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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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북송시대의 인물로 자는 문화(文化).
2. 생애
송나라의 태조(太祖) 조광윤과 태종(太宗) 조광의의 동생이다.[1] 본래의 이름은 조광미(趙匡美)였으나 조광윤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태조의 이름을 피휘하여 조광미(趙光美)로 고쳤다.
조광미는 태조가 즉위하면서 가주(嘉州) 방어사로 제수되었고 흥원윤, 산남서도 절도사를 지냈다. 그 외에도 태조 재위기에는 동중서문하평장사, 시중, 경조윤, 영흥군(永興軍) 절도사를 역임하였다.
태조 사후 조광의가 즉위하면서 태종의 이름을 피휘하여 정미(廷美)로 개명하였고 상서령, 개봉윤이 더해졌으며 제왕(齊王)으로 봉해졌다가 진왕(秦王)으로 봉해진다.[2]
그런데 태종 재위기에 진왕 조정미가 역모를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이 조정 내에 돌았다. 물론 조정미가 진짜로 역모를 일으키려는 마음은 없었지만 조정미는 태종에 의해 억울하게 개봉윤에서 파직되고 서경유수로 쫓겨났으며 진왕에서 부릉현공으로 강등되었다.
태종의 아들이었던 초왕(楚王) 조원좌(趙元佐)는 숙부인 조정미의 신원을 태종에게 간청하였으나, 태종은 조원좌의 간청을 듣지 않았다.
조정미는 이후 방주의 부릉으로 유배되었고 결국 쓸쓸함 속에 옹희(雍熙) 원년(984년)에 세상을 떠나고 부릉왕으로 추봉되었다.
숙부인 조정미의 억울함을 토로했던 황태자 조원좌는 조정미가 죽었다는 소식에 너무 슬퍼한 나머지 궁궐에 불을 놓는 등 완전히 미쳐버려 결국 태종에 의해 폐서인되었다.[3]
사후 조정미는 진종에 의해 진왕으로 다시 복권되었고 휘종 대에 들어서 위왕(魏王)으로 추봉되었다. 시호는 도(悼).
3. 가족관계
조정미에게는 10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이 있었다.
4. 기타
조정미가 죽기 직전에는 형인 태조 조광윤의 아들들이었던 조덕소와 조덕방도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조덕소와 조덕방의 죽음, 태종 조광의의 의심스러운 즉위과정에 조정미의 죽음까지 합쳐 태종의 즉위에는 여러 의견이 무성하다.
[1] 본래 조정미 위로 큰형인 조광제(趙光濟)와 동생인 조광찬(趙光贊)이 있었으나 조광제와 조광찬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2] 다만, 태종의 즉위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남아있다. 그 과정은 태종 항목을 참고.[3] 조원좌는 그의 처지를 동정했던 진종이 즉위한 뒤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