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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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북송시대의 문인. 아버지 소순, 형 소식과 함께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일원이자 삼소(三蘇) 중 한 명이다. 미주(眉州, 현 쓰촨 성 일대)에서 태어났으며 자(字)는 자유(子由)였다.
2. 생애
보원(寶元) 2년(1039년), 형 소식이 4세였을 때 태어났고, 지화(至和) 2년(1055년)에 자신보다 2살 어린 사(史)씨 여인과 혼인했다.
가우(嘉祐) 2년(1057년), 아버지 소순이 형과 자신을 데리고 카이펑으로 상경하였고, 이때 장방평(張方平), 구양수(歐陽修) 등 관료나 이름난 문인들에게 인정을 받았으며, 과거에 급제하여 비서성 교서랑(校書郞)에서 시작하여 낙양의 군사추관(軍事推官), 송신종대에 삼사조례사촉관(三司條例司屬官) 등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왕안석의 법률 개혁에 반대하고 있던 터라 신법 찬성파의 모함을 받아 허난 성으로 잠시 좌천되었고, 이후 장방평 등을 따라 송철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비서성 교서랑으로 임명되었고, 원우(元祐) 원년(1086년)부터 우사간(右司諫), 역관 어사중승(歷官 御史中丞) 등 다양한 관직을 역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성(紹聖) 원년(1094년) 황제가 이청신(李淸臣)[2] 을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임명하였는데, 이에 상소를 올렸으나 그 내용 중에 전한 소제(昭帝)가 무제(武帝)의 법도를 바꾼 일을 언급하였고, 철종이 이를 '한무제를 이전 정권에 비유하였다.'라고 여겨 소철을 여주(汝州, 현 허난 성 직관(直管)시)로 좌천시켰고, 재차 책임을 물어 원주(袁州), 남경(南京), 균주(筠州) 등 다양한 지역으로 옮겨 일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후 태중대부(太中大夫)로 복직시켰으나, 채경에 의해 잠시 강등되어 허주(許州, 현 허난 성 허창(許昌) 시)에 거주하다 다시 복직되었다. 이때부터 허주에 살면서 영빈유로(潁濱遺老)라는 호를 지어 각종 자서전을 집필하였으되 사람을 만나지 않기를 10년 동안 지속하다 정화(政和) 2년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후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라는 관직을 얻었으며 순희(淳熙) 연간에 문정(文定)이라는 시호를 얻었다.
3. 업적
왕안석의 신법 제시로 인해 당시 조정이 뜨거운 감자가 되었던 시절에 신법 반대파로 활동하였으며, 그 외에도 회하에서 복무할 적에 치수를 잘 하기도 하였다.
고문학자로서도 이름을 널리 떨쳐 춘추, 도덕경 등을 해석하였고, 아버지, 형과 함께 촉학(蜀學)이라는 유교의 한 연구 방향을 제시하였지만 불교의 영향이 짙은 글도 자주 집필하였다. 저서로 시문집인 <난성집(欒城集)> 84권, <난성응조집(欒城應詔集)> 12권, 시집인 <전송시(全宋詩)> 등이 있다.
4. 여담
소철의 부인인 사(史)씨는 소철의 조모와 성이 같다.
소철의 부친인 소순은 자신의 작품 중 하나인 명이자설(名二子說)에 그가 아들 둘의 이름을 왜 식(軾)과 철(轍)이라고 지었는지 수록하였다. 수레(車) 앞턱의 가로나무인 '식(軾)'은 별로 하는 일이 없어 보이지만 없으면 완전한 수레가 될 수 없으므로 손상을 입지 않도록 관리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직설적이고 강경한 성품 탓에 화를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의미로 소식의 이름을 지었고, 수레자국을 뜻하는 '철(轍)'은 세상의 모든 수레가 남기는 것이지만 수레의 이로운 점을 논할 때 잘 거론되지 않고, 수레가 전복되고 말이 죽는 사고가 나도 바퀴 자국에는 화가 미치지 않으므로 성격이 유순하고 남의 기분을 잘 이해하는 소철이 큰 고난을 겪지 않을 것이라 예견하여 철(轍)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소철은 형 소식 못지않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