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송)

 


'''대송 초대 황제'''
'''太祖 大皇帝 | 태조 대황제'''
'''묘호'''
'''태조(太祖)[1]'''
'''시호'''
계운입극영무예문신덕성공지명대효황제
(啓運立極英武睿文神德聖功至明大孝皇帝)
'''연호'''
건륭(建隆, 960년 ~ 963년 11월)
건덕(乾德, 963년 11월 ~ 968년 11월)
개보(開寶, 968년 11월 ~ 976년 12월)
'''생몰'''
927년 3월 21일 ~ 976년 11월 14일 (50세)
'''재위'''
'''북송의 황제'''
960년 2월 4일 ~ 976년 11월 14일 (16년)
'''국적'''
후당(後唐)
후진(後晉)
후한(後漢)
후주(後周)
북송(北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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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趙)
''''''
광윤(匡胤)
'''부모'''
부황 선조(宣祖) 조홍은(趙弘殷)
모후 소헌태후(昭憲太后) 두씨(杜氏)
황후 ||[[효혜황후 하씨|{{{#000,#fff 효혜황후 하씨(孝惠皇后 賀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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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황후 왕씨(孝明皇后 王氏)
효장황후 송씨(孝章皇后 宋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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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초기 생애
2.2. 황제 즉위
2.2.2. 진실
2.2.3. 구 황족의 대우
2.3.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
2.3.1. 상세
2.3.2. 기타
2.4. 이루지 못한 통일
2.4.1. 수상쩍은 최후
2.4.2. 여러 의문점
2.4.3. 사후
2.4.4. 한국의 조씨
3. 이야깃거리
4. 가족 관계
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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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송의 초대 황제. 오대십국시대의 명장이자 송나라의 건국자이다.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영무예문신덕성공지명대효황제(英武睿文神德聖功至明大孝皇帝). 휘는 조광윤(趙匡胤). 동생과 더불어 묘호보단 휘인 조광윤으로 유명하다.
창업군주 특성상 많은 정적들을 죽여 희생을 치르고 왕조를 안정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조광윤은 전조의 황제인 시종훈과 평화적인 왕조교체를 성공했고 이후 군권 회수에도 토사구팽이 아닌 대화로써 평화롭게 회수하였다.
조광윤은 사대부를 우대하는 문치주의를 펼쳤고 이 문치주의 정책은 동생인 조광의가 계승하여 문학가들의 등장과 화약을 비롯한 획기적인 발명품을 등장시키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지나친 문치주의 정책으로 국방력이 약화되어 이후 거란서하에게 밀리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점도 있다.

2. 생애


송나라 황실의 기록에 따르면 송태조는 전국시대 조나라 조유목왕의 후손이라고 한다. 조나라 왕가의 후손들은 진시황 시대에 각지를 전전하다가 한나라 성립 이후 과거 조상의 영토였던 탁군 지역에 정착, '탁군 조씨' 또는 후대의 행정구역에 따라 '하간 조씨'로 알려지게 되었다. 견사생풍의 고사에 등장하는 서한 대의 경조윤 조광한이 대표적인 인물.

2.1. 초기 생애


탁군[2] 고안현 사람으로[3] 조광윤이 태어난 시기는, 당나라 멸망 이후 수많은 왕조들이 난립하였다가 빠르게 망테크타고 이어서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던 5대 10국 시기였다. 실제 조광윤의 집안도 원래 후당의 금군을 지휘하는 장수였다가, 후당이 망하자 후주에 복속된 군관 집안 출신이었다. 아버지 조홍은은 후주의 금군을 지휘하여 여러 군벌들과 맞서 싸우면서 공적을 세운 고위급 지휘관이었고, 조광윤 역시 당시 후주 태조 곽위의 양아들인 시영[4]의 수하로 들어가 군관으로 활약하였다.
시영(후주 세종)이 954년 제위에 오르자 영토 확장 의지를 천명하였고, 조광윤은 군의 지휘관으로서 남벌에 참여하여 상당한 공적을 세웠다. 그리고 당시 거란족의 도움을 받아 후주를 위협하던 군벌들을 모조리 박살내고 버로우시켰다. 조광윤이 탁월한 지휘 능력을 발휘하여 후주에 수많은 승리를 선사하자, 세종은 금군 총사령관직을 내려 후주의 모든 병력를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게다가 조광윤은 세종이 제위에 오르기 전부터 수하로 있었던 인물이었고, 상당한 충성심을 가진 인물이었기에 세종으로부터 상당한 총애를 받았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게 세종 시영은 죽기 전에 금군 총사령관이었던 자신의 처남을 해임시키고, 그 후임으로 조광윤을 앉혔다. 그 이유는 내가 죽으면 처남이 내 어린 아들을 죽이고 황제에 오를 테니, 연줄이 없고 충성스러운 조광윤을 앉혀놓자![5]였다. 사실 시영 본인도 직계 혈통이 아닌 고모부의 양자로 황제가 된 경우이기 때문에, 외척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2.2. 황제 즉위



2.2.1. 진교의 변


959년 세종이 승하하고 그 뒤를 이어 아들인 시종훈이 공제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즉위 당시 공제는 7살 먹은 어린아이에 불과했기 때문에, 유제의 등극으로 후주를 갈아 마시기 딱 좋은 시기라고 판단한 거란과 후주와 대립 중인 여러 군벌들은 서로 결탁하여 후주를 압박하였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조광윤이 나섰으나, 당시 부하들은 "이게 모두 저 어린 황제 때문이다"란 생각과 함께 시씨 황실에 대한 불만을 품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조광윤의 엄청난 군공과 명성, 후주에서의 위치를 감안하면, 충분히 황제가 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조광윤은 제위에 대한 욕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는데, 결국 참다못한 부하들이 조광윤을 옹립하기로 결정하고 행동에 나섰다.
960년 정월, 후주의 여러 신하들이 정월을 축하하는 중 북변 수비대가 전갈을 보내왔다. 전령은 요(거란)와 북한 연합군이 대거 침입한다고 알렸다. 이에 후주 조정에서는 귀덕절도사 겸 검교태위, 전전도점지휘사 조광윤에게 금군을 이끌고 출동케했다. 군을 이끌고 출정한 조광윤은 개봉 동북쪽에 위치한 진교역(陳橋驛)에서 야영을 했다. 원래 조광윤은 술자리를 가지면 술에 취해 떡이 되도록 마시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를 이용하여 그날 밤 동생 조광의와 부하들은 조광윤에게 술을 계속 권했다.
결국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신 조광윤은 부하들의 계획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 사이 조광의, 조보 등은 미리 준비해둔 황포를 가지고 술에 만취된 조광윤의 침소로 쳐들어간 뒤 급히 조광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간 후 황포를 입혔다. 이후 부하들은 “우린 당신을 황제로 모시기로 했으니 얼른 어린 황제로부터 양위 받으시오! 안 그럼 우린 반란 일으킬 겁니다!" 라고 말하며 양위받을 것을 강요했다. 이때 군사들이 황포를 걸친 조광윤을 보고 일제히 “만세! 만세! 만세!”라고 삼창을 하자 조광윤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난감해했다. 이후 조광윤은 황실과 신하들, 백성들에 해를 입히지 않겠다는 조건과 절대 복종의 맹세를 받아낸 후에야 부하들과 휘하 장졸들의 요청을 수락하였다.[6] 결국 병력을 이끌고 개봉에 입성한 조광윤은 공제의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올랐고 북송을 건국하였다. 왕건과 마찬가지로 자신은 군주가 될 생각이 없었는데 부하들이 억지로 밀어넣어 군주가 된 케이스다.

2.2.2. 진실


이것이 역사서에 적힌 공식적인 설명이다. 이 기록을 그대로 믿기란 어려운 일이다. 요나라의 공격으로 조광윤이 출동했다는 것은 송나라측 기록이고, 요나라측 기록에는 당시 송나라를 공격했다는 내용이 없다. 자국 내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느라 바빴을 뿐이다. 즉, 거란의 공격 자체가 조광윤이 군사를 이끌고 출동하기 위한 거짓 정보에 불과했다. 더구나 부하들이 억지로 황포를 입혔다고 했는데, 황포는 황제의 옷이고 군중에 굴러다닐 리가 없다. 사전에 준비하지 않았으면 황포가 갑자기 등장할 리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조광윤은 출동하기 전에 자기 가족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놓았다. 이를 종합해보면 조광윤은 처음부터 반란을 일으킬 목적으로 거란의 공격이라는 거짓 보고를 이용해서 군사를 이끌고 출동했던 것이다.
참고로 진교정변은 자치통감에 나오지 않는다. 자치통감은 959년 12월까지만 서술하고 끝나기 때문에 960년 정월의 진교정변은 등장하지 않는다. 진교정변이 요나라와 북한 연합군이 공격할 때 일어났다고 나오는 것은 960년부터 내용이 시작하는 청나라 때의 속자치통감이다.

2.2.3. 구 황족의 대우


그러나 그는 비록 제위를 빼앗았지만 실제 개봉 입성 후 휘하 군사들이 곽위 때와 달리 백성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았고, 전임 왕조도 잘 대해주었다. 중국 역사 내내 선양으로 제위에 오르는 경우가 많았지만, 실상은 남북조 시대부터 군대가 성 안에 들어오면 민가를 약탈하고 반항하는 백성들을 죽였고, 전 황족은 그 자리에서 족치거나 적당히 대접하다가 몰래 암살하는 일이 빈번했다.[7] 하지만 조광윤은 이런 선례와 달리 미리 휘하 군대에게 철저히 민가 약탈과 살육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고, 전임황제인 시종훈와 후주 황족들을 죽이기는 커녕 오히려 우대했다. 아울러 단서철권(丹書鐵券)[8] 을 내려 시씨 문중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시씨 문중은 북송이 금나라에 쫓겨 남쪽으로 내려갈 때도 송나라 황실이 함께 데리고 갔고, 남송이 멸망할 때까지 양송 3백 년간 보호받았다. 그리고 선양한 공제 시종훈을 정왕(鄭王)으로 봉해 식읍을 내려 그의 가문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고, 그가 973년에 20세의 나이로 요절했을 때에도 황제에 준하는 예우로 장사까지 지냈다. 이러한 후대는 이후 송나라 내내 이어졌고, 그래서였는지 후에 애산 전투에서 패한 송나라가 멸망할 때 '''많은 시씨 일족이 끝까지 송나라 황실과 명운을 같이 했다.''' 이런 시씨 일족 중 한 명이 수호지에도 등장하는데 바로 소선풍 시진이다. 시씨 이외에도 5대 10국의 군주나 장수들도 죽이지 않고 관용을 베풀었고[9] 정복한 지역의 백성들의 약탈을 엄금하면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반면 관용을 베풀되 통일에 대한 의지는 확고했던 거 같다. 남당후주 이욱이 조광윤에게 "천하를 반분해서 각자 다스립시다"라고 말하자, '''"내가 누운 침대 옆에서 외간 남자가 코골며 자는 것을 어찌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라며 으름장을 놓으며 사신을 내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2.3.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


일단 제위에 오른 조광윤은 병권을 가진 군벌들이나 자신을 옹립한 장수들의 존재가 매우 위험하다고 판단하였다. 많은 창업 군주들은 자신을 도운 공신들을 토사구팽 식으로 조지는 비정한 면모를 보이거나, 쳐죽이려다가 오히려 역관광타는 안습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조광윤은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과 형제처럼 지낸 공신들과의 의리를 이용해 병권을 인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방법은 정직하게 설명을 한 뒤 설득으로 병권을 받아오는 것이었다.
일단 휘하 장수들을 모두 초청하여 연회를 벌였는데, 이 자리에서 장수들이 만취 상태에 놓이자 갑자기 시종들을 멀리하고 공신들만 남긴 다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아주 솔직하게 설명했다.
조광윤: "만일 그대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짐은 황제가 되지 못했을 것이야. 그러나 황제가 된 후 짐은 매일 밤에 잠을 잘 수가 없네."
공신들: "폐하, 신들이 혹여 역심이라도 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신들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조광윤: "그대들이 배신하지 않아도 부하들이 부추긴다면? 그렇다면 그대들도 거절하기 힘들 것이 아닌가?"
공신들: "폐하께서 안심하시려면 신들이 어찌해야겠사옵니까?"
조광윤: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돈'. 그리고 '마음의 평화'이니,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그대들 스스로 잘 생각해 보도록 하게나."
그러자 공신들은 조광윤의 말 뜻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고급 장교들은 모두 황제에게 사직서를 제출하였고, 조광윤은 그들의 사표를 바로 받지 않고 병권이 주어지지 않는 자리로 전보 조치했다. 이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5대 10국이 왜 벌어졌는가를 다시 정리한 것인데, 각 장수들이 군권을 갖고 있다 보니 장기적으로는 황제를 우습게 보고 또 다른 분란의 원인이 된 경우가 허다했다는 것. 그렇게 술자리에서 자신의 고민을 토로함으로써 하루 아침에 군벌들의 세력을 넘겨받아 중앙으로 복속시킨다. 이 사건은 지방 군벌에 의한 군웅할거의 국면을 종식시키는 계기가 된다. 태조는 동일한 수단으로 왕언초(王彦超) 등 여러 명의 절도사들의 병권도 자발적으로 받아내고, 지방의 행정과 재정을 모두 중앙으로 복속시켰다.
왜 황제에게 병권이 집중되어야 하는지를 설득하는 한편, 병권을 내놓은 개국 공신들에게 그에 따른 혜택도 약속했다. 그리고 동일한 방법으로 각 지방의 절도사들을 불러 역시 정직하게 설명하고 설득한 뒤, 병권, 지방 행정권, 재정권 등을 중앙 정부로 흡수하였다. 이로써 조광윤은 '''숙청 없이 상황을 말끔히 정리하였다.''' 여타 많은 나라의 초대 왕이 개국 공신에게 피 튀기는 숙청을 한 것에 비하면 꽤 특이한 사례. 물론 병권 반납에 대한 불안감을 가질 사람들을 위한 혜택은 철저하게 줬다. 조광윤은 병권을 내놓은 휘하 장수들이나 지방 절도사, 군관들을 지방의 관리로 전보하거나 토지를 하사하는 등, 공신들이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게끔 조치를 취함으로써 자신이 한 약속을 모두 지켰다.

2.3.1. 상세


물론 이는 조광윤이 휘하의 장수나 군벌들과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에 가능한 일이긴 했다. 실제로 조광윤 자신조차도 처음부터 군권 회수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는데, 휘하에 있던 군인들의 설득[10]으로 군권 회수를 최종 결정했다고 한다. 다만 이 배주석병권도 말 그대로 설득으로 좋게만 풀렸다기보단, 은근한 숙청 경고(...)와 함께 잘 구슬려 결과적으로 비폭력적으로 해결되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사실 연회에서 한 말 자체도 보면 그냥 '너네 숙청당해서 뒤질래, 고향 내려가서 편하게 살래?'라는 협박에 가까운 말이지만, 어찌 되었든 결과는 비폭력적으로 좋게 끝난 건 사실.
또 실제로 조광윤은 술자리에서 협박(?)만이 아니라 힘 있는 신하들 임지를 수시로 바꾸어 뿌리를 못 내리게 하는 식으로 신하들의 세력을 약화시켰는데, 이 때에도 성의 없이 임명장만 휙 던져주는 게 아니라 직접 대면해서 "님 바쁘게 오라가라 해서 죄송하지만, 님 아니면 해줄 사람이 없음요ㅠㅠ" 라고 하니 신하들 입장에서도 속셈은 보이지만 황제가 직접 읍소하는데 뭐라 하긴 그렇고 해서 "에라 까짓거 해 드립죠" 하고 따라간 것도 있었다.
어쨌든 수많은 유혈숙청들의 이유는 권력을 빼앗긴 원한이란 게 죽기 전에는 사라지지 않아서다. 그런 면에서 다 죽이는 건 거칠게 말해 수많은 창업군주들이 개나 소나 하는 수준이지만, 권력 회수라는 목적을 달성하면서도 유혈사태를 보지 않았다는 면에서 정치력은 전 세계 전 시대를 통틀어도 보기 힘든 수준이라 봐도 좋을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의 역대 왕조중에서 송 왕조와 함께 중앙집권을 지향한 한족 통일왕조의 모범적인 전형으로 꼽히는 한나라명나라의 사례와 비교하면 이 점은 명확하다. 일단 통일왕조가 탄생한 뒤 정국이 안정되기 위해서는 군벌(중앙정부-황제의 통제 바깥에서 군권을 가진 권신)이 없어져야 한다. 이것을 하지 못한 사례가 바로 오대십국의 역대(오대) 왕조들과 서진 왕조로, 이들 왕조는 일시적인 통일을 이루었을지언정 예외없이 단명했다. 반면 장기간의 번영에 성공한 한, 송, 명의 세 왕조의 경우, 왕조 초기에 공신들의 군권 회수에 성공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다만 여기서 한,명 왕조와 송 왕조의 차이는 모범적인 토사구팽의 전형을 보여준 한, 명 왕조에 비해[11] 송 왕조에서는 공신들을 숙청하는 대신 군권만 내놓으면 편안한 여생을 보장해주었던 것. 연회에서 공신들을 압박한 것 자체가 "너네 숙청당해서 죽을래? 아니면 병권 내놓고 조용히 살래?" 라는 협박에 가까웠다는 것이야 물론 사실이지만, 어지간한 창업군주들은 협박의 수준에 멈추지 않고 그냥 실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갓 탄생한 왕조의 안정을 위해서는 이런 병권 회수 작업이 없으면 안되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이 점에서 같은 목표를 지향하면서도 피를 흘리는 대신 압박과 설득으로 해결한 송 태조의 정치력이 대단했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든 셈.
게다가 피 대신 협상과 설득으로 얻어낸 결과물 역시 충분히 대단하여, 망탁조의오삼계와 같은 내부 반란세력의 발호로 멸망 수순에 빠져든 한/명 왕조와는 달리 송 왕조는 문치주의로 인해 약화된 군사력으로 외부의 침략에 시달릴지언정, 애산 전투에 이르기까지 역대 송 왕조에서 우대받았던 사대부들의 충성심을 확보할 수 있었다.

2.3.2. 기타


여담으로, 이후 비슷한 방법으로 공신들의 재산을 꽁으로 가로채기도 했다. 공신들을 다시 모아 연회를 베풀고 술이 떡이 되도록 만든 뒤에 부축하고 데리고 갈 각 집안의 아들들에게 '애비가 집마다 10만관씩 조정에 바치기를 원하고 말했다'라고 한 것. 이후 술에서 깨고 보니 지난 밤 술김에 돈을 바친다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아니라면 황제를 능멸한 대역죄가 되니 살기위해 바치게 되었다고 한다..

2.4. 이루지 못한 통일


이후 조광윤은 통일을 위해 송과 대립하던 5대 10국 시대의 국가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하였고, 반항하는 군벌들을 밟아나아가면서 중국 대륙 통일 작업에 착수하였다.[12] 더불어 과거 제도를 시행하고 문치주의를 표방하면서 사회 제도 개편에 나섰다.[13][14] 이 과정에서 여러 공신들이 불만을 품고 반발하기도 했으나, 유혈 숙청을 싫어했고 뭐든지 인간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조광윤은 그 때마다 필살기처럼 '''술자리 초청''' 스킬을 발휘하여 대화로 풀어나갔다. 이런 점을 보면 유화술은 타고난 사람이었던 모양.

2.4.1. 수상쩍은 최후


그가 숨을 거두기 직전 남은 건 송나라 북쪽에 있는 북한(北漢)과 남쪽에 위치한 오월(吳越) 정도였다. 그러나 조광윤은 중국 통일 위업을 달성하지 못하고 976년 숨을 거두고 영창릉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동생 송태종 조광의가 즉위하여 조광윤이 시작한 중국 통일 및 국가 체계 정비를 완수하였다. 다만 즉위 과정에서 의문점이 많아 혹시 조광의가 형을 암살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얘기를 들어보면 '''엄청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얘기인즉슨, 조광윤이 죽던 날 밤 동생 조광의가 광윤의 침실에 들어가 다른 사람들을 물리치고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신하들이 방문 밖에서 바라보니 누군가 도끼를 방바닥에 찍으면서 "그렇게 하라!" 라고 외치는 모습이 촛불 그림자로 비치었다. 이후 갑자기 방문이 열리더니 조광의가 나와 "형님이 말씀하시기를, '장남 조덕소가 아직 어리고 천하일통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으니, 어린 아들을 황제로 삼으면 후주 공제처럼 나라를 잃을까 두렵다. 아우가 제위를 물려받으라.'라고 하셔서 내가 사양하니, 형님이 도끼로 나를 '''위협'''하여 '''어쩔 수 없이 '제위를 받겠다.''''고 하자 숨을 거두셨다."라고 주장하며 제위에 올랐다(...).

2.4.2. 여러 의문점


당연히 의심할 만한 일인지라, 일부 신하들은 태조가 아니라 태조의 첩을 희롱하다 걸린 태종이 도끼를 들고 형을 위협하다 죽이고 제위를 찬탈했다고 믿었다. 사실 맨 위 초상화에서 보듯이, 이 두 형제가 서로 너무 닮아서 그림자만으로는 누군지 구분할 수 없었던 것이 이러한 의심의 근원이었다. 이 고사를 '촛불 그림자와 도끼 소리'라는 뜻의 촉영부성(燭影斧聲)이라고 한다. 이 고사가 어찌나 유명한지 정사에선 어영부영 넘어가더라도 각종 야사로 꾸준히 전해진지라 청나라 강희제가 유조에서 역대 왕조가 후사 정하던 얘기하면서 언급할 정도.
애당초 태종의 주장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당시 태자 덕소는 어린 아이가 아니라 거의 30살에 가까운 나이였다는 것이다. 사실 위에서 설명한 조광윤의 즉위 과정도 작전을 계획하고 총지휘한 게 바로 동생 조광의였음을 생각하면 묘하게 섬뜩한 부분이다. 정말로 저 모든 걸 계획해서 계획대로 자기가 황제가 되었는지, 아님 형에게 충성스런 동생으로 살다가 자연스럽게 형의 뒤를 이었는지는 당사자 밖에 모르겠지만...

2.4.3. 사후


참고로 이때부터 북송의 역대 황제와 남송 초대 황제 송고종 때까지는 송태종의 후손이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송 태종의 자손이 귀했고, 송 고종 이후에는 송휘종정강의 변으로 송 태종의 자손들이 대거 금나라로 끌려가고 송 고종의 대도 끊기면서[15] 송 태조의 자손들이 황제에 오르게 된다.[16]

2.4.4. 한국의 조씨


한국의 성씨 중에 배천(白川)[17] 씨는 조광윤의 차남 연의왕 조덕소(趙德昭)의 삼남 조지린(趙之遴)이 시조이다. 조지린은 황실의 난[18]을 피해 979년 고려로 망명해 경종황해도 배천군 도태리에 정착해 살았다고 한다. 조지린은 고려 현종 때 좌복야 참지정사가 되었으며 아들 조양유(趙良裕)는 덕종정종 때 판위위사승(判衛尉寺丞)을 지냈고 추의찬화익조공신(贊化翊祚功臣) 문하시중으로 백천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유명한 사람으로는 임진왜란의병장이었던 조헌(趙憲)이 있다.
마찬가지로 임천(林川)[19] 조씨는 조광윤의 장남[20] 연의왕 조덕소의 차남 기왕 조유길(趙惟吉)의 오남 조천혁(趙天赫)을 시조로 한다. 979년 조덕소가 화를 입자 숙부 위왕 조유고(趙惟固)와 함께 고려로 망명해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천혁은 현종 때 강감찬과 함께 요나라를 격파한 공으로 가림백(嘉林伯)[21]에 봉해졌다고 한다. 여담으로 가수 조용필의 본관이 임천 조씨이다.

3. 이야깃거리


  • 조광윤이 세상을 떠날 때 돌에 유훈을 새겼고, 새 황제가 즉위를 하였을 때 반드시 이를 보고 지키도록 하였다.[22] 이를 돌에 새겨 남긴 유훈이라 하여 '석각 유훈'이라 하는데, 존재 자체가 송 황실 최고의 극비였던 까닭에 아무리 총애받는 신하라고 해도 그 존재를 몰랐다. 결국 이 석각 유훈은 금나라수도 변경(개봉)을 점령한 후에야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시씨의 후손은 죄가 있어도 형을 가하지 말고, 역모의 죄를 지었다 해도 옥중에서 자진하게 해주고, 저잣거리에서 공개 처형하지 말 것. 그리고 지속(支屬)에게 연좌시키지 말 것.
>2. 사대부와 상소하는 사람을 죽이지 말 것.
>3. 자손으로 이를 어기는 자는 하늘이 반드시 죽일 것이다.
역사 소설가 진순신의 경우에는 <18사략> 등에서 이 석각 유훈을 비롯한 송 태조의 통치 방식을 높게 평가하면서 중국 사상 최고의 군주로 평가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우연인지 운명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광윤의 보호를 받던 시씨들은 애산 전투에 참여해 송나라의 최후를 같이 한다.
송태조축국도(宋太祖蹴鞠圖).
조광윤은 상당한 축국 실력을 자랑했다고 한다. 이 그림에는 참모인 조보, 뒷날 태종이 되는 동생 조광의도 그려져 있다. 공을 가지고 노는 사람이 태조 조광윤이고, 뒷쪽 가운데쯤에 태조와 비슷하게 생긴 인물이 동생인 태종 조광의.
무장의 모습을 그린 현대의 작품. 조광윤은 무예가 매우 뛰어난 용장으로, 특히 창술과 봉술에 능했다고 알려져 있다.[23] 전쟁터에서는 쇠로 만들어진 봉을 휘둘렀는데, 전투 중에 봉이 부러져 쇠사슬로 연결했는데 그 위력이 대단하여 편곤의 시초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듯 곤술(棍術)에 뛰어나서 태조곤법이라는 것도 있었는데, 무림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을 정도로 달인이었다. 편곤의 기원을 따지다 보면 이 사람의 이름이 꼭 튀어나온다. 다만 실제로는 조광윤이 아니라 서융족의 무기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송(宋) 태조(太祖) 삼십이세장권(三十二勢長拳) 즉 장권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축국도 잘하고 봉술도 권법도 마스터인 걸 보니 꿈의 무술고수황제인 듯.[24]
  • 선견지명도 있었는데 속자치통감 7권에 따르면 송나라의 수도로 낙양장안, 개봉 중에서 택일하려고 하였을 때, 조정 제신들은 모두 험준하지만 당 말 이래로 쇠퇴해진 낙양이나 장안 대신 조운이 편리한 5대 이래로의 도읍 개봉에 정도할 것을 지지하였고 송 태조는 처음에는 낙양, 나중에는 장안을 선택해 주나라, 한나라처럼 험한 지형에 의존해 용병을 하지 않으려 했으나 송태종 조광의가 조운을 통해 물자가 풍부한 개봉을 추천해 마지못해 이를 따르면서 동생의 말은 진실로 훌륭하지만 백년도 안 돼 천하 사람들의 힘이 고갈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즉 개봉은 수비할만한 곳이 없는 평야니 훗날 후손들에게 해가 될 것이라 탄식했던 것.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 배주석병권의 일화에서 보듯 공신들과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인격도 원만했으나, 공신들에 대한 비판에는 울컥하는 면모가 있었다. 뇌덕양이라는 신하가 공신 조보를 비판하자 화가 치민 조광윤은 "야 조보가 내 공신인 거 모르냐?"라면서 도끼를 집어다 자루로 뇌덕양의 입을 후려쳐서 옥수수를 털어버렸다(...). 그리고 뇌덕양은 지방 관직으로 좌천. 뒷날 조선세조는 경연 자리에서 이 일을 기록한 기사를 강독하게 되자 시독관 홍옹에게 "이 일화 어떤 것 같냐?"라고 질문을 던졌다. 홍옹은 "죄가 있으면 마땅히 관련 부서에서 처리할 일이지 송 태조처럼 신하의 이를 부러뜨린 건 잘못입니다"라고 상식적인 평가를 내렸으나, 정작 세조는 "무슨 소리! 조광윤 그 양반 재위 20년간 과감히 결단한 것은 이것뿐이구만!"이라고 평가했다(...).[25]
  • 이 문서에서 계속 일컫는 도끼는 사실 사람 잡는 그 쇠도끼가 아니라 옥으로 만든 도끼 모양 장신구다. 어찌나 좋아했는지 무슨 판사가 법봉 두들기듯이 들고 지냈다고. 비슷한 일화가 하나 더 있는데 후원에서 활을 쏘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송 태조에게 어느 관리가 들어와서 상소문을 올리겠다고 보고했다. 송 태조가 보니까 별로 중요하지는 않은 내용 같아서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닌데 이게 뭐라고 지금 여기 와서 나한테 들이밀면서 내 시간을 허비하는가.”라고 신하를 꾸짖었는데, 그 신하는 지지 않고 "죄송하지만 폐하께서 한가하게 노는 것보다는 중요한 일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빡이 친 송 태조는 다시금 그 도끼로 신하를 쳐서 신하의 이가 두 개나 부러졌다. 입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눈 하나 깜짝 놓고 부러져 땅에 쩔어진 자기 이를 줍는 그 신하를 보고 "너 지금 그거 가지고 나한테 담아두는 거냐?"라고 물었는데, 그 신하는 "아닙니다. 그냥 가지고 나가서 사관한테 보이려고 그럽니다."라고 대답했다.[26] 그 자리에서 송 태조는 신하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고 치료비까지 주었으며, 후일 자신이 어떠한 일을 하고 있더라도 항상 상소문을 올리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 이 사람에게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지는 지역 음식이 있는데, 조광윤이 즉위하기 전 빈곤하던 시절 섬서성의 파오모(泡馍)라는 누룩 없이 구운 딱딱하게 굳은 빵을 국에 적셔먹던 것에서 유래한 파오모를 뜯어 양념한 양고기국물에 꿇여먹는 양러우파오모(羊肉泡饃(食+莫))라는 시안(도시) 지방에서 일상적으로 먹는 요리가 있다.
  • 태조 조광윤의 치세는 고려 광종 (949~975) 의 치세와 겹친다

4. 가족 관계


조광윤이 유명하지 않던 시절에 하경사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 그러나 송이 건국되기 전에 죽어, 후에 효혜 황후로 추봉하였다. 이후에 창덕군 절도사 왕요의 딸을 계실로 맞이하였는데, 송이 건국되자 황후로 삼았는데 곧 효명 황후이다. 이어 효명 황후가 죽자 집안이 화려한 송악의 딸을 황후로 삼았는데, 그녀가 효장 황후이다.[27]
효혜 황후가 연의왕 조덕소와 위국 대장 공주, 노국 대장 공주를 낳았으며 효명 황후가 진강혜왕 조덕방을 낳았다. 그 외의 자녀들은 요절해서 설명을 생략한다.

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대중 매체에서는 판관 포청천에서 자주 언급되는데, 태조 본인이 죽은 지 오래인 인종 대라서 직접 나오진 않고, 그가 하사한 물품이나 어명 때문에 죄인을 처벌할 수 없어 포청천이 어려움을 겪는 식으로 언급한다('천하제일장', '도룡기', '뇌정노' 등의 에피소드). 태조의 명이라 당대의 황제인 인종도 어쩔 수 없어 쩔쩔 매다가 허점을 노려 모가지를 날리는 게 일반적인 결말. 단, 시씨 가문에게 면죄부를 주는 단서철권만은 포청천도 어쩔 수 없어서 포기하고, 대신 범인이 벼락을 맞고 죽어서 결과적으로는 천벌을 받았다는(...) 결말('뇌정노' 에피소드)로 나온다. 작중에는 간접적으로 포청천을 괴롭히는 장치로만 나오긴 하지만, 사실 포청천이 판관으로서 활약이 가능하게 법을 제정하고 법관의 중립성과 독립성, 전문성을 위해서 제도를 정비한 것도 바로 태조인 만큼 포증에게는 애증이 가득한 선대 왕일 것이다.
주성치구품지마관에서는 포청천을 패러디한 장면이 나오는데, 선황의 하사품으로 버티는 죄인에게 그보다 더 선황이 주성치의 선조에게 하사한 보검을 들고 나와 명령을 따르라고 협박한다. 그런데 청나라 배경인데 명나라 황제가 하사한 보검으로 협박한 통에 오히려 반역으로 궁지에 몰린다(…).
허나 유독 조광윤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는 별로 많지 않은 편으로, 1986년에 싱가포르에서 조광윤과 이욱을 주인공으로 제작한 절대쌍웅(绝代双雄)이 최초이다. 북송 초기를 다룬 창작물인 양가장[28] 관련 창작물은 많기는 한데, 이는 조광윤 다음 대인 태종 조광의 시대의 스토리라 조광윤이 직접 나오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그리고 2년뒤 홍콩 TVB에서 조광윤과 후주 세종의 이야기를 다룬 병권(兵權)이 제작. 이 두 작품은 모두 국내에서도 비디오로 나왔다.
드라마 삼국으로 유명한 고희희 감독이 '대송전기지조광윤'이라는 사극을 찍었는데 조광윤 역은 삼국에서 조조로 유명한 진건빈이 맡았다[29]. 동생 조광의는 신삼국의 육손 역이었던 소봉이 맡았다. 여기에서는 촉영부성 일화를 재해석했는데 광윤은 이미 광의의 황좌를 향한 야욕을 알았지만 [30] 어머니의 형제 상속 유언과 친동생이라는 애정 때문에 차마 죽이지 못 했다고 설정되었다. 그래서 단 둘이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이 죽어야 광의가 살 수 있다는걸 알고 광의는 자식이 없기 때문에 광의도 후사는 조카에게 전할거라 믿고[31] 광의에게 황제 자리를 양보한 걸로 나온다.[32] 이 후 얼마 뒤 광윤은 알 수 없는 원인으로 갑작스럽게 사망을 하고[33], 광의가 왕위를 잇게 되면서 드라마가 끝이 난다. 이 드라마에서 광의는 처음엔 형밖에 모르는 착한 동생이었지만 개국 후부터 시영의 황후였던 언니들처럼 자기도 황후가 되고 싶다는 마누라[34]의 잔소리에 물들어가며 흑화한다는 설정.[35] 하지만 광의가 새로 즉위한 후 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슬퍼하는 조카를 위로하는 장면이 나온 직후 광의가 훗날 새로들인 황후에게 아들을 얻어 자기 아들에게 제위를 전했고[36] 남송 대에야 광윤의 후손들에게 제위가 돌아갔다는 해설이 뜬다.

6. 둘러보기



[1] 통칭으로 예조(藝祖)라고도 한다. 사서에서 조예조(趙藝祖)라고 하면 이 사람을 지칭.[2] 현재의 허베이성 저우저우 시(涿州市)로, 유비와 동향인 셈이다.[3] 탁군은 조광윤의 본적지이고, 실제 출생지는 낙양의 협마영이다[4] 원래 곽위의 아내의 조카, 다시 말해서 곽위의 처조카이다. 고모부의 성인 곽(郭)씨 성을 받고 양자가 되었으나, 고모부가 죽은 뒤 도로 시(柴)씨 성으로 돌아왔다.[5] 물론 조광윤은 처음에 후주를 멸망시키거나 할 계획도 아니었으며 본래 주의 충신으로 남길 원했으나 친인척들과 휘하 장수들의 협박 or 강력한 설득으로 인해 결국 선양 형식으로 후주를 멸망시킬 수밖에 없었다...는게 공식적인 입장. 그래도 시영과의 의리(?) 때문인지 찬탈은 했어도 일족은 보전해주었다.[6] 5대10국 시대 당시 정변이 일어난 뒤 군이 도성 안에 들어올 경우, 민가를 약탈하고 백성들을 죽이는 일들이 빈번했다고 한다.[7] 이게 420년 유송 멸망 이래 징크스처럼 자리잡았다.(...)[8] 면사금패(免死金牌)라고도 하며, 죄를 지어도 처벌받지 않는 일종의 국가유공자 증명서 겸 개국태조가 내린 대훈장 역할을 하는 문서였다. 이것이 있다면 역적모의를 획책하지 않는 한 아무리 후대의 황제라도 함부로 벌을 내릴 수 없었다.[9] 조광윤이 특별한 건 아니고 황족만 바뀌고 지배층은 그대로 유지한 게 5대 10국 전체의 특징이다. 풍도가 대표적 예이다.[10] 군권을 가진 사람 개개인의 충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그 부하들이 엉뚱한 생각을 하고 그들에게 군권을 사용할 것을 강요한다면 어쩔 것이냐는 지적이었다. 실제 역사를 보면 이런 사례가 굉장히 많다. 당장 조광윤 본인부터가 후주의 장군으로 동분서주하다가 부하들이 술먹이고 황제로 추대한 사람이다.(...)[11] 사실 한 왕조의 창시자인 유방(한고제)는 알려진 것에 비하면 그렇게까지 직접적이고 가혹한 공신 숙청을 벌이지는 않았다고는 하지만, 어쨌건 유방 사후 여후 집권기와 문제~무제 집권기의 백년이 지나면서 남아난 개국공신 가문이 별로 없다고 할 정도로 철저한 숙청이 일어났고, 명나라의 주원장 같은 경우는 그냥 본인이 직접 철저하게 공신들을 숙청했다.[12] 조광윤의 치세 기준으로 남평, 후촉, 남한, 남당이 멸망하였다.[13] 내치에 집중한 기간이 꽤 길다. 거의 10년 가까이 되는데 즉위 이전에 시영과 함께 거슬리는 주변국은 다 패놔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정권교체로 인한 반란도 진압하여 어느 정도의 여유가 생겼기에 가능했다. 게다가 시영이 추진하던 일들을 조광윤이 적극적으로 이어받았으니 시영의 입장에서는 그나마 다행일지도?[14] 송나라의 근본이 되는 제도의 기초를 다듬었는데, 그 당시에는 혁신적이었지만 후대에 가면 송나라의 많은 문제점이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15] 다만 황제가 될 만한 가까운 황족이 없었다는 거지, 태종의 후손이 완전히 전멸한 건 아니다. 대표적으로 남송 영종 때 재상을 지낸 조여우(趙汝愚)가 있는데 그는 태종의 후손이었다.[16] 남송의 송효종은 사남 조덕방의 차남 조유현의 후손이며 송이종은 차남 조덕소의 차남 기왕 조유길의 후손이다.[17] 황해도 배천군이다. 특이한 케이스로 한자 표기는 白川이지만 백천이 아니라 배천으로 읽는다.[18] 조덕소가 태종의 압력에 의해 자살한 사건.[19]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이다.[20] 장남 등왕 조덕수, 삼남 서왕 조덕림(趙德林)은 요절해서 사실상 장남이었다.[21] 임천의 옛 이름.[22] 새로 즉위한 송조의 황제는 입이 무겁고 글을 모르는 내시 한명과 이 돌 앞으로 가서 아무 말 하지 않고 읽었다고 한다.[23] 후주와 북한이 대회전을 벌인 고평 전투에서 우익을 맡은 장수가 도주하는 바람에 큰 위기를 맞았으나. 시세종의 숙위장령이던 조광윤이 친위대를 이끌고 돌격해 적의 전열을 무너뜨려 승리한 적이 있다.[24] 조광윤은 중국에 꽤 많은 설화를 남겼을 정도로 젊은 시절에 구직활동을 위해서 열심히 돌아다녔고 무예가 뛰어났다고 하는 이야기가 많다.[25] 본인도 공신들을 아꼈고 성격도 무례했던지라(...) 이 일화를 좋아했던 듯하다. 더욱이 세조는 한무제, 당태종 빠였으니 평상시 조광윤이 우유부단하다고 까는 것도 그의 사고방식으론 크게 이상하진 않았을지도. 세조 실록, 세조 1년(1455년) 8월 5일.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108005_004[26] 그러니까 사관에게 있던 일을 얘기해서 역사에 기록해놓겠다는 말이다.[27] 할머니가 후당의 의령 공주, 외조부가 후한의 시조 유지원, 어머니가 후한의 영녕 공주이다.[28] 송나라 때의 무인인 양업과 그 아들들의 이야기이자 무용담으로 중화권에서 인기가 많다.[29] 여기서는 조조 역을 맡았을 때 나온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와는 완전 다른 느낌의 목소리로 나와 다소 이질감이 느껴지기도 한다.[30] 이 드라마가 아무리 같은 제작사라도 그렇지 옛 작품에서의 장면 재활용을 너무 많이 했다. 송군이 장강을 건너 남당을 총공격하는 장면에서는 신삼국에서 묘사되는 동오의 트레이드마크인 흰 전포 차림의 군인들이 화공 속에서 무쌍난무를 벌이는데... [31] 드라마에서 광미는 안 나온다. 배다른 동생이라서인지 광미까지 등장시키면 인물관계가 너무 복잡해지니까.[32] 물론 대놓고 자리를 양보한다고 말하지는 않고 '조카의 등극을 돕든, 본인이 황제가 되든 너 알아서 해라' 라고 하며 넌지시 얘기하였다.[33] 광의가 어의를 시켜 독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광윤은 진작부터 광의의 계획을 눈치채고 있었고 결정적으로 어의가 준 독약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감독이 원인 불상의 죽음으로 남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이미 황위를 양보까지 한 마당에 무슨 독살을 하려고 했겠는가[34] 이름은 부용. 시영의 황후였던 언니들보다 자기가 이쁘고 똑똑하다(...)며 자기도 황후가 되고 싶다고 시영 앞에서부터 징징댄다. 진교의 변에서 광윤에게 입힐 황포를 이 사람이 손수 지었는데 그걸 사이즈 맞나 보자고 광의한테 먼저 입혀볼 정도. 사실 태후의 형제 상속 유언도 광의의 처가 친정아버지를 이용해 '짜낸' 것에 가깝다. 그러나 정작 이렇게 더럽고 치사한 짓은 다 하면서도 천명은 어쩔 수 없는지 황후가 되기 전에 가슴을 부여잡고 요절하는데, 어찌나 한이 맺혔던지 임종에도 남편한테 황포 한번만 입어보라며 애원할 정도. 광윤은 이런 부용의 빈소에 부용이 지어 광의가 입혀줬던 그 황포를 가져가 태우며 명복을 빈다. 실제로 의덕항후 부씨는 태조가 죽기 1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35] 자기 부하들이 황제를 독살하자고까지 하는데 차마 형을 직접 죽이지는 못하고 독살 시도 혐의가 형한테 알려졌는데도 형 앞에서 별 씨알도 안 먹힐 변명(형 살리자고 독약과 해독법을 공부하느라 그랬다나?)을 하는데 그걸 광윤은 다 받아준다. 광윤이 아니라 다른 황제 동생이었으면 광의는 진작에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36] 실제로는 광의네 큰아들들 원좌, 원희는 물론 광의에게 제위를 물려받는 덕창도 광윤 생전에 태어났고, 큰아버지 광윤이 귀여워해서 황궁에서 컸다. 휘만 봐도 덕자 돌림을 쓰다 나중에야 원자 돌림으로 개명했을 정도니... 이는 인물구도가 번잡해지니 극에 맞게 각색한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