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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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洵[1] (1009년 5월 22일~1066년 5월 21일)
1. 개요
2. 생애
3. 업적
4. 여담


1. 개요


북송대의 관리이자 문인. 는 명윤(明允)이며, 는 노천(老泉)이다. 중국 산문의 기틀을 다진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하나로, 당송팔대가에 해당하는 다른 인물인 소식소철의 아버지이기도 하며 아들들과 함께 삼소(三蘇)라고 불리기도 하며 이 중 소순만이 따로 노소(老蘇)라고 불리기도 한다.

2. 생애


대중상부 2년에 미주(眉州, 현 쓰촨 성 일대) 미산(眉山)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적에 그는 싫증을 잘 내는 성격 때문에 글공부에 집중하지 못하였으며, 부친 소서(蘇序, 973~1047)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집안을 부양할 의무를 느끼지 못하여 늘 집에서 빈둥거리거나 여행을 다녔다. 천성 6년(1027년)에 정(程)씨 여인과 혼인하여 이듬에 딸을 낳았으나 그 딸은 1년을 못 넘기고 죽었는데, 딸이 죽은 날까지도 종일토록 밖에서 쏘다녔다고 한다.
그러다 명도(明道) 원년(1032년)에 모친 사(史)씨가 병사하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학문에 매진하기 시작했다.[2] 하지만 지금까지 학문을 게을리 했으면서 꿈만 야무졌던 소순은 공부를 시작한 지 겨우 1년 만에 과거에 응시해 진사시를 치렀다. 결과는 당연히 낙방. 하지만 그는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고 대신 공부라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절감하여 이후 학습에 더욱 매진했다.
그는 자신의 준비가 부족했고 소홀했다는 것을 반성한 후 더 이상 과거에 응시하지 않기로 결심했으며, 이에 지난 1년 동안 쓴 모든 문장을 다 불사르고 오직 공부 그 자체에만 매진했다.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하는 공부가 아니라 진정 훌륭한 인재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소순은 이후 6~7년 동안 매일 손에서 책을 떼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고, 그 결과 마침내 장족의 발전을 하여 붓을 들기만 하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글을 쓸 수 있었고 순식간에 아주 긴 문장도 지을 수 있었다. 이 때 그의 나이가 27세였는데, 사후 구양수가 그의 묘비에 "스물일곱에 발분하여 독서하기 시작했다."[3] 라고 쓰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그가 공부 자체를 27세에 비로소 시작했다고 알고 있다.
가우(嘉祐) 2년(1057년), 경성에서 치르는 과거에 응시한 소식과 소철을 데리고 개봉을 방문했다. 당시 소순은 자신이 그동안 쓴 '기책(幾策)', '권서(權書)', '형론(衡論)' 등 22편의 문장을 당대의 이름난 문인이었던 구양수(歐陽脩)에게 보여주었다. 그것들을 읽은 구양수는 소순의 뛰어난 재능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당시 재상이었던 한기(韓琦)에게 소순을 천거했고, 한기 역시 소순의 문장을 본 후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이때 마침 소순의 두 아들이 어린 나이에 뛰어난 성적으로 진사에 급제하자 소씨 집안은 단번에 유명해졌다. 그리하여 당시 수많은 문인들이 앞다투어 그의 문장을 베꼈고 당시 사회의 문풍(文風)을 크게 일으켰다.
가우 5년(1060년)에 패주(霸州) 문안현 주부로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비서성 교서랑 등 다양한 벼슬을 지냈고 1066년 5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처음 관직에 진출했을 때 태상인혁례(太常因革禮)라는 글을 집필하고 있었는데 죽기 직전에 그것을 완성하였다.

3. 업적


유명한 저작으로 역사적인 지도자들의 행적과 자질을 평가한 권서, 북송 이래의 예(禮)에 대해 기록한 태상인혁례, 문집인 소로천전집(蘇老泉全集) 등이 있다. 그의 문체는 논하고자 하는 바를 옛 인물이나 사건 등에 빗대어 비유 없이 날카롭고 직설적으로 논하여 사람들의 뇌리에 깊게 박히도록 하는 문체였다.
국내에선 아들인 소식(별칭 소동파)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지는 편이지만, 소순이 아들들을 가르치고 그들과 함께 상경하지 않았다면 본인과 소철은 물론 소식 또한 이름을 날리지 못하였을 것이다.

4. 여담


부인인 정씨 사이에서 3남 3녀를 두었으며 그 중 다섯째로 낳은 아들이 소식, 여섯째가 소철이었다. 하지만 이 둘을 제외하고 모두 요절하였는데, 그 중에 가장 오래 생존했던 넷째 자식인 삼녀 팔랑(八娘)이 18세에 죽었고, 셋째 자식이자 장남인 경선(景先)이 4세에, 둘째딸은 13세에, 맏딸은 1세에 죽었다.
저작 중 하나인 명이자설(名二子說)에 그가 아들 둘의 이름을 왜 식(軾)과 철(轍)이라고 지었는지 나와 있다. 수레(車) 앞턱의 가로나무인 '식(軾)'은 별로 하는 일이 없어 보이지만 없으면 완전한 수레가 될 수 없으므로 손상을 입지 않도록 관리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직설적이고 강경한 성품 탓에 화를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의미로 소식의 이름을 지었고, 수레자국을 뜻하는 '철(轍)'은 세상의 모든 수레가 남기는 것이지만 수레의 이로운 점을 논할 때 잘 거론되지 않고, 수레가 전복되고 말이 죽는 사고가 나도 바퀴 자국에는 화가 미치지 않으므로 성격이 유순하고 남의 기분을 잘 이해하는 소철이 큰 고난을 겪지 않을 것이라 예견하여 철(轍)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1] 참고로 현대 표준중국어 발음은 Sū Xún이다.[2] 이와 관련된 설화가 존재한다. 어느 날 밤 꿈속에서 한 노인이 강가에 서 있었는데, 그 노인은 기울어진 나무를 손으로 가리키며 "수리하여 다듬지 않으면 대세는 이미 기울 것이다." 라고 말한 후 곧장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소순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으며, 노인이 했던 말이 자신을 일깨우는 것임을 직감하고 그제서야 깨달음을 얻어 이때부터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는 이야기이다.[3] 年二十七,始發憤讀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