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종(송)
[clearfix]
1. 개요
북송의 제7대 황제. 묘호는 철종(哲宗), 시호는 헌원계도현덕정공흠문예무제성소효황제(憲元繼道顯德定功欽文睿武齊聖昭孝皇帝). 휘는 후(煦). 신종의 6번째 아들. 그가 죽은 이후 북송 멸망의 원흉이라고 까이는 혼덕공이 즉위하면서 북송은....
2. 생애
2.1. 황제가 되기 전
송신종의 6남이자 덕비 주씨[2] 소생으로 희녕 9년 12월 7일 기축에 궁 안에서 태어났으며 원래 이름은 용(傭)이었다[3] . 검교태위, 천평군절도사를 부여받았고 균국공에 봉해졌다가 원풍 5년, 개부의동삼사, 창무군절도사로, 이후 1082년 연안군왕으로 진봉되었다.
원래 신종의 6남이었기 때문에 정상적으로는 황제가 되기 힘든 게 사실이었지만, 다섯 형이 모두 요절하면서 살아있던 형제 중 장자가 되었다. 아버지였던 신종이 원풍 8년(1085년) 2월 업무를 못 볼 정도로 위독해지자[4] 서둘러 조정 대신들이 황태자 건저를 올려 신종과 신종의 모후 선인성렬황후 고씨에게 동의를 구했고, 대신들의 주장에 황제와 황태후가 허락하면서 후계건저가 논의됐다.
이때 철종의 할머니 선인성렬황후는 국정 안정을 위해 어린 손자들 대신 성년에 접어든 선황 영종과 자신의 아들[5] , 즉 신종의 동복동생 중 한명에게 송 신종의 뒤를 잇게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형서, 채학 등 대신들은 예법에 따라 신종의 장남이 있기에 아니된다고 주장했고 선인성렬황후 역시 자신의 주장을 거둠으로써 신종의 장남인 연안군왕 조용이 황태자로 추대되었다.
신종의 동의 이후, 선인성렬황후가 교서를 반포하며 연안군왕을 황태자로 봉했으며[6] , 1085년 3월에 연안군왕은 정식으로 황태자가 되었는데 황태자 책봉 때 휘를 용에서 후(煦)로 바꿨다. 그리고 원풍 8년(1085년) 3월 아버지 신종이 붕어하자 불과 9살의 나이에 황태자 조후가 송조의 새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죄를 용서받지 못한 자들에게 대사면을 내렸으며 요나라에서도 사신이 와서 신종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7]
2.2. 원우 연간
나이가 어렸던 철종 대신 그의 할머니 선인성렬황후 고씨가 태황태후로서 수렴청정을 했다. 원래부터 아들이 추진했던 신법을 반대하던 선인성렬황후는 신종 시절 신법을 추진해오던 조정 대신들을 대거 교체하고 황제을 주변에서 모시는 환관들까지 싸그리 바꿨다 . 따라서 어린 황제 주변은 선인성렬황후의 입김이 작용하기 알맞게 교체되었고 조정 역시 구법파들이 다시금 자리잡게 되었다.[8] 그리고 철종 즉위 후 태황태후의 신임을 받았던 사마광이 돌아와서 재상으로 임명된다. 그리고 이 시기 조정의 주요대신들은 이 당시 연호인 원우(元祐)를 따서 원우당파라고도 부른다.
선인성렬황후와 대신들은 원우 연간동안 꾸준히 어린 철종의 교육에도 힘을 쏟았고, 선인성렬황후도 어린 손자를 친아들 이상으로 돌보면서 제왕과 인간으로서 갖춰야할 부분까지 신경쓰며 늘 손자의 훈육에도 적극적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시독 소식, 범저우 등에게 어린 황제의 교육을 담당케 했다. 이들은 교육을 통해서 어린 철종이 성인이 되고 난 뒤, 진종이나 인종처럼 '''선조들의 전례를 따르고 사대부와 함께 청렴한 태평성대를 이루는 군주'''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으며, 선인성렬황후 역시 손자가 훌륭한 군주가 되도록 힘썼다. 아울러 어린 철종이 늘 다른 곳이 아닌 황제 자신의 침상에서 잠을 자게 하는 등의 규칙을 정해서 엄격하게 훈육했고 철종에게 만약의 불상사가 벌어지는 일이 없도록 상당히 신경썼다 .
선인성렬황후는 수렴청정기간동안 국정을 몇몇 신하들과 상의하고 일을 신중히 결정했다. 신종 사후 철종이 즉위한 직후, 태황태후의 신임 속에 재상으로 사마광이 임명되었다. 임명된 사마광은 신종때 신법 중 가장 문제점이 컸던 모역법(면역법) 폐지, 차역법 부활을 추진했고 이를 5일 이내로 실행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신법 폐지는 워낙 밀어붙이기식으로 급격했고 짧은 기간에 실행하라는 것은 신법파들과 지방관 등의 반발을 초래했다[9] . 이런 가운데 이듬해인 1086년 신법파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왕안석이 사망했고, 8개월동안 집권했던 사마광마저 미처 후속대책을 내기도 전에 사망했다.[10]
사실 원우연간의 선인성렬황후의 섭정기간동안, 그녀를 중심으로 조정은 비교적 수월하게 운영되었음에도 철종의 발언권은 거의 없었다. 여기에는 선인성렬황후 본인이 유능하고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서 안정적으로 나라를 이끈 것과 송의 관료제가 신종 연간동안 꽃을 피웠던 이유도 있었지만, 황제의 할머니와 원우당파 대신들이 ‘황제의 나이가 어리는데 무슨 일이 성사되겠는가’라고 판단했던 이유도 컸다. 물론 철종이 17세가 되어서야 국정에 참여했지만 이때에도 대신들이 10대 철종이 제시한 의견보다는 선인태후의 의견에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11]
따라서 철종은 어전회의 중 할머니와 대신들의 행동과 조치에 대해서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하면서 반항하였다. 철종이 당시 했던 반항은 ‘황제임에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허수아비’라는 불만이 담긴 퉁명스러운 말과 묵묵무답과 같은 소극적인 방식이었다. 그래서 조정회의 중에 자신의 뒤에 있던 할머니 선인성렬황후가 "왜 의견을 제시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낭랑[12] 할머니께서 일을 처리하셨다"고 말해서 뒤에 있던 선인성렬황후가 "무슨 말이냐"라고 다시 반박하는 일이 생기거나, 할머니의 물음에 입을 닫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일들이 종종 벌어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신하들은 철종과 선인성렬황후에게 아뢸 때 종종 입을 닫고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2.3. 소성, 원부 연간
1093년 선인성렬황후 고씨가 병으로 사망하고 철종이 제대로 친정을 시작한다. 원우연간동안의 일에서 언급했듯이 철종은 17세 이후에도 할머니의 수렴청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황제의 어좌 옆에는 늘 할머니 고태후의 자리가 항상 마주하고 있었고, 신하들도 보고를 할때 황제에게 등을 돌려 보고 하기보다는 먼저 태황태후에게 알리는 상황이 계속됐다. 따라서 철종은 자연스레 할머니와 원우대신들에게 불만을 가졌는데, 이때 젊은 황제에게 더 큰 원망을 들은 쪽은 신하들이었다.
당시 원우대신들은 선인태후가 손자인 철종의 성품이 안정되어 있다고 먼저 밝혔음에도, 누구도 성년이 된 황제를 위해 태황태후에게 발을 치우라고 말을 하지 않았다.[13] 더해서 일부 대신들은 다 큰 철종에게 “일이 진행되기 전 태후마마께 먼저 아뢰시고, 태후마마의 말을 경청하신 뒤에는 그 말씀대로 하시옵소서”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까닭에 연호를 소성(紹聖)으로 바꾼 이때의 모습들을 보면 정책이나 인사 등이 원우연간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원우대신들의 평이 많이 깎기기도 했다.
할머니 사후, 철종은 원우연간동안 함께하던 환관들을 교체하면서 몇 명은 그 죄의 무거움을 물어 처형시켰다[14] . 또 선인태후 섭정기동안 밀려나있던 장돈, 증포 등 옛 신법파들을 다시금 중용했다. 따라서 재상 장돈이 실권을 장악한 철종의 친정 시기는 과거 신종 때의 정책이 되살아난 것으로 보였고 원우 연간 이전으로 회귀되는 조치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집권한 신법파들은 과거 왕안석과 사마광 생전보다 타협점을 찾기 힘든 인물들이 많았고,[15] 정치적 계략이 탁월한 이들도 많았다. 따라서 이때 신법파의 정책들이 추진됨과 함께 원우당인[16]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의 연장선에서 궁 내 부적 사건 등이 엮이면서 맹황후 폐출 사건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먼저 수도 개봉에 있던 상청저상궁 석비는 원우당인으로 지목된 소식이 썼다는 이유로 훼손되고 다시 채경의 글로 교체되었다. 또 원우 연간[17] 동안 전국 각지에 만들어진 비각 기사들도 죄다 없애버렸고 이미 죽은 사마광 등도 공격 대상에 포함되어 관직이 낮춰지고 부관참시될 뻔했으며 《자치통감》 역시 훼멸될 뻔했다. 그러나 이때 사대부들의 반발을 의식하고 있던 재상 장돈이 사마광, 여공저 등의 공적, 묘비, 위패 훼손 등은 안 된다고 건의해 막고, 젊은 철종에게 외부 명사들을 추천해 그들을 조정에 등용하도록 했다. 따라서 사마광 등 죽은 명신들의 부관참시나 관직 폄직 등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고, 《자치통감》의 경우 서문을 송 신종이 써준 관계로[18] 《자치통감》은 살아남았을 수 있었다. 그러나 조정 내에서는 채경, 채변, 증포 등이 정적들을 탄핵해 당쟁은 격화되고 서로의 감정도 상하게 되었다. [19]
이 기간동안 조정에서는 재상 장돈, 증포, 채경, 채변 등이 자신들의 정적들을 원우당인으로 지목해 이들을 탄핵하고 공격했다. 이 결과 엄격한 조사 끝에 구법파 관료 약 700, 800명이 처벌을 받거나 영원히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는 조치를 당했다. 그리고 그 정도가 심하다고 판단된 이들의 경우에는 그 자손들까지 연좌되었다. 따라서 깊숙히 당쟁에 끼어들지 않은 소식, 소철 형제 같은 신하들도 계속 좌천당했고, 구양수의 셋째아들인 구양비의 경우에는 증포와 그의 처남 위태에게 단지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모함을 당해, 노주지주로 좌천 후 귀향조치되고 파직당하는 경우까지 발생했다.[20] 하지만 철종의 친정 시기는 너무 짦았고, 젊은 철종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처럼 건강하지 못했다. 1099년 어린 외아들 조무(趙茂)가 요절하면서 크게 낙심하고 슬퍼하던[21] 젊은 황제는 겨울에 감기를 앓게 된 이후 심한 기침이 끊이지 않았고[22] , 지병이 악화되어 1100년 1월 25세 나이에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2.4. 후계자 문제
예법에 따라 신종의 아들 중에서 다음 황제를 정해야 했고 당시 황실 최고어른인 흠성헌숙황후 상씨가 재상 장돈 등과 함께 건저회의를 주재하여 누가 철종의 후계자가 되어야 할지를 논했다. 정상대로라면 당연히 재상 장돈의 주장처럼 예법상 ''모제(동복 동생) 간왕 조사를 내세워야 한다"는 말이 받아들여진 뒤 손쉽게 처리될 수 있었다. 하지만 회의를 주재하던 흠성헌숙황후 상씨가 "모두 신종의 아들들인데 차별을 받으면 안 된다."라고 말해서 간왕 조사가 제위에 오름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3] . 그리고 차선책이었던 이복동생 중 가장 연장자인 신왕 조필도 눈병이 있어서 안 된다는 이유로 거절되었다. [24]
따라서 회의 흐름은 자연스레 후보자가 단왕 조길[25] 로 압축되었다. 이때 흠성헌숙황후와 그녀를 따르는 대신들[26] 은 '''단왕은 잘생기고 말끔하며 그림도 잘 그리고 시도 잘 쓰고, 생전에 신종께서도 나에게 '이 아이는 오래살 수명과 복된 관상이 있고, 인자하고 효행도 있다'고 하셨다''''는 주장까지 하면서 단왕을 지지했다. 물론 이런 주장에 장돈은 흠성헌숙황후에게 “이분은 행위가 경박하고 온건하며 묵직하지 못합니다.”라며 정치를 해야 되는 인물로 부적합하다고 반대했지만[27] 평소 장돈을 시기해온 증포가[28] “장돈은 저와 상의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흠성헌숙황후를 지지했다(...). 이렇게 송 철종의 유지와 예법상 후계구도는 흠성헌숙황후와 선인성렬황후 사후 선인성렬황후 측근들이 흠성헌숙황후에게 몰려든 상황 속에서 벌어진 궁중 내부의 암투 등이 당쟁과 엮이면서 무시되듯 뒤바뀌게 되었다. 따라서 간왕, 신왕을 제치고 가장 나이가 많음에도 황제와는 어울리지도 않던 단왕 조길이 송 철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게 된다.
그의 무덤인 영태릉은 북송의 황릉들과 함께 금나라 장군 점한과 금나라의 괴뢰국인 제나라의 꼭두각시이자 허수아비 황제인 유예[29] 에 의해 도굴되었다. 점한은 송태조의 영창릉에서 옥대와 보기들을 싹쓸이하는 등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으며, 유예는 철종의 영태릉에서 옥기와 보물들을 약탈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 이때 철종의 시신은 끌려나와 밖에 버려졌는데,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던 남송의 태상사소경 방정석이 이를 보고 통곡하여 인근에 손에서 피가 나도록 땅을 파서 시신을 매장하고 돌아와 송고종에게 이를 알리니 송 고종은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3. 가족 관계
정실부인인 황후로는 소자성헌황후 맹씨와 소회황후 유씨(昭懷皇后 劉氏)가 있었다. 이 중 소자성헌황후와의 사이에서는 복경공주가 있었고, 두번째 황후인 소회황후 유씨(昭懷皇后 劉氏)와의 사이에서는 외아들인 헌민태자 조무가 있었지만 정실부인들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과 아들 모두 요절했다. 그밖에도 다른 후궁들 사이에서도 딸 3명을 더 뒀는데 철종의 자녀 1남 4녀 중 아버지 철종보다 오래 생존한 자녀는 딸 2명 뿐이었다.
소자성헌황후 맹씨는 철종보다 3살 연상으로, 17살이었을 때 선인성렬황후에게 간택되어 궁에 들어와 황후에 책봉되었지만, 자색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남편 철종에게 황후로서 예와 대우는 받아도 사랑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선인성렬황후 사후 원우당인(구법파)들이 조정에서 밀려날 무렵, 맹 황후가 병에 걸린 외동딸 복경공주를 낫게 하기 위해 궁중의 금기사항이자 가법상으로도 금기사항이었던 부적을 쓰는 의식을 한 사건이 첩여 유씨의 모함으로 꼬투리 잡혀서 1099년 폐출되었다[30] . 맹 황후의 친정은 구법파와 끈이 닿아 있었고, 첩여 유씨의 집안은 신법파와 끈이 닿아 있었기에, 맹 황후가 쫓겨난 것은 단순한 궁중 암투의 결과가 아니라 신법파에게 힘을 실어주고 구법파에게 타격을 주려는 철종의 의도도 작용한 결과였다.
이후 맹 황후는 철종의 명에 따라 요화궁이라고 불리는 몇 칸짜리 낡은 집에서 머물며 머리를 깎지 않은 비구니가 되었다가, 남편 철종이 1100년 죽고 시동생인 휘종이 즉위한 이후 1101년 다시 황후의 명예를 회복하고 복귀하게 된다. 그러나 나중에 또 폐출되었다. 그녀는 2번 폐출되고 2번 황실에 복귀한 것과 함께 그 유명한 정강의 변 사건으로 송나라 황실 사람들 중 송고종과 함께 유이하게 황실 사람 중 금나라로 압송될 때 끌려가지 않은 '''새옹지마''' 사례로도 유명하다. 자세한 건 소자성헌황후 맹씨 참조.
맹 황후가 쫓겨난 후, 헌민태자를 낳은 첩여 유씨는 황후가 되었다. 그녀가 바로 소회황후 유씨다. 소회황후는 철종보다 3살 연하였으며 시와 글을 잘 쓰고 외모가 예뻐서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다만 성격이 칼칼했다고 한다. 유씨는 철종이 죽고 휘종이 즉위한 이후 2번째로 맹황후를 내쫓았고 숭은태후로 추앙받았지만, 태후라는 신분을 이용해 정치에 백방으로 관여하려고 했다. 결국 유씨는 이때문에 휘종과 신하들의 불만을 사서 1113년에 죽었다.
4. 여담
- 김용의 소설 천룡팔부의 막바지에 선인성렬황후가 임종을 앞두는 장면에서 등장하여 신법파를 등용하고 요와 전쟁을 꿈꾸는 모습으로 나온다. 철종이 친정을 시작하며 중신들을 물리치자 요의 도종이 기뻐하며 송나라 침공을 계획한다.
- 고려의 제11대 국왕 문종의 넷째 아들이자 순종, 선종, 숙종의 동생인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이 고려 선종 2년인 1085년 4월에 송나라로 비밀리에 유학갔을 당시[31] , 북송의 수도 변경에서 만났던 당시의 황제가 바로 철종이었다. 이때 철종과 의천의 휘가 후(煦)로 같아서 의천은 철종과 만났을 때 피휘(避諱)하여 이름 대신 자(子)인 의천을 주로 사용했다고 한다[32] . 고려 왕자이자 고려 국왕의 친동생이 송나라까지 왔던 만큼 당시 철종은 의천대사를 극진히 예우했고 의천이 명승(名僧) 대덕(大德)을 두루 만나 볼 수 있기를 청하자 철종은 북송 당대의 명승들이 의천과 만나 불교를 논할 수 있도록 모든 편의[33] 를 제공해주었다. 이후 의천은 불법 연구를 활발히 하고 송나라에 절과 교단 등을 세우며 활동했지만 아버지 문종, 형 선종과 마찬가지로 아들의 유학을 걱정하고 반대했던 어머니 인예왕후의 강권 등으로 1086년 6월 강제 귀국 조치되어 고려로 돌아가게 되었다[34] .
5. 둘러보기
[1] 본 연호에서 유래하여, 철종을 원우황제라 통칭하기도 한다.[2] 사후 흠성황후로 추존되었다. [3] 송사 본기 철종 1권[4] 송사 본기 철종 1권에 따르면 당시 신종은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할 정도로 병세가 위중했다고 한다.[5] 신종의 동복동생들은 3명이 있었다. 오영왕(吳榮王) 조호(趙顥), 윤왕(潤王) 조안(趙顔), 익단헌왕(益端獻王) 조군(趙頵). 여기에서 신종의 후계자로 언급된 형제는 오영왕 조호, 익단헌왕 조군이었다.[6] 당시 성인성렬황후는 교서에서 "황자의 성품이 씩씩하고 의젓하며, 배우는 것을 좇음이 영리하다. 스스로 황제에게 약을 먹이고, 손수 불경을 쓰며 황제를 기원했다."고 알렸다. -송사 본기 철종 1권-[7] 송사 본기 철종 1권[8] 이러한 조치는 자연스레 오해를 불러 일으켜서 철종의 생모인 주 덕비가 과민반응하도록 만들었다. 주 덕비는 아들 철종의 수라에 독을 탔을까봐 먼저 기미했고 철종의 동태 역시 살피는 등 신경썼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녀는 자연스레 철종을 훈육하고 손자를 친모 못지 않게 과보호해 온 선인성렬황후, 과거부터 철종의 친모와 사이가 좋지 않던 신종의 정실 흠성헌숙황후 등과 대립각을 세우게 되었다.[9] 물론 개봉부에서 이 조치들을 시행했던 채경처럼 짧은 기간에 실행하라는 명을 따른 관리들도 있었지만 이런 경우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은 반발이 더 심했다.[10] 신종 생전 희녕변법 추진기간 동안 논쟁을 펼친 왕안석과 사마광이 죽은 뒤, 철종 친정기에 접어든 이후부터 신법과 구법의 당쟁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송의 국력은 급속도로 약화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11] 할머니와 대신들의 이런 방식과 조정 분위기는 당연히 사춘기에 접어든 철종을 설득시키기 힘들었다고 한다. 즉위 후 할머니와 스승들에게 ‘사대부를 존중하되 함께 국정을 이끌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아 온 젊은 황제는 자연스레 할머니에 대한 반항심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12] 娘娘. 귀부인을 높여 부르거나 황후 또는 귀비를 뜻하는 말로 여기에서는 선인성렬황후를 높여 부르는 말[13] 물론 여기까지는 어쩔 수 없기도 하다. 신하 입장에서도 수렴청정 정지를 주장하는 말은 먼저 꺼내기에는 곤란하기 때문 당장 명종때 문정왕후가 명종이 20살까지 수렴청정을 했음에도 신하들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가 문정왕후가 먼저 수렴청정 중지를 밝히자 그제서야 찬성의 뜻을 보였다.[14] 이유는 이들이 그동안 선인성렬황후에게 철종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실과 왜곡해서 과장되게 보고하고 태황태후와 황제 사이를 벌어지게끔 음모를 꾸몄기 때문이라고 한다.[15] 그나마 왕안석과 사마광은 사적으로는 서로 존중하는 관계이기라도 했다. 서로 보낸 편지에서는 대처적으로 서로를 '나라를 위한 마음은 같지만 방향이 다른 사람' 취급을 한다.[16] 신법당 사람들이 선인성렬태후 고씨 생전의 원우 연간 섭정기 때 구법파들을 부르는 말[17] 선인성렬태후 섭정 기간이자 구법파의 집권 시기.[18] 당초 신종의 지시가 있기도 했으니 아들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쓰라고 한 것을 훼멸시킨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었을 것이다.[19] 같은 신법당파 내부에서도 탄핵이 벌어졌다. 따라서 ‘황제폐하께서 엄연히 계시는데 재상 장돈을 무서워하는게 문제다’라는 주장이 증포를 통해 나오면서 일련의 사건들의 포문을 연 장돈마저 공격당했다.[20] 구양비는 이후 철종 원부(元符) 말에 다시 조정에 복귀해 이부(吏部), 우사(右司)의 낭중(郎中)에 임명되었다.[21] 철종은 아들이 죽자 헌민태자(獻愍太子)라는 시호를 내렸다.[22] 철종과 마찬가지로 그의 할아버지인 영종 역시 호흡기쪽 문제로 인종연간부터 심화된 국내문제 개혁을 추진하려고 준비하던 중에 일찍 사망했다.[23] 여기에는 신종의 정실 흠성헌숙황후와 철종의 모친 덕비 주씨의 사이가 아주 나빴다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다. 따라서 이런 요인들 때문에 예법과 철종의 유지는 무시되어 간왕 조사가 즉위하지 못하게 되었다. 예법대로 간왕 조사가 즉위하면 덕비 주씨의 아들 2명이 황제가 되고, 흠성헌숙황후 입장에서는 두 번이나 덕비 주씨의 아들이 즉위하면 마치 덕비 주씨가 정비로 여겨진다고 생각한 것이다.[24] 신왕 조필의 눈병(안질)은 상당히 심해서 앞에 있는 사람이 거의 안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즉 거의 맹인과 다름없을 정도로 심각했던 신왕의 이런 결점은 과거 지능이 모자란 지적장애인이나 사이코패스인 황제들보다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25] 고모부인 왕선을 어릴때부터 흠모해왔으며 예술, 시짓기, 회화 그리기, 축첩, 유흥에 능한 왕선과 함께 10대 초반에 어울리며 이미 유흥과 관련해서는 유명했다.[26] 선인성렬황후가 죽자 선인성렬황후를 따르던 관료와 측근들은 흠성헌숙황후 주변으로 몰렸다고 한다. 따라서 철종이 갑자기 요절하면서 벌어진 후계 논의는 구법파와 신법파 간에 벌어진 당쟁이기도 했다.[27] 농담이 아니고 장돈의 우려대로 정말 휘종은 정치하면 안되는 인물이었다. 더욱이 황후의 주장은 개소리중 개소리인 것이 인자함과 효행은 그렇다고 쳐도 잘생기고 말끔하고 그림 잘 그리고 시 잘 쓰는 인물이 좋은 지도자가 된다는 보장이 없다. 그나마 장수는 이해라도 되는 것이 당시 송나라 황제가 5대 영종부터 줄줄이 젊은 나이에 요절했기 때문 이 점에서 보면 당시엔 오래 살 황제는 많은 이들이 바랄만한 요소긴 하다.[28] 증포는 장돈을 추천하면서 내심 장돈이 자신을 추천해주길 바랬지만 장돈이 추천해주지 않아 불만을 품고 사이가 나빠졌다.[29] 북송의 관리로 금나라에 항복했으며 제나라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악비에게 연달아 발려 금나라 본국으로 압송되었으며, 유예의 조카가 뒤를 이었지만 남송과 강화 후에 제나라는 폐지되었다.[30] 이 의식은 철종이 허락을 했으나, 의식 이틀 뒤 복경공주가 죽자 맹 황후는 죽은 딸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불당을 만들고 기도를 올렸고 이는 전에 한 의식과 함께 문제가 되었다. 첩여 유씨가 이를 빌미로 철종에게 '황후가 요승을 불러 황제를 저주한다.'고 모함하자 철종이 불같이 화를 내며 직접 친국을 한 뒤, '황후가 법사를 부려 황제를 저주했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폐출시켰다.[31] 의천은 깊은 공부를 위해 일찍부터 송나라 유학을 가기 원했지만 아버지 문종이 위험한 바닷길로 가야하고 복잡한 국제 정세까지 고려해볼 때 송나라 유학은 안 된다고 해서 강력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따라서 문종과 큰형 순종 생전에는 송나라 유학을 가지 못했던 의천은 비밀리에 두 사람만 데리고 송나라 상선을 타고 가게 되었다. 아버지와 형과 마찬가지로 동생의 유학을 반대했던 선종은 뒤늦게 동생 의천을 찾으러 군사까지 보내 쫓았지만 이미 의천이 멀리 가버린 탓에 데리고 오지 못했다고 한다.[32] 이 당시 의천의 나이는 30살이었고 철종의 나이는 10살이었다.[33] 의천의 입국을 반대해왔던 소식(소동파)이 고려 국왕의 친동생인 의천대사의 개인 가이드 역할을 했다고 한다.[34] 귀국 직후 의천은 형이자 국왕인 선종에게 걸죄표를 올려 국왕의 명을 어기고 송으로 유학간 것을 사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