 강력한 영향이라는 말은 한국인의 종교관을 형성하는 것이 이것 하나라는 말은 아니다. 대체적으로 학계는 종교보다는 유학으로서 학문의 한 분야로 접근한다. 공자는 자신이 종교 지도자라는 생각이 전혀 없었고, 심지어 조선 당대에 유학을 종교라고 생각한 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학자라고는 누구나 생각했다. Religion의 일본의 번역어 종교라는 개념 자체가 아주 근대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때문에 이 항목에 쓰는 것이 부적절할 수도 있으나, 한국인에게 너무나 강력히 영향을 미쳐서 종교 문서에 쓰여있다고 생각하면서 넘어가도록 하자. 혹시나 한국인의 학문관 분야가 자세해지면 이 글은 옮겨가야 할 수도 있다.
유학은 한국인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유학은 존재를 독아적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유학은 한 존재에게는 반드시 그 존재를 앞선 존재가 있으며, 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현대에는 강박적이라고 경솔하게 취급되는 조상 중시에서 쉽게 드러난다. 예컨대 유학에서는 웃어른이 작고한 후에, 혼백이 흩어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이라고 알려진 일정 기간 동안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의례가 있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시묘살이 등등이 있으며, 유학에서 예는 후대로 갈수록 정교해진 측면이 크다. 대표적으로는 예송논쟁과 사단칠정논변이 있다. 그 복잡함은 단지 종교적인 숭배가 아니라, 어떤 지적인 사랑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유학의 영향으로 한국인은 개체가 자기이익만을 추구하는 독아적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전통적인 심성을 간직한 사람은 인간의 무한경쟁이 결국에 만들어낸 균형이 인류사라고 믿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파시즘과 비슷한 오류가 있다. 유학에 대한 옹호에 반대 의견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싫든 좋든 지금의 한국인의 많은 부분이 바로 이 유학이 만든 사상관 위에 세워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이 유학이라는 지평을 전복하고자 하는 시도였더라도 그러하다.
현세의 부와 안녕이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유교는 한반도를 500년 동안 다스린 나라의 이념으로 있었다. 조상님 모시기 또한 현세의 복을 빌기 위함이었으나 나중엔 주객이 전도되어 조상님을 모시다가 큰일이 나는 경우도 있었다. 몸살이 났는데도 기어이 3년상을 치르다 죽어서 줄초상을 치른다거나 명당을 차지하려고 한밤에 몰래 다른 사람의 묘를 파다 걸려서 뭇매 맞거나 무리한 성묘 또는 벌초를 강행하다 아예 조상님 옆에서 영원히 잠드는 등의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조상을 모신다는 자체가 '''주객전도'''라는 사실이다. 조상을 모시는 것은 서구와는 다른 영혼관의 영향으로 생겼는데, 그들이 조상을 모시는 것은 복을 빌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은 조상들을 가족의 일원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5대조까지는 집에서 모시는데 이에 따라 집에 돌아오면 산 부모님이 아니라 5대조의 위패에 먼저 문안을 올리러 찾아가게 된다. 그리고 세대가 교체될 때마다 5대조 위패의 순서가 바뀌는데 이는 그 기간 동안 모셨으면 죽은 사람의 넋이 충분히 만족하고 땅으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조상님께 인사를 드리는 것이 기복신앙과 결합하면서 조상신 숭배로 나타났으니 이는 가족을 신으로 생각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기에 주객이 전도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민족전통 연구가들은 우리의 종교는 여전히 전통 기복신앙이라고 한다. 죽은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건 중국 고대 문서에도 기록되어 있고, 불교를 들여 왔더니 하라는 해탈은 안하고 천지신명 대신 부처에게 빌고, 삼국지를 알려주니 관운장한테 빌고, 기독교를 들여오니 예수한테 빌었다.
이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지 한국인의 현대 종교 생활을 보면 대개 현세구복적 성격으로 믿는 경우가 많다. 구원을 중시하는 천주교의 추기경이 세 명[39] 이나 나기도 했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雖臥馬糞 此生可願 수와마분 차생가원)'''" 또는 "'''죽은 정승이 산 개만 못하다'''" 라는 한국 속담은 현세를 중시하는 태도를 잘 나타낸다. 단, 두 번째 속담은 "아무리 존귀했던 몸이라도 한 번 죽으면 거들떠보지 않는 것이 세상 인심이다"라는 뜻도 있다. 세상 인심이 실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뜻도 있다. 이런 속담들이 있음에도 한국이 OECD 자살률 최상위권 국가라는 점은 꽤나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이것은 기관들 혹은 정부 차원의 과한 제도로 인한 시선들 때문이지 '한국인'의 관념에서 바라보아선 안되며 실제로 한국의 높은 자살률은 OECD 평균의 3배에 육박하는 독보적인 노인층의 자살률 때문이며 다른 연령층의 자살률은 OECD 평균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다. 다만 노인층의 자살률에서 독거노인의 비중이 높다는 점 또한 조상에 대한 예의를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에 비하면 매우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이런 자살률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한국인의 현세구복을 비는 태도는 종교 사상의 변질을 낳아 변질된 종교인이 출현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3.3.2. 기초학문을 싫어하는 경향?
3.3.2.1. 주장
순수학문과 기초학문은 아니지만 예체능의 경우 교육비도 많이 들고 육체적으로 고생도 많이 하며 정부 지원도 변변찮은데다 성공하지 못하면 살아남기 어렵다. 문제는 이를 천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당장 공부 좀 하던 자식이 예체능 쪽으로 가겠다고 말하면,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너 그걸로 벌어먹고 살 수는 있겠니?'''"라며 걱정부터 할 것이다. 거기다 사회적으로 봤을 때 이들은 상황이 힘들어서 지원자가 적고, 지원자가 적으니 후원해 주는 단체도 없고, 후원해 주는 단체가 없어 상황은 더 힘들어지고, 상황이 더 힘들어지니 지원자는 더더욱 적어진다는 악순환의 늪에 빠져 '''진짜로 못 벌어먹고 사는 상황이 되는 경우가 많다.'''
과장을 좀 보태서 '''거의 모든 학문'''에서 철저히 '''돈을 더 잘 벌 수 있는''' 학문에만 정부 지원이 집중적으로 몰린다. 특히 인문학이나 자연과학 같은 기초학문은 한국에서는 찬밥 신세를 면치 못 한다. 여전히 한국에서는 기초학문이 영 좋지 못한 대접을 받는 실상이며 한국인의 대다수가 인문학적 훈련이 매우 결여돼서, 논리적 사고와 높은 수준의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 민주주의 사회의 구성에 있어서 개개인이 가진 인문학적 소양은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말과 글을 통해 타인의 생각과 시사적 맥락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 올바른 투표, 성숙한 토론 등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중요 근간이기 때문이다.
밥 못 벌어먹고 사는 과목을 지칭하는 '문사철' 혹은 '국철사' 라는 속칭[40] 까지 돌고 있을 정도다. 기초학문을 이상하고, 안 된다고 여기기 때문에 능력 있는 인재들을 제대로 육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외국에 나가서라도 한국인이 높은 성과를 낸 건 한국인에게 좋은 일이지만 바꿔 말하자면, 이는 한국의 인재들이 국내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해외로 빠져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이 대한민국의 국익에 좋은 현상이 절대 아니라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사실 문사철은 전근대에만 해도 학문의 정수이고 사실상 전부였다. 그러던 것이 겨우 백여 년 만에 가장 인기없는 분야로 바뀌었으니 격세지감을 느낄 만하다. 물론 당대의 지나친 문사철 우대로 인한 관리들의 현실감각 부족, 기술직 천시 등이 결코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미래의 국가 경쟁력을 생각해서 지금부터라도 기초과학에 막대한 투자를 해도 모자랄 판에 당장 사회적인 인식부터가 찬밥 신세니 정말 큰 문제가 아니라 할 수 없다. 공학은 4년 학부 과정만 마쳐도 엔지니어로서 첫 발걸음을 뗄 수 있겠지만, 기초과학에 해당하는 물리/생물/수학/화학 등은 일단 기본적으로 10년 이상의 공부를 해야 하고, 민간 기업들의 투자가 공학에 비해 미약한 것과 더불어 대학생들 또한 이 분야에 적극적이지 않다. 기초과학에 대한 무관심은 국가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당장 거의 모든 대학에 붙는 '취업순위 1위 대학'이라는 꼬리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자. 일단 한국의 응용과학 관련 공학기술 분야는 세계적인 수준이라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지만, '''기초과학이 부재한 응용과학의 발전은 결국 '후발주자'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기초학문 중에서도 기초과학 분야는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데 있어 천시해서는 결코 안되는 필수학문이다. 웬만큼 나라의 틀이 잡혔다면 반드시 대폭 지원해주고 우대해줘야 하는것이 이런 기초과학 분야인데, 대한민국은 벌써 선진국 반열에 접어든 세계 10위 경제대국인데도 기초학문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결국 개선되지 못했다. 단순히 다른 국가의 성과를 보고 그것에 급급하여 언발의 오줌누기식으로 뿌려대는 정권 립서비스용 멘트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사회에서 우대받는다는 인식이 들 수 있을 정도의 의미있는 과학계 지원이 시급하다.
솔직히 이것은 과학뿐만이 아니다. 대학을 졸업하면 모든면에서 공부를 안한다. 아니 하기 싫어한다. 고시를 보는 경우만 몇년 더한다. 그래서 지금 공부한것만으로 돈벌 수 있는 과목을 선호하는 것. 순수과학이든 예체능이든 인문학이든 계속 공부를 해야하는 것들이다. 결국 자기가 공부하기 싫으니까 자기 자식이 하고 싶은 공부는 못하게 하고 하기 싫어하는 공부를 시키는 꼴. 이걸 보는 위키러는 꼭 기억하자. 우리나라는 지금 밥 굶고 사는 70년대가 아니다.
3.3.2.2. 반론
이에 대한 반론으로는 한국의 근대화 시기를 고려한다면 기초과학보다는 실용적인 공학/과학기술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근대 과학의 기반을 다져온 유럽과 북미, 그보다는 늦었지만 빠르게 성장한 일본이 냉전 시기 선진화된 민간/국민 생활을 누리며 기초과학에도 이런저런 투자를 하고,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이 국가 개발 주도로 기초과학을 전폭적으로 밀었던 그 시기에 '''한국은 일단 먹고 살아야 했다.''' 게다가 공산권의 기초과학 발전은 자본주의 서방 진영과 사실상의 수장인 미국과의 군사, 체제 경쟁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기초학문에 투자할 여력은 고사하고, 당장 입에다 넣을 쌀도 없는 판국이라 뭐라도 만들어 팔고 식량을 구해야만 했다. 그 결과 경공업/중공업 치중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원래 나라가 주저앉았다가 다시 성장할때 황금만능주의 같은 근시안적 사고관이 자리잡는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매우 흔한 일이다. 전체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에서 맹위를 떨쳤고, 선진국이라는 일본도 패전 이후 다시 경제를 건설하던 20세기 중, 후반에는 '이코노믹 애니멀'이라 불리며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한중일 모두 이렇게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한중일 세 나라 다 비슷한데 왜 한국이 기초학문에서 부족하냐고 하면 할 말이 없는 것도 아니다. 중국의 체급은 우리와 비교 불가고, 일본은 패전국이라지만 과거 열강의 일원이었다. 한국은 세계에서 투자하거나 지원하기에 별로 메리트가 있는 국가도 아니었고, 산업화를 성공할 역량이 있어 보이는 국가도 아니었다. 한국의 산업화가 좌우 막론하고 '''도박'''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도 그것이다. 중공업, 전자산업, IT산업 등이 한국에서 발전할거라고 본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때문에 한국 자체가 기초학문을 천대하는 나라라기보다는 근현대사에서 겪은 여러 경험이나 요인들로 인해 현재의 기초학문 천대로 이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래서 한국인들의 기초학문에 대한 관심이나 수준이 부실하다는 비판은 타당하지만, 한국인들이 기초학문을 배척한다고 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 한국인은 한국인의 장점이 있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쳐가며 우리나라는 미국과 일본의 대규모 경제 지원이 있었다지만 그 어떤 기술력 없이 맨손으로 시작해야만 했다. 고작 약 50여년만에 산업화, 현대화, 선진화, 민주화를 달성한 국가이며 세계 꼴찌 수준의 경제 규모에서 2019년 기준 GDP 10위의 경제 규모를 가진 경제 대국이 되었다. 과거의 평화로웠던 조선과 비교해보더라도 이러한 발전상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거의 없는 수준이다. 근대 과학의 역사가 수백년에 달하는 기초과학 강국들과의 단순한 비교는 분명 무리가 있다.
또한 대한민국이 응용과학에 비해 기초과학이 떨어지는 건 맞지만, 의외로 대한민국의 기초과학 기술력은 '''세계에서 8~15위'''(물리학, 수학, 생물학, 화학 등. 대충 대한민국이 가지고 있는 경제력 순위와 비슷하다.) 정도는 된다. 무엇보다도, 여러 산업이나 공업, 소프트파워 등을 '''자급자족 할수 있는 나라는 정말 적다.''' 자꾸 한국의 기술이나 산업을 미국이나 일본, 중국, 서유럽 국가들과 비교하는 사람이 많지만, 자체적으로 산업/공업을 굴려 자체적으로 보급하는 나라는 거의 이 국가들이 전부나 마찬가지다.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을 자식에게 시키는 것이 조기교육, 과외 등으로 이루어졌고 창의적인 생각보다는 단순히 암기를 빠르게 해서 답을 바로바로 찾아야 한다는 교육방침이 이런 사회를 만들게 된 것. 자신 세대에 배웠던 교육과정을 자식에게 전달해주니 창의적인 교육이 불가능 해지고 비슷한 행보를 걷게된다. 한국엄마&미국엄마 비교(한국어가 난이도가 훨씬 높아 변인통제가 되지 않은 실험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여기서는 마인드적인 차이에 대해 초점을 둠.)
기초 과학 분야 수상자가 나오지 않는 것은 교육 환경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지만 '''시기상조라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해석'''이다. 기초 과학의 발전이라는 게 단기간 돈을 쏟는다고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오랜 세월 꾸준히 투자와 인식 개선을 해야 그때 꽃을 피우는 게 기초 과학이다. 실제로 일본도 19세기 말부터 기초 과학을 육성하기 시작하여 20세기 중반부터 10년에 한 번꼴로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고, 21세기에는 매년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수준까지 왔다. 또한 과학자가 연구 결과를 낸 뒤에 그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32년'''이 걸렸고, 수상자의 평균 연령은 만 69.1세로 거의 '''만 70세'''에 가까웠다.#
또한 한국은 세계적으로 봐도 상당히 드물 정도의 폐쇄적이고 엄격한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라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남성들이 학업을 중단하고 전혀 다른 일에 '''강제적으로''' 종사해야 한다는 것은 기초 과학 육성에 매우 불리한 점이다. 사실 기초 과학뿐만 아니라 많은 분야에서 잠재력을 희생하는 방식이고,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는 운동 선수와 연예인의 병역 이슈만 봐도 이런 문제를 쉽게 알 수 있다.
3.4. 평화주의 민족론?
함경도 관찰사 윤승훈(尹承勳)이 치계하였다.
“호적(胡賊)을 분탕한 과정을 군관 이희길(李希吉) 등이 싸움터에서 돌아왔기에 신이 상세하게 물어보고 또 들은 것을 참고하니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중략)
장주 부락(張主部落)에서 마을외 부락(亇乙外部落)까지 무려 1천여 집을 한꺼번에 태워버리니 연기는 하늘에 치솟고 사기는 배가되었습니다. 적들은 감히 가까이 오지는 못하고 남녀 노소가 모두 흩어져 산 위로 올라가 바라보고 울부짖을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움 속에 묻은 곡물까지 다 파내어 불태웠으며 이미 밭에 심은 곡식은 모조리 짓밟아버렸고 마을외 부락의 성채(城寨)도 다 불태웠습니다.
이 호적(胡賊)은 강성(强盛)하여 장주 부락으로부터 마을외 부락까지 40여 리에 좌우로 높은 산과 절벽이 있고 그 안은 아주 넓습니다. 토지는 비옥하고 그 가운데로 큰 냇물이 흐르며 모든 부락들은 그 물을 끼고 살고 있습니다. 집들이 즐비하고 살림의 넉넉함은 물 아래 있는 다른 호적들과 비교가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잠깐 사이에 다 쓸어버리고 빈터를 만들고 나니 보기에 장쾌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600년 5월 8일 기사中
한국의 알려진 이상한 통념 중 하나.만일 조선 사람들이 꿈을 깨어 가지고 물을 주여 먹어 가면서도 진보 하여 공평 하고 정직 하고 편리 하고 부국 강병하는 >학문과 풍속을 힘 쓰거드면 조선 사람도 잉글랜드나 미국 사람만 못 하지 안 할 터이요 '''조선도 청국을 처 요동과 만주를 차지하고 배상 팔억 만 원을 받을 터이니''' 원컨대 조선 사람들은 마음을 크게 먹어 '''십 년 후에 요동 만주를 차지 하고 일본 대마도를 찾아 올 생각들을 하기를 바라노라''' 하면 될 터이니 결심 하여 할 생각들만 하고 못 되려니와는 생각하지 말지어다
1896년 8월 4일 화요일 - 한글 현대문 (독립신문)
한국사, 특히 조선 건국 이후부터 한국전쟁까지의 역사를 주로 들먹이며 '수천 년 동안 침공만 당해온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면서 이를 또 역으로 해석하여 "한국인은 침략따윈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는 주장을 펼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를 그대로 수용하기엔 어폐가 너무 많다. 그나마 철벽방어를 이룩했으면 모를까, 본토의 일부라도 점령당한 사례를 들먹이면 그저 '''자신들이 호구라고 자랑하는 것'''에 불과하다.
실상은 호전적인 민족이였기 때문에 예방전쟁 차원으로 주변국의 침공이 반복된 것일수 있지만, 정확히는 정복하러 왔다가 예방전쟁으로 변질되는 수준의 피해를 입는 경우가 반복된 것 이다. 타민족이 보기엔 대규모 침공을 당해도 살아남는 괴상한 민족이였기 때문에 놔두면 후금처럼 패권국으로 성장할 가능성을 높게 보았다는 의미다. 역사적 전례로 볼 때 당하기만 하는 국가가 살아남은 경우는 사실상 없었다. 한국인이 정말 평화주의 민족이 였으면 진작에 한족에게 흡수당한 만주족 처럼 됐을테니 살아남아도 단일민족이란 말은 못꺼낸다. 이미 10세기 무렵에 인구수 1억을 찍었던 중국 송나라도 약한 국방력 때문에 요, 금, 서하 등에 침공만 당하다 무너졌다. 즉, 인구수가 압도적으로 많고 영토도 광대한 나라라도 침공만 당하다가는 끝내 멸망하고 만다. 현대까지 문화적 명맥을 유지하고 있기 위해서는 최소한 자국을 방어하기 위한 국방력이 보장되어야 하며, 전근대 시대에는 자국 방어를 위해서 주변의 약소국을 상대로 예방전쟁이 많았다.
실제 한국 역사를 살펴보면 고대사에는 당연히 다른 나라를 침공했던 사례가 발견된다. 고구려도 초기 엄연한 약탈로 경제를 유지하고 침공으로 영토를 넓힌 국가인데 광개토대왕이 어떻게 해서 만주 일대로 영토를 확장했는지 이후의 발해역시 그 넓은 영토를 어떻게 확장했는지 생각해보자. 그리고 당시 삼국은 서로 다른 나라였고 이들이 한세기도 쉬지않고 치고박고 싸웠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백제는 자신들의 전쟁에 일본을 자주 동원했는데, '''일본군은 백제가 멸망 했음에도 동원되었다.''' 백제의 침략전쟁 스케일을 보면 이 시점부터 평화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는걸 알수있다. 거기에 일본은 나당연합에 망한 백제의 잔존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동원할수 있는 일본군을 전부 소집'''해서 한반도로 파병하지만 결국 패전한다. 이후 대부분의 백제인들은 일본에 정착하게 된다. 나당전쟁도 물론 당나라가 빌미를 제공했지만 신라가 선제공격해서 일어났고, 관군은 아니지만 신라 해적 신라구는 쓰시마 섬과 강성할 때는 일본 본토 후쿠오카, 구마모토 지역까지 유린했다.
중세로 넘어가면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빈번했던 오랑캐 토벌, 동북9성, 4군 6진 개척도 여진족과 같은 다른 족속들에게는 '''명백한 침략이다.''' 단, 여진족은 고려시대 때부터 고려의 북방 지역에서 약탈을 지속적으로 일삼았기에, 동북 9성, 4국 6진 개척은 어찌보면 정당방위로 볼 수 있다. 물론 조선 초 이성계의 영향력 아래 여진족을 통제 하던 시기도 있다. 토벌 당시 그냥 불만 지른 게 아니라 '''학살은 물론 농경지에다 소금까지 뿌렸다.''' 심지어 조선은 왜란 직후의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조차 여진족 마을 불태우고 토벌하였다. 방어전으로 버티다 항복한 병자호란도 결과적으로 조선이 먼저 선전포고를 날렸다. 이는 강력한 유목 제국의 등장을 막기 위한 예방전쟁의 성격을 띈 침공이었는데, 10세기부터 송나라를 삥뜯어먹으며 군신 관계를 요구해왔던 요, 금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호령하던 몽골 제국에 대한 경험이 조선에게 강렬한 트라우마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리 싹을 자르기 위해 학살이나 거주지 파괴, 부족 간 이간질 등을 통해 북방 민족의 힘을 지속적으로 빼놓은 것이다. 심지어 여진족 토벌을 위해서 명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으며, 명 역시도 조선에 지원병을 보내서까지 여진족을 조져댔다. 결국 임진왜란으로 명과 조선이 만주에 신경을 쓰지 못한 사이에 여진은 힘을 키웠고 결국 청을 건국한다. 임진왜란이 없었다면 여진족은 명과 조선의 합동 견제로 청나라를 세울 꿈조차 꾸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세웠다 하더라도 요나라처럼 장성 이북만 가져갔을 공산이 크다.[41]
한반도가 지정학상으로 주변 나라의 이민족으로부터의 침입을 당하기에도 적당한 데다가 실제 역사적으로도 그랬던 건 맞긴 하다. 다만 비교적 원나라와 청나라, 일본에게 굴복당한 역사가 강조되는건 그쪽 기록이 더 상세하기 때문이고, 지속적인 노출효과 때문에 더 큰일처럼 부각되었을 뿐이기도 하다. 참고로 고려/조선때도 중국쪽으로 침략할 생각이 있었긴 했으나 그 동네가 워낙에 세력이 큰 탓에 실현시키진 못하고 사대주의로 바뀌어 조용히 지냈을 뿐이다.[42] 만일 조선이 근대화를 일찍이 성공시키고 강력한 국가를 갖추었다면, 중국이나 일본으로 쳐들어가지 않을 거라고 전혀 장담을 못 한다. 당시는 제국주의가 만연했기에 동서양 막론하고 어떤 국가든 자기가 힘을 갖췄다고 생각하고, 극단주의자가 정권을 장악하고 나면 주변국을 공격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의외로 조선-대한제국 시대 자체도 늦은 근대화와 약한 군사력이라는 현실에 눌려 중립 행보를 보였을 뿐 실상은 제국주의에 관심을 보였으며 청나라 상대로 군사적 우위에 이르자 아예 땅 뜯어먹을 생각부터 했다.[43]
한국인의 특성은 다소 정치적 호전(好戰)적인 성향 혹은 군사주의라는 견해가 있다. 외국인이 볼때 한국인은 군사력 증강을 한다고 하면 찬성하면 했지 비판이나 반대는 하지 않는다는 것.
근현대에 수난의 역사가 길었던 현대 한국인들에겐 "그게 무슨 개소리냐"며 잘 받아들여지지 않으나 제3국의 입장에서는 북한의 존재 (북한도 코리안이다.), 경직된 정치계, 후술할 남한 사회에 있는 극단적 공동체사회주의의 부작용들, 대체복무를 인정하지 않는 징병제[44] 와 민주주의국가 치고는 없는것이나 다름없는 문민통제[45] , 과거 교련의 영향을 받은 교육방식[46] , 그리고 예능프로로서의 리얼입대 프로젝트 진짜 사나이[47] 의 존재 때문에 자주 언급된다.
물론 상당수는 일본제국의 군국주의에서 배워온 것들이지만 모든게 전부 다 일제만의 탓이고 한국인은 아무런 잘못도 과거 한국사는 아무런 연관도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래서 과장하지 않는 서술을 하더라도 "평화적이다"라는 단어는 사실상 꺼내지 않는다. 그렇다고 오해하면 안 되는게 국제깡패라는 비아냥을 듣는 미국도 비슷한 언급이 있으며, 평화주의가 무조건 진리라는 것도 아니다.
3.5. 글로벌믹스형 사고방식
교양만화가 이원복 교수가 2013년에 개정한 <새로 만든 먼나라 이웃나라> 9권에서 소개한 이론인데, 한국은 서구권의 식민지배를 받은 경험이 없었기에 유럽식 문화에 거부감이 없었기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1960년대 이후 기독교의 광속 보급, 빠른 민주주의관 확립 등이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서구의 것을 받아들여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것이다.
그러면서도 전통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은 면이 있는데, 한국인은 여전히 공동체 정신과 남을 배려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중요시하다 보니 자연재해 성금 모금운동이나 1998년 외환위기 당시 금모으기 운동 등에서도 폭발적인 저력을 발휘했다. 글로벌믹스형 의식구조는 일본의 '화혼양재' 정신과 차이점을 보이는데, 글로벌믹스는 서구적 요소를 한국식 그릇에, 한국적 요소를 서구식 그릇에 동시에 담아 적응력이 강한 문화를 창조해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문화적 결합은 문화와 경제 분야에서 폭발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한국인들은 원본 그대로 들여온 서구적 요소를 적절히 융화/발전시켜 세계적인 운동선수, 성악가, 연주가, 무용가, 프로게이머 등을 수없이 배출해냈고, 한류 열풍도 이러한 가치관을 토대로 탄생한 것이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미국 할리우드 영화와 팝송이 미국 대중문화 고유의 질보다는 미국의 막강한 국력과 풍부한 자금원을 토대로 한 반면, 한국의 경우 가무에 남다른 재능이 있다거나 자국의 문화가 뛰어나서 그랬다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걸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에 이원복 교수는 한류의 성공 비결은 '글로벌믹스'가 한몫을 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경제 분야에서도 1960년대부터 미국, 유럽 유학생들이 그 나라 학문을 배워 돌아온 후, 그걸 우리 실정에 맞게 다듬어 경제 발전을 이뤘고, 거기에 한국인 특유의 헝그리 정신과 같은 투자 및 노력이 더해져 2017년 기준 수출 5,739억불짜리에 세계 5위 경제대국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위와 같은 견해는 이원복 교수의 자의적이고 개인적인 견해라 이견이 있을 여지가 있다. 이원복 교수는 해당 분야의 전공자도 아니다.
4. 유전적 요인
한국인은 만주족(정확히는 여진족), 일본인과 가장 유전적으로 가깝다고 한다.[48][49]
100% 정확한 연구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한민족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민족은 만주족(정확히는 여진족)과 일본인이고, 그 다음이 사모예드족 > 시버족 > 코랴크인 > 다우르족[50] > 몽골인 > 한족(북중국인) > 이텔멘족 > 한족(남중국인) 순으로 나타난다.[51]
다만 몽골인과 중국 한족도 유전적으로 한국인과 매우 가까운 민족들이다. 실제로 한국인과 일본인과 중국 한족의 유전적 차이는 전체 유전적 다양성의 1% 미만으로, 이는 다른 집단과 비교했을 때도 매우 작은 차이이다.[52]
또한 만주족, 사모예드족, 시버족, 코랴크인, 디우르족 등은 현재 주류 민족으로서 존재하는 국가가 없는 소수 민족들이다. 그렇기에 현대에 존재하는 국가 기준으로 따진다면 일본인, 몽골인, 중국 한족만이 남는다.
한국인은 남중국인(남방 한족)보다 북중국인(북방 한족)과 유전적으로 더 가깝다. 사실 북과 남으로 나누기는 했어도 절반으로 딱 나눈 게 아니라, 중국 대륙 전체로 보면 남중국인(남방 한족)이 있다고 보는 지역은 난링·우이 산맥 이남 지역으로, 매우 일부분이다. 난링·우이 산맥 이남 지역은 역사적으로 존재감이 없던 지역이었고(역사적인 중국의 주요 도시는 전부 이북에 있다), 이북 지역에서 북중국인이 매우 많이 유입되었기 때문에 명확히 분류하고 비교하는 건 어렵다고 한다.
유전적 거리로 인종을 분류한다면 아프리카인(니그로이드), 코카소이드, 동북아시아인, 북극인, 아메리카 원주민, 동남아시아인, 태평양 섬 원주민, 오세아니아 원주민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중 한국인은 동북아시아인에 속한다. 해당 유전 거리 지도를 보면 한국인은 만주족과 가장 가까우며, 그 다음으로 일본인과 가깝다. 또한 동북아시아인과 가장 가까운 인종은 코카소이드와 북극인이고, 동남아시아인은 아메리카 원주민보다 유전적으로 먼 인종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인의 기원을 설명할 때 흔히 북방계와 남방계로 나누어 말할 때가 많은데, 어디까지나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지, 명확한 실체가 있는 집단이 아니다. 특히 특정 지역을 두고 북방계와 남방계로 구분하고, 북방계와 남방계의 외모를 구분하는 내용이 인터넷에 많이 떠돌아다니는데, 유사과학이다. 한국인의 조상 되는 집단이 어디에서 어떤 경로를 거쳐 한반도에 정착했는지는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알 수 있다. 비교적 최근에 한반도에서 건너간 일본의 도래인과는 달리 한반도에 정착한 집단은 선사시대로 한참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북방계니, 남방계니 하면서 외모의 특징을 말하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다. 북방이라고 하니 몽골, 남방이라고 하니 동남아시아가 떠올라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인과 동남아시아인은 유전적 거리가 다른 인종으로 분류될 수 있을 만큼 매우 멀다.# 북방계와 남방계라는 단어는 일본에서 넘어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본의 남방계는 조몬인(혹은 아이누)을 지칭하는 말이고 북방계는 한반도나 중국에서 넘어온 도래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한국의 남방계는 남중국이나 동남아, 북방계는 북중국이나 몽골을 지칭하는 말로 변형되었다.
국제적인 기준으로 2019년 만 19세 한국 남성 평균 신장은 175.5cm이다.# 중남미에서 이보다 큰 남성 평균 신장은 자메이카(177cm), 푸에르토리코(179.5cm), 브라질(175.7cm) 밖에 없다. 또한 아시아에서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전부 한국인보다 평균 신장이 작고, 한국인은 남유럽 국가들과 평균 신장이 비슷하며, 이탈리아(174.4cm), 포르투갈(174.4cm), 불가리아(174.2cm) 등은 한국보다 작다.#
한반도는 남한 지역보다 북한 지역이 전통적으로 평균 신장이 더 컸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만약 통일이 돼 북한 지역의 영양 상태가 개선된다면 평균 신장이 더 클 것으로 예상된다.
또 임진왜란 당시 초기 전투 중 하나였던 동래성 전투가 발발한 동래읍성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골들을 측정해 본 결과 당시 조선인 남성들의 평균 신장은 163.6cm였고 여성들의 평균 신장은 153.4cm였다고 한다. 그런데 에도 막부 시절 일본인들의 평균 신장을 살펴보면 남성들은 155cm 정도였고 여성들은 144cm 정도였다고 한다. 즉, 조선인 남성들이 일본인 남성보다 8cm 정도 더 컸고 조선인 여성들이 일본인 여성보다 9cm 더 컸다는 걸 알 수 있다. 참고 다만 에도 막부 시절에는 이미 일본의 육식 금지 기간이 매우 오랜 기간 지속됐던 시기이다.
서울대학교의 연구[53] 에 의하면 한국인은 일본인과 중국인에 가까운 민족으로 중국인, 일본인과의 Fst값이 각각 0.01155, 0.11127로써 가까운 수치를 보였고 전 대륙을 대상으로 구성된 24개 SNP를 이용하였을 경우에는 한국인은 중국인과 가까운 Fst값을 보여 주었으나 O그룹의 세부 하플로그룹들을 이용하여 분석한 결과는 중국인보다 일본인과 가까운 Fst값-0.01757(중국인0.07269)을 보여 주었다.
Y 염색체 (부계유전) 하플로그룹은 O-M176과 O-M122[54] 가 가장 많으며, C2-M217[55] 가 약 11%, N-M231이 4%[56] , D-M174 그룹은 2%[57] 정도.
mt-dna (모계유전) 하플로 그룹은 D4가 32%로 가장 많고 B 그룹이 12%로 그 다음으로 많다. A 그룹은[58] 7%이며 그 외에는 G, N9, Y, F같이 다양한 그룹이 나타나나 그 수는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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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노무자와 일본인 조종사. 왼쪽이 한국인 노무자고 오른쪽이 일본인 엘리트층인 조종사다. 잘 보면 노무자는 말랐지만 하얗고 키가 훨씬 크고 조종사는 잘 먹고 잘 자란 엘리트인데도 키가 작음을 알 수 있다.[59]
잉겔로레 에버펠트 箸 《유혹의 역사》에 의하면 세계에서 가장 체취가 적은 사람들 중 하나에 든다고 한다.(314쪽 참조) 그런데 일본인들은 재일한국인들이 마늘 냄새가 난다는 인식을 가졌다고 느낀다. 확실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마늘을 세계에서 제일 많이 먹는[60] 것 때문인지 마늘 냄새가 난다는 말 자체는 일본 뿐 아니라 다른 해외에서도 나오는 모양인데 박찬호만 해도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이후에 마늘 냄새를 지우기 위해 일부러 한국 음식은 쳐다보지도 않고 매일 미국 음식을 엄청나게 먹었다고 1박 2일에서 회고한 적이 있다. 사실 여기서 말하는 "체취"는 먹는 음식이나 땀에서 나는 냄새가 아니라 겨드랑이의 아포크린선에서 분비되는 지방이 박테리아에 인해 분해되면서 나는 '''액취(腋臭)''', 즉, '''암내''' 이다. 영어에서 이 둘 다 "body odor"라고 표기됨에 따라 빚어지는 혼돈이다.[61]
사실 '''마늘냄새라는 건 진짜 냄새가 나서 그런 말을 한다기 보다는 인종차별적인 뉘앙스가 매우 다분'''하다. 오히려 한국인들은 타 민족의 엄청난 액취 를 잘 맡을 기회가 없고 해외에 나갔을 때의 위축되고 부족한 자신감 때문에 '진짜로 내몸에서 냄새가 나나??'라고 당황해서 박박 씻거나 서양식만 먹는 경우가 있다.[62] 하지만 만약 이런 말을 들었을 때에는 당황하거나 위축될 필요 없이 "너야말로 지금 암내난다 한국인은 데오도란트 안쓰는거 몰라?[63] " 한마디만 대답하면 상대가 진짜냐며 허둥지둥해서 데오도란트를 찾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한국 문화가 유행하면서 한국 음식과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좋아진 최근은 마늘냄새 드립도 듣기 힘들어졌다.
꽤나 신뢰성이 있는 조사 결과에 의해서도 체취가 날 수도 있는 유전자를 보유한 사람들이 없다고 한다.(물론 이론이 현실에 완벽하게 적용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체취가 나는 유전자를 보유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한국인의 마늘 섭취량이 압도적으로 많다보니 한식을 자주 먹으면 마늘 냄새가 날 수도 있지만, 그건 마늘 섭취량을 줄이면 해결되는 문제다. 애초에 세계에서 가장 체취가 나지 않는 특성을 가진 민족에게 냄새가 난다고 놀리는 것은 자폭이나 다름없다. 정작 놀리는 본인들은 데오드란트와 향수를 엄청나게 사용해서 그 정도인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마늘 냄새가 나지도 않는데 난다고 거짓말할 때가 매우 많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유당 분해 능력이 부족하다고 한다. 허나 최근엔 어린시절부터 유제품류의 섭취하는 인구가 매우 많기 때문에 유당불내증을 호소하는 사람이 갈수록 줄고 있다고 한다. 아마 20년 가량 뒤에는 지금보다 훨씬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또한 다른 연구 결과에서는 유당불내증의 빈도가 동아시아 주변국보다는 적다는 자료도 있다.##
5. 생활상
조선 시대의 주요 사상인 유교와 성리학의 영향이 남아 높으신 분, 특히 연장자에 대해 공경하는 예절에 관련된 도덕적 요구도가 매우 높은 편이나 세대가 흐르면서 차츰 흐릿해지고 있다. 당연히 별 상관 없이 단순한 문화의 차이인 부분도 많다.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예절에 대해서는 식사에 대한 예절은 식사예절, 회식, 존댓말에 대한 예절은 한국어의 존비어 문화, 압존법, 기타 예절은 예절 문서를 참조할 것.
언어적으로 직설적인 표현과 능동형 어휘 사용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는 수동태가 드물지 않게 사용되는 외국어(영어, 일본어 등[64] )와 차별화되는 점으로 한국어에서는 어설프게 사용된 피동형이나 수동태는 잘못된 문장으로 생각한다. 조금 극단적인 경우 한국어식 수동태는 모두 번역체라며 아예 배제대상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같은 맥락에서 욕으로 유명하다. 외국인이 안녕하세요와 빨리빨리 다음으로 배우는 말이 욕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있으며, 특히 어감이 강렬한 씨발은 이미 전세계에 뜻이 알려진 욕이라고 한다(...)
또한 과거부터 풍자 또한 발달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인터넷의 발달 이후 곳곳에 등장하는 각종 유머들에서 말도 안 되는 코드로 잘 나타나고 있다. 상대적으로 사우스파크식의 욕설 개그나 비난 위주의 유머[65] , 두 명이 투덕거리면서 웃기는 일본식 만담은 주류가 아니다.[66] 이렇게 뒤틀어서 풍자하는 형식의 문화가 퍼져있기에, 대통령를 비롯한 정치인들은 주요 술안주거리가 되며, 유명인들의 신상 문제 또한 자주 불거진다.
또 한국인은 친하지 않은 사람은 3음절 이름 특성으로 성과 이름을 합쳐서 부르는데[67] 친하더라도 격식을 갖춰 3인칭으로 전달해야 하는 경우에는 합쳐서도 자주 부른다. (예를 들어 평소에는 철수 선배 - 전달시에 김철수 선배 / 평소에는 이 사장님 - 전달시에 이영희 사장님.) 적당히 친해지면 높임법적으로 자신보다 낮거나 동일한 단계의 사람은 'ㅇㅇ아/야' 식으로 '야' 나 '아' 를 붙여서 부르고 높은 사람은 나이에 따른 칭호(형/오빠/누나/언니 등)나 직책 및 사회 관계에 따른 칭호(선배/사장님) 등을 주로 사용하여 부르는데 전자는 이름, 후자는 성을 주로 앞에 붙여 사용한다.
특히 나이에 따른 칭호가 매우 독특한 편인데, 다른 국가들에선 잘 쓰지않거나 혹은 가족내에서만 사용되는 형, 누나 등을 혈연관계가 아닌 연장자들에게도 사용한다는 점이다. 같은 문화권의 이웃인 중국, 일본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그다지 사용되지 않는다.
별명은 성과 이름의 앞글자를 따서 부른다든가 한두 글자의 발음을 강하게 바꿔 부른다든가 하는 식으로 귀여운 느낌을 많이 주기 때문에 주로 여자들이 더 많이 사용한다. 성인 이후의 남자들은 이러한 별명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그것 외에도 반말과 존댓말의 개념이 있어 높으신 분에게는 존댓말을 써야 하고 경직된 단체[68] 에선 다나까체를 쓰는 경우가 많다.
어느 나라나 그렇지만, 지역에 따라 한국인들도 그 도민성(道民性)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69] 물론 다르다고는 해도 (남북 문제를 제외하면) '한국인' 이라는 공통분모에 비하면 옅은 편이며 교통과 정보 매체의 발달로 더욱 희석되어 가는 추세다. 이렇듯 현 시점에서 도민성을 지나치게 맹신하는 것은 자칫 비하가 될 수 있으니 이러한 지역드립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
5.1. 눈치 문화
한국인의 사회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사회성 중 일부를 묶어서 부르는 말로 주변의 상황을 스스로 파악하고 적절한 행동을 하는 능력이다. 원래 '눈이 있는 곳'을 뜻하는 말이었다는 얘기가 있다.
한국의 눈치 문화는 단순한 상황 판단이나 상대방의 기분 파악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암묵적인 룰과 서열 의식, 비록 상식선에서 이게 맞는 선택일지라도 분위기 흐름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거나 개인의 자존심마저도 굴욕감을 참아내면서 수시로 굽혀야하는 고도의 처세술을 요구하기도 한다. 게다가 여러가지로 비언어적인 영역을 포함하는 개념이기에 해당 문화권에 익숙하지 않은 외부인이나 같은 한국인일지라도 타고난 성격이 이와 맞지 않을 경우, 사회에 적응하기 힘들게 하는 배타적 요소가 되기도 한다.
이와 비슷한 개념은 일본의 와 중시, 혼네와 다테마에가 있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하는게 맞다고 여겨지거나 실제로 느끼는 감정이 다를지라도(혼네) 주변 분위기나 상대방과의 관계, 혹은 속한 조직의 룰을 최우선시해서 일단 겉으로는 다르게 표현하고 행동하는 모습(다테마에)이 한국인의 눈치와 기본적인 흐름이 흡사하다. 다만 디테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일본의 그것이 한국보다 더 내부로 숨기려는 경향과 서열 또는 친분 관계에 따라서 눈치보는 방식이 천지차이로 바뀌는 한국과 다르게 정말 가까운 사이에서도 어느 정도는 중시한다는 차이가 있다.[70][71]
이렇듯 한국의 눈치, 일본의 혼네와 다테마에의 공통적인 특징은 속한 사회가 고맥락 문화권이라는 점이다. 미국의 문화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Hall)의 저서 '문화를 넘어서(Beyond Culture)'에 나온 '고맥락 문화'와 '저맥락 문화' 중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권은 고맥락 문화에 속한다. 고맥락 문화는 말의 함축적인 의미를 중요시 하는 반면, 저맥락 문화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중시한다. 그래서 전형적인 고맥락 문화인 한국에서 눈치는 나쁜 일에 대비하기 위해 필요한 것, 생명과도 같거나 '''생명 그 자체'''로 여겨진다. 누가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 뜻을 스스로 이해하고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5.2. 식생활
- 한국 요리 문서도 참조.
오죽하면 ''''한국인이 식사를 조금만 덜 했어도 보릿고개 이야기는 없었다', '옛날 전쟁이 날 때 하도 많이 먹어서 식량보급이 부족했다'''' 하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조선시대 성인 남성의 '''한 끼''' 쌀 섭취량은 420cc, 여성은 300cc, 아이는 약 180cc 정도였다. 420cc는 현대 한국 남성의 '''하루''' 쌀 섭취량과 맞먹으며 평민들은 보통 2끼를, 왕족이나 양반들은 삼시 세끼 챙겨먹고 야참에 자릿조반까지 5끼를 먹었다. 그런데 여기서 5끼라는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끼니 개념과는 좀 다르다. 예를 들어 영국의 티타임 같은 것을 끼니에 포함시켰다고 생각하면 된다.
기록사진에 나오는 식사량을 보면 현대의 한국인과 외국인이 다 같이 놀란다. 자세한 것은 한민족의 식사량 문서도 참고하자.
예전 조선시대 남자들은 밥을 무려 '''5공기'''+참외 5개 등의 기타 반찬을 한 끼에 먹었다고 한다. 물론 먹은 만큼 '''열심히''' 일해야 했기 때문에 뚱뚱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다만, 상대적으로 아침이나 저녁보다 점심을 부실하게 먹은 건 맞는다. 예전의 점심은 식사라기보다는 간식에 가까웠다고 한다. 애초에 점심(點心)의 어원이 불교 용어다. '''마음에 점을 찍는다'''는 뜻. 왕도 보통 점심에는 국수 등 간단하게 때우고 밖에 나가는 등 에너지 소모가 클 때만 제대로 된 점심을 먹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짜게 먹어도 어차피 고된 농사 때문에 땀으로 염분이 죄다 배출되어서 괜찮았다고 한다. 물론 요즘 같은 시대엔 얄짤없이 고혈압 크리(...).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다른 이야기도 있다. 과거의 밥은 잡곡의 비율이 높아 상대적으로 많이 부풀어 올랐다는 것과 또한 과거 한국인은 점심은 죽 정도로 때웠기 때문에 식사량의 총합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또한 잡곡밥을 먹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쌀밥과는 달리 '''먹어도 배가 금방 꺼지는 속성이 있다'''. 조선시대 실록의 기록을 보면 "흉년 때조차 백성들은 쌀밥만 찾아 먹고 잡곡 귀한 줄 모른다"고 벼슬아치들이 평민들을 비판하는 부분이 있다. 당시 기준에는 쌀은 고급, 보리 등의 잡곡은 저급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었던 모양이다. 애초에 명칭부터 잡곡이다. 요즘엔 오히려 별미로 잡곡밥이 귀한 취급을 받기도 하니 격세지감이라 할 만하다.
흔히 일반 백성은 쌀밥을 못 먹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조선시대 후기에 와서 벼농사가 활성화된 남쪽 지방의 일반 백성들은 경제력만 뒷받침 된다면 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 물론 농촌에서 춘궁기부터 추수 전까지는 보리밥이나 잡곡밥을 많이 먹었겠지만 쌀밥이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던 것이다.[74] 각종 기록이나 외국인의 목격담을 참고해보면 의외로 일반 백성들이 많이 먹고 잘 먹는다는 내용이 많다.
물론 흉년의 경우는 예외다. 솔잎, 소나무 껍질, 도토리 등의 지금 생각하면 후덜덜한 각종 구황식품을 먹고 견뎌야 했던 이면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아두자. 그나마 18세기 이후 감자와 고구마와 같은 훌륭한 구황식품이 전래되면서 사정이 나아졌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국인의 대식은 이미 조선시대에 유구국(오키나와)까지 알려질 정도였고 구한말에 한반도를 다녀간 여러 외국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바이기도 하다. 자세한 것은 한민족의 식사량 참조.
사실 옛 과거의 역사에서 가난과 굶주림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리기도 하는데 이는 일제 치하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겪었을 때의 고생에서 생긴 잘못된 인식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은 한민족의 실생활의 측면에서 봐도 단절의 시대였고 요즘 와서는 한민족이 대대로 못 먹고 굶주렸다는 잘못된 인식을 깨기 위한 자료가 많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밥을 엄청나게 많이 먹는 문화는 늦어도 1950년대생들의 청년기까지 나타나는 문화다. 노인들한테 물어보면 '사발(공기가 아니다!)에 고봉밥으로 드셨다'는 증언을 들을 수 있다. 실제로 씨름선수 이만기가 아는 형님에 출연했을때 지나가듯이 밝힌바로는 1970년대 당시 한국 정부에서 현대적인 농업 기술이 아직 발달되기 전이라 곡물 생산을 증식 시키기 위한 통일벼, 농기계 보급을 비롯한 식량 증산계획과 동시에 당장 있는 쌀의 과소비를 억제하고자 과도한 식사량(특히 쌀을 비롯한 곡류)을 개선하려고 지금은 흔히 볼 수 있는 스테인리스 밥공기를 식당 등지에 전면으로 보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인들은 큰 사발에 밥을 가득 담아 먹는 비대한 식사량을 가지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현대 한국의 식단에 매운 음식이 많은 것과는 달리 16세기까지만 해도 한국의 식단에는 매운 음식이 거의 없었다.
이순신의 식단으로 알려진 16세기 한식1
이순신의 식단으로 알려진 16세기 한식2
전통 한식1
전통 한식2
전통 한식3
전통 한식4
전통 한식5
전통 한식6
전통 한식7
현대의 한식은 매운 음식이 비교적 많다.[75] 이는 대표적인 현대 한국 음식 중의 하나가 김치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다만 김치도 원래는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은 형태였다.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 요리 하면 자주 떠올리는 것이 매운 음식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한국인들은 매운 음식을 비교적 잘 먹는다고 볼 수 있다. 현대 한국 요리에서 매운 맛이 발달한 이유로 먹을 것이 부족한 과거에 식욕을 자극하기 위해서라는 의견도 있다. 한국에 고추가 전해진 것이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는 점[76] , 정통 한식의 경우 맵지 않은 게 주류라는 점, '맵고 짠 한국 요리'의 대부분은 근대 이후에 형성된 점을 볼 때 식욕 자극이 원인일 수도 있고, 그냥 시대가 변하면서 매운 맛을 선호하게 된 게 원인일 수도 있다. 더 최근에 들어서는 '매운맛을 좋아하는 한국인'이 일종의 밈화 되어서, 이런 사회적 트렌드가 역으로 식문화에 영향을 주어 캡사이신의 사용빈도가 크게 늘어나고 엽기떡볶이나 불닭볶음면처럼 고통스러울 정도의 매콤함을 강조하는 등, 매운맛을 강조하는 경향이 급증하기도 했다.
MSG 역시 출시 이후 대부분의 한국 요리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그 결과 한국인 대부분이 MSG가 들어가지 않은 음식을 맛 없는 음식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생겼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로는 MSG가 들어가지 않은 요리를 먹는 것이 미식가라는 풍조까지 생겨서, 식당에서 MSG를 넣지 말라고 요구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자주 사용된 MSG 덕분에 근대 이후로 개발된 한국 요리 대부분의 오리지널 레시피는 MSG이다.
한편 과거에는 고기가 귀한 음식 재료였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그랬지만 한국은 전통적으로 농업 중심의 식량 생산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기호만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과 직결되었기에 당연한 결과라고 하겠다. 예를 들면 쌀을 재배하여 100명이 먹고 살 수 있는 땅에 목초지를 만들어 고기를 먹는다면 9명이 먹고 살 수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 때 국가에서 농업을 적극 장려하여 백성들의 생활에 안정을 꾀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고기를 먹는 것은 상대적으로 사정이 안 좋은 편이었다. 고기를 먹을 때 거의 버리는 재료가 없다는 것을 보면, 고기 먹기가 쉽지 않은 환경이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런 전통적인 식습관은 사정이 훨씬 좋아진 현재에도 영향을 끼쳐서 한국인의 1인당 육류 소비량은 OECD 평균에 미치지 못한다.# 물론 일본과 중국보다는 높은 소비량을 보이기는 하나, 전통적인 식단이 육류보다는 채식 위주다 보니 아직 그 영향이 크게 남아있는 것이다. 당장 한국과 일본에서 고기 먹는 날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말하는 것만 봐도 아직 식문화에 육류 소비 비중이 크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는 한국과 일본이 돈이 없어서 고기를 못 먹는다기보다(물론 목축하기 매우 좋은 환경이라 고깃값이 싸다면 유리하겠지만) 그만큼 전통적인 일상 식단에 고기의 비중이 크지 않아 별미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백성들이 농사 지을 소를 남기지 않고 먹어 치운다고 정부에서 많이 고민하였고, 결국 소를 잡아먹는 것을 금지한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실록을 찾아보면 '소를 잡아먹었기 때문에 처벌했다'라는 구절들이 있다. 심지어 당시 일종의 마을 자치규범인 향약에서는 '소를 잡는 것을 금한다'라는 규범이 당당하게 명문화돼서 실려 있을 정도였고, 소를 밀도살하는 것이 큰 중죄인 만큼 소를 잡을 때는 공식적으로 도살장에서 잡아야만 했다. 소를 잡아먹는 것이 금지되기는 했지만, 명절 때이거나 병든 소를 잡아먹는 것은 허용했다. 그래서 주인의 식탐 때문에 '''멀쩡한 소가 병든 소로 둔갑'''하는 일도 있었다. 사실 소를 잡는 것은 금지한 이유는 그만큼 소가 전근대 농업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기 때문이다. 쟁기질을 할 때 소로 하는 것과 사람이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속도를 낸다. 또한 무거운 물체를 옮길 때 소가 있다면 훨씬 수월하다.
그만큼 고기가 귀해서인지 한국인은 소의 거의 모든 부분을 버리지 않고 쓴다. 부위를 나누는 것도 자그마치 120가지로 외국에서 들으면 기절할 지경으로 나눈다. 사실 도살해서 이렇게 안 쓰이는 가축이 더 드물지만 한국인은 소를 도축하면 가죽, 뼈, 피, 골수, '''뇌'''(!) 등 쓸 수 있는 건 거의 다 쓴다.
쇠고기는 자주 먹었지만 조선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돼지고기는 기피되었다. 이슬람교 신자들이 돼지고기의 변질을 우려해 돼지고기를 꺼리던 게 어느새 교리와 문화적 관습으로 자리잡았듯이, 조선시대까지 돼지고기는 변질의 우려로 질이 낮은 고기 취급을 받았다.[77] 돼지고기의 수요가 급증한건 18세기와 19세기 무렵으로 비교적 근대에 들어서이며, 지금은 삼겹살이라는 한국 특유의 육식 문화 탄생으로 돈육의 섭취량이 조선과 비교하면 아주 많아졌다. 소는 귀했기 때문에, 간혹 고기를 먹어야 할 일이 있다면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개고기를 먹는 경우가 잦았다. 그래서 여름날 영양보충을 해야 할 복날이 오면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개고기를 쓰곤 했는데,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보신탕이다.
어찌되었든 어느 한 집에서 소나 돼지 등의 가축을 도축하면 마을 집집마다 고기를 돌리는 것은 하나의 관례였다. 이러한 관례는 최근의 시골에서도 종종 보이곤 한다. 그만큼 고기가 귀한 식재료인지라 어느 집에서 고기를 생산(?)했다면, 그 집에서는 들뜬 기분이 충만한 마을 사람들에게 좋든 싫든 고기를 나눠줘야 했다는 이야기이다.
흔히 외국에서 Korean BBQ라 부르는 한국 특유의 고기 구워 먹는 방식은 조선 시대에도 있던 오래된 전통 방식이다. 이 고기 구워 먹는 방식은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진출한 몇몇 재일교포들에 의해 일본에서 야키니쿠란 이름과 함께 대중적인 식문화로 자리잡았으며, 이런 이유로 여전히 일본의 고깃집에서는 테이블 구성과 밑반찬에서 한식의 영향을 짙게 찾아볼 수 있다.[78] 현재는 한국 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면서 이러한 한국식 고기 구워 먹는 방식이 온오프라인을 통해 세계 곳곳에 퍼지고 있다.
과거 고려시대 때는 불교의 영향으로 채식을 즐기기도 하였다.
즉, 도살기술 자체가 쇠퇴하여서 중국 사신이 왔는데도 접대가 이러하다. 하지만 고려가 멸망한 건 '''600년'''도 더 된 이야기니 이것만으로는 한국의 고기 문화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참고로 현대 중국에서 한국인은 "고기가 비싸서 고기를 못 먹는 가난한 사람"으로 오해받는 경우도 있다. 흔히 중국인들이 넷상에서 한국인을 비하할 때 하는 말이 "빵쯔는 고기도 비싸서 못 사먹는다." 인데, 한국인의 고기 소비율을 보면 어불성설. 오해의 유래는 한국 드라마라는 설이 있다. 중국에서 방송되는 한국 드라마에서 등장인물이 한우 같은 고급 고기를 선물받고 좋아하는 장면을, 고작 싸구려 고기에 기뻐하는 걸로 오해해서 그렇다고.[79] 정작 1인당 육류 소비량은 한국이 더 높다.#
한국의 식단 차림의 전형이라 할 만한 반상 차림은 뚜껑이 있는 그릇에 담겨 나오는 반찬 가짓수에 따라 3첩, 5첩, 7첩 등으로 부르는데, 첩수가 올라갈수록 점차 차림이 풍부해진다. 하지만 여기서 딱 3가지 어디에나 빠지지 않으면서 아예 첩수에도 계산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밥, 국, 김치'''이다. 밥하고 국은 그렇다 치더라도, 최소의 기본 반찬은 고기가 아닌 절인 채소였다는 이야기다. 김치에 대한 자세한 것은 문서 참조. 조선시대 식단을 재현한 좋은 예.
현재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숟가락을 비중 있게 사용하고 있다. 유독 한국에서만 숟가락의 비중이 높은 이유는 음식에 물기가 많고 또 언제나 밥상에 오르는 국이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일본의 국은 한국과 달리 건더기가 적어서 '국물'에 가깝고, 그나마도 개인별로 작은 그릇에 담아 들고 마신다. 이에 반해 한국인이 즐겨 먹는 찌개류나 국밥은 물기가 많고 젓가락으로 일일이 건져먹기가 힘들기에 숟가락이 필요한 음식이다.
고려 후기에는 몽골 요리가 전해져 고기를 물에 넣고 삶아 그 우러난 국물과 고기를 함께 먹는 지금의 설렁탕, 곰탕이 생겨났는데, 여기서 파생된 국밥은 애초에 밥을 국에 말아놓은 것이다. 이러한 식생활 풍습은 전 세계에서 드문 것이라고 한다.[80]
결론적으로 한국인은 젓가락, 숟가락을 모두 사용하여 식사를 하는 특이한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한국과 중국, 일본을 비교할 때 자주 인용하는 예시이다. 이러한 음식의 스타일에 대한 표현으로 맛있는 식재료를 얻으면 중국인은 기름에 볶거나 튀기고 한국인은 국을 끓이고 일본인은 회를 친다고 한다. 그리고 금속제 식기를 사용한다는 것도 특이한 점이다. 지금이야 도자기 그릇을 더 많이 쓰지만 1980년대까지도 '''숟가락, 젓가락 뿐만 아니라 그릇 전반이 다 놋쇠나 스테인레스였다.'''[81] 동북아시아 3국의 젓가락 중에 한국의 쇠젓가락은 가장 무겁고 사용하는 것이 어려운 편에 속한다.
한국의 차 문화는 잎 녹차 위주로 발달했다. 중국의 경우 차 문화의 본산답게 백차부터 흑차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발달되었고, 일본의 경우 한국과 같이 녹차 위주이지만 말차처럼 보다 가공을 하는 쪽으로 발달된 편.
불교와 차 문화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는데, 대승불교가 중국을 통해 한국, 그리고 일본에 이르는 과정에서 기호식품이면서도 불교의 계율에 어긋나지 않는 차가 함께 소개된 것. 서아시아에 이슬람이 퍼지면서 와인 문화가 멸절되고 대신 차, 커피가 기호식품으로 자리잡은 것과 유사하다.
고려시대까지는 차 문화가 융성했으며, 우려낸 차를 상업적으로 파는 시설인 다방[82] 도 존재했다. 조선시대로 넘어간 이후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해 '불교적 음료'인 차 또한 탄압받아 쇠퇴하였다. 검약을 강조하는 유교 이념하에서 차를 사치품으로 본 것도 있고, 사농공상의 기준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을 먹일 수 있는 작물(쌀)을 생산하는 농업을 중시한 조선에서 상업적 작물[83] 을 민간이 자율적으로 키우는 것은 권장되지 못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개국 이후 조선 초부터 고려를 병들게 한 귀족적[84] , 미신적[85] 행태를 일소하는 과정에서 불교의 상징처럼 된 차 문화 또한 명맥이 끊기다시피 한 것. 그러나 조선조 왕실에서 소모할 차 정도는 억불정책 하에서도 남겨둔 사찰에서 생산했으며[86] , 선비들과 사찰을 위주로 조선조 내내 명맥을 이어왔다. 대중화가 되기 힘들었을 뿐. 애초에 정약용의 호(다산)를 생각해보자.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친 후, 현대에 이르러서도 차 문화가 대중적이지는 않은 편. 오히려 커피가 압도적이다. 이는 자국 차 재배농가를 보호하기 위한 관세에서 비롯된 부분도 많은데, 홍차류의 경우 관세가 40%이고 한국에서 차 관련 주 생산품목으로 꼽히는 녹차의 경우 관세가 무려 600%(!)다. 애초에 자국 생산량이 압도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영업을 위한 상품(찻잎)을 대량으로 들여올 경우 관세폭탄을 맞아버리니, 다방[87] 의 경쟁성이 거의 사라지는 것.
반대로 커피 원두의 경우 관세가 8%(...)이다. 애초에 세계시장에서 거래되는 가격이 커피가 더 싼데다[88] 관세장벽으로 인해 대중화의 길은 요원하다. 그러나 차 매니아 층(이른바 프리미엄 시장)을 대상으로 한 시장에서는 한국 녹차도 비중이 있는 편. 중일과는 다르게 4계절이 뚜렷하다는 기후적 이유로 중엽종 차를 재배하는데다[89] 늦가을~겨울~초봄으로 이어지는 한대 시즌으로 인해 차 나무에 기생하는 벌레들이 다 죽으므로 우전같은 여름 이전에 수확하는 차들은 농약을 쓰지 않는다. 뜻하지 않은 오가닉(...)인 것.
이렇게 세계 주류에 비해 품종이 달라 풍미에서 강점을 가지고 유기농인 녹차가 소량 생산되는지라, 맛을 위해서는 돈 따위 크게 생각하지 않는 프리미엄 시장을 위주로 녹차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5.3. 놀이 문화
노는 것을 좋아하는데 특히 '''모여서''' 노는 걸 아주 좋아한다. 허나 노는 것에 대해 좋지 않게 보는 이면적인 시선도 있다. 그 일례로 "그럴 시간에 일을 해라."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놀고 자빠졌네." "밥먹고 할짓이 없어서" 등이다.
물론 이것 때문에 술자리 문화가 다소 기형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부분이 생겼으며 이 때문에 여기에 끼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괴로워하거나 아싸로 떨어져 나가기도 하고, 가끔은 대학 술자리에서 사람이 죽는다는 소식도 들린다. '''개인차가 당연히 있는 것이니 강요하면 안된다.'''
다른 사람에 관심을 자주 보이고, 대인 관계와 조직 생활을 중시하다 보니, 대개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하지 않고 여럿이 몰려다니는 것에 강하다. 유독 한국에서 사람들이 혼자 밥 먹기에 익숙하지 않기도 하고(조선까지는 소반이라고 일컫는 혼자 밥먹는 식사 문화가 일반적이었다. 같이 먹게 된건 물자가 수탈로 부족해지는 일제강점기와 인프라가 초토화된 한국전쟁 이후다. 다만 요즘은 대학이든 직장이든 점심식사 정도는 혼자 해결하는 경우가 많아져 예전보단 나아졌다.), 혼자 술을 마실 경우 알코올 중독 초기증상을 의심하기도 하며, 대개 혼자 다니는 사람에 반감을 갖는다. 내향적인 사람을 보면 이상하다며 성격을 고치는 걸 권유하거나, 본인이 손발 걷고 나서서 외향적으로 만들어주려 하기도 한다.
요즘 젊은 세대가 다소 개인주의적으로 변해간다고는 하지만 아직 젊은 세대들도 혼자가 되는 것에 약한지라 모여서 밥 먹고, 모여서 놀고, 친구들하고 만나서 술 마시는 것에 더 강하다. 거기다 혼자 다니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대다수인데, 이러한 것은 내향적인 것과 외향적인 것과는 별개로 존재한다.[90]
청년들은 클럽에서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고, 장년들은 관광버스나 관광지에서 노년들은 도시내 공원에서 흔들어 제끼고, 심지어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전당대회에서도 춤과 노래판이 벌어지는 것을 보면 한국인의 춤, 노래에 대한 열정은 세대와 지역을 초월한다. 게다가, 2010년대에 들어서 수많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등장하면서 노래와 춤에서 실력 경쟁을 하는 사람들도 늘어가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옛날 한국인들의 조상들도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도 많은데 제창이나 사물놀이의 역사를 봐도 알 수 있다. 그 때문인지 '''"한국인은 정한의 민족이 아니라 흥이 많은 민족이다."'''라고 평가를 하기도 하지만, '''"쌓인 게 많으니까 풀려는 게 아닌가?"'''라는 반론도 있다. 다만, 뭐든지 참고 사는 것이 고대 한국인들의 문화가 아니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흥이 많은 민족'이라는 말이 틀린 말도 아닐 것이다. 농담이 아니라, '''"참고 살면 화병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대개 남 눈치를 보지않고 흔들어 제끼는 중남미, 지중해 유럽 국가와는 다르게 체면을 차리는 정서가 있지만(중세 유럽도 체면 문화가 강했다), 술을 마시거나 놀때는 남 눈치 안보고 신나게 노는 특성이 있다. 일상 생활에서 그런다면 눈치를 주지만 놀때는 떼로 들썩이는 성향이 강하다.
김홍도의 무동.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고 있다.
김홍도의 씨름. 씨름 시합하는 것을 구경하며 즐기고 있다.
김홍도의 활쏘기. 당시에는 활쏘기도 놀이의 일종이었다.
김홍도의 고누놀이. 고누는 두 사람이 판에 말을 벌여놓고, 말을 많이 따먹거나 상대의 집을 차지하는 것을 겨루는 놀이다.
신윤복의 쌍육삼매. 남자와 여자가 쌍륙 놀이를 즐기고 있다. 쌍륙은 남녀노소 함께 즐기던 놀이였다. 쌍륙에서 사용하는 말1, 쌍륙에서 사용하는 말2
투호를 즐기는 모습
현대에 아이들이 즐기는 각종 놀이는 그 유래가 생각보다 오래된 것들이 정말 많다. 예를 들어 딱지치기, 구슬치기, 닭싸움, 숨바꼭질, 술래잡기, 말타기(말뚝박기), 팽이치기, 그네타기 등은 모두 조선 시대에도 흔히 즐기던 놀이였다.
한국 전통 놀이 중 가장 과격한 것 중 하나는 석전이다. 진영을 나누어 돌이 던지며 노는 것인데, 사실 말이 노는 것이지 실제 전투를 방불케 할 정도로 죽일 듯이 던졌다.
"매년 정월 열엿샛날 부안(부내)에 사는 사람들이 부의 가운데를 흐르는 시내를 경계로 나뉘어, 오른쪽과 왼쪽으로 돌을 던져 서로 승부를 결정하는데, 한 해의 풍년을 점친다. 경오년 '''적을 토벌할 때'''에 모집하여 선봉에 삼았더니, 적이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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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지》〈풍속조〉#
"팔매싸움을 좋아하여 매년 4월 초파일부터 아동들이 모여 성남에서 팔매싸움을 익혔다. 단오에 이르면 장정들이 모여 좌우로 편을 나누고 깃발을 꽂고 북을 치며 고함을 지르고 날뛰면서 돌을 던지는 것이 비가 퍼붓는 것 같았다. 승부를 겨루었을 따름이니 비록 '''죽거나 다쳐도 후회하지 않았다.''' 수령이 금할 수 없었으며, 경오년 왜적을 정벌할 때 돌을 잘 던지는 자를 선봉으로 삼으니 적병이 나오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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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권32 〈김해풍속조〉#
"향리에서는 너덜편과 서산편으로 나뉘어 매년 정월 15일 석양으로부터 팔매싸움이 개시되는데, 팔매싸움 전후 수일간은 아동들이 타촌으로 왕래치 못한다. 그것은 서로 맹렬하게 적시하는 까닭이다. 전투는 소아(小兒)로부터 시작되어 아이들이 패하면 대아(大兒)들이 이를 대신 출진하고, 대아들이 패하면 대인(大人)이 출진하여 결전을 행한다. 투석은 손에 쥐어 던지는 것이 아니라 소위 '망팔매' 또는 '줄팔매'라는 것으로서 노끈 끝에 소석을 결박하여 그것을 서서히 돌리다가 갑자기 전 완력을 다하여 투척하면 돌만이 빠져나가는 것이다. 접전시의 고함소리는 '다과라'라고 하며, '''패주자를 따라 그 마을에 침입하여 가옥을 파괴'''하는 일도 있고 혹 적촌에 변장 기습하기도 하며, 밤이 어두워서 팔매싸움이 불가능하면 횃불로서 서로 싸우기도 한다. 또 평안도에서 석전이 가장 성행했던 곳은 평양으로, 최후의 정월 15일에는 평안감사가 관전하러 나왔다. 당시 '''평양 사람은 두상에 돌에 맞은 상처를 가지지 않으면 이를 남자의 치욕'''으로 생각하고, 적에게 패배 당하고 '''집으로 도망해 오는 자는 그 어머니가 이것을 책환'''(責還;야단쳐서 다시 싸움터로 보냄)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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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고〉#
이 석전은 외국인이 보고 남긴 기록도 있다."추석 차례를 마치면 양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줄팡게'를 들고 금천가로 모인다. 줄팡게는 일종의 간이 투석장치로, 질긴 삼베로 만들며 길이는 한발 정도이다. 금천은 폭이 40~50m에 달하는 넓은 개울이다. 싸움은 열 살 남짓한 아이들부터 시작하지만 차츰 연령이 높아져서 마침내 서른 살 미만의 청년들이 싸움을 주도하게 된다. 이때쯤이면 마을의 노인들은 작전지시를 내리기도 한다. 각 편에는 싸움을 지휘하는 존재가 있었는데 이를 대장이라고 불렀으며, 보통 머슴 가운데 힘이 센 이들이 맡았다. 대장뿐 아니라 싸움의 주력은 양 마을의 머슴들이나 소농들, 즉 하정배들이었다. 정월에 지내는 동제도 바로 이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싸움이 시작되면 양편은 강 양편에서 돌팡게와 줄팡게를 주고 받는다. 줄팡게는 훨씬 멀리까지 돌을 날려보낼 수 있으며, 숙달된 자는 정확하게 적을 맞힐 수 있어 효과적이다. 차츰 싸움이 격렬해지고 한쪽이 밀리는 듯 하면 다른 한쪽은 강을 건너 상대편을 추격한다. 추격하다가 서로 마주치면 육박전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깨진 기왓장으로 머리를 내리칠 정도로 격렬'''하였다. '서중리의 탱자를 현리 싸움꾼이 먼저 따거나, 현리의 배를 서중리의 싸움꾼이 먼저 따면 이긴다'고 하지만 한번도 그런 적은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저항이 격렬하여 마을 안으로 진입하는 것이 어려웠다는 이야기이다. '''누가 얼마나 다쳤든지 싸움이 끝나면 일체 잘못을 탓하지 않았다. 이긴 편이 길하다는 믿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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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리 민속보고서〉#
"매년 일정한 시기에 국가에서 허락하여 약 3일간에 걸쳐 시읍 사람과 촌사람 사이에 석전이 열린다. '''사람이 죽을지라도 그것은 불가피한 사건으로 여기고 관헌은 이에 관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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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 Carles, 《Life in Corea》 London. 1887, p173
한국의 전통놀이와 민속놀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그들의 가장 이상한 오락의 한 형태는, ―'''만일 그것을 참으로 오락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석전이다. 매년 봄에 돌을 가지고 싸워도 무방하다고 하여 남자는(소년까지도) 돌이 많이 있는 야외로 나간다. 거기서 그들은 편을 짜 가지고(보통은 시읍 대 촌락) 정식의 돌 던지기 싸움을 한다. '''매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죽고, 부상자는 무수하다'''. 나는 이 기상한 행사의 기원을 발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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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R. Saunderson, 《on Corea and its people》 London. 1895. p299-316
고대부터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놀이를 즐겼다는 기록이 많다.비석치기'는 전통놀이인가 민속놀이인가 아니면 전래놀이인가? 놀이와 관련된 책이나 연구논문에서도 명확한 개념을 정의하고 있지 않고 심지어 논외에 붙이고 있다. 그러나 일단 사전적인 정의에서 출발하여 살펴보면 객관적인 정의가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먼저 전통놀이에서 사용되는 '전통'은 "계통을 받아 전함. 또는 이어 받은 계통, 관습 가운데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특히 높은 규범적 의의를 지니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위의 개념에 의한 전통놀이는 윷놀이, 팽이치기, 제기차기, 널뛰기, 차전놀이, 줄당기기, 강강술래 등과 같이 우리나라의 시대적인 배경과 의식, 삶의 형태에 있어서 대표적인 놀이를 말한다. 그러나 근세에 만들어져 널리 행해지고 있는 고무줄놀이, 깡통차기, 돼지불알 등은 전통놀이라고 하기에 한계를 보인다. 또한 일반적으로 인식하기에 한국의 전통놀이에 '돼지불알', '개뼉다귀'' 등을 포함시킨다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아이들이 흔히 하는 작은 놀이들은 전통놀이의 범주에 넣기가 어려운 한계를 가지고 있다. 교과서에도 실린 놀이 가운데 '긴줄넘기', '굴렁쇠', '쌍8자 놀이', '딱지치기' 등은 전통놀이인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하여 명확한 기준을 내리기 어렵기에 전통놀이는 제한된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고 특히 아이들의 놀이 모두를 상정할 때 전통놀이라는 개념은 부적절하다고 여겨진다. 민속놀이에서 민속의 사전적 정의는 민간의 풍속이고 민속놀이란 민간에서 발생하여 전해 내려오는 그 지방의 생활과 풍속을 반영한 놀이로 되어 있다. ..(중략).. 민속놀이란 놀이의 분류로서의 개념이 아니라 놀이 중에 '민속'이라는 말의 특징 즉 지역성, 민간성, 궁정의 반대, 향토성을 가진 어떤 놀이군을 말하는데 그 주체가 민간, 민중, 인민이 되는 놀이를 말한다. 현재까지 가장 많이 사용되는 민속놀이란 개념에서 놀이의 주체를 정확하게 파악하면 자체 모순에 빠지게 된다. 즉 '칠교', '승경도', '투호', '유객주', '쌍륙', '바둑' 등은 양반이나 궁중에서 행해졌기에 민속과는 거리가 먼 놀이들이다. 그러나 민속놀이대회나 민속놀이라는 제목으로 쓰여진 많은 책에도 이와 같은 놀이를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그간 민속이란 개념에서 파악되어지는 주체의 문제를 간과하고 일반적으로 사용하였기에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현재 발행된 교과서에도 민속놀이라는 명칭으로 '투호'나 '바둑' 등을 소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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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놀이연구가)#
정월에 지내는 제천행사는 국중대회로 날마다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데 그 이름을 영고라 하였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
고구려 백성들은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나라 안의 촌락마다 밤이 되면 남녀가 떼지어 모여서 서로 노래하며 유희를 즐긴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조
마한은 해마다 5월이면 씨뿌리기를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떼를 지어 모여서 노래와 춤을 즐기며 술 마시고 노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의 춤은 수십 명이 모두 일어나서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치켜들었다 하면서 손과 발로 서로 장단을 맞춘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마한조
변한의 풍습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마시기를 좋아한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한조
호남 무안현(務安縣)의 남녀 18인이 섬에 들어가 고기잡이를 하다가 갑자기 광풍(狂風)을 만나 유구국(琉球國)까지 표류하였다. 그 나라 사람들은 삭발하거나 장발 차림이었는데 언어가 통하지 않아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그들이 북 하나를 가지고 앞에 와서 손으로 가리키며 고무(鼓舞)하는 모양을 지었는데, 우리 나라 사람들이 그 뜻을 알아채고 노래를 부르며 북춤을 추자, 그때에서야 그 사람들이 고려인(高麗人)이라고 부르면서 집을 지어 거처하게 하는가 하면 쌀을 주어 밥을 지어먹게 하는 등 자주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왜국(倭國) 살마주(薩摩州)로 이송되었다가 다시 대마도(對馬島)로 보내져 어려움 끝에 간신히 귀환하였다. - 현종실록 5권, 현종 3년 7월 28일
마을마다 북과 나팔, 피리, 몇 개의 솥뚜껑이 있어서 흔히 여름철의 고달픈 노동 시간 중에 한참 동안 일손을 멈추고 힘껏 합주하여 피로를 푼다. - 프랑스 신부 달레(C.C. Dallet)의 <조선교회사 서설> 중
중국인인 조선족들도 같은 핏줄 아니랄까봐 중국에서도 노래를 잘하는 소수민족으로 꼽힌다고 한다. 중국의 최건 같은 경우는 러시아의 빅토르 최만큼이나 유명하다.아시아 민족 중에서 조선인보다 더 음악에 대하여 열렬한 애호심을 가진 민족은 없을 것이다. 군부의 어느 대신이 손풍금의 연주에 감동하여 평소의 엄숙한 태도를 던져버리고 박자에 맞추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 에른스트 야코프 오페르트
'너무 과하게 놀아서 문제가 된다'는 주장도 있는데, 솔직히 따져보면 너무 과하게 일을 해서 생기는 문제가 더 많다. 이로 인해 놀이 문화가 '놀 때 놀자' 는 식의 형태로서 기형적으로 발달한 경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한민국 문서에서 평균 노동시간 자료와 교육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다. 밖에서 돈 벌어오시는 부모님들이 괜히 애주가가 되는 것이 아니고, 학생이 괜히 게임 중독에 빠지고 비행을 범하는 것이 아니다. 적절히 일하고 건전하게 노는 문화의 정착이 필요하다는 비판도 받는다.
혼자서 놀이공원에 가거나 극장 등에서 하는 공연을 보러 가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다만 극장 혼자 가는 걸 이상하게 여겨 꺼리는 건 북미나 유럽 등지에서도 있는 현상이다. 특히 외국에서 디즈니 랜드 같은 놀이공원을 혼자 간다는 건 일반적이지 않다고 받아들여진다.
만약에 한국에서 이런 행동을 했다면 희한하다고 평가받거나 거의 좋게 보이지 않았을 것인데, 실제로 2009~10년 폭설 때 길거리에 스키를 신고 나온 사람의 영상이 화제가 되자 네티즌들의 반응은 대체적으로 부정적이었다. 물론 이는 도심지에서 스키를 타는 행동이 위험하기 때문에 비판받은 것도 있고, [91] 강원도 산골에서 눈 왔을 때 스키 타고 논다고 뭐라 할 사람이 없긴 하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비판보다는 비난이 주를 이루었다.
물론 미국 같은 나라라고 해서 그런 행동을 다른 사람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감정을 비난할 수 없다는 인식이 훨씬 더 자유로운 편이라 그러한 행동에 대해 직접적인 비난은 덜한 편이다.
일단 이러한 사고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교통/통신의 발달 등의 이유로 다수/소수가 분명해지고 그에 따른 획일화된 가치가 보편적으로 퍼진 만큼, 개인(소수)의 가치관이 장식화되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놀이 문화의 개성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다만 2020년대에 접어드는 현대에서는 영화관에서 혼자 영화를 보고 식당 등에서 혼자 밥을 먹고 코인노래방 혹은 오락실 등에서 혼자 노는 한국인들을 아주 흔하게 볼수 있으며, 사회도 무조건 모여서 하는 것을 강요하진 않는 분위기가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코로나바이러스가 대유행하면서 거리두기로 인해 전혀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결국 소득이 오르고 시대가 흐르면 사회 분위기가 바뀌기 마련이다.
5.3.1.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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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AA(미국영화협회)의 집계에 따르면, 2019년 한국 영화 시장은 북미 영화, 중국 영화, 일본 영화 시장에 이어 영국 영화, 프랑스 영화, 인도 영화시장과 나란히 하게 되었다.
한국 영화는 전 세계 영화팬들에게 회자되는 명작들을 배출하였으며, 골수 팬덤이 세계적으로 있을 정도로 발달했다. 그런만큼 대한민국은 인구 대비 영화 관람횟수가 가장 높은 비율에 드는 국가 중 하나로, 한국 영화시장은 박스오피스 기준으로 세계 대형 영화 시장 중 하나이며 매출 금액 기준으로 미국을 제외한 국가들 중에 2018년 세계 5위 시장이다. 미국 달러화로 보통 15억~16억 달러 수준을 유지하는 중이다.
한국인들의 1인당 평균 연간 극장 관람 횟수는 약 4회 정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영화관 스크린 개수는 2017년 10월 기준 2,804개. 일본의 3,472개 스크린 대비 600개 정도 적지만 한국보다 두 배가 넘게 인구가 많은 일본의 인구수를 감안하면 오히려 한국이 굉장히 많은 편이다. 계산해 보면 한국은 스크린 1개당 담당 인구가 1만 명대 후반으로 세계 10대 영화 시장 중 '''최소'''급이다. 또 1996년이라는 비교적 늦은 시기에 시작한 부산국제영화제가 홍콩국제영화제(HKFF)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아시아 대형 영화제로 거듭난 사실을 생각하면,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영화에 큰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5.4. 성문화
한국인의 성생활은 굉장히 이중적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양지의 성문화는 극단적으로 터부시되고 음지의 성문화는 그에 반발해 경도되어 나가는 상황'''이라 볼 수 있다. 유교적, 기독교적 보수주의와 서구적 개방주의가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는 나라다. 성문화에 대해 숨기고 부끄러워하고 가리는데 급급하는 사람들도 수두룩 하지만 반대로 유흥업소에서 방종한 유흥을 즐기고 섹스와 포르노에 대해서도 수위가 서구권이나 이웃나라 일본에는 못 미치지만 드라마나 예능에서 흔히 농담의 소재가 될 만큼 자유로운 나라이다.
전체적으로 세대차이가 많이 나며 그 세대차이의 문화충격을 극복 못하고 대한민국/문화 규제와 탄압을 보듯이 규제와 검열로 탄압을 가하기도 한다. 젊은층은 이러한 문화규제와 성문화 억압에 대해 반감이 크며 '성적 억압'과 '성적 자유주의'가 충돌하고 있다. 최근에 들어선 세대간의 갈등을 넘어서 페미니즘의 대두가 사회적으로 심화되어 성적 개방에 대해 성별간의 갈등으로도 번져가고 있는 상황이다.
5.5. 외모지상주의
외모지상주의가 비단 한국만의 문제겠냐만은, 한국은 성형수술 대국이라는 오명 때문에 국내외적으로 외모지상주의가 심하다는 허위 비난을 많이 받아왔다. 이 오명에 매우 큰 역할을 한 게 국제미용성형학회(ISAPS)의 2011년 자료다.[92] 그 자료를 기준으로 한국이 인구당 비율로 따졌을 때, 가장 많은 성형을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 이 통계는 일반인들이 딱히 성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피부과 시술 같은 것도 성형 수술에 포함시킨 것이다. 성형 수술이라고 하면 보통 째고 깎는 외과적인 걸 생각하는데 피부,헤어 등의 비외과적 시술도 성형 수술에 포함시킨 결과, 한국이 1위를 차지했다. 그리스나 이탈리아, 브라질 등도 외과적 수술만을 따진다면 한국과 비슷하다.#
또한 이 통계 자체도 논란이 있다. 한국에 피부과, 성형외과를 갈 목적으로 오는 외국인들이 그대로 통계에 포함된다는 점과 피부과, 성형외과는 서울에 병원과 환자가 몰려 있는 게 심해 설문 조사 표본을 잡을 때 유독 지역 격차가 크다는 점, 결정적으로 한국 통계 자료의 내용과 불일치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93]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최근의 2018년 ISAPS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총 수술 건수에서 TOP 10위 안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10위 안에 있는 국가 중 오스트레일리아, 아르헨티나, 콜롬비아는 한국보다 인구가 적은 국가들이기 때문에 인구당 비율로 따져도 저 국가들이 한국보다 성형률이 높다.'''#
국가별로 성형률을 조사한 자료가 사실상 ISAPS의 것 뿐이고 2011년에 나온 자료를 하필 언론에서 인구당 비율로 표를 작성하여 만들어 보도한 것 때문에 널리 퍼져서 세간의 인식에 한국은 성형대국이 됐다. 물론 이토록 많이 퍼진 것에는 혐한 세력의 악의적인 퍼뜨림도 크게 한몫 했을 것이다. 이들은 한술 더떠서 한국인의 99퍼센트가 성형 수술을 하며 심지어 아기 때부터 성형을 한다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도 한다.[94]
이런 걸 자극적인 소재로 삼고, 조롱할 생각으로 외국의 언론과 방송에서 별 근거도 없이 한국 여성은 무조건 성형을 한다는 식의 방송은 대중들의 왜곡된 인식을 더욱 가속화했고, 이런 악의적인 헐뜯음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결과, 이제는 한국인들조차 그들이 만든 자료를 보고 우리가 성형을 제일 많이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윗 문단에서도 언급했듯이 2018년 가장 최근의 ISAPS의 자료에서는 한국보다 성형률이 높은 국가들이 있다.
또한 이와 비슷한 악의적인 소문 중에는 한국인 음경 길이가 세계에서 가장 작다는 말도 안 되는 루머도 있다. 이 루머도 한국 성형률을 왜곡한 세력이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음경 크기에 관한 여러 가지 오해의
또한 혐오 세력의 한국인 음경 길이 날조에 관한
5.6. 패션에 대한 관심
외국인들에게 한국인은 남녀 가리지 않고 패션에 많은 관심을 두는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유튜브 등지에서 한국 남자들은 패션에 상당한 공을 들이고 다른 나라의 남자들에 비해 상당히 꾸미는 편이라는 외국 여자들의 반응을 많이 볼 수 있다. (다만 그 외국 여자들은 보통 한국의 대중 문화 중 하나인 k-pop 아이돌을 보고 그런 인식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통계상으로도 세계 남성 화장품 시장 1위를 한국이 차지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외국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향수, 데오드란트, 선크림 등을 포함하지 않은 수치이다. 다분히 한국 남성 화장품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마케팅 성 조사로 외국 남성들이 많이 이용하는 화장품은 쏙 빼고 한국 남성들이 자주 이용하는 것만 포함한 조사다. 또한 통계에 매우 큰 허점이 있는데 어디까지나 조사한 기준이 화장품이 아닌 '남성' 화장품이라는 것이다. 보통 외국에서는 남성이니 일반이니 하면서 화장품의 성별을 구분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마케팅 목적으로 올인원, 남자를 위한 등의 문구를 붙여 '남성 화장품'이라고 자주 언급하지만 외국은 그런 일이 드물다. 만약 모든 종류의 화장품을 전부 포함하여 남성이 사용하는 빈도를 조사한다면 결과가 매우 다를 것이다. 외국 남성에게 향수와 데오드란트는 필수이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은 유독 한국인들의 피부가 엄청나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한국산 화장품에 대한 관심도 매우 높다.
남녀 모두 개성을 추구하는 패션이 아니라 유행을 타는 패션에만 관심이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헤어스타일부터 외모까지 유행이 시작되면 거기 따르는데 치장에 집착하면서도 남들과 똑같이 치장하여 몰개성화를 추구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물론 다른 국가도 패션의 유행이 있지만 개개인이 바리에이션을 주고 개성을 꾀하는 반면 한국인은 철저하게 유행의 기준에 맞춘다는 의견이다.
최근에 들어선 그런 여론에 대한 반발심리로 자기가 옷을 잘 입는다는 한국의 트렌드세터들은 오히려 더 개성있고 자신의 스타일을 추구하는 경향이 생겼다. 또한 패션 유튜버의 대중화나 직구의 일반화 등 패션에 대한 정보를 얻기 쉬워지고 소비수준이 높아지면서 하이엔드 브랜드나 다양한 브랜드의 소비가 매우 늘어났다. 이로 인해 과거 소위 남친룩 위주의 클론 일변도에서(일명 모나미룩) 남친룩, 스트릿, 미니멀, 아메카지 등등 나름 카테고리가 다양화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옷 이외에도 헤어스타일, 화장품, 제모 등등 전반적인 패션에 관심이나 소비 수준이 매우 높아졌다.[95]
물론 위의 문단은 패션에 정말 관심이 많은 계층의 입장을 주로 대변하기에 보편적인 시각에선 한국에 이 정도 하는 남자들은 굉장히 드물다.
아무리 클론이라고 까여도 최소한 깔끔하고 기본은 하려는 인원이 많으므로 평균의 비율이 높다면 그 나라 사람들이 옷을 잘 입는다는 의견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니다. 다만 한국인들이 패션에 관심이 많고 많이 꾸민다 하더라도 국제적인 패션 트렌드를 이끈다거나 선도하는 경우는 지금까지는 거의 없다. 위에 언급된 것처럼 주로 외국에서 몇 년 전에 유행했거나 현재 유행하는 스타일이 한국에 그대로 수입되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
결론적으로 한국인이 전 세계적으로 패션에 대한 관심이 꽤 높은 건 사실이지만, 과연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글로벌적으로 패션 강국이라 할 수 있는지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많이 바뀌긴 했지만 아직도 롱패딩, 투블럭, 김구&뿔테안경 등 복제인간에 가까운 유행을 따르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 점, 한국이 딱히 세계적 패션 트렌드를 이끌지 못하는 점, 세대별로 차이가 심하게 나는 점 등은 아쉬운 점이기는 하다.
5.7. 빠른 경제 발전의 그림자
한국이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속도로 빠른 경제 성장을 겪은 국가이다 보니 그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도 이를 압축할 수 있는 말은 '문화 지체'이다. 어느 나라든 정신 문화의 발전은 물질 문화의 발전을 따라잡지 못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앞서 썼듯이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발전을 보인 바가 있기에 그만큼의 갭이 큰 편이다.
산업화와 근대화의 시작을 알린 유럽과 바로 그 뒤를 이은 미국을 비롯한 영미권 신대륙 국가들이 오랜 기간동안 변화를 거쳐왔고, 이들에 비해 확연히 빠르게 바뀌었다는 일본도 100년에 조금 못 미치는 기간이 걸린 것에 비해, 한국은 이들의 절반도 안되는 30~40년 간의 고도성장으로 한 순간에 시대상이 바뀌었으니 물리적인 시간만 비교해봐도 지체현상이 두드러질 수 밖에 없는 것.
한국의 경제 성장으로 인한 시민들의 의식적인 부조화가 몇 가지 있는데, 대표적으로 이미 완전한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섰음에도 나오는 한국의 선진국 여부 논란이다. 선진국 또는 개발도상국 문서 참조. 때문에 일부 한국인들에게는 아직 스스로가 별 것 아니라는 소극적인 의식이 많이 남아 있기도 하다. 다만 의도적으로 깎아내리는 일도 매우 많다. 즉, 비뚤어진 사대주의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종종 보인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본인의 열등감을 민족/국가적 비하로 해소하려는 목적이긴 하다.
이런 최근의 개별 사례를 제외하더라도 빠른 발전에 따른 부작용이 많다.
아직도 전근대 농업 국가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따르는 세대가 두 눈 뜨고 살아 있으며, 이들의 자식 세대인 산업화 · 민주화 세대, 그리고 이들의 자식 세대인 정보화 세대, 이제는 이들의 자식들이 세상에 나와 성장하는 자동화 시대이다. 즉, '''동시대에 전혀 다른 문화를 따르는 3~4대'''가 동 시대에 공존하는 양상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세대갈등이 적으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 이 때문에 현대 사회의 규범, 질서 등의 새로운 가치관에 적응하지 못하고 세대 간의 소통이 부족해지며, 서로가 서로를 혐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완만한 발전을 이룬 사회였으면 '지혜로운 노인'과 같은 교과서적 클리셰가 적용되었겠으나 한국은 이와 거리가 멀어지고 오히려 기성세대들은 청년세대들에게 무조건 역정을 내거나 무시하는 풍조가 자리잡게 되고 청년세대들은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이 심해져 틀딱충이니 뭐니 하며 기성세대를 혐오하게 된것이다.
애당초 농경 사회에서 산업 사회를 거쳐 정보 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을 몇 세기에 걸쳐 점진적으로 겪은 서구권도 문화 지체 현상으로 엄청나게 고생했는데 겨우 반세기 만에 그 모든 과정을 겪은 한국에서 극심한 문화 지체 현상이 발생하지 않기란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초월적으로 유연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하다. 결국 모든 세대문제가 그렇듯이, 시간만이 해결책일 듯 하다.
5.8. 욱하고 폭발하는 불 같은 성격
실제로 화병 문서를 봐도 순간적으로 욱하고 분을 제대로 삭히지 못하며 이런 증세가 심할 경우 증상이 신체적으로 나타날 정도로 한국인 특유의 다혈질적인 기질은 문화고유장애 중 하나로 인정될 정도이다. 실제로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는게, 과거 예맥족과 한(韓)족 시기부터 해서 고구려와 발해, 고려, 조선을 거쳐오면서까지 한민족의 호전성은 주변국들에게 꽤나 저명했다.
이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반도라는 지정학적인 특성상 긴 세월 내내 섬과 대륙 국가 양측으로부터 수시로 외침을 자주받았고, 과거 고구려나 발해 당시에는 아예 약탈과 정복을 나라 근간으로 삼았을뿐더러 고려와 조선까지도 북방 유목민족을 상대로 정벌을 명분으로 한 학살 등을 자행한 이력이 있다. 고로 이러한 기존의 내재된 호전성과 더불어 주변국들의 침공에 맞선 대규모 전쟁 중 신경질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이 더해졌다는 말이 있으며[96][97] 계절에 따라 높낮이의 격차가 매우 큰 기온 탓도 있을거라 추정된다.[98]
또한 관습적으로 깊게 자리잡힌 한국만의 독특한 존비어와 나이 체계로 인한 연장자 권위의식[99] , 일제강점기때부터 시작되어 현재도 진행중인 전국적인 징병제로 인한 경직 및 수직화된 사회문화덕에 일상과 사회생활에서 수시로 스트레스 받을 일들이 많거니와 단시간에 폭주하는 듯한 특유의 음주문화 역시 이에 한몫 했을거라 보는 경향도 많다.
한마디로 역사적, 기후적, 사회시스템과 분위기등등 총체적으로 개개인들에게 짜증날 일들이 많기에 성질이 수시로 건드려지다 보니 분노가 폭발하거나 신경질적인 모습이 오랫동안 누적되어 국민성의 큰 일부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 하지만 비교적 강한 공권력과 엄벌주의, 전반적인 교육수준 및 시민의식이 높아지면서 서로 이해하거나 참는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행패를 부리거나 남을 함부로 치거나 둔기를 들면 그 자체로 구속수사까지 갈수 있음을 누구든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분노범죄와 묻지마 범죄가 잊을만하면 터지며 이로 인한 피해도 무시못할 수준이고 사회문제까지 되고 있기에 이에 대한 대책이 논의되고 있다.
실례로 통계를 확인해보면 대한민국의 폭행, 살인 같은 강력범죄 40-50% 정도가 우발적인 동기에서 벌어진다. 특히 살인, 살인미수 건은 그 정도가 심해서 매년 통계를 낼 때마다 우발적인 살인동기가 절반을 넘어간다. 살인은 피의자가 형량의 경감을 노리고 우발적 살인동기를 주장해서 이런 통계가 나올 수도 있으나 1999년부터 집계되는 폭행범죄는 명백하게 우발적 동기가 주요원인임이 통계치로 잡히고 있다.
5.9. 빨리빨리 문화
한국인들의 급한 성미를 상징하는 단어. '빠르다'의 부사화 접사 '-이' 결합형 '빨리'가 두 번 쓰인 말이다. '빨리빨리 문화' 식으로 말하기도 하고, 일각에서는 한국인 특유의 강박증으로 여기며 한국인을 '빨리빨리 민족'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자세한 내용은 빨리빨리 문서 참조.
6. 여담
6.1. 게임 실력
6.2. 외국 미디어의 한국인 묘사
- 한국인 캐릭터 일람은 해당 문서를 참조.
최근에는 보통 한국인 캐릭터는 특정 분야에 미칠 듯한 고수, 아니면 실력파라서 막강하지만 결국 주인공한테 발리는 역할로 많이 나온다. 혹은 발차기를 엄청 잘하거나, [101] 살짝 나사 빠진 놈이 많다. 뛰어날진 몰라도 '완벽' 하고는 거리가 먼 캐릭터가 태반이다. 남성 캐릭터는 공부 잘하는 까칠한 캐릭터로 나오는 경우가 많으며 여성 캐릭터는 공부 잘하는 보이시한 캐릭터로 나오는 경우가 은근히 많다.
한동안 한국 혹은 한국인 하면 한국전쟁, 가난한 이미지, 북한 등에서 나오는 스토리가 대부분이었고 캐릭터로는 돈벌레, 일벌레, 소수의 공부만 하는 너드로 묘사되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가 2010년대 들어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삼성그룹, 현대그룹, LG그룹 등의 글로벌 대기업부터 시작해서 K-POP, 온라인 게임, 한국 드라마, 한국 영화 등 한국 대중문화의 진출로 인한 이미지 향상, 세계 영화 산업에서 한국 영화 시장의 독보적인 성장, 유튜브를 비롯한 인터넷 매체를 통해 폭넓게 소개되는 한국의 모습들, 2010년대 들어 급증하기 시작한 국내 외국인 관광객들, 그리고 미국 본토 내에 진출한 한국인들[102] 등이 그 변화를 이끌기 시작했다.
덕분에 미국인들이 직접 실제 '한국인'을 접할 기회가 늘어나면서 모호하고 추상적이었던 한국인이라는 특성이 점차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미국 내 한국계 배우 풀 자체도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한 점도 있다. 일본인과 중국인 일색이던 미드에서 점점 한국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Lost, Drop Dead Diva, Mentalist, Grey's Anatomy, 워킹 데드 등 주조연급으로 한국계 배우가 한국계임을 밝히면서 나온다. 그 외 CSI, law&order 등 각종 수사물이나 The Office 같은 시트콤에서도 한국 관련 에피소드나 나오거나 지나가는 대화에서라도 꼭 등장하는 편이다.[103]
일본이나 중국과는 달리 기존의 이미지가 희미했던 것이 한국 문화의 세계적인 유행으로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대폭 확장되면서 긍정적인 이미지가 많이 퍼지고 있다. 앞으로 해외 매체에서 한국인 캐릭터의 다양화를 지켜보는 재미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위 내용은 모두 '''대한민국의 국민'''이야기고, 미디어나 매체에서 북한인들은 다들 악당, 테러리스트 등으로 나오는 등 북한의 자업자득으로 생긴 이미지 때문에 인식이 별로 좋지 못하다.[104] 탈북자 캐릭터가 냉전 시절 소련인 망명자 캐릭터처럼 소비되기도 한다.
[image]
이 이미지는 2017년 뉴욕 타임즈에서 1,746명을 대상으로 아시아 전도에서 북한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찍어보라고 조사한 결과인데, 총 36%만이 한반도 위쪽을 맞게 찍었고, 나머지는 남한과 중국, 일본, 심지어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찍었다. 북한이 외신에서 다뤄지는 빈도수를 생각해보면 남한에 비해서 오히려 인지도가 높다고 볼 수 있는데도 답변 수준이 이 정도이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나머지 잘못 선택한 국가들도 어딘지 모른다는 뜻이다.[105] 또한 한국의 높은 교육수준으로 한국인들이 요구하는 평균적인 지적수준이 높음도 감안해야 한다. 평균적인 교육을 받은 국민들이 세계지도에서 한국은 커녕 영국, 러시아, 미국조차 제대로 찾지 못하는 교육수준을 가진 나라가 태반이다.
실제로 서독, 동독의 사례와는 달리 북한과 남한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례도 종종 있어 가끔 남쪽에 사는 한국인(?)을 괴롭게 하기도 한다. 북한 문제에 민감한 일본이나 중국, 러시아, 미국과 같은 이해관계국의 국민은 South Korea와 North Korea라는 구별을 매체를 통해 종종 받아봤기 때문에 한국이 두 개의 집단 내지는 국가로 나뉘어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지만, 여러 국가의 시골이나 제3세계로만 내려가도 한국이 어디 붙어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106] 게다가 이들은 외국에 대한 관심도 자체가 적고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한국발 콘텐츠보다 미국발, 일본발 콘텐츠를 먼저 접하는 경우가 많기에 '''한국이란 나라가 존재한다'''는 정도만 알고 있다고 한다. 물론 한국에서도 시골 사람들이나 중장년층들 역시 알고 있는 나라가 그다지 없는 편으로, 어디서나 이건 비슷한 현상이다.
또한 제3세계권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한국의 존재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많은 편. 일례로 슈퍼주니어의 예성이 북유럽권에서 김정일 아들로 오해받는다거나, 프랑스에서는 '''북한이 자본주의이고 남한이 주체주의'''라는 식으로 오인받았다거나 하는 사례가 목격되는 중.
물론 지금은 유럽권에도 한국이 비교적 유명해졌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한국 차원의 문제를 넘어서 이미 유럽에서는 동아시아인의 이미지는 중국인이다. 이는 이들의 언어에서도 나타나는데, 스페인어 등에서 본래 중국인만을 지칭하는 'Chino(중국인)'라는 용어를 타 아시아국가 출신인들조차 중국인과 구별을 못해서 한꺼번에 싸잡아 부르는 것이 대표적인 용례이다.#참조
그렇지만 이는 외국 문서에서도 서술되어 있듯, 한국인이라고 이런 유형의 사고방식에서 깨끗한 것은 아니다. 한국인들도 외국인을 서양인, 미국인(혹은 적어도 영미권 사람)과 같은 뜻으로 쓰는 일이 많고, 실제로도 코카서스 인종을 만나면 으레 짐작으로 그 사람은 미국인이고 영어를 쓸 것이라고 싸잡아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결국 특정 문화권을 대표하는 국가가 어떻게 그 이미지를 알렸느냐(=스테레오타입)의 문제인데, 이로 미루어보면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외국인의 스테레오타입은 미국인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유럽권에서는 하필 중국인이 동아시아인의 스테레오타입 이미지를 꿰차고 있다는 게 문제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에서는 일본인이 동아시아인의 스테레오타입이다. 그래도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한국의 이미지가 꽤 괜찮은 편이다. 국가별 한류 문서를 통해서도 이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고, 당장 위 링크 글만 봐도 알 수 있다. 한국이나 저쪽이나 기성세대의 인식 때문에 세대 갈등이 생기는 건 똑같다.
다만 이러한 사례들은 보통 한국 문화의 유행이 비교적 덜하거나 한국 문화를 잘 모르는 외국인의 경우이고, 한국 문화가 유행하는 나라이거나 개인적으로 한국 문화에 관심에 많은 외국인은 오히려 한국인보다 한국에 대해 더 잘 알 때도 많다.
6.3. 세계최강의 예비역전력
- 전세계 어디와 비교해도 최강의 예비역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인구의 절반인 약 2600만명의 남성중 그 절반인 1300만명 이상이 예비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 전쟁 발발 시 길거리로 나가서 지나가는 20대 이상부터 60세 이하 남자를 아무나 붙잡아도 이동사격이나 전술사격 수준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사격능력 자체를 겸비하고 있다. 또한 모집된 예비역중 대부분이 기본적으로 명령 체계를 이해하며, 이에 따라 사격, 수류탄투척, 각개전투, 숙영, 경계근무, 진지구축 등을 조건만 된다면 바로 수행할 수 있다. 공익이나 방위 출신이라도 기초적인 훈련은 받았다. 이게 정말 대단한건데, 왜냐하면 민병대보다 수배로 잘 훈련된 정규군 병사로서 1인분 몫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현대전에선 주 교전부터가 분대 단위 중장거리 교전이며, 이와 더불어 대형 장비등을 동원해 더더욱 철저한 집단화력을 구사하기 때문에 개인의 뛰어난 체력/전투력과 사격전술은 근중거리 보병간 시가전을 수행하는 일부 정예군이 아닌 이상은 크게 의미가 없다. 고로 일부 특수목적 부대가 아닌 이상 일반적인 정규군은 얼마나 명령 체계에 따라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지가 승패를 가르기 때문에, 한 국가에서 1000만명 이상의 남성들이 명령 체계에 따라 조직적인 무력 행위를 할 수 있다는건 진짜 어마어마한 전력인 것이다. 길거리에서 당장 남자 열댓명을 모집해 임무를 하달하면 선출된 분대장의 명령에 따라 전장에 투입되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게 대한민국이다. 말 그대로 전투민족이라고 봐도 손색이 없다.
- 당장 번화가에 나가서 30분~2시간만 투자해도 소총수, 의무병, 통신병, 행정병, 전차병, 운전병, 탄약병, 정훈병, 박격포병, 포병, 공병, 헌병, 각종 병과출신의 부사관 및 상원사 이상급의 고급 부사관, 중위 및 대위 출신의 위관, 못해도 한두명의 영관급 장교, 심지어 운이 좋다면 장성급 출신 전역자를 찾을수도 있다. 심지어 해군, 해병과 공군도 이에 해당한다. 함정 승선자 및 비번 중인 민항기 조종사라면 바로 함정/전투기/헬기/수송선 등의 파일럿으로 차출될 수도 있다. 몇개 연대, 육군의 경우 사단까지도 편제가 가능하다.
- 전쟁 발발 시 화기와 탄약만 보급되면 누구든지 시가전에서 기본적인 게릴라 활동을 바로 시작할 수 있다. 심지어 특수부대 출신들이 꽤 많은만큼, 유사시에는 길거리에서 불러모은 아저씨들이 알고보니 기밀 특수부대 출신이라 이들을 최정예 특작조로 편성해 고난도의 특수작전을 수행하게 하는 흠좀무한 일이 가능하다.
- LA 폭동 당시 한인타운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진지를 구축하여 방어선을 만들고 화기로 무장한 후 각자 지휘체계까지 만들어 폭동을 방어해낸 사례는 아주 유명한 일화다. 자세한 것은 루프탑 코리안 문서를 참고해라.
- 종종 한국군 예비군들이 1년 반~2년이라는 타 모병군에 비해서는 짧은 훈련 기간을 지니기에 전투력이 떨어지고 정예도가 떨어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는 징병제라는 특성상 당연한 한계다. 오히려 징병제임에도 불구하고 모병제인 국가들의 병사들과 비교될정도로 뛰어난게 굉장한거다. 병사들 대부분이 대학교에 재학 중이고, 고졸이어도 고등학교 당시에 철저한 공교육을 이수한 것부터가 한국 병사의 평균적인 인적풀이 뛰어나다는 증거인데, 당장 미군에선 장교나 부사관으로 임관할 것을 종용받는 수준의 우수자원들이 이병으로 들어가 구르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2년 가량의 짧은 훈련기간 + 훈련 커리큘럼 부족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커리큘럼/기간을 극복하는 뛰어난 응용력과 전투력을 지녔다. 당장 베트남전 당시만 보더라도 이러한 사실을 크게 뒷받침 해준다.
- 예비군의 유일한 약점은 징병제 체계 자체의 약점 딱 두개밖에 없다. 첫째는 징병제인만큼 병사들 대부분이 군에는 관심이 없던 민간인 신분에서 징병 된데다가, 타국에서는 병역 거부 판정받을만큼 마르고 허약한 인원들도 꽤 현역으로 들어온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미군, 자위대, 중국 인민해방군 등 자국의 청년들 중 체력, 체격적으로 상위집단을 엄선해 뽑은 모병제군보다는 아무래도 평균적인 체력이나 체격 등의 부분에서는 좀 떨어질 수 있다는 것. 일반 부대가 이렇다보니 별도의 모병제를 시행하고 있는 특전사나 수색대 등의 정예군에도 도미노 현상으로 꽤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이 또한 징병제인만큼 어쩔수 없이 프로페셔널한 직업 의식이 떨어진다는 것. 이마저도 병사 대부분이 대학 재학중인 우수자원이라는 장점에 파묻히고도 남을정도... 소규모 국지전 해외 파병이 주류를 이루는 최근 국제 정세에서야 직업군인으로 이루어진 프로페셔널한 소규모 정예군인 모병제가 좋긴하겠지만, 징병제의 진가는 국가의 남성들 모두가 징집되는 전면전에 드러난다는걸 잊으면 안 된다.
7. 관련 문서
7.1. 외국
- 한국인이 좋아하는 국가
- 외국인
- 중국인
- 일본인
- 대만인
- 몽골인
- 베트남인
- 태국인
- 캐나다인
- 미국인
- 멕시코인
- 러시아인
- 영국인
- 아일랜드인
- 독일인
- 프랑스인
- 이탈리아인
- 스페인인
- 그리스인
- 터키인
- 인도인
- 아랍인
- 이집트인
- 유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