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명
墓碑銘 / Epitaph
1. 개요
묘표에 새겨 고인을 기념하는 명문(銘文)이나 시문(詩文).내가 젊고 자유로워서,
상상력에 한계가 없었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그러나 좀 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내 시야를 약간 좁혀,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마지막 시도로,
나와 가장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누운 자리에서 나는 문득 깨닫는다.
만일 내가 내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얻어,
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 있었을 것을.
그리고 누가 아는가,
세상도 변화되었을지!
--
웨스턴민스터 성당의 어느 주교의 묘비명.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 한국사의 주요 사료인 광개토왕릉비, 문무왕릉비도 묘비명이다. 고대 인물의 경우 묘비명에 가계도나 대표적 업적 같은 것을 역사서보다 상세하게 적어놓아 좋은 사료가 되기도 한다.
조선시대의 경우 유교적인 관습에 따라 관직명을 올리는 게 보통. 대다수 일반인의 경우 관직이 없기에 관직에 오르지 못한 학생이라는 의미로 '''학생부군신위'''라고 쓴 게 보통이다. 이런 관습은 꽤 최근 까지 남아있어, 공무원들의 경우 5급 사무관 이상들의 경우 묘비에 직급을 쓸 수 있었다. 덕분에 나이든 6급 주사들은 묘비명 때문에 승진을 하려고 했을 정도. 전통적 의미의 관직(공직)이 아닌 사기업에서 근무한 사람들의 경우 아무리 대표이사, 전문경영인 (CEO) 등의 최고 자리에 오르더라도 관직이 없기 때문에 "학생부군신위"라 쓰는 게 보통이었다.
서구권의 경우 사람의 인생을 나타내는 것이며 대부분 고인이 죽기 전에 새겨달라고 부탁했던 말이나 고인을 기리는 좋은 말을 써준다.[1] 그러나 위인들 중 특이한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유언이나 부탁을 통해 뭔가 이해가 안 되는 문양이라든가 암호를 써놓기도 한다.
간혹 고인의 삶을 단문이나 시 등의 문학적 형태로 새겨넣는 때도 있다. 문학적인 묘비명에는 작자와 시대의 취향에 따라 깊은 슬픔을 나타내는 것이 있는가 하면 우스꽝스러운 것, 때로는 죽은 사람에 대한 냉소(冷笑)를 나타내는 것 등의 여러가지가 있다.
게임 및 영화 등에선 뭔가 숨겨진 보물창고의 입구나 중요한 열쇠 역할을 하기도 한다.
2. 역사
묘비명은 매장의 양식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된 묘비명은 미라를 넣은 관(棺)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죽은 사람의 나이와 관직, 이름 등의 간단한 사실들만 새긴다. 그리스 묘비명의 대부분은 단순히 이름과 고별의 뜻을 나타낸 것이 많으나, 거기에 아름다운 시구(詩句)를 곁들인 것도 있다. 이는 엘레지조(調)의 형식이며, 묘비명의 걸작은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 전쟁의 명예로운 전사자를 애도한 시모니데스의 작품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묘비명은 다른 기념 각문(刻文)과 함께 발달하여 '에피그램'이라는 문학 장르의 일부를 형성하였다. 로마의 묘비명은 그리스와는 달리 원래 단순한 사실만을 새겼다. 그리고 로마 묘비명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지나가는 사람의 주의를 끄는 말들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는 죽은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기 때문이며, 그 때문에 통행인이 많은 길가에 묘를 세웠다. 기독교인의 묘비명은 고전시대의 그것을 계승한 것으로 실제로 13세기까지는 라틴어를 사용하였으며, "그대 위에 흙이 가볍기를(sit tibi terra levis)"이라는 로마 이래의 상투문구를 그대로 썼다. 16세기에 들어와 묘비명은 문학으로 취급되어 유명한 비명(碑銘)이 시인들에 의해 지어졌다.
3. 유명한 사람들의 묘비명
-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
>자신보다 현명한 사람들을 주위에 모으는 방법을 알던 사람, 여기에 잠들다.
- 근대인의 고뇌를 그린 장편 철학시 〈오디세이아〉,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 등으로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Νίκος Καζαντζάκης)는 평소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잘 담아낸 묘비명을 남겼다
>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α. Δε φοβόμαι τίποτα. Είμαι λεύθερος.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살았다. 썼다. 사랑했다.
>날이 갈수록 내게 더욱더 새로워지는 것은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과 내 마음속의 도덕률이다.[3]
- 영국의 극작가이자 비평가, 소설가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의 묘비명은 CF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작품과 생활 속에서 늘 풍자적인 모습을 보여주던 그인만큼 묘비명도 익살적이다.
>내 언젠가 이 꼴 날줄 알았지.[4]
- 통계역학의 기틀을 설립한 열/통계물리학의 아버지인 이론물리학자 루트비히 에두아르트 볼츠만(Ludwig Eduard Boltzmann)의 묘비명은 극단적으로 짧으면서도 지극히 강렬하고 아름답다.
>S=klnΩ[5]
- 대수학의 아버지인 디오판토스의 묘비에는 수학 문제가 적혀 있는데, 방정식을 풀면 디오판토스의 사망 당시 나이가 나온다. 정규 교육과정에서 다들 한 번씩은 보게 되는 유명한 묘비명 덕분에 간혹 고인드립의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보라 ! 여기에 디오판토스의 일생의 기록이 있다. 일생의 6분의 1은 소년이였다. 그리고 12분의 1 후에 수염이 자라고 다시 7분의 1이 지나서 결혼을 하였다 5년이 지나 아들을 낳았고 아들은 아버지의 나이의 꼭 반을 살았으며 아들이 죽은후 4년뒤에 죽었다.[6]
-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오명으로 잘 알려진 니콜로 파가니니의 묘비명은 의외로 평범하다.
>제노바 태생의 천재 음악가 니콜로 파가니니 여기에 잠들다
- 제3대 미국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의 묘비명은 이렇다. 대통령을 지냈으면서도 자신이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을 넣지 않았다는 게 포인트. 사실 이 생몰년을 제외한 문장은 제퍼슨이 사망하기 전에 직접 정한 묘비명인데 이렇게 정해 놓은 후 가족들에게 여기서 단 한 단어도 추가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미국 독립 선언서의 기초자, 버지니아 종교 자유법의 제안자, 버지니아 대학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이 여기 잠들다. 율리우스력 1743년 4월 2일 나서 1826년 7월 4일 졸하다
- 조선시대의 대학자 퇴계 이황의 묘비명은 이렇다. 이 묘비명은 퇴계가 죽기 직전에 직접 정한 묘비명이라고 하는데, 이게 특이한 이유는 퇴계도 조정에서 벼슬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직함들을 다 빼고 적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묘비명에는 죽은 사람이 관직에 몸담았을 경우 그의 관직들을 다 넣는 것이 관례.[7] 그런데 퇴계와 대립했던 남명 조식은 이를 두고 "벼슬 안 한 나도 처사 칭호가 부끄럽거늘 지가 무슨..."이란 식으로 비꼬았다고 한다.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도산에서 물러나 만년을 숨어산 진성 이씨의 묘)
- 고대 그리스 (정확히는 시칠리아)의 수학자 아르키메데스의 묘비에는 원통에 내접하는 구의 모습이 그려져있다. 사망 당시 로마군의 시라쿠사 함락으로 난리통인 상황에서 여전히 그는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 기하학 문제를 풀고 있었다고 한다. 때마침 약탈하러 온 로마 병사에게 '그 그림에 손대지 말라'라고 말했고, 이에 분노한 로마 병사의 칼에 죽었다고 한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사령관 마르켈루스는 이 소식을 듣고 애석해하며 아르키메데스의 묘비명에 그가 마지막으로 연구했던 것을 묘비명을 새겨줬다고 한다.
- 아동문학가 소파 방정환의 묘비명은 소파의 일생을 간결하지만 확실하게 보여주는 묘비명이다.
>童心如仙(동심여선: 아이의 마음은 신선과 같다) 어린이의 동무 소파 방정환의 묘
- 미국의 위대한 흑인 인권 운동가 마틴 루서 킹의 묘비에는 그 유명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의 마지막 대목이 살짝 바뀌어 적혀 있다.
>Free at last! free at last! thank God Almighty, I'm free at last!
>(드디어 자유가, 드디어 자유가! 전능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제가 마침내 자유로워졌나이다!)
>(드디어 자유가, 드디어 자유가! 전능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제가 마침내 자유로워졌나이다!)
- 1666년 대화재로 전소된 런던 시가지와 세인트 폴 대성당 복구 작업에 참여한 크리스토퍼 렌은 자신이 설계한 세인트 폴 대성당에 안장되었는데, 그의 묘비명에는 건축가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바쳐졌다.
>여기 이 토대에 이 교회와 도시의 건축가이며 사익이 아니라 공익을 위하여 90년 넘게 살았던 크리스토퍼 렌이 누워 있다.
>읽는 이여, 그의 기념비를 찾고자 하거든 그대의 주위를 둘러보라. 1723년 2월 25일, 91세를 일기로 사망.
>읽는 이여, 그의 기념비를 찾고자 하거든 그대의 주위를 둘러보라. 1723년 2월 25일, 91세를 일기로 사망.
>大韓 德惠翁主之墓(대한 덕혜옹주지묘)
- 대한민국의 공수특전사령관 정병주 장군의 묘비명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백비. 이게 특이한 이유는 정병주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데, 원래 국립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된 묘에는 간단한 약력이나 추모 글귀가 새겨져 있기 마련이지만 정병주의 묘비에는 계급과 이름만 적혀 있고 이런 것이 하나도 적혀 있지 않다. 이는 유족들의 뜻인데 "명령을 생명으로 여기는 군인들이 상관에게 총질을 하고도 버젓이 살아 있는 세상에서 돌아가신 분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는 뜻이라고 한다.
>육군소장 정병주의 묘(앞면)
>一九八九년 三월 四일 경기도 고양군 산중에서 별세(뒷면)
>一九八九년 三월 四일 경기도 고양군 산중에서 별세(뒷면)
- 코미디언 김미화가 미리 지어놓은 자신의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웃기고 자빠졌네
- 실제 아이작 뉴턴의 묘비명이 아니지만, 알렉산더 포프의 찬사는 너무나 유명해서 묘비명으로 잘못 알려져있다.
>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신이 “뉴턴이 있으라! 하시자 세상이 밝아졌다
>신이 “뉴턴이 있으라! 하시자 세상이 밝아졌다
- 고려 말의 명신 포은 정몽주의 묘비명은 이렇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무미건조하고 특이점도 없는 평범한 묘비명이지만 영원한 고려의 충신으로 남은 그의 삶은 물론이고, 그를 존경했던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심정이나 평가도 모두 엿볼 수 있는 묘비명이다. 덧붙여 정몽주의 묘비는 조선 중종 때 유학자들이 세운 것인데, 원래 당대의 묘비명에는 추증된 관직이나 생전에 몸담은 관직까지 모두 넣는 것이 관례이지만 정몽주는 고려의 충신이라는 이유로 조선 태종이 추증한 관직명은 빼고 이렇게 지은 것이라고 한다.
>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고려 수문하시중 정몽주지묘)
- 신라 삼국통일의 제1공훈자인 김유신의 묘비는 두 개이다. 모두 당대가 아니라 후대인 조선시대에 세워진 묘비지만 살아서는 태대각간이라는 최고 직위를 누렸고, 죽어서는 '흥무대왕'으로 추존된 그의 입지를 잘 보여주는 묘비명이다. 덧붙여 두 번째 김유신의 묘비에 물이 묻으면 '능(陵)'이라는 글자가 '묘(墓)'로 바뀐다는 사실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9]
>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신라태대각간김유신묘)
>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陵(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릉)
>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陵(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릉)
- 이소룡의 묘비명은 본명인 '이진번'이 한자로 표기되어 있고
- 조선의 독립과 조선인의 인권 보장을 위해 일본인임에도 발벗고 나섰던 변호사, 후세 다쓰지의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그의 인생 역시 이 한 마디로 요약된다.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
- 한때 전 세계의 절반을 호령하던 사상인 공산주의의 창시자, 카를 마르크스의 묘비명은 공산당 선언에서 따 왔다.
짧고 강렬하며 자신의 사상을 가득 담은 묘비명이 특징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미국이 크게 자랑스러워하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묘비명은 작가답지 않은 하나의 문장이다.
>일어나지 못해 미안하오
- 중국 역사상 유일의 여자 황제인 측천무후의 묘비에는 아무런 글자도 없다. 이를 무자비(無字碑)라고 한다. 이는 측천무후의 유언을 따른 것으로, 이유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내 업적은 참으로 크니 도저히 글로써 남길 수 없다'라는 극도의 자만에서 비롯한 것인지, 아니면 차마 글로 남기고 싶지 않다는 겸양의 표현인지 확실하지 않다. 비슷한 것으로 명나라 만력제의 묘비 또한 무자비인데, 이 쪽은 확실히 전자의 자만이 맞다. 각 인물에 대한 평가도 측천무후는 '잔혹한 정치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내부 통치는 잘했다'라는 재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만력제는 부정할 수 없는 명나라 최악의 암군으로 평가받는다.
- 터키의 국부이자 초대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묘비는 그가 생전에 남긴 말을 담고있다.
>Benim naçiz vücudum, bir gün elbet toprak olacaktır. Fakat Türkiye Cumhuriyeti, ilelebet payidar kalacaktır.
>(나의 미천한 몸은 언젠가 당연히 흙이 될 것이다. 하지만 터키 공화국은 앞으로도 영원히 남아있으리라.)
>(나의 미천한 몸은 언젠가 당연히 흙이 될 것이다. 하지만 터키 공화국은 앞으로도 영원히 남아있으리라.)
-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였던 레오나드 메틀로비치의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When I was in the military, they gave me a medal for killing two men and a discharge for loving one.
>(군은 내가 두 명의 남자를 죽였다는 이유로 훈장을 주었고, 한 명의 남자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나를 전역시켰다.)
>(군은 내가 두 명의 남자를 죽였다는 이유로 훈장을 주었고, 한 명의 남자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나를 전역시켰다.)
>STEEL TRUE BLADE STRAIGHT
>(강철처럼 진실하고 칼날처럼 곧다)
>(강철처럼 진실하고 칼날처럼 곧다)
>그는 하늘의 장벽을 돌파했다.
4. 그 외
4.1. 묘지명
墓誌銘
묘지에 담은 글으로, 죽은 이의 간단한 내력을 적은 글귀를 묘지에 담은 것이다. 묘비명이 비석에 새긴 것이라면 묘지명은 무덤 안에 같이 묻는 것이다. 묘지명은 어제의빈묘지명처럼 망자가 생전에 살았을 과거의 생활상을 엿보는 데 도움이 된다.
4.2. 김광규의 시
읽어보면 참 씁쓸하다.
201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 영역 현대시 파트에 이육사 시인의 「강 건너간 노래」와 엮여 출제되었다.
4.3. 킹 크림슨의 노래 Epitaph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인 킹 크림슨의 히트곡으로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에 수록된 곡이다.
[1] 그는 좋은 남편이었으며 훌륭한 아버지, 믿음직스러운 친구, 인생의 업적 등.[2] 정확히는 묘비명이 아니다. 조병화 서재이자 오늘날 조병화문학관으로 쓰이고 있는 경기도 안성 편운재의 조형물에 새겨진 시로 제목은 <꿈의 귀향 >이다. 다만 조병화 시인의 묘소가 편운재 바로 옆에 있고, 시인 본인도 이 시를 자기 묘비명으로 삼겠다고 말했으니 묘비명으로 봐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시인은 생전에도 "내 사상적인 모체도 어머니이다"라며 어머니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밝힌 바 있으며 시인의 모친 묘소도 함께 있다.[3] 이는 칸트의 대표적인 철학서 《실천이성비판》에서 나오는 구절이다.[4] 원문은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이다. 직역하면 「내가 오랫동안 머무른다면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알고 있었지」이다.[5] 엔트로피를 나타내는 공식이다. S=엔트로피, Ω=해당 상황이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 그리고 k=볼츠만 상수를 의미한다. Ω를 W(앙상블)로 쓰기도 한다.[6] 디오판토스의 나이를 x로 놓으면, 'x/6 + x/12 + x/7 + 5 + x/2 + 4 = x'라는 식이 성립된다. 양 변을 계산하여 해를 구하면 디오판토스의 나이는 84세이다. 정상적인 풀이는 그렇고…. 사실 1/7, 1/12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은 곧 나이가 이들의 공배수였다는 것과 같고, 7과 12의 공배수 중 사람의 나이가 될 수 있는 것은 최소공배수이기도 한 84뿐이다.[7] 가령 충무공 이순신의 묘비에는 '증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사 덕풍부원군 행 정헌대부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충청전라경상삼도수군통제사 시 충무이공순신지묘'라는 엄청 복잡한 묘비명이 새겨져 있다.[8] r96 이전에는 '겉넓이'의 비로 잘못 적혀 있었는데, 실제 묘비에 적혀 있는 것은 부피의 비이다. 그런데 원기둥의 겉넓이는 6πr2, 구의 겉넓이는 4πr2이므로, 겉넓이의 비 또한 3:2이다.[9] 말라 있을 때에는 돌의 색상이 비슷해 잘 보이지 않지만, 다른 재질의 돌을 사용했기 때문에 젖었을 때 글자 부분의 색상 차이가 선명하게 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