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주
- 다른 뜻: 後主(후주)는 뒤를 이은 군주라는 뜻으로 정식 묘호를 받지 못한 군주들이 받는 시호이다. 촉한의 유선, 북제의 고위, 후량의 소종, 남진의 진숙보, 전촉의 왕연, 남한의 유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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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대(五代)의 마지막 왕조로 951년에 후한을 무너뜨리고 곽위(郭威)가 개봉(開封)에 세운 국가이다. 국호는 주(周)이지만 과거의 무왕(주)(周武王)이 세운 주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후주, 성씨를 따라 곽주(郭周), 시주(柴周)라고 부른다.
2. 역사
곽위는 황제가 되었지만 거병할 때 자식이 모두 살해되어서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954년에 죽을 때 처남의 아들인 시영(柴榮)을 양자로 세워 제위를 잇게 하니 이가 후주 세종(世宗, 954년 ~ 959년)이다. 세종은 북한(北漢)과 싸워 승리를 거둔 뒤 내정에 충실을 기하고 군대를 정비해 천하 통일의 야심을 품고 남당(南唐)과 북한을 압박하고 요나라를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959년, 겨우 39살에 병사한 뒤 그의 어린 아들인 시종훈이 제위를 잇자, 군대가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서 장군 조광윤(趙匡胤)이 황제로 옹립되었다. 이로서 통일 왕조의 초석을 닦은 후주도 겨우 9년 만에 멸망하고, 조씨에 의한 송이 개창되었다.
그러나 이 오대 최후의 왕조인 후주의 황족인 시씨는 조광윤의 쿠데타 때에 선양했기 때문에 사실상의 대귀족으로서 대우받았고, 시종훈 본인도 조광윤의 후한 대우와 보호를 받았다.[1] 그래서 남송 최후의 전투인 애산 전투에서 시씨 일족은 남송의 최후의 군대와 함께 항전하여 남송과 최후를 함께했다.[2]
3. 한국과의 관계
고려와도 관계가 있다. 이 나라 출신 인물인 쌍기(雙冀)는 956년, 광종 시대의 고려로 들어와 귀화하고, 한림학사와 문형에 올랐다. 그는 958년 과거 제도를 창설하고 첫 지공거가 되었다. 이 과거 제도는 세습이 아닌 실력으로 사람을 선발하는 제도로서 그동안 군림하였던 호족 세력을 누르고 광종의 왕권 강화에 일조하였다. 대표적인 중국계 한국인인 셈인데, 후손은 단절되었다.
4. 역대 황제
[1] 물론 이 부분은 조광윤 개인이 숙청과 보복의 릴레이를 끊으려고 결정을 내린 것도 크다. 실제로 그는 부하들에 대해서도 피비린내 나는 유혈 숙청을 단행하지 않고 술자리를 연 뒤 정중하게 '부탁' 하여 병권을 넘겨받는 형태로 군권을 모으는 등 최대한 온건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노력했다.[2] 소설『수호지』에 나오는 소선풍 시진(柴進)도, 이런 역사적 사유 때문에 아마 후주 세종의 후예로 그려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