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나가와 사건
砂川事件 / 砂川騒動
스나가와 사건 / 스나가와 소동
1. 개요
1957년 7월 8일 도쿄도(東京都) 기타타마 군(北多磨郡) 스나가와 정(砂川町)[1] 에 있던 타치카와 미군 비행장 확장 반대운동 중에 발생한 사건으로 정부의 강제 측량에 반대하는 농민 시위대 7명이 출입금지 경계책을 '''부수고''' 기지 안으로 들어갔다가 체포되어 기소된 사건이다.
2.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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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기동대와 대치 중인 시위대
초기 농민들의 저항으로 시작된 이 사건은 추후 노동조합과 학생시위대가 가담함에 따라 점차 그 규모가 커졌고, 결국 경찰기동대와 격돌하는 등 격렬한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기소된 7인의 재판 과정은 전국적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1959년 3월 30일, 도쿄도 지방재판소(지방법원)의 '''다테 아키오'''(伊達秋雄) 재판관은 “일본 정부가 미군의 주둔을 허용한 것은 전력 보유를 금지한 헌법 제9조 2항(전항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육해공군기타의 전력은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하지 않는다.)[2] 에 위배된다”고 적시하여 시위대 7인 전원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이 판결은 주일미군, 나아가 미국 정부의 심기를 건드리는 꼴이 되었다. 이에 따라 더글러스 맥아더 2세[3] 주일미대사의 권고가 제기되었고[4] 당시 외무대신이던 후지야마 아이치로(藤山 愛一郞)는 이튿날 소집된 내각회의에서 이 사건에 '''비약적 상고'''(제1심 판결에 대하여 항소심을 거치지 아니하고 상고법원인 대법원에 직접 상고)를 적용하자는 의견을 피력했다. 검찰의 주도 하에 상고는 전례 없는 속도로 진행되어 도쿄도 지방재판소의 제1심 판결이 나온 지 불과 8개월 만인 1959년 12월 16일에 최고재판소(대법원)가 본 판결을 '''파기·환송'''했다.[5] 1963년 최종적으로 벌금 2천 엔의 '''유죄'''가 확정됐다.
최고재판소의 판결은 두 가지 이유로 원래의 판결을 파기했다. 하나는 나가누마 공소심 판결에도 적용된 '''통치 행위론'''이고, 다른 하나는 제9조에 대한 '''독자적 해석'''이다. 헌법 판단을 자제하는 통치 행위와 독자적인 헌법론의 적극적인 전개는 모순되는데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판결의 다수 의견에 따르면, 미일안전보장조약은 주권국으로서의 일본의 존립에 아주 중요한 관계가 있는 고도의 정치성을 가지고 있기에 위헌이냐 아니냐의 법적판단은 사법적 기능만을 하도록 되어 있는 사법재판소의 심사에는 원칙적으로 어울리지 '''않고''', 게다가 극도로 명백하게 위헌 무효라고 인식하지 않는 한, 재판소의 사법심사권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므로 제1차적으로는 안보조약 체결권을 가진 내각 및 승인권을 가진 국회의 판단에 따르고, 마지막으로 주권을 보유한 국민의 정치적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링크
최고재판소의 이러한 판결은 사실상 '''헌법보다(!!!)''' '''미일안전보장조약'''을 상위에 둔 것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일본은 1960년 미일안전보장조약을 개정함으로서 주일미군에 대한 법적 지위를 확립하고 이의제기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기에 이른다.
3. 기타
- 2014년 이 사건의 전 피고인 쓰치야 겐타로 씨(79, 시즈오카시) 등 4명이 17일, 1심 무죄 판결을 최고재판소(대법원)가 파기하고 반려한 뒤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은 잘못된 것이라며 도쿄지방재판소(지방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고 교도통신이 18일 보도했다.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