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헌태후 두씨

 


'''북송의 추존 황후
昭憲太后 | 소헌태후
'''
'''시호'''
소헌태후(昭憲太后)
''''''
두씨(杜氏)
'''출생'''
902년
'''사망'''
961년
'''재위'''
'''북송의 황태후'''
960년 ~ 961년
'''배우자'''
선조(宣祖)
'''부친'''
두상(杜爽)
1. 개요
2. 가계
3. 금궤지맹
3.1. 금궤지맹에 대한 논란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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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昭憲太后 杜氏
(902년 ~ 961년)
북송의 태후로 태조 조광윤태종 조광의의 모후이자 추존황제인 선조 조홍은의 황후이다.

2. 가계


오대십국시대의 인물인 두상(杜爽)[1]의 딸로 정주 안희현에서 태어났다. 조홍은에게 시집을 가서 조광제, 조광윤, 조광의, 조정미, 조광찬, 연국장공주, 진국장공주를 낳았다.[2]
조광윤이 후주의 절도사가 되면서 남양군태부인이 되었으며, 조광윤이 북송을 건국한 이후 황태후가 되었다. 소헌태후는 961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태조가 한시도 태후의 곁을 떠나지 않았지만, 결국 그 해에 세상을 떠났다.
사후의 시호는 명헌(明憲)이었다가 소헌(昭憲)이 되었으며, 안릉[3]에 합장되었다.

3. 금궤지맹


북송 건국 1년 뒤에 소헌태후 두씨가 임종을 앞두고 아들들을 불러모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소헌태후 두씨: 그대는 천하를 어떻게 얻었는가?

태조 조광윤: 모두 부황과 태후 마마의 거듭된 경사 덕분입니다.

소헌태후 두씨: 아니다. 그것은 주 세종어린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만일 주나라에 성년의 군주가 있었다면, 어찌 천하가 너의 것이 되었겠는가? 만약 황제의 자리를 물려줘야 한다면, 아우인 광의에게 제위를 물려줘야 한다. 성년의 군주를 세우면 사직이 안정될 것이다.

이후 승상인 조보에게 지금의 이야기를 모두 쓰되 틀리지 않도록 기록하라는 말을 남기며, 그들의 대화를 금궤에 보관하였는데 이를 금궤지맹이라고 불렀다.

3.1. 금궤지맹에 대한 논란


소헌태후 두씨의 금궤지맹대로 간다면 제위 계승 순서는 다음과 같다.

조광윤→조광의→조정미→조덕소

쉽게 말해 제위를 물려주는 건 형제 상속 이후 태조의 아들인 조덕소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의문인 점은 조광의가 즉위한 이후였다. 976년에 태조가 세상을 떠난 이후, 태종이 금궤지맹을 공개한 것은 즉위한지 5년이 지난 뒤였다. 재상에게 기록하게 하고 금궤에 보관하도록 한 이유나 즉위 이후 금궤지맹을 바로 공개하지 않은 것이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961년에 태후가 세상을 떠날 당시 조광윤은 30대 중반이었고, 태조의 아들인 조덕소는 10대 초반의 나이였다. 또한 조광윤이 976년에 사망할 때 조덕소는 이미 20대 중반의 나이였기 때문에, 조광의가 조광윤에게 "어린 아들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이라고 말하는 게 성립되지 않는다. 이는 후주의 세종이 자신의 어린 아들이었던 시종훈에게 제위를 물려준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래서 금궤지맹에 대한 논란과 더불어 나온 일화가 바로 촉영부성의 일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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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사로 추증되었다.[2] 이중 조광제, 조광찬은 요절하였다. 또 조정미에 대해서는 소헌태후 두씨의 소생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3] 송선조 조홍은의 능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