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온

 





'''조선 세종의 장인 | 소헌왕후의 부친'''
'''청천부원군 심온
靑川府院君 沈溫'''

'''군호'''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시호'''
안효(安孝)
'''품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본관'''
청송(靑松)[1]
'''이름'''
온(溫)
''''''
중옥(仲玉)
'''생부'''
심덕부
'''생모'''
인천 문씨(仁川 門氏)[2]
'''부인'''
삼한국대부인 순흥 안씨(順興 安氏)
'''자녀'''
5남 5녀
'''묘소'''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
'''생몰
기간
'''
'''음력'''
을묘년 ~ 무술년 12월 23일
'''양력'''
1375년 ~ 1419년 1월 18일
1. 소개
2. 사돈에 의한 억울한 죽음
3. 죽음 직후
4. 사후
5. 대중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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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심덕부의 다섯째 아들로 세종장인이다. 태종외척 숙청 작업의 희생자.
세종의 외삼촌 민무휼의 사돈이기도 하다. 아버지 심덕부는 조선 개국 공신으로 고려 말 최무선과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웠고 한양의 궁전과 종묘 건설 총책임자였다.

2. 사돈에 의한 억울한 죽음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나고 사위인 충녕대군이 왕이 되자 심온은 영의정이 되었다. 그렇잖아도 태종은 외척이라면 무조건 의심하고 경계했는데, 마침 심온이 명나라 사신으로 가게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심온을 전송했다는 말을 듣고 심온의 세력이 커지기 전에 죽일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심온이 조선을 떠나있는 동안 심온의 동생을 강상인의 옥에 연루시켰고, 심온 역시 연좌제로 연루시켰다. 결국 심온은 압록강을 건너 귀국하자마자 체포되어 서울에서 조사를 받았고 결국 강상인과의 연관성을 실토하고[3][4] 하루 뒤 사사되었다.
이때 태종의 뜻을 받들어 심온 숙청 작업을 맡았던 사람이 심온과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박은이었다.[5] 이 때문에 심온이 죽기 직전 자손들에게 '다시는 박씨 집안과 혼인하지 마라!'고 말했다는 야사가 있다.[6]
심온은 태종이 승하한 후에도 복권되지 못하다가 외손자인 문종이 즉위한 후에야 겨우 복권된다. 세종도 장인인 심온이 억울하다는 건 알았지만 심온이 결백했다고 밝히고 복권시킬 경우 자기 아버지 태종이 죄없는 사람을 죽였다고 인정하는 결과가 되어서, 국왕으로서의 정치적 부담과 왕실의 위엄 때문에 손을 못 대었던 것으로 보인다.[7] 문종도 직접적으로 심온이 억울하다고 말한 게 아니라 내가 굳이 관직을 주려는 게 아니라 세종의 영릉 비문에는 소헌왕후의 아버지인 심온의 이름도 올라야 하는데, 한번 새기면 고치지도 못하니 관직이 없어선 안 된다면서 운을 띄웠다. 물론 이 때쯤 되면 왕이 외할아버지 복권한다는 데 반대할 신하는 없어서 문제없이 처리되었지만. 그나마 심온의 아내와 자식들은 죽지 않고[8] 변방의 관노로 전락했거나 관로가 막혔다가, 태종이 죽은 후 이직과 황희의 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을 빌려 세종의 명령으로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9] 심온의 딸들 또한 별 탈 없이 당대의 내로라하는 사대부 집안과 혼인하였으며, 변방의 노비로 있던 시기에도 물리적으로 험한 대우를 받았다고 보긴 어렵다[10]. 성종대의 중신 노사신과 세조, 성종 대 사시찬요, 금양잡록, 고사관수도 동을 남긴 강희안, 강희맹 형제가 심온의 외손자이며 또다른 심온의 외손자인 박중선의 딸들은 월산대군제안대군의 부인, 그리고 중종장경왕후의 생모이다.

3. 죽음 직후


이때 역적의 딸이라 하며 소헌왕후를 폐비시켜야 한다고 하였으나 세종의 항의와 아들을 이미 3명이나 두었다하여 왕비의 자리를 지켰다. 태종 입장에서는 이미 심씨 가문의 숙청이 종료되었고 소헌왕후가 다른 외척들처럼 야심을 내보이거나 하는 행위를 하지 않아 굳이 중전까지 쫓아낼 필요성을 가지진 않은 듯하다.[11] 무엇보다 '''숙청의 목적이 왕비 집안 견제였는데 새 왕비를 들이면 그 집안도 또 잡아야 했다'''. 그러면 또 폐비하고 또 숙청하고 악순환이 되니 왕비를 건드는 건 태종 입장에서는 피하고 싶은 경우다. 게다가 소헌왕후를 폐출하고 새 왕비를 들여서 그 왕비가 적자를 낳게 되면, 소헌왕후의 아들들의 정통성 문제가 꼬여버린다. 그렇지 않아도 왕위의 정통성 문제로 인해 이미 태종 본인이 일으킨 1차, 2차 왕자의 난이란 피바람이 있었다. 적장자 세습이란 원칙을 어떻게든 확립하려 했던 태종으로선 이런 모험을 또 할 수가 없었다.

4. 사후


태종이 죽은 이후 세종은 심온의 죽음에 대해 재수사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종은 심온 사건을 주도한 유정현을 따로 불러 좌의정으로 임명한 후 국가 중대사마다 그의 의견을 참고했다.[12] 소헌왕후는 그런 세종의 태도에 아무런 언급이 없으나 이후에 유달리 불교에 매달렸다고 한다.[13]
심온의 가족들, 즉 소헌왕후의 친정 가족들은 이후 태종이 죽고 어느 정도 시간이 좀 나서야 복권이 될 수 있었지만, 심온은 복권되지 못했고 이후 심온의 외손자인 문종이 왕에 오르고 나서야 이전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었다. 아들인 세종 입장에서는 부왕의 결정을 바로 뒤집는 게 쉽지 않은 일이지만, 손자인 문종에게는 그런 부담이 훨씬 덜하기 때문이다.
아들들은 살아남았지만 세종 때는 연좌로 벼슬을 못하다가, 문종 때 심회, 심결이 관직을 받고[14] 세조에게 각별히 대우받아 심회는 영의정, 심결은 영중추부사 등을 역임한다. 그런데 심회는 성종 때 폐비 윤씨의 일에 반대 안했다는 이유로 갑자사화부관참시 당했다.
여담으로 성종 - 연산군 시기의 대신인 노사신은 그의 외손자이다. 노사신의 어머니인 심씨는 심온의 딸이다.

5. 대중 매체


사극 용의 눈물대왕 세종 등에 등장한다.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정하완이 맡았다. 태종 치세 초부터 앞날이 기대되는 인재 중 하나로서 하륜으로부터 기대를 받거나 황희가 태종에게 쓸 만한 인재들 가운데 하나로 천거하는 등 꾸준히 등장하나 중요한 조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사위 충녕대군이 세자의 물망에 오른 이후부터. 태종이 외척이라면 일단 경계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충녕이 세자가 되자 기뻐하는 주변인들과 달리 크게 걱정하며, 아니나 다를까 세종이 즉위하면서 영의정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는데 그 사이에 상왕인 태종이 만들어 놓은 함정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된다.
결국 명나라에서 귀국하자마자 끌려가 국문을 당한다. 딸인 소헌왕후는 이 소식을 듣고 실신했다가 대비이자 시어머니인 원경왕후에게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며, 이에 원경왕후는 친정 식구가 멸문지화 당한 한을 며느리에게 대물림할 수 없다며 태종에게 선처를 호소하지만 무시당한다. 세종도 장인인 심온이 억울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실권이 아버지 태종에게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고 죄책감과 자괴감에 시달리는 등 난리도 아닌 상황.
모진 심문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했지만, 태종이 심복인 내금위장을 몰래 감옥으로 보내 심온이 죽어야만 모든 게 끝난다는 걸 암시하자 결국 더이상은 사람을 죽이지 말 것과 중전인 딸의 신분을 보장해 달라는 것을 조건으로 죄를 시인하고 죽음을 맞는다. 민씨 형제와 달리 권력을 남용한 적도 없고 오히려 조용히 살려고 노력했지만, 정치 9단 태종이 작정하고 죽이려 했으니 도저히 살아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는 태종의 음모를 실행하는 데 앞장선 박은에게 원한을 품어 후손에게 "박씨와는 혼인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심온과 박은이 오랫동안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묘사되었기에[15] 심온의 배신감이 절절하게 와닿는다. 심온은 평소 박은을 뛰어난 학자로 높이 평가하며 사석에서 나보다 박은 대감이 영상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말하기도 했고, 명으로 떠나기 전 배웅 나온 박은에게 조정을 잘 부탁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박은도 심온에게 밀려 영의정이 되지 못한 걸 내심 고까워하긴 했으나 무고를 할 정도로 미워하진 않았기에 심온을 고문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내비친다. 하지만 태종에 의해 외척 제거의 선봉에 세워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생각에 살 길을 찾다 소헌왕후의 폐비까지 주장하게 된다.
심온이 죽은 후 그의 딸이자 중전인 소헌왕후가 훗날 복수할까 봐 두려워한 대신들은 태종에게 소헌왕후도 폐위하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강력한 왕권에 집착해 처가와 외가를 쓸어버린 태종조차 이제는 지쳐서 "지금 중전을 폐하면 또 새로 중전을 들여야 하고, 그럼 그 중전의 외척도 똑같이 멸해야 할 텐데, 내가 얼마나 더 외척을 도륙내야 겠느냐!" 하며 역정을 내고 며느리인 소헌왕후만은 건드리지 않는다. 당연한 게, 왜 심온을 죽였는지를 생각하면 소헌왕후를 폐한다는 것은 아예 중전을 두지 않을 것이 아니라면야 지금까지 해온 짓을 수포로 돌리는 짓일 뿐이다.
대왕 세종에서도 비슷한 처지로, 여기서는 배우 최상훈이 연기한다. 사위인 충녕대군에게 좋은 스승 역할을 하며, 대놓고 야심을 품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정치가로서의 포부나 수싸움도 제법 나타낸다. 작중 왕세자인 양녕대군이 결정적으로 몰락하는 어리 스캔들과 여진 정벌의 기도를 밝혀 버리는 인물도 바로 심온이며, 세종에게 양위하기로 결심한 태종과 독대하여 병권까지 세종에게 맡기기를 주청하여 태종의 눈 밖에 난다.
이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사이에 무고를 당하는 것은 용의 눈물에서의 모습과 같으며, 극에서 원경왕후의 라이벌이었던 효빈 김씨마저 이 일은 너무하다며 심온을 구할 방법이 정말 없느냐고 원경왕후에게 한탄할 지경.
영의정이 된 후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 조선으로 귀국하기 직전 옥사가 터졌다는 걸 알게 되자, 최만리 등은 명나라 관료들과 접촉해서 차라리 명나라로 심온을 망명시키려 한다. 하지만 심온은 '일국의 대신이 누명을 쓰고 외국으로 도망가면 그 또한 국가 망신'이라는 주장을 하며 순순히 조선으로 들어와 죽임을 당한다. 당시 접촉했던 명나라 환관인 황엄은 '조선의 진정한 충신'이라며 감탄했을 지경.
뿌리깊은 나무 1화에서도 등장하는데 행보는 똑같다. 한인수가 연기. 여기서는 세종이 심온을 살리려고 귀국하지 말고 명나라로 피신해 있으라는 밀지를 써서 믿을만한 생각시에게 들려보내 심온의 집사장에게 전하라고 밀명을 내렸는데 막상 심온의 집은 의금부에서 접수한 상태였고 마침 몸을 피해 있던 심온의 노비 중 하나인 석삼과 그 아들인 똘복이와 접선하게 된다. 똘복이는 의남매인 담이에게 밀지의 내용이 맞는지 확인했지만 글자를 자세히 몰랐던 담이는 전하가 쓰신 내용 맞다고 둘러댔으며 그 밀지 전달을 석삼이 자진하여 맡아 의주로 달려가 심온에게 밀지를 전달한다. 그러나 사실 그 생각시는 심온 숙청파인 조말생에게 포섭된 상태로 세종의 밀지는 똘복이와 만나기 전에 이미 바꿔치기되어 있었으며[16] 석삼이 밀지를 전달하는 장면을 금부도사가 포착하여 석삼은 그자리에서 치명타를 입고 같이 끌려온 심온은 세종의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사사를 선택했으며 죽기 전에 똘복이에게 전하는 석삼의 유서를 대신 써 주었다.
심온과는 상관이 없지만, 오성X한음에서 청송 심씨와 반남 박씨 사이에서 벌어진 비극이 담긴 에피소드가 나온다.
[1] 시조 심홍부의 현손으로, 청송 심씨 안효공파의 파조이다.[2] ‘文’씨가 아니다.[3] 사실 심온은 관련이 전혀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심온이 떠나자마자 태종이 다시 강상인을 붙잡아 조사했고 강상인의 입에서 심온이란 이름이 나올때까지 고문해댔다. 그러고 나서 심온이 귀국하자마자 고문해댔는데 심온도 자기가 억울한 건 사실인지라 하루도 안 되는 사이 곤장을 세 번 맞고 압슬형도 두 번을 받으면서도 실토하지 않았지만 수사책임자 역할을 맡은 유정현이 "당신쯤 되는 지위에 있는 분이 이런 고문을 당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소? 실토하지 않고 배겨내겠습니까?" 라는 뉘앙스의 말을 하자 이게 무슨 상황인지 깨달은 심온은 결국 태종이 원하는 대답을 내놓았다.[4] 이게 이렇게 엮을 수 있었던 것은 태종이 양위하고나서도 軍國大事를 처리하고 있었고, 심온의 동생 심정이 의흥삼군부 중군 동지총제로 고위급 군 지휘관에 있었다. 거기다가 이 심온의 아비 심덕부가 중흥9공신 중 하나인 것은 제외하고서도, 심온의 다른 동생 심종이 이성계와 신의왕후의 딸 경선공주에 부마이자, 무인정사 때에 정사2등신이였다. 이외에 심온의 큰형 심인봉도 의흥삼군부 도총제로 고위급 지휘관에 있었으니, 이방원이 큰 문제라고 여기고도 남았을 정도였다.(다만 심정이 심온의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된 것과는 다르게 형 인봉은 그렇지 않을 것봐서 세종즉위년에 도총제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또한 심온 자신도 민무휼과 사돈지간을 맺었다. 민무휼과 심온 모두 사돈지간이었는데 끝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5] 심온이 이조판서 시절 자파 인사 위주로 기용한다고 했으며 영의정이 되었을 때는 실권이 없다고 투덜거린다고 했다. 이 박은의 경우 당시 좌의정이었다.[6] 실제로 박은이 심온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을 뿐 아니라 아예 심온의 딸인 소헌왕후까지 폐위할 것을 주장했다. 그야말로 견원지간.[7] 덧붙여 세종은 아버지인 태종을 진심으로 존경했을 뿐 아니라 대단한 효자였다. 이러니 뭐... 게다가 심온을 복권시킬 시 정치적 후폭풍이 불어닥치는건 당연한 일인데 심온을 억울하게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들이 아직 살아있는 때라서 이들까지 갈아버려야 했는데 정치보복은 세종의 정치 스타일과 맞지 않았다. 그리고 효자/불효자 같은 개인적 성격을 따지지 않더라도, 부왕이 한일을 바로 뒤집는것은 왕조시대에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자체로 국왕의 권위에 손상이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3~4세대가 지나고 나서야 복권된다. 청나라의 중원 통일을 주도한,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역시 순치제의 증손자인 건륭제 시기에나 복권될 정도. 보통 이 정도의 시간차를 두고 복권시켰다.[8] 어차피 역모 사건이 벌어져도 여자들은 사형은 당하지 않지만, 아들들까지 처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심온의 숙청이 외척 경계에 의한 것임을 잘 알 수 있다. 정말로 반역을 꿈꿨다면 아들을 살려둘리가 없었기 때문.[9] 그마저도 오해를 살까봐 대언(=승지)들을 불러서 "선왕께서 관노로 삼는건 원치 않아 했는데 유정현이 강하게 주장해서 그렇게 된 거고 그 이후에도 논의가 있긴 했는데 선왕께서 세상을 뜨시는 바람에 못했던 일이다." 라는 말을 했다.[10] 세종실록에는 세종이 심온의 일족이 노비가 되었던 일을 거론하면서 '일단 천인으로 만들되 천인의 일은 시키지 말 것이며, 뒷날 이를 고치도록 하라' 라는 태종의 지시를 언급한다. 즉 험한 대우를 받았다 보기 어려운 것이 아니고, 아예 그런 대우를 받았던 적이 없다. 용의 눈물에서는 심온의 아내가 노비 신세가 되자 노비들이 들고일어나 비싸보이는 옷을 빼앗으려고 했으나 관군이 이를 꾸짖으며 심온의 아내를 대우해주는 모습이 나온다.[11]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태종이 박은을 흘겨보며 '벌써 떡두꺼비같은 '''아들을 셋이나 낳았고 투기도 모르고 후덕한 며느리'''를 내가 왜 폐하겠는가? 내가 심온을 친건 왕비를 내쫓기 위해서가 아니라 외척의 힘을 꺾어두려는 것임을 아직도 모르겠는가? 끌끌~' 이라는 장면을 넣어 이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아주 간략하게 보여주었다. 그 앞 장면에서 "이미 시집왔으니 그 아비의 죄에 연계시킬 수 없다.", "다시 말하지 말라. 내가 공비(소헌왕후)에게 밥을 먹으라 했고 '''염려하지 말라 했다.'''" 라는 말도 넣어서 이것이 결코 소헌왕후를 타겟으로 한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12] 함께 심온 사건을 주도하고 소헌왕후 심씨를 폐비시킬 것을 주장한 박은은 태종이 죽기 하루 전 죽었는데 사후 세종에게 "아첨하는 신하" 라며 까였다. 아무래도 심온 사건 때 보여준 태도에 적잖이 기분 나빴던 모양[13] 조선의 국가 정책이 숭유억불이기는 하지만 이는 불교의 정치적 영향력을 줄인다는 것이지, 아예 불교의 씨를 말리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태종도 태조가 중병에 걸렸을 때 승려들을 불러다 기도를 올린 적이 있고 세종도 말년에 불교에 기울었으며, 세조는 대군 시절부터 불경을 간행했다. 이러니 왕실 여성이 불교를 믿든 안 믿든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다.[14] 심온의 장남 심준은 문종 즉위 전에 죽어 벼슬을 못 받았지만 그 아들 심미가 벼슬을 받았다[15] 상술했듯이 하륜이나 황희로부터 천거를 받는데, 두 사람만 따로 묶은 것은 아니고 유정현이나 다른 인물들도 함께 거론되나 언제나 박은과 함께 언급되었다. 또 국문을 받을 당시 심온은 유정현에게는 호놈을 하며 반말을 했지만, 박은에게는 '좌상 대감' 이라 부르며 하오체를 썼다.[16] 바꿔치기된 밀지에는 '''군사를 일으켜 조정을 장악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상태로 군관이 들이닥치면 그야말로 빼도박도 못하는 역모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