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소

 


<colbgcolor=#2e8b57><colcolor=#ece5b6> '''대송의 황족
연의왕(燕懿王)
趙德昭 | 조덕소
'''

'''시호'''
의(懿)
'''작위'''
연왕(燕王)
''''''
조(趙)
'''이름'''
덕소(德昭)
''''''
일신(日新)
'''생몰'''
951년 ~ 9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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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e8b57> '''부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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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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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등왕(滕王) 조덕수(趙德秀))
서왕(舒王) 조덕림(趙德林)
진강혜왕(秦康惠王) 조덕방(趙德芳)

1. 개요
2. 생애
3. 가족관계와 후손
3.1. 조지린과 조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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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북송시대의 인물로 태조 조광윤의 아들. 자는 일신(日新).

2. 생애


조덕소는 태조 조광윤과 효혜황후 하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래 태조의 슬하에는 조덕수(趙德秀), 조덕소, 조덕림(趙德林), 조덕방(趙德芳)이 있었으나, 조덕수와 조덕림은 요절하여 사실상 조덕소가 장남이었다.
본래 조덕소는 태조 재위기에 귀주 방어사, 산남서도 절도사로 제수되었으며 태조가 조덕소를 황태자로 책봉하려고 하였으나, 태종이 즉위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게 되었다.
조덕소는 태종이 즉위한 뒤에 영흥군 절도사, 시중이 되었고 무공군왕으로 봉해졌다. 그런데 본래의 제위 계승은 태조와 태종의 어머니이자 조덕소의 친할머니인 소헌태후 두씨의 유조에 따라 태조 사후 태종 조광의→조정미를 거쳐 조덕소에게 이어질 예정이었으나 태종이 즉위한 시기에는 태종이 자신의 아들들에게 제위를 물려줄 생각이었다.
조광의는 장남인 조덕소가 아직 어리다고 주장하였으나 사실 조덕소는 태조가 세상을 떠날 때 20대였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가 있다.
조덕소는 태종이 북한을 멸망시키고 오대십국시대를 통일한 979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태종이 북한을 정벌할 당시에 태종이 북한 정벌 도중에 전사하였다는 소문이 돌아서 조덕소가 즉위하려한다는 움직임이 있었다.
태종 조광의는 북한을 정벌한 뒤 조덕소를 의심하였는데 조덕소는 태종의 의심 속에 결국 979년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조덕소 사후 2년 뒤인 981년에는 동생인 조덕방도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에 태종의 의심스러운 즉위과정과 더불어 두 형제의 죽음에 태종이 연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남겼다.[1]
조덕소는 사후 연왕(燕王)으로 추봉되었다. 사후 시호는 의(懿).

3. 가족관계와 후손


조덕소는 북송의 태자태부 왕부(王溥)의 딸인 한국부인(韓國婦人) 왕씨에게 장가를 가서 슬하에 5명의 아들로 조유정(趙惟正), 조유길(趙惟吉), 조유고(趙惟固), 조유충(趙惟忠), 조유화(趙惟和)가 있었다.
남송의 황제 중 효종, 광종, 영종이 조덕소의 동생인 조덕방의 후손이었다. 영종의 아들들이 모두 요절하여 영종은 조덕소의 9대손인 영왕 조희로의 아들 조여거를 양자로 들여 조귀성(趙貴誠)으로 개명시키고 이후 1224년에 영종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조윤(趙昀)으로 개명시켰다. 1224년에 영종이 세상을 떠나고 조윤이 즉위하게 되니 이때 즉위한 황제가 바로 이종이었다. 또한 이종 사후에 즉위한 도종공제, 단종, 소제도 조덕소의 후손이었다.[2]

3.1. 조지린과 조덕소


배천 조씨에서는 시조를 조지린으로 기록하며, 조지린은 태조 조광윤의 손자이자 연의왕 조덕소의 아들로, 북송 황실 내부의 난리를 피해 고려로 망명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는 의문이 남는 언급인데, 실제는 조덕소 슬하의 다섯 아들이 모두 유(惟)자 돌림을 따랐기 때문.
먼저 고려사에서 전하는 조지린의 기록은 이러하다.

趙之遴, 白州銀川縣人. 有吏幹, 性嗜酒, 日夜娛樂. 穆宗朝, 拜吏部侍郞·知銀臺事, 時以朋比乾沒譏之. 然視金諾·李周禎輩, 有閒. 顯宗二年, 以左僕射·叅知政事卒, 輟朝三日, 謚恭華.

조지린은 배주 은천현 사람이다. 관리로서 재능은 있었지만, 성품이 술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음악을 즐겼다. 목종 연간에 이부시랑, 지은대사로 임명되었는데, 이때 조지린을 무리를 지어 재물을 탐한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김낙과 이주정의 무리를 보건대, 차라리 조지린은 나은 점이 있었다. 조지린은 현종 2년(1011)에 좌복야, 참지정사를 지내다가 죽었으며, 조정에서는 3일 동안 폐조하고 시호를 공화(恭華)라고 하였다.

- 고려사

고려사에서 조지린이 태조 조광윤의 후손이라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조지린은 송사에도 등장하는데, 송사 고려열전에서 전하는 조지린의 기록은 이러하다.

咸平三年, 其臣吏部侍郎趙之遴命牙將朱仁紹至登州偵之, 州將以聞, 上特召見仁紹. 因自陳國人思慕皇化, 爲契丹羈制之狀, 乃賜誦函詔一道, 令仁紹齎還.

함평 3년(1000년)에, 고려의 신하였던 이부시랑 조지린이 아장인 주인소에게 등주로 가서 정탐을 명령하였다. 등주의 장수가 아뢰어 황제가 특별히 주인소를 불러보았다. 이에 주인소가 고려 사람들이 중화의 교화를 사모하면서 거란의 제재를 받는 상황을 이야기하였고, 이에 왕송에게 세함에 조서 1통을 내려주고는 주인소에게 그것을 가지고 돌아가게 하였다.

- 송사 487권 고려열전

송사에 등장하는 조지린에 대한 내용은 위의 기록이 전부이다. 송나라가 조지린에 대해 안 것은 주인소를 통해서였는데, 조지린이 만약 태조의 손자라면 주인소가 이를 언급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송사 그 어디에도 조지린이 태조의 손자라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또한 상술하였듯 조덕소에게는 5명의 아들이 있었고, 모두 북송시대에 관직 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조지린이 조덕소의 아들이라는 언급은 어느 정도의 윤색이 가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1] 태종의 의심스러운 즉위과정은 송태종 항목을 참고할 것.[2] 도종의 아버지인 조여예가 조덕소의 9대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