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말생

 


趙末生
(1370~1447)
1. 개요
2. 일대기
3. 사극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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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초상화는 조말생의 초상화라고 전해지지만 복식이 조선 중기 이후의 것이라서 조말생의 초상화가 아니라는 설도 만만치 않다. 설령 조말생이 맞다면 조선 중기 이후 다시 그린 그림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 초기의 문신. 장원급제자. 태종의 사돈.
본관은 양주양주 조씨 문강공파의 중시조이다. 자는 근초(謹初)·평중(平仲), 호는 사곡(社谷)·화산(華山). 시호는 문강(文剛)이다.

2. 일대기


1370년(공민왕 19년) 생이다. 이름이 끝 말(末), 날 생(生)이지만 막내는 아니다. 그만 낳자고 말생이라고 지었다가 하나가 더 생겼던지 막내 이름은 조종생 마칠 종(終)자 이다. 조말생의 바로 윗형은 출가해 스님이 됐다. 고려 때는 승려가 된다는 것이 집안의 영광으로서, 왕실, 문벌귀족 가문에서도 형제 중 1~2명 정도는 승려가 돼 가문의 번성을 빌었다. 혹시 국사(國師) 자리에라도 오르면 큰 권세를 쥘 수 있었다. 조말생은 고려 출생이다.
아버지 조의는 서운관의 정(正,종3품)으로 관직은 높았지만 집안이 권문세족은 아니었다. 서운관은 고려 시대 역법, 천문, 지리 등을 총괄하는 부서로 조선이 건국되고 관상감으로 바뀐다. 조말생은 개성에 살면서 책을 가까이하고 유학 경전들을 탐독했다. 정몽주의 직계 제자인 예문관 대제학 조용(趙庸,진보 조씨)에게 배웠다. 그리고 꿈많던 20살 즈음 고려가 망한다.
1401년(태종 1년) 문과에 장원 급제해 감찰, 헌납, 이조 정랑 등 엘리트 코스를 제대로 밟았으며 이후 지신사(도승지), 형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거치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1418년 조말생은 이조참판으로서 정3품 당상관에 올랐다. 참판직은 태종 5년인 1405년에 신설된 관직으로 현재의 차관에 해당한다. 왕조는 비록 바뀌었지만 아버지의 관직을 이 때 넘었다.
양반은 관직을 갖는 동시에 왕으로부터 품계를 받는다. 관직은 업무 부서와 그 지위를 뜻하고 품계는 양반으로서 명예 등급을 말한다. 조말생을 총애한 태종은 정덕대부 품계를 내려주는데, 정덕대부는 종1품계로서 참판 관직에 넘치는 것이었다. 조말생이 사양했지만 태종은 "원래 정승을 시켜주고 싶은데 그건 천천히 할테니까 사양말라"고 했다고 한다.[1]
태종은 자기 총애에서 끝나지 않고 차세대 주자로서 세종과 짝지워줬다. 아울러 신빈 신씨와 사이에서 낳은 정정옹주(1410)와의 짝으로 조말생의 장남 조선(趙璿,1410)을 사위로 들여 서로 사돈이 됐다. 신빈 신씨는 태종의 총애를 받은 후궁으로 3남 7녀를 낳고도 태종의 병구완을 허락받을 정도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이에 더해 신빈 신씨의 아들과 조말생의 딸이 혼인하여 겹사돈을 맺음으로써 그 권세를 더했다.
세종대왕 즉위 후에도 약 8년여간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명에 다녀왔다.[2] 1424년 스승 조용(趙庸)이 세상을 떠난다. 1428년 권력형 비리에 연루돼 잠시 실각한다. 노비를 받은 대가로 나라 이권을 사적으로 넘겼다는 혐의. 조말생은 법정 한도의 10배 이상의 뇌물을 수뢰해 사형될 위기였다. 삭탈관직은 물론 대간들의 사형 상소가 빗발쳤다.
세종은 일단 조말생을 충청도 회인[3]으로 귀양보냈으나 여론은 가라앉지 않았다.[4] 법대로 교형을 선고하라 요구해도, 혹은 예는 갖춰 죽게 사약을 내려 죽이라는 상소에도, 세종은 선대왕이 아꼈던 신하라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말생을 살리되, 이마에 낙인을 찍으라 청을 올리기도 하고 평생 한양에 들어올 수 없게 하라는 상소에도 세종은 그 모든 상소를 끝끝내 거절했다.
귀양가고 얼마 안 돼 조말생은 바로 사면됐고 고향집에서 2년을 쉬었다. 세종은 1430년에 다시 직첩을 돌려줬다. 대간들은 가만있지 않았다. 언관들이 궁 앞에 멍석을 깔고 전원 사직 시위를 벌였다. 결국 세종은 신하들과 끝없이 평행선을 달리는 논쟁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권도로 행하겠다"(내 마음대로 하겠다)며 권도, 즉 왕도정치가 아니라 패도정치를 하겠다는 의미의 말까지 하며 신하들의 뜻을 꺾어버렸고, 1432년 조말생은 동지중추원사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미 그의 나이 63세였다. 1433년에는 함길도관찰사로 북방에 가 여진족들을 격퇴하기도 했다. 그해 겨울에 병으로 사직해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로도 지중추원사, 예문관 대제학 등을 겸임했으며 3도 도순문사로 충청도나 전라도, 경상도 일대의 축성 작업을 총괄하기도 했다.
조말생도 황희 정승과 같이 장수하여 1439년 궤장[5]을 하사받았고 70이 넘은 고령의 고위관료들이 들어가는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1442년 숭록대부가 되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영화로운 인생을 산 반면, 높아진 인망이나 위신을 이용해 자신의 오점인 뇌물 사건에 대해 자신이 무죄인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세종은 끝내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다만 이 사건으로 인한 부당한 몇 가지 대우[6]를 해소해 준 것 정도로만 끝냈다. 조말생의 행정능력과 수완은[7] 높이 사서 살려주었고 중용했지만 그의 부패함은 묵과하지 않았던 세종의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조정에서 꽤 오래 일한 신하인데도 끝내 정승이 되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뇌물 사건의 타격이 컸다.[8]
만년인 세종 26년(1444년) 무렵부터 나이가 들어서 지속적으로 세종에게 사직하겠다는 청을 올렸으나 세종은 이 또한 들어주지 않았다. 실록을 보면 조말생의 사직 기록은 이렇다.
  • 세종 6년 1월 4일 병조 판서 조말생이 칭병 사직의 상서문을 올리다
  • 세종 6년 4월 25일 병조 판서 조말생이 사직을 청하는 전문을 올렸으나, 윤허하지 아니하다.
  • 세종 7년 10월 5일 병조 판서 조말생이 사직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다.
  • 세종 15년 11월 17일 함길도 관찰사 조말생이 병으로 사직하기를 빌었으나 허락하지 않다
  • 세종 19년 9월 4일 지중추원사 조말생이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다
  • 세종 20년 10월 27일 예문 대제학 조말생이 사직을 청하다
  • 세종 22년 8월 10일 판중추원사 조말생이 하직하다
  • 세종 23년 10월 27일 예문관 대제학 조말생이 사직을 청하다
  • 세종 24년 6월 23일 예문관 대제학 조말생이 파직을 청하다
  • 세종 26년 12월 14일 판중추원사 조말생이 사직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다
  • 세종 28년 5월 11일 영중추원사 조말생이 사직코자 상서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다
  • 세종 28년 11월 28일 영중추원사 조말생이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상서하였다
  • 세종 116권 29년 4월 27일 영중추원사 조말생의 졸기(卒記)[9]

이렇게 사직 상소를 끈질기게 올렸지만 전부 거절당하고 1447년 4월에 사망했다.[10] 향년 78세. 다만 단순히 죽기 전까지 부려먹은 것이 아니고, 정치적인 보호를 위한 쇼맨쉽에 가깝다. 군대를 관리하는 병조판서라는 자리는 본래 한 사람이 오래 머무는 자리가 아니다. 언제나 군사 쿠데타를 일으킬 능력이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취임하고 이임하기까지의 기간이 매우 짧은 관직이다. 때문에 조말생은 주변의 눈치를 피하기 위하여, '자신은 관직에서 내려오고 싶지만, 왕께서 불허하신다.' 라는 변명을 만든 것이다. 세종이 아무리 능력있는 신하를 오래 등용한다 해도, '''절대 의지가 없는 신하는 등용하지 않았다.''' 때문에 죽기 직전까지 부려먹혔다는 의견은 이러한 과정을 오해한 것이다. 후에 문강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문(文)은 학문에 부지런함을 뜻하고 강(剛)은 지난 오점을 고친 것을 뜻하는 의미로 내린 시호라고 한다. 세종실록의 조말생의 졸기에서는 기개 있고 도량이 크며 일처리 방식이 너그럽고 후덕했지만 뇌물 사건의 오점이 상당히 커서 정승이 되지는 못했다는 평을 남겼다.

3. 사극


세종 대에 워낙 쟁쟁한 신하들이 많아서 당시 고위 관료 중 한 사람이었음에도 대중적 인지도가 그렇게 높은 인물은 아니다.
용의 눈물에선 과거에 급제한 젊은 시절부터 등장해 태종의 총신 중 한 명으로 가끔 얼굴을 비친다. 첫 등장 때 태종이 참관하는 가운데 권근과 박석명 앞에서 면접을 보는데, 이 때 극중 시점이 태종이 즉위한지 얼마 안 되어 태조 이성계가 함흥에 가 있는 시점이었다. 그런데 태종의 면전에서 '빨리 태상왕 전하를 모셔와야 왕실의 위엄을 살릴 수 있다'고 주장해 신하들을 식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태종은 그냥 조용히 웃고 면접을 계속하라고만 할 뿐이었다.[11] 이후 무난하게 관직생활을 했으나 세종 즉위후 심온을 역모로 몰아 억울하게 죽일 때 후환을 두려워해 유정현, 박은 등과 함께 중전을 폐비시켜 목숨을 보전하려 하는 등 소인배 같은 모습을 보여주며 결국 열이 받을대로 받은 세종에게 제대로 한 소리 듣고만다.[12] 과거에 막 급제한 풋내기 시절부터 조말생을 봐온 태종은 많이 컸구만 하며 혀를 끌끌찼다. 배역은 손종범이 맡았다.
대왕 세종에서는 야인시대의 최동열 기자, 불멸의 이순신의 윤두수를 맡았던 정동환이 배역을 맡았는데, 처음에는 태종의 비서 + 박은의 측근 정도의 비중이었으나, 극이 진행되며 그 두 사람의 능력을 보고 배웠는지 일순간 폭풍성장하여 박은을 쳐내고, 상왕인 태종의 병권까지 회수하며 뒷통수를 거하게 때리는 대정객으로 각성한다. 정동환의 느글느글한 말투가 일품이다. 이후 세종의 가장 큰 정적으로 활동하는데, 그야말로 세종 즉위 후의 메인 빌런. 후일 천문기기와 장영실 등용 건으로 세종과 집현전을 구석에까지 몰아넣었으나, 전날 자신이 그런 것처럼 이번에는 자신이 집현전에 심어놓은 첩자인 김문의 배신으로 역사에서의 뇌물 사건이 터지며 되려 자신이 궁지에 몰린다. 처음엔 세종이 봐줘서 넘어가서 잠시 숙이지만 이후엔 도성에 내려온 북삼도 백성들을 선동하여 화재를 일으켜 민심을 악화시킨 뒤 경녕군을 옹립하려고 하지만 결국 자신이 배후임이 밝혀지고 사형이 10번 구형 가능한 수준의 뇌물 수수가 밝혀진다. 처음 뇌물 수수에 걸렸을 때는 세종이 그의 능력을 사서 넘어갔지만 두 번째 장죄가 드러났을 때는 세종조차 "그대는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인사냐"며 경악할 정도. 하지만 숙청되지는 않고 이후 세종에게 북방 정벌을 위해 병조판서로 재등용된 뒤 마지막회까지도 모습을 비춘다. 후반부에서는 왕진이 조말생에게 "그대의 충성심을 믿는다."라고 하는데, 이어서 하는 말이 "조선 군왕에 대한 그대의 충성심을 믿는다."라고 할 정도로 변한 것으로 나온다. 또한 세종의 심복인 윤회의 건강을 생각하여 세종의 문자 창제 의도를 눈치채고도 이를 세종의 병환으로 돌려 중신들의 외혹을 무마시키고는, 윤회에겐 "네 몸이나 챙기게 이 멍청아"라면서 챙겨주는 모습을 보인다.
극중에선 막강한 정치적 공작능력을 군부에도 발휘하여 병조판서가 되자마자 친세종 성향의 무장들을 제외한 모든 군부의 수장들을 포섭하여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버렸으며, 무려 태종이 비밀리에 군령으로 조말생을 죽이려했음에도 군부의 집단항명을 이끌어내어 살아남고 오히려 상왕 태종의 군권을 빼앗을 정도이다.[13] 또한 무술이나 전술지휘에 능하지는 않지만 인사기용과 업무지시 능력이 탁월하고, 전략적 식견이 뛰어난데다 적국관련 정보수집력과 정세파악력은 가히 독보적이며 침투공작에도 능해서 오밤중에 자기 집에서 자고 있던 여진족 오도리부 족장 동맹가(먼터무) 부자를 순식간에 납치해와서 한방에 오도리부의 공세를 차단해버리기까지 한다.
  • 용비어천가 시리즈
여말선초의 시기를 다룬 육룡이 나르샤와 조선 초기를 다룬 뿌리깊은 나무에서 등장한다.
작중 행보는 조말생(뿌리깊은 나무) 항목 참조.
이영석이 연기한다.
배우 허준호가 맡았다. 중반의 어가 사건 이후부터 등장하는데 거의 반 은퇴한 상태였지만 명나라와 작당하고 자기들끼리 하려는 신하들을 두고 보지 못한 세종의 계획을 받고 실행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작중에 등장하는 고위 신료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세종 편이었던 인물로 같은 고위급이었던 황희[14]와 대립하거나 병부에 있던 인물 답게 카리스마 있게 행동하기도 한다.
[1] 세종 29년 4월 27일 무오 2번째 기사. 조말생의 졸기[2] 명나라가 조선 태조를 곤란하게 하려고 남의 족보를 꼬아 기록한 것을 바로잡으러 갔으나 명나라는 꿈쩍하지 않았다.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라고 남의 족보를 손댄 것. 이 문제를 종계변무라고 하는데 200년 가까이 지난 선조 때에야 바로 잡힌다.[3] 현재 충청북도 보은군 회인면[4] 특히 꼬장꼬장 하기로 악명(?)이 드높았던 허조가 앞장서서 조말생을 죽여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다시 말하지만, 법에서 정한 수치에서 10배나 넘는 양의 뇌물을 받은 조말생의 혐의를 당시 법으로 결론을 내보면 사형 뿐이었다.[5] 나라에 공이 많은 원로들에게 주는 지팡이와 의자.[6] 조말생의 막내아들 '조근'이 과거에 합격해서 합격자 등록을 위해 예문관에 갔다가 한참을 기다린 후, 정확히는 이틀 뒤에나 합격자 등록이 이루어진 일이 발생한다. 이유는 아버지 조말생의 전과기록 때문이었다. 재밌는 사실은 조말생은 당시 예문관의 수장인 대제학 직위에 있었다. 즉, 자기 부하들이 상관인 자신의 전과기록 때문에 아들의 합격자 등록을 지연시킨 것이다. 당시 위세를 회복했던 조말생은 '부하 관리들이 망령되게 상관인 제 잘못을 논해 제 아들까지 그 피해를 입게 되었고, 부서의 수장을 기만하였으니 무슨 낯으로 같은 부서에서 상하예의를 차리며 직무를 수행하겠습니까? 신을 해임시켜주시길 바랍니다' 라면서 세종에게 자신의 해임을 요청하는데, 세종은 합격자 등록에 관련된 인물들을 처벌하는 정도로 끝냈다.[7] 세종 집권기에 꼭 필요했던 국방관련 능력으로 추정. 조말생은 8년간 병조판서로 재직했으며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시기에 행해진 조선군의 대마도 정벌 당시에도 병조를 담당하고 있었다.[8]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런 비리 기록들은 실록에 기록되어 역사에 남게 된다. 조선의 왕이나 신하들은 후세에 오명을 남기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조말생이 세종에게 탄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던 것.[9] 해당 인물이 사망했을 때 그의 행적과 평판 등을 종합해서 평한 글[10] 마지막 상소를 올린 건 죽기 몇 개월 전으로 내용은 풍질에 걸려서 오늘 내일 할 것 같을 정도로 힘드니 제발 사직시켜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쯤 되면 잔인한 수준...[11] 이때 문과 장원급제가 조말생, 무과 장원급제가 이징옥이었다. 그리고 과거가 끝난 후 벌어진 연회자리에서 이성계가 태종이 보낸 차사를 쏘아죽였다는 소식이 전해진다.[12] 용의 눈물 스트리밍을 통해 이 모습을 본 네티즌들은 '저러니 세종이 죽을 때까지 부려먹지.'라는 드립을 친다.[13] 다만 이는 태종이 병조에 박아둔 최측근 강상인이 심온 사건으로 태종 본인에게 처형당하며 태종과 군부와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탓도 있다.[14] 영의정으로만 언급되지만 시기 상으로 황희일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