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자성헌황후 맹씨

 


'''북송의 황후
昭慈聖獻皇后 | 소자성헌황후
'''
'''시호'''
소자성헌황후(昭慈聖獻皇后)
'''별호'''
원우황후(元祐皇后)
''''''
맹씨(孟氏)
'''출생'''
1073년, 명주(洺州)
'''사망'''
1131년
'''재위'''
'''북송의 황후'''
1092년 ~ 1096년
'''남송의 황태후'''
1127년 ~ 1131년
'''부군'''
철종
'''조부'''
맹원(孟元)
'''자녀'''
복경공주(福慶公主)
1. 개요
2. 황후 책봉
3. 첫번째 시련
4. 두번째 시련과 정강의 변
5. 두번째 복귀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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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생지사 새옹지마(人生之事 塞翁之馬)[1]'''
북송의 제7대 황제인 송철종의 첫번째 황후. 보통 원우황후 맹씨(元祐皇后 孟氏)[2] 또는 맹 황후라고도 많이 불린다. 한 사람으로서도, 한 나라의 국모로서도 1번 겪기 힘든 '''황후 폐위를 2번이나 겪고 2번 다시 복귀[3]'''한 독특한 이력과 '''유일하게 당시 북송의 수도 개봉에 있던 황실 사람 중 정강의 변 때 금나라로 압송되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더불어 '''국가 최고의 위기 속에서 송나라의 구심점이 되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2. 황후 책봉


1073년에 북송 명주(洺州) 지방[4]의 명문가 출신 증태위(贈太尉) 맹원(孟元)의 손녀로 태어났다. 17세가 되던 해, 송철종의 할머니 선인성렬황후 고씨에 의해 궁에 들어갔으며, 궁에서 궁중예법과 교육을 받았다. 성품이 온화하고 부드럽고 학식도 풍부했으며 예법상 황후가 가져야 할 품행을 갖추었기에 황실의 어른인 선인성렬황후와 신종의 정실 흠성헌숙황후 상씨 모두에게 사랑을 받았고, 이후 선인성렬황후(선인태후)가 100명의 여인들 중 직접 간택하여 원우7년(1092년)에 황후가 되었다.
하지만 남편인 철종은 원래부터 출중한 외모와 뛰어난 글솜씨, 시짓기를 가진 첩여 유씨[5]를 총애했다. 그리고 자신보다 연상인데다 외모도 평범한 맹황후를 여자로서는 가까이 하지 않고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본래부터 인품을 중요시 여겼던 철종의 할머니 선인태후는 철종을 불러 "이렇게 좋은 아내를 얻기가 쉽지 않다."면서 여러 차례 타일렀지만, 철종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맹황후에게 황후로서의 대우는 했지만 여인으로서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6]. 선인태후는 손자의 이런 태도에 탄식하면서, 맹황후를 두고 "현숙하지만 복이 없구나. 그렇지만 나중에 나라에 화가 생기면 감당할 이가 맹씨일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3. 첫번째 시련


철종과 혼인을 하고 황후가 되었지만 여러 해 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1094년 복경공주를 낳게 되었다. 맹 황후는 복경공주를 극진히 아꼈는데, 소성 음력 9월(1096년) 불과 3살밖에 안 된 딸이 원인 모를 병으로 앓아 눕게 되자 전국에서 좋다는 약은 다 구해서 써보고 유명한 의원들을 불러 치료했음에도 병세에 차도가 없었다. 이에 맹 황후의 언니가 소문을 듣고 도사에게 부적을 써달라고 해서 부적을 가지고 오게 된다. 도사는 이 부적을 황제 앞에서 불로 태워서 그 잿물을 이용하면 효과가 있다고 했는데,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고 있었던 송나라에서 부적과 주술을 사용하는 것은 금기였고 궁중 예법상으로도 금기시되는 일이었다. 그런 의식을 황제 앞에서 하겠다는 건 더 문제가 있는 일이었다.[7] 하지만 맹 황후는 하나밖에 없는 딸을 위해서 이를 무릅쓰고, 마침 딸의 병문안을 위해 온 남편 철종에게 어렵사리 말문을 열어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허락을 구했다.

당시 철종은 맹 황후에게는 무관심했어도 맹황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복경공주는 매우 아꼈기에, 맹 황후가 부적과 주술의 힘을 빌려서라도 딸의 병을 낫게 하려는 것을 이해해주었다. 철종은 맹 황후가 어렵게 하나하나 설명하고 부탁함을 듣고 난 뒤, 부드러운 말투로 '이것은 인지상정이 아니오. 구태여 중궁께서 크게 놀랄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가법과 궁중예법상 어긋나더라도 자신의 앞에서 부적을 태워야하는 주술 의식을 허락하고 당장 집행하라고 명을 내렸다. 하지만 이틀 뒤, 이런 민간요법에도 불구하고 복경공주가 3살의 나이에 죽고 만다. 하나밖에 없는 딸을 잃은 맹 황후는 죽은 복경공주의 안위와 명복을 기리기 위해 불당을 건립하고 기도를 드렸는데, 이게 호시탐탐 황후 자리를 노리던 첩여 유씨에게 빌미를 주고 만다.
출중한 외모를 가졌지만 성격이 악독하고 황후 자리에 욕심이 많았던 유씨는 맹 황후가 불당을 만들고 요승을 불러서 황제를 저주하고 있다고 철종에게 참소했다. 처음 첩여 유씨가 부적을 걸고 넘어졌을 때에만 해도, 철종은 자신도 이미 아는 일이고 허락했던 일이기도 해서 참소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불당에 요승을 불러 기도를 올린다는 이야기까지 나오자 대노하여 즉시 부적과 불당에서 있었던 일련의 사건을 조사케 한다. 철종이 친국하는 가운데 맹 황후 주변의 궁녀들과 환관 수십명이 끌러가 심한 고문을 당했다. 불로 태우고 혀와 팔다리가 잘리는 등 심한 고문을 방하면서도 궁녀들과 환관들은 꿋꿋히 황후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결국 견디다 못한 몇몇 궁인이 거짓자백을 했다. 이 일로 1099년 '황후가 법사를 부려 황제를 저주했다'는 결론이 내려진 뒤, 맹 황후는 폐해지고 궁에서 쫓겨나게 된다.
사실 이 사건은 단순한 궁중 암투로 일어난 게 아니었다. 당시 북송은 철종이 친정을 시작한 이래, 과거 원우연간 선인태후의 섭정 아래 정국을 주도한 구법당(원부당인)과 신법당의 대립이 있었고 맹 황후와 첩여 유씨도 각각 구법파와 신법파에 끈이 닿아 있었다. 게다가 맹황후의 친정은 구법당에 속했고, 역시 구법당을 지지하던 선인태후가 직접 선발하여 간택한 황후이기도 했다. 즉, 부친인 신종의 정책과 유지를 계승한 철종이 할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마침 첩여 유씨가 맹황후의 행동을 문제 삼은 걸 이용해 맹 황후를 쫓아냄으로서 신법파에게 힘을 실어주고 구법파에게 정치적 타격을 입힌 거였다.

4. 두번째 시련과 정강의 변


철종은 맹 황후를 폐한 뒤, 그녀를 요화궁이라고 불리는 몇 칸짜리 낡은 집에서 머물며 머리를 깎지 않은 비구니가 되게 한다. 이때 맹 황후의 법명은 충진(冲眞)이었고 화양교주(華陽敎主), 옥청묘정선사(玉淸妙靜仙師)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첩여 유씨는 철종이 그렇게 기다렸던 첫 아들 헌민태자 조무를 출산하게 된다. 곧 그녀가 새로운 황후에 책봉되게 되는데 바로 소회황후 유씨(昭懷皇后 劉氏)이다. 하지만 유씨가 황후가 된 지 2개월 후에 헌민태자가 갑작스레 죽었고, 곧 이어 아들을 잃고 침통해하던 철종마저 겨울에 감기에 걸려 기침 등으로 고생하다가 1100년 1월 요절하면서, 철종의 이복동생인 단왕 조길이 철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송휘종이다.
시동생인 휘종이 즉위한 후 흠성헌숙황후 상씨가 섭정을 하게 되면서, 철종 생전에 밀려나 있던 일부 구법당 세력이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맹 황후 역시 복권되어 선황 철종의 정실 신분으로 황태후가 되었다. 하지만 1년 후인 1101년 흠성헌숙황후가 사망하자 다시금 휘종이 신법당을 중용하고 원우당사건이 터지면서, 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맹 황후는 1102년에 또 다시 황태후 자리에서 폐출되었다.[8]
다시 궁 밖으로 쫓겨난 맹 황후는 이후 궁으로 다시 들어가지 못했고, 궁 밖에서 철종의 폐후로 25여년을 힘겹게 살게 된다. 그러다가 송흠종 때 북송의 수도인 개봉이 금나라에게 점령되는 정강의 변이 벌어지게 된다. 이때 상황 휘종 부부와 황제 흠종 부부, 많은 황족들이 금나라 연경으로 압송되었는데, 맹 황후는 철종과 휘종에게 폐출되었기에 황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끌려가지 않게 되었다.

5. 두번째 복귀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다


금나라 군대가 물러난 뒤, 장방창(張邦昌)이 괴뢰국 대초의 꼭두각시 황제가 되면서 그에 의해 원우황후로 복권되게 된다. 이 조치는 장방창 본인의 정통성을 위한 것이었지만 그녀는 오히려 친필 편지를 써서 당시 제주로 가있던 송휘종의 아들이자 흠종의 동생 강왕 조구에게 보냈다. 맹 황후의 편지 내용은 강왕 조구한테 송황실의 제위에 오르라는 내용이었고[9], 강왕이 즉위해야 할 명분이 되는 편지이기도 했다. 따라서 강왕 조구는 맹황후에게 받은 친필편지를 천하에 읽고 고한 뒤 송고종으로 즉위하게 된다. 즉 그녀가 친필 서한을 보낸 사건은 정통성과 적법성을 장방창이 아닌 송고종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송황실이 재건하게 해준 사건이었다.
이후 그녀에겐 존호로 융우태후(隆佑太后)가 올려졌고 정통성과 적법성이 부족한 약점을 지닌 고종을 인정하는 역할과 함께 멸망의 위기에 빠진 송나라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러다가 1130년 묘우의 변이 터져 고종이 강제퇴위되고 원의태자 조부가 옹립된 상황에서 수렴청정을 맡기도 했다. 이때 재상 장준이 주동자 묘부, 유언정 등을 제거하고 그녀가 스스로 수렴을 거두면서 고종을 복위시켰다. 이 사건 후에도 맹황후와 고종과의 관계는 여전히 좋았고[10], 그녀는 송황실의 큰어른이자 하나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따라서 그녀는 송태후(宋太后), 융우태후(隆祐太后), 정황태후(正皇太后)로 계속 높여졌다.
1131년 향년 59세의 나이에 사망했는데 소자헌열황후(昭慈獻烈皇后) → 소자성헌황후(昭慈聖獻皇后)가 시호로 내려졌으며 사후 남편인 철종의 위패와 함께 모셔졌다.

6. 둘러보기






[1] 인생의 모든 일은 화가 복되고 복이 화 될 수 있으니 함부로 자기 처지를 비관하거나 낙관하지 말라[2] 철종의 치세 중 전반기인 원우(元祐) 시기에 재위한 황후라는 뜻. 복권 초기엔 원우태후로도 일컬어졌다.[3] 남편 철종에게 1번, 시동생인 휘종에게 1번 황후 자리에서 폐위되었고, 시동생 휘종에게 1번, 시조카 남송 고종에게 1번 복위되었다.[4] 오늘날의 허베이성[5] 철종보다 3살이 어렸고 맹황후보다는 6살이 어렸다.[6] 당시 철종은 할머니가 살아있는 동안 조정회의에서 할머니뿐만 아니라 대신들에게도 자신의 의견이 종종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대신들이 할머니 의견은 따르고 황제의 생각에 대해서는 '폐하께서 아직 어리시고 태황태후마마께서 수렴청정을 하고 계시다' 식으로 잘 따르지 않았던 것에 불만이 있었다고 한다.[7] 특히 타인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한 국가의 국모가, 그것도 유학 교육과 궁중예법, 가법까지 받은 황후가 이런 일은 한다는 것은 부덕(婦德)에 어긋나고 황후 자리에서 탄핵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8] 원부황후(소회황후 유씨)는 이때 채경과 합작하여 원우황후(맹황후)를 내쫓았고 숭은태후가 되었다. 유씨는 휘종의 재위기에 정치에 백방으로 관여하며 야심만만한 모습을 보이다가, 휘종과 신하들의 불만을 사서 결국 1113년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9] '장방창이 (천하를) 찬탈한 종적은 이미 의심할 바가 없으니 마땅히 (강왕은) 서둘러 천자의 자리를 바르게 하고 사직을 다시 일으켜야 하며 망설이는 것은 아니된다'[10] 고종은 맹 황후와 관계가 좋았는데 평소 맹황후가 술을 많이 먹음이 걱정되어 손수 편지로 음주를 줄이셨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