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헌왕후

 




'''조선 제4대 왕비
소헌왕후 | 昭憲王后
'''
존호 · 휘호 · 시호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5px -11px"선인제성소헌왕후
(宣仁齊聖昭憲王后)
<colbgcolor=#bf1400> '''휘호'''
선인제성(宣仁齊聖)
'''시호'''
(昭憲王后)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출생'''
1395년 10월 12일 (음력 9월 28일)
조선 경기도 양주 사저
'''사망'''
1446년 4월 19일 (음력 3월 24일)
(향년 50세)
조선 한성부 수양대군 사저
'''능묘'''
영릉(英陵)
'''재위'''
'''조선 왕세자빈'''
1418년 7월 6일 ~ 9월 9일
(음력 1418년 6월 3일 ~ 8월 10일)
'''조선 왕비'''

1418년 9월 9일 ~ 1446년 4월 19일
(음력 1418년 8월 10일 ~ 1446년 3월 24일)
(27년 7개월 10일 / 10,08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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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본관'''
청송(靑松)
'''봉작'''
경빈(敬嬪) → 공비(恭妃)
'''부모'''
부친 청천부원군 심온
모친 삼한국대부인 안씨
'''형제'''
5남 5녀 중 첫째[22]
'''부군'''
세종
'''자녀'''
8남 2녀
'''종교'''
불교

1. 소개
2. 일생
2.1. 충녕대군과의 혼인
2.2. 왕비가 되다
2.3. 시아버지에 의해 친정이 숙청되다
2.4. 그 이후
3. 평가
4. 여담
5.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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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조선의 제4대 왕인 세종대왕의 왕비. 문종세조(수양대군), 안평대군등 세종대왕의 8남,2녀의 어머니이자, 단종, 예종의 할머니이다. 본관은 청송 심씨로 개국공신 심덕부의 손녀이며, 청천부원군 심온의 딸이다. 태조의 딸 경선공주에게 시조카가 된다.[1]

2. 일생



2.1. 충녕대군과의 혼인


세종보다는 2살 연상으로, 1408년 태종의 3남 충녕대군과 혼인하여 경숙옹주(敬淑翁主)에 봉해졌다. 태종의 여동생인 경선공주[2]가 소헌왕후의 숙모인데, 경선공주가 충녕군의 배필로 추천했다고 한다.

2.2. 왕비가 되다


이후 1417년, 경숙옹주에서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다시 책봉되었다.
당시 세자이던 양녕대군망나니짓이 절정에 달하자, 시아버지인 태종이 양녕대군을 내쫓고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았다. 덩달아 심씨도 세자빈이 되어서 경빈(敬嬪)으로 봉해졌고 곧 왕비가 되었다.
본래 세종대왕이 즉위했을 때는 세종이 직접 '검비'(儉妃)라고 호칭을 지어 주었으나, 시아버지 태종은 발음이 좋지 않다는 이유 로 '공비'(恭妃)라고 고쳤다고 그래서 세종실록 초반부에는 '공비'라고 기록되었다. 이렇게 왕비에게 비호를 지어주는 관습은 1432년에 공식적으로 사라졌다.(후궁 항목을 참고)

2.3. 시아버지에 의해 친정이 숙청되다


세종이 왕이 되고, 세종의 장인이자 소헌왕후의 친정아버지인 심온은 영의정이 되었다. 그런데 심온이 영의정에 부임한 건 태종 본인의 명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에 대해선 보통은 태종이 심온숙청하기 위한 사전 위장으로 해석하는 편이다. 외척을 경계하여 알레르기만큼 싫어하던 태종은 강상인의 옥에 심온을 연루시켰다.
강상인은 군사 업무를 세종에게만 보고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에 대해 "상왕(태종)을 모욕했으며 왕명 없이 함부로 군을 움직였다"는 누명을 씌우고 여기에 심온을 연결시켰다. 사은사로 세종대왕의 즉위를 명나라에 고하러 갔던 심온은, 국경을 넘어 평안북도 의주에 도착하자마자 결국 사약을 받았다. 이때 심온 숙청에는 심온과 정치적 라이벌인 박은이 실무적인 주도를 하였는데, 이 때문에 심온이 죽기 직전 자손들에게 '다시는 박씨 집안과 혼인하지 마라!'고 말했다는 야사가 있다. 그래서 이후 심온의 가문(청송 심씨)와 박은의 가문(반남 박씨)은 원수 지간이 되었다는 이야기.
또한 이때 심온 뿐만 아니라 심온의 형제와 다른 자식들까지 귀양을 갔고, 그나마 자신의 비인 원경왕후의 남동생들(처남)을 숙청했던 것과 달리 심온의 아내와 자식들은 살아났지만, 변방의 관노로 전락하거나 관로가 막히는 등 가문이 완전히 풍비박산났다. 이들은 태종이 사망한 뒤에야 사면되었다. 참고로 심온의 아내, 즉 소헌왕후의 어머니가 죽은 것은 세종 26년(1444)이다.
이때 숙청을 진행한 박은과 유정현 등은 역적의 딸이라 하며 소헌왕후를 폐비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태종이 죽은 후에 소헌왕후가 보복을 행할 것을 두려워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태종은 세종의 항의도 있고, 소헌왕후가 아들을 이미 3명이나 두었다 하여 왕비의 자리를 지켜주었다. 여담으로 그때 소헌왕후는 또 임신 중이었다.(...) 당시 복중 태아는 바로 4남인 임영대군. 태종 입장에서는 이미 심씨 가문의 숙청이 종료되었고 소헌왕후가 다른 외척들처럼 야심을 내보이거나 하는 행위를 하지 않아 굳이 며느리까지 쫓아낼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듯하다.
무엇보다 이때 한바탕 숙청한 이유가 왕비가 아닌, 외척을 없애기 위함이었다. 폐비시켰다간 다시 왕비를 간택해서 맞아들여야 하고, 법도상 조실부모한 규수는 간택 자격이 없으니 새로운 규수를 간택하면 또다시 외척이 생긴다. 그러면 외척 컴플렉스 걸린 태종 입장에선 다시 칼바람 한바탕(...) 더군다나 소헌왕후는 이미 아들을 셋이나 낳았다. 만일 소헌왕후를 폐비하고 세종대왕이 새로운 왕비를 맞아 또 아들을 본다면, 세종의 후계구도는 매우 복잡해진다. 이복동생 이방석이 세자가 되어 계모 신덕왕후와 갈등을 빚고, 끝내 왕자의 난으로 정권을 탈취한 태종으로선 손자대에서 또 같은 역사가 반복되길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태종의 뜻이 무색하게도 결국 역사는 반복되었지만.. 게다가 이 지경이 되면 그나마 외척 숙청이란 명분이라도 있었던 심씨 가문 숙청은 정작 명분이 사라진 단순한 학살극으로 전락하게 된다.

용의 눈물에서도 후환을 두려워 한 신하들이 중전을 폐비시키자고 난리를 치는데 태종이 이에 빡쳐서 '''"새 중전을 세우면 또 한바탕 사람들을 때려잡아야 되는데, 날 보고 언제까지 사람 잡는 일을 하라는 거냐?"'''라며 진저리를 치며 버럭했다. 이 반응 자체는 창작이긴 하지만, 실제로도 아무리 태종이라도 이쯤에는 사람들을 숙청하고 때려잡는 데 진저리가 났을 법도 하다.[3]

2.4. 그 이후


이후로는 조용히 내명부를 통솔하다가 세자 문종의 정실(세자빈) 휘빈 김씨의 미신 사건, 순빈 봉씨의 말도 안되는 사건이 연달아 터지자 두 세자빈을 질책하기도 하였다. 실록에는 "자애로우면서도 기강이 엄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세종 8년(1426) 한양에 큰 불이 났을 때에는 당시 '강무'라고 하는 사냥 겸 군사훈련을 참관하기 위해 [4] 지방에 나간 세종대왕과 세자 문종을 대신해서 화재 진압을 직접 진두지휘하기도 했는데, 천 가구가 넘는 집을 태웠을 정도로 규모가 큰 대화재였다. 당시 소헌황후는 후일의 금성대군임신한 만삭의 몸으로 모든 일을 지휘했다. 이 때문에 당시 정승 황희는 세종이 아닌 소헌왕후에게 보고를 올렸다.[5]
한편 세종대왕은 아버지 태종이 죽은 이후 처가인 심씨 가문을 복권하기는커녕, 유정현을 영의정에 임명했다.[6] 그런 세종의 태도에 소헌왕후 심씨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으나[7], 유달리 불교에 매달렸다고 한다.[8]
만년에는 병이 생겨서 자주 피접을 나갔다가, 1446년 이질 때문에 향년 52세로 차남 수양대군의 사저에서 눈을 감았다. 그 패륜아적인 행동을 일삼은 수양대군, 즉 세조도 어머니 소헌왕후에겐 갖은 효도를 다 하였다고 기록되었고, 세조의 정실 정희왕후도 시어머니 소헌왕후에게 총애를 받았다. 특히 정희왕후가 장남인 의경세자(도원군)를 출산할 때가 가까워지자, 소헌왕후가 관례를 깨고 정희왕후를 궁으로 불러들여 궁궐 안에서 출산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3. 평가


남편과 자녀들(8남 2녀)을 상당히 잘 둔 아내이자 어머니이다. 일단 남편은 세종대왕[9], 장남은 문종, 차남은 세조, 3남은 안평대군 등등 화려하다. 두 딸 정소공주정의공주 역시 총명하였으며, 자세한 가족관계는 세종대왕/가족관계를 참조.
자주 회자되는 말로는 만약 소헌왕후가 더 오래 살아서 손자 단종의 치세 때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로 있었다면 계유정난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계유정난은 어린 단종 대신 수렴청정할 왕실 어른이 아무도 없어 정승들이 주도하는 정국에 집현전 학사들과 종친들이 불만을 품고 분열된 틈을 노리고 들어가 성공한 정변이다. 소헌왕후가 살아 있었다면 명분도 없고 단종 지지세력이 분열될 일도 없어, 세력이 가장 약한 축인 수양대군은 할 수 있는 게 없어진다.
정치적 시각이 아닌 가족적 시각에서 보더라도, 세조는 어머니가 뻔히 살아있는 상황에서 같은 어머니에게 태어난 친동생들(안평대군, 금성대군)을 죽이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끝내 죽이는 등의 패륜을 감히 벌이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어머니한테만큼은 효자였던 수양대군이기에 더욱 나서기 힘들다.''' 아니, 효자가 아니었다 해도 그것만은 감히 할 수 없는 짓이다. 만일 소헌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 단종을 상대로 칼을 겨누는 건 소헌왕후를 향해 겨눈 것과 같으므로, '''대번에 명분이 붕괴된다.''' 조선의 정치적 이념이었던 유교에서 혀가 닳도록 강조하는 오륜 중에서도 가장 앞섰던 것이 충과 효다. 반역죄가 아닌 이상 자식이 부모를 고발할 수 없었을 정도로[10] 효를 중시했던 조선에서 자신의 어머니가 살아 계신데, 같은 어머니에서 나온 동생과 조카[11]를 죽인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자폭밖에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소헌왕후는 조선 최고의 왕비라고 칭송까지 받던 사람이니 만큼, 이런 상황에서 난을 일으킨다는 것은 설령 성공한다 치더라도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한다는 소리다. 또 소헌왕후가 위황후급 짓을 하지 않는 이상, 자기 아들이 자신의 장손자를 쫓아내겠다는데 정상적인 어머니라면 편을 들 리가 없다.
세종대왕조선시대에도 이상적인 군주의 롤모델로 꼽혔듯이,[12] 소헌왕후 역시 '''이상적인 왕비의 롤모델'''로 조선시대 내내 칭송받았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소헌왕후가 이끌었던 내명부는 조선시대 통틀어도 가장 안정적이었기 때문.[13] 세자빈들 사건이 있지 않았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이후의 훨씬 버라이어티한 조선의 내명부 역사[14]를 생각하면, 세종 때의 내명부는 상당히 안정적인 편이었다. 애초에 세자빈들의 사건도 소헌왕후가 잘못한 거라고 할 수도 없다. 오히려 순빈 봉씨 일에서는 소헌왕후가 봉씨를 꾸짖기도 했지만, 이건 그냥 봉씨가 시부모의 말을 들어먹지 않았던거라...
세종 또한 이런 왕비를 극진히 대했으며, 소헌왕후는 '''역대 조선의 왕비 중 왕과의 사이에서 2번째로 많은 자녀를 둔 왕비'''[15]이기도 하다.(총 8남 2녀) 이처럼 왕비가 낳은 자식이 많은 게, 내명부가 안정적이었던 가장 큰 요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정통성 있는 대군이 8명이나 있으니, 한둘 정도 문제가 생기더라도 큰 문제가 없었던 것. 후궁들도 감히 왕위계승에 끼어들 수 없었으므로 자중했을 것이다. 게다가 다들 똑똑하고 능력 있기까지 했다.
이렇게 자식을 많이 낳다 보니, 위에서 언급했듯이 생애의 중요한 순간을 임산부의 몸으로 맞은 경우가 많았다. 왕비 즉위식 때는 안평대군이 태어나기 1달 전이었고, 친정아버지인 심온이 숙청당할 때는 4남 임영대군임신 중이었다. 그리고 한성 대화재 진압을 지휘할 당시에는 금성대군이 태어나기 약 1달 전이었다.[16]
소헌왕후 본인 다음으로 많은 소생을 둔 신빈 김씨와도 친밀하게 지냈다고 한다. 김씨는 소헌왕후가 안평대군을 낳은 직후에는 수양대군유모가 되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세종과 소헌왕후의 막내아들인 영응대군의 유모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신빈의 소생들은 수양대군과 친했으며, 뒷날 세조는 신빈과 그 소생의 이복 아우들도 극진히 대해 주었다.

4. 여담


  • 생전에 설탕을 좋아해서 와병 중인 상태에서도 설탕을 먹고 싶어했는데, 후에 장남 문종이 설탕을 얻자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의 영전에 바쳤다는 이야기가 있다.[17] 설탕은 사탕수수에서 얻는데 사탕수수가 열대작물인지라 조선에서는 재배할 수 없었고 사탕무도 전래되기 전이므로 설탕은 모두 해외에서 수입해야 하는 사치품이었다. 그래서 왕비 소헌왕후조차 쉽게 구할 수 없었던 것.
  • 일생 동안 가족비극을 많이 겪었다. 자식을 셋이나 떠나보냈는데 보통의 왕비나 후궁들이 아이를 낳고 이름도 없이 떠난 경우도 아니였다. 소헌왕후가 30대가 되고 나서 첫째아이인 정소공주가 세상을 떠났고, 50대가 되었을 때 5남 광평대군이, 이듬해 7남 평원대군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 충격에 소헌왕후의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에 이르렀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이 왕비가 되던 해에 시아버지 태종이 주도하여 아버지 심온이 처형당했고, 어머니는 관비로 전락했다가 사위에게 복권된 뒤 세상을 떠났다. 또한 자신의 큰며느리 현덕왕후원손을 낳고 하루 만에 요절하였다. 이러한 불행한 가족사에 소헌왕후 본인도 힘들어해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고 불교에 많이 의지했다.

5. 대중매체에서


정희왕후인수대비, 문정왕후처럼 커리어우먼 스타일이라기보다는 조용히 남편을 뒷바라지하는 전통적인 여인상에 가까운 왕비라서인지, 현대 매체에서는 남편 세종대왕이 조명되는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 편이다.
조선왕조 5백년 시리즈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김영애가 소헌왕후로 열연하였다.
용의 눈물에서는 당시 17살의 도지영[18]이 연기했는데, 역사적 이미지 그대로 조용하고 순종적인 여인상을 잘 표현해냈다. 배우 본인부터 대단히 유약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는데, 후반부 상왕 태종의 외척 제거 정책에 의해 친정이 작살나 그 정신적 충격에 몸져눕는 모습이 안타까울 정도로 어울렸던 것이 아이러니.
하지만 본격적으로 세종의 치세가 시작되자 내조의 여왕의 면모를 보여준다. 집현전 학사들이 여름에 고생하자 얼음 식혜를 보내주기도 하고 어찌보면 자신의 원수와도 같은 태종에게도 그래도 시아버지라고 잘 모시는 착한 심성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자신의 친정을 풍비박산낸 박은에게 세종이 자비[19]를 베풀자 본능적으로 반대하기는 하지만, 세종의 뜻을 따라주며 대인배적인 모습도 보여준다.[20]
대왕 세종에서는 주역 중 하나로 아역은 남지현, 성인역은 이윤지가 연기했다.[21] 남편의 왕자 시절 단순 내조를 넘어 따끔하게 지적을 하거나, 남편의 일을 함께 돕는 등 깨우침을 주는 반려자로 그려진다. 충녕대군이 대군 시절 왕재로서 부각될 때는 시어머니 원경왕후, 형님인 양녕대군 부인(세자빈)의 압박과 경고를 뒤에서 견디는 모습이 자주 비춰진다. 충녕대군의 즉위와 심씨 가문 숙청부터 남편 세종과 갈등하는 장면도 나오고, 친정이나 자식을 잃었을 때의 슬픔도 표현되는 등, 인간적으로 조명되기도 했다. 또한 초궁장을 데리러 온 강상인에게 직접 맞서기도 하고 천문 연구 기록을 찾는 명나라 사신에게 단호하게 경고하기도 하는 등 강인하고 지혜로운 모습도 보여준다. 부친 심온을 구하려 명에 사람을 보낸다는 창작 설정이 덧붙여졌다. 이 부친 도피 시도가 들켜 대신들이 폐비 주청을 올린다는 전개. 딸 정소공주요절을 계기로 세종과 화해한다. 이 때 자신이 시아버지(태종)를 너무 원망해 벌을 받았다며 노비가 된 모친 앞에서 자책하는 모습이 나온다. 후반부에는 조용히 세종을 내조하며 훈민정음 창제에도 어느 정도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마지막회에서는 수양대군을 데리고 명나라까지 가서 정통제에게 의복을 전해주는 장면이 나왔다. 이 드라마에선 세종이 상당한 애처가로 그려지며, 외척의 발호를 매우 경계한 부친 태종으로부터 아내의 폐비를 막기 위해 세종이 여러 명의 후궁을 들이는 것으로 나온다. 물론 후궁을 여럿 들이는 이유를 세종이 설명했을 때 소헌왕후는 이해할 수 없다, 차라리 폐비를 시켜달라는 대답을 하지만…
뿌리깊은 나무(드라마)에서는 장지은이 연기했다. 1회, 2회 초반부에 등장. 심온 집안 옥사와 관련해서 등장했으며 소이를 데려다 거둔 것도 소헌왕후.
웹 드라마인 퐁당퐁당 LOVE에서 진기주이도의 부인으로 나온다. 배역이름은 소헌. 극 중에서 이도랑 사이가 안 좋다.
대군 - 사랑을 그리다에서 양미경이 연기한 대비 심씨는 소헌왕후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다. 정확히 말하면, 소헌왕후가 단종 때까지 살아서 수렴청정을 했으면 어땠을까 나온 상상에서 창조된 인물.
나랏말싸미에서는 전미선이 연기하며, 담당 배우의 최후의 작품이다.
유오디아 작가의 작품인 조선후궁실록의 외전 정난기연에서는 여주인공 이화진과 친구 사이였다고 나온다. 남편 세종과 사이는 좋지만, 친정이 멸문되었을 때 남편이 곁에 없었던 것이 평생의 한이라고. 소녀 시절에 화진과 우정의 증표로 목걸이를 나눠 가졌는데, 이 목걸이는 각자 영응대군과 화진의 친구 김지현에게 전해지면서 중단편 소설 '대군의 연인'의 발단이 된다.

[1] 조선동성동본 간의 혼인도 터부시될 정도로 부계 근친에 민감했지만, 인척 관계는 거의 신경쓰지 않았다.[2] 심온의 동생 심종에게 하가하였다[3] 혹은 제아무리 외척 견제를 빌미로 벌인 숙청이어도 이런게 2차례 이상 이어질 경우 나올 후폭풍을 슬슬 걱정했을지도 모른다. 애시당초 이방원을 자기 권력을 위해 부득이하게 사람을 죽인거지 사람 죽이는데 미친 살인광은 절대 아니였다.[4] 이걸 놀이로 보면 안 되는데, 조선시대 왕의 사냥은 왕이 친히 지켜보는 군사훈련도 겸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세종은 사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귀찮다고 투덜거린 적도 있으며, 사냥을 좋아했던 부왕 태종이 상왕으로 살아 있을 때는 태종이 반억지로 끌고 가다시피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강무는 공식적으로 군사훈련이며 훈련 중 활을 쏘아 잡은 짐승을 제사용 육고기로 사용하거나 많이 잡히면 신하들에게 나누어 줬다. 군사훈련 하는데 당연히 활솜씨도 봐야 했고... 태종은 정말 사냥을 좋아해서 강무 핑계로 여러 민폐를 끼쳤다는 사실이 많이 알려져서 생긴 오해다.[5] 이후 세종은 강무를 나갈 때마다 '나 없을 때 무슨 일 있음 꼭 중궁한테 보고하고 일체 그 명령에 따라라.'라고 하교해놓고 갔을 정도로 소헌왕후를 굳게 신뢰했다.[6] 사실 태종의 유지 때문에 그랬다고 봐야 한다. 왕의 유지는 그 다음 대의 왕이 바꾸면 불효로 여겨진다. 세종도 심씨 가문의 억울함을 모르는 건 아니었기에, 나중에 유정현이 죽자 심온의 처와 딸들을 관노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그럼에도 심온만은 복권시켜주지 않았다고. 심온을 복권한 것은 문종이다.[7] 사실 야사는 차치하고 실록만 놓고 본다면 왕비가 왕에게 무슨 말을 했고 불평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거의 없다. 세종은 장인어른인 심온을 복원 시켜주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태종에 대한 불효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대신 아들인 문종이 즉위하자마자 외할아버지인 심온을 복권해주었다. 다만 왕비의 행실에 대해 왕이 언급하여 기록에 남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만 왕이 왕비 및 내명부에 대한 언급을 할 때에는 뭔가 큰 일이 난 경우가 많긴 하다. 원경왕후효빈 김씨를 얼려죽이려고 했다거나, 순빈 봉씨가 대사건을 일으켜 쫓겨났다거나, 왕비에게 욕을 하고 암살시도를 했다거나[8] 물론 이건 별로 이상할 일은 아니다. 사대부가는 물론 왕실의 여자들까지도 불교에 매달림은 드문 일이 아니었기 때문.[9] 물론 세종대왕이 능력 있는 남편이고 부부 간에 금슬도 좋기는 했지만, 후궁이 꽤나 많았기 때문에 속앓이를 다소 했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세종의 자식 20여 명 중 10명은 소헌왕후 소생인 걸 보면, 세종대왕이 어쨌든 소헌왕후를 아꼈음은 사실인 듯하다. 앞서 보았듯이 심온 사건과 그 이후의 일로 나름의 죄책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에 비례해서 다른 쪽으로 잘해주려고 했을지도.[10] 자식이 반역죄가 아닌 이유로 부모를 고발하면 설령 부모가 진짜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 자식은 강상죄로 사형을 받는다. 조선에서 강상죄는 역모죄 다음으로 무거운 죄다.[11]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장손자[12] 조선시대 신하들이 왕들에게 했던 얘기가 "세종대왕성종대왕 좀 본받으십시오!" 였다. 그리고 그 성종은 세종대왕을 본받으라는 소리를 들었다.[13] 특히나 세종 때에는 내명부에 후궁이 많은 편이었다. 그 중 세종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다고 전해지는 신빈 김씨의 경우에는 자녀를 8명이나 낳았는데, 소헌왕후는 김씨와 별다른 잡음 없이 지냈고 오히려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 막내 아들인 영응대군의 양육까지 맡길 정도였다고 한다. 후궁들을 잘 이끌고 큰 문제없이 내명부를 통솔한 것만 봐도 소헌왕후가 얼마나 왕비로서 역할에 충실했는지 알 수 있다.[14] 특히 '''성종''' 때나 '''숙종''' 때를 보자[15] 역대 조선의 왕비 중 가장 많은 자식을 둔 왕비는, 아이러니하게도 남편과 사이가 상당히 안 좋았던 태종의 왕비이자 소헌왕후의 시어머니 '''원경왕후'''이다. 원경왕후가 태종과의 사이에서 4남 4녀를 낳았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양녕대군에 앞서 세 아들을 더 낳았다. 다만 셋 모두 요절해서 별로 알려진 사실은 아니다. 따라서 실제로는 7남 4녀를 낳았던 것이다.이 내용은 상왕으로 물러 앉은 태종이 지난 날을 회상하면서 남긴 말로, 조선왕조실록 세종 원년(1419) 2월 3일 기사에 자세히 기록되었다.[16] 세종대왕 사후 세종의 아들들은 둘로 갈라져서 안평대군, 금성대군단종 편에, 임영대군은 세조 편에 섰다. 덕분에 임영대군은 평생 잘 지냈지만 안평대군, 금성대군은...[17] 원문은 다음과 같다. 昭憲王后之病也, 欲嘗沙糖, 後人有進之者, 上見之流涕, 薦之輝德殿。 '소헌왕후가 병환이 났을 적에 사탕을 맛보려고 하였는데, 후일에 어떤 사람이 이를 올리는 이가 있으니, 임금이 이를 보시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휘덕전에 바치었다.' - 문종실록 13권[18] 본명은 도지원. 현재 예명 '임서연'으로 개명.[19] 몸져 누워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전의를 보내고 직접 병문안을 다녀오기로 결정했다.[20] 병석에 있던 박은은 이 소식을 듣고 "왕과 왕비께서 정말 (그릇이) 크신 분들"이라며 탄복했다.[21] 재미있는 게, 남편인 세종 역으로 등장한 김상경과 이윤지는 나이 차가 12살 차이로 띠동갑 수준이다. 실제로는 남편인 세종보다 소헌왕후의 나이가 더 많았다.(이윤지는 아들인 문종을 맡은 이상엽보다도 1살 아래다.) 아역배우들인 이현우와 남지현이 연기할 때는 (당연하지만) 동갑내기 소꿉부부같은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