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글러스 맥아더
[clearfix]
1. 개요
미국의 군인이자 정치가. 통칭 '''맥아더 원수'''.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군인 중 한명이다. 일찍이 군인이 되어서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6.25 전쟁 등 20세기에 벌어진 주요한 전쟁에 모두 참전한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 집안 역시 명문 군인 가문이어서 아버지 아서 맥아더는 육군 장성으로서 필리핀의 군정 총독이기도 했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이미 1910년~1920년 대에 국가적 영웅이었는데, 육군사관학교 수석 졸업, 최연소 육군 소장, 최연소 육군 참모총장, 육군 원수까지 군의 주요지위를 거쳤으며, 태평양 전쟁과 일본의 전후처리에서 막대한 영향을 행사하였고 한국의 6.25 전쟁에서도 인천 상륙작전 등을 지휘하며 활약했다.
태평양 전쟁에서 태평양 방면 연합군 총사령관, 육군 원수로서 지휘했으며, 우스갯소리기는 하지만 '일본의 백인 쇼군'으로 불렸을 정도로 종전 이후 연합군 점령하 일본에서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그렇기에 전후 일본 사회의 구조에는 그의 입김이 많이 남아있다. 그 때문인지 2006년 타임지가 선정한 '아시아의 영웅들' 리스트에 포함되기도 하였다.[2][3] 6.25 전쟁에서도 유엔군 총사령관으로서 북한군이 우세한 상황을 인천 상륙작전을 통해 성공적으로 반격하였으며 한국인들 사이에서 높은 인지도와 명성을 가지고 있다. 일본인들도 맥아더를 고평가하는데, 점령군의 사령관인데도 일본인들이 맥아더를 좋아하는 이유는 일본에 가혹한 벌을 내리지 않고 최대한 선처해주었으며 은퇴 이후에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핵 공격을 "잔인했다"며 간접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여받은 약장 역시 매우 비범하다. 약장 목록을 보면 알겠지만 명예훈장부터 시작해서 하나 받아도 가문의 영광인 수훈십자장 3회 수훈(천만에 가까운 미육군 누적참전 병력 중 현재까지 겨우 13,000명만 수훈받았다.), 하나 받아도 베테랑 병사 취급받는 은성훈장 6회 수훈, V기장(영웅적인 행동을 한 군인에게 수여)이 달린 동성훈장 수훈, 육군 수훈복무훈장 4회 수훈, 대통령 부대 표창 6회 수훈, 대한민국 정부의 무공훈장 중 최고 등급인 태극무공훈장 수훈, 그 외에도 육군항공 조종사 마스터 기장, 소총, 권총 특등 사격기장까지. 그야말로 맥아더는 군인으로서 '전설', '신화'라고 불릴만한 경력을 갖춘 명장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면에서는 많은 문제를 노출하였다. 6.25 전쟁 당시 핵무기 사용과 중국으로의 확전(擴戰)을 반대한 군 통수권자인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명령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다가 해임되는 등, 미군 역사에서 문민통제에 역행했던 대표적 장성이기도 하다.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그는 화려한 전공에도 불구하고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1.1. 이름 표기
Douglas MacArthur
MacArthur라는 인명의 영어발음은 [məˈkɑː(ɹ)θə(ɹ)\](머카서)에 가깝다. [θ\] 발음을 'ㅅ'을 표기할 것으로 규정한 "국제 음성 기호와 한글 대조표"와 "접두사 Mac-, Mc-은 자음 앞에서는 '맥'으로, 모음 앞에서는 '매ㅋ'로 적"는 것으로 규정한 "외래어 표기 용례의 표기 원칙"을 토대로 한다면 옳은 "매카서"가 된다. 하지만 관용 존중 차원에서 통용되는 표기인 '맥아더'가 단독으로 인정되었다. 당시에 정확한 발음에 대해 몰랐다기보단 아일랜드/스코틀랜드계 성씨인 MacArthur[4] 에서 '''Mac'''과 '''Arthur'''를 분리해 읽고 그 원형에 맞춰 '''맥'''아더로 표기하게 된 것이 굳어진 뒤 관용 표현으로 인정된 것. 사실 [맥, 아더\]와 같이 끊어 읽으면 받침 ㄱ에서 [k\] 발음이 나겠지만, 뒤에 바로 모음 '아'가 이어지는 바람에 받침 ㄱ이 유성음화되어 [매가더\]의 [g\] 발음으로 실현된다는 게 좀 에러다. 또한 Arthur의 'th'발음은 과거에는 유성음과 무성음에 관계없이 'ㄷ'으로 옮겼으나 무성 치 마찰음[θ\]이므로 표기법상으로는 'ㅅ'이 된다. [5] 똑같은 원리로 굳어질 뻔했던 "아더 왕"은 현재 "아서 왕"으로 잘 쓰고 있기에 아쉬운 부분. 관용 표기라 하니 더글러스 맥아더만 이리 표현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으나, 아예 "MacArthur" 자체를 "맥아더"로 표기하기로 결정되었으므로, 같은 철자를 가진 다른 인명도 맥아더로 표기하는 것이 현행 규정상으로는 맞다.
일본어에서는 원어 발음에 따라 '맛카사'(マッカーサー)라고 부른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것과 거꾸로 처박혔다는 뜻의 '맛사카사마'(真っ逆さま)를 이용해 말장난을 하기도 했다. 한편 진적좌(真赤左)와 발음이 같다 하여 '진짜 좌익 빨갱이'란 드립으로 욕하는 경우도 있는데 대중매체 문단 참조.
2. 생애
3. 평가
4. 어록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유효한 수단을 동원해 신속히 그 전쟁을 끝내는 것 말고 달리 대안이 없다. 전쟁의 최고의 목표는 우유부단하게 끄는 것이 아니라 승리이다. '''노병은 결코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 (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6]
이제 나는 군인으로서 생애를 마치고 사라진다.[7]
나는 항상 웨스트포인트로 돌아옵니다. '''의무(Duty), 명예(Honor), 국가(Country)'''[8]
가 항상 울려 퍼집니다. 오늘은 당신과 마지막으로 대화를 합니다. 강을 건널 때 마지막으로 남은 인식있는 생각은 '''생도대, 생도대, 그리고 생도대'''(The corps, and the corps, and the corps)가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작별을 고합니다.[9]
마지막까지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용기이다. 그것은 도덕적인 용기, 확신을 갖는 용기, 꿰뚤어 보는 용기이고, 세상은 항상 용기있는 사람을 모함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군중의 고함과에 맞서는 양심의 목소리가 있다. 그것은 역사만큼 오랜 싸움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용기는 역사를 이끌어 간다.'''
'''전쟁에서 승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In war, there is no substitute for victory.)'''[10]
우리는 이제 실업자가 되겠군.[11]
'''나는 돌아올 것입니다. (I shall return.)'''[12]
자유의 목소리인, 맥아더 장군이 말합니다. '''필리핀의 국민들께: 제가 돌아왔습니다. (People of the Philiphins: I have returned.)'''[13]
[의역]
일본은 12살의 소년이다.[14]
일본인은 쇼군에게 칼을 대지 않는다.[15]
'''군대에는 민주주의가 없다.'''[16]
펜이 칼보다 강하다고 말하는 자는 아마 자동화기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Whoever said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obviously never encountered automatic weapons.)
우리는 돈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 싸웠고, 대공황의 해법은 열심히 일하는 것이지 손을 벌리는 것이 아니다.
일본 사회는 철학을 잊어버리고, 윤리를 등한히 여기며 미학을 멀리한 사회이다.
우리는 모든 전력을 다하여 이 나라를 지켜야 한다.
인천상륙작전은 5000대 1의 도박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있지만 나는 그런 모험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는 인천에 상륙할 것이며 적을 분쇄할 것이다.
전투에서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지만, 경계에서 실패하는 지휘관은 용서할 수 없다.[17]
'''공산주의는 사상이 아니라 강도짓을 정당화 하는 것이다. 성실히 일해서 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기업을 만들고 기업을 운영해서 이윤을 남기고 정당하게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된 사람들을 부르주아라고 부르며 전제군주제의 세습 신분인거마냥 선동해서 그들의 사유 재산을 강탈해서 공유하자고 하는 강도질을 정당화 하는 것이다.''' 우리 미국은 칼 마르크스 라는 악마가 만든 공산주의에 맞서 신성한 사유재산을 수호해야하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지켜야 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이 아니라 마음가짐을 말한다.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나긋나긋한 무릎이 아니라 씩씩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오르는 정열을 가리킨다. 그것은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함이다.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선호하는 마음을 뿌리치는 모험심을 의미한다. 때로는 20세 청춘보다 60세 인간에게 청춘이 있다. 나이를 더하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 이상을 버릴 때 비로소 늙는다. 영감이 끊기고, 정신이 아이러니의 눈에 덮이고, 비탄의 얼음에 갇힐 때 20대라도 인간은 늙지만 머리를 높이 치켜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80세라도 인간은 청춘으로 남는다..[18]
5. 후손
맥아더의 외아들은 아버지의 소망과 달리 군인이 되지 않았고 맥아더라는 성마저 버렸다. 맥아더가 지은 시인 "아들을 위한 기도"는 한국에서 꽤 유명한데, 이 시의 주인공인 그의 외아들 아서 맥아더 4세는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자신의 성을 바꾸고 잠적했으며, 친한 친척들하고만 연락이 되고 있고 다른 행방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들에 의해 뉴욕 시에 거주한다는 것만 알려진 상태다. 2000년에 어머니인 진이 사망했을 때도 언론에는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들이 햄버거 가게의 주인이 되었다는 소문도 있지만 완전 허구다. 오죽했으면 2000년대 중반쯤에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그와 연락이 되는 친척들에 의해 부정되었다.
솔직히 이름 바꾸고 숨어버릴만 한게 그는 어릴 때부터 너무나 유명한 아버지로 인해 세간의 관심을 지나치게 받았다. 아버지가 원수 계급장을 달 정도가 되면 대개의 경우 그 아들은 이미 장성해서 사회의 중견이 되어 있지만[19] , 아서 맥아더 4세의 경우 맥아더가 58세가 되어서야 본 늦둥이라 그가 태어났을 때 이미 맥아더는 미군 최고위 장성이었다. 그리고 2차대전을 겪으며 맥아더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자 그에 대한 세간의 관심도 비상해져서 어렸을 때 이미 라이프지의 표지 모델이 될 정도였다. 또 맥아더가 일본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을 때도 그는 고작 7살 꼬마에 불과했다. 이 정도면 한 나라의 왕자나 다름없는 위치였고 세간의 관심 또한 평범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어렸을 때는 몰라도 장성하면서 그는 이런 세간의 관심을 점점 견디지 못했고 결국 아버지가 죽자 성을 바꾸고 은거하게 된다. 그의 친척들도 이런 그의 심정을 잘 알기 때문에 절대 그에 대해서 노출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형인 아서 맥아더 3세와는 사이가 좋았는지, 서로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자신의 형제 이름을 붙여줬다. 그래서 미국의 외교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2세는 실제로 더글러스 맥아더의 조카이고 더글러스 맥아더의 아들 이름은 아서 맥아더 4세이다.
6. 여담
- 옷차림새가 대단히 특이하다. 필리핀 육군 원수 정모에 짙은 레이밴 선글라스, 수제 콘파이프 담배(옥수수 자루로 만든 담배 파이프)가 트레이드 마크. 필리핀 원수 정모,[20] 선글라스와 함께 맥아더의 아이콘으로 유명한 콘파이프지만 사실, 그는 싸구려 콘파이프를 그다지 애용하지 않았고 실제로는 브뤼에르 나무로 만든 고급 수제품을 애용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일부러 검소한 이미지로 보이려고 콘파이프를 사용한 건 아니고 바빠서 고급 파이프를 챙기지 못해갖고 여벌로 준비해놓은 콘파이프를 물고 있을 때 사진을 찍혔는데, 하필 이때의 사진이 대단히 유명해져서 콘파이프가 그의 아이콘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또 맥아더 자신이 이런 이미지의 가치를 잘 아는 사람이라 그 뒤로 기자들 앞에서 포즈를 취하거나 대중 앞에 나설 때는 항상 콘파이프를 들고 있었다고 한다. 정치인들조차 대부분 이런 식의 이미지 관리에 신경을 쓰지 못하던 시절에 그는, 시대를 앞서 이런 이미지 관리의 중요성을 알고 실천했던 사람이었다.[21] 콘콥은 가격이 저렴하기는 하지만 내구성, 특히 내열성이 별로라 오래 쓸 수가 없다. 애초에 소모품인 것으로, 2020년 한국 기준으로 보더라도 저렴한 것은 만 원대 가격이다. 어지간한 것은 값이 7~8만 원대 정도인 브라이어(브뤼에르) 목재 파이프의 경우 관리만 적당히 해 주면 10년 이상 반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데 비해, 콘콥 파이프는 가격은 1~2만 원대지만 잘 써도 1년 쓰기가 어렵다. 즉, 가격은 싸지만 오래 쓸 수 없어서 오히려 비경제적인 것. 따라서, 보급형에 가까운 콘콥 파이프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주로 애용하는 파이프는 따로 있지만 파이프 관리가 힘든 상황에서 막 쓰는 파이프로 사용하거나, 아니면 굳이 돈을 주고 파이프를 사지 않고 본인이 직접 제작해서 사용하는 경우다.[22] 즉, 맥아더의 아이콘인 콘콥 파이프의 경우 여기저기 전쟁터로 출장(...)다닐 일이 많은 맥아더가 예비용 파이프로 가지고 있던 것을 들고 있다가 우연히 사진이 찍혔고, 이후 대중적 이미지 조성과 득표를 위한 호응을 위해 사용했다고 보는 정도가 가장 적절할 것이다. 특히 대선 후보 출마 시에 맥아더를 지지할 가능성이 높은 보수적인 농촌 주민들에게 콘콥 파이프는, 몇 번씩 직접 만들어서 써 본 소박하고 익숙한 아이콘이다.
- 그의 화려한 사관학교 시절 성적이 증명하듯 매우 유능한 군인이었고, 교양과 학식 또한 높았다. 그가 남긴 많은 명언들이 그렇듯 언어를 구사하는 데 있어서도 특출난 재주가 있었다. 외모 또한 큰 키에 귀족적인 풍모가 있어서 정말 누가 보아도 엘리트 군인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7일 맥아더는 수원비행장에 도착해서 한강 이북의 전황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때 후퇴하지 않고 참호 속에 남아 있던 어느 한국군 병사에게 맥아더가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냐고 묻자, 그 병사는 "상관의 후퇴 명령이 없습니다. 명령이 있기 전에는 이 참호를 지켜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탄복한 맥아더가 무슨 소원이 없냐고 묻자, 병사는 "국군에는 소총밖에 지급되어있지 않고 그나마도 탄약이 부족합니다! 적들을 저지하기 위해 필요한 충분한 무기와 탄약을 주십시오!"라고 말했다.[23] 이에 감격한 맥아더는 바로 지원군 파견을 승인했다.[24] 참고로 이때 맥아더의 시찰 비행 기록은 현재까지 남아있다.# 일부에서는 이 만남의 주인공이 2013년에 작고한 신동수#s-3 씨라고 하는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는 정식으로 부정했다.
- 6.25 전쟁에 참전했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이 나라가 재건되는데 최소 100년은 걸릴 것이다."라는 예상을 했다. 그러나 한강의 기적으로 산업화를 완성하면서 예상이 빗나갔다.
- 한국에서의 임팩트는 정말 커서 일부 무속 신앙에서 신앙의 주체로도 나타나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양담배가 법적으로 금지되었던 시절. 그를 모시는 무속인들이 양담배를 불법으로 입수하여 제물로 써서 신문 지면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지금도 그를 모시는 무속인들이 남아 있다. 이 때문인지 다음 만화속세상 '도사랜드'에서 무당인 주인공의 어머니가 섬기는 제네럴 보살이라는 이름으로 3화부터 등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맥아더를 무속신으로 모시는 사당이 인천광역시에 있다.
- 인천광역시 자유공원에는 시민들의 성금으로 세워진 그의 동상도 서 있다. 그러나 2005년에 NL성향 시민사회단체가 나서서 이 동상의 철거를 요구한 일이 있기도 했다. 서울 자하문 터널 옆에도 동상이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자하문 터널 옆 정확히는 자하문 고개에 있는 동상은 김신조 외 20여명이 박정희를 암살하러 왔던 1.21 사태 당시 현장에서 사망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이다. 다만 맥아더 장군 동상은 1960년대 말까지 경복궁 내와 반공회관(현 광화문 KT 사옥) 앞에 있던 적이 있긴 했다.
- 호주에서도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 호주는 태평양 전쟁 발발 당시 영연방의 일원으로서 주력 사단이 대부분 북아프리카 등 유럽 전선에 파병나간 상황이라, 예상되는 일본의 공격에 상당히 취약한 상태였다. 그러나 맥아더가 미국의 급조된 2선급 사단과 준정규군인 호주 민병대를 이끌고 뉴기니 전선에서 악전고투, [25] 일본군의 전력을 야금야금 깎아 먹으면서 버텨내고, 산호해 해전에서 미 함대가 극적인 무승부를 이끌어내면서 호주는 일본의 위협에서 한숨 돌리게 되었다. 이후 뉴기니 전선에서, 그리고 미군의 과달카날 상륙 이후 과달카날에서 일본군 지상 전력이 급격히 소모되면서, 호주에 대한 일본군의 위협은 완전히 일소되었다. 소규모 일본군 병력이 호주 서부에 상륙했다는 떡밥이 있긴 한데, 어차피 전황에 손톱 만큼도 영향을 주지 않은 관계로 무시당했다(...). 이렇게 보면 호주에서 맥아더를 높이 평가해야 맞겠지만, 그리고 실제로 평가는 높지만, 막상 미군이 태평양 전선에서 공세로 돌아선 이후로는 맥아더는 호주군의 주 업무를 전략적으로 가치가 떨어져 미군이 지나친 섬들에 대한 토벌전 정도로 한정지었다. 개전 초기, 가장 어려운 전선에서 열악한 여건에도 용감히 싸웠던 호주 사람들은 당연히 격분했다. 다만 이것은 맥아더 개인의 문제는 아니다. 한숨 돌린 1943년 후반 이후 미국은 전후 국제정치판도를 설계하기 시작했는데, 호주군이 필리핀상륙까지 동행하면서 남서태평양 일대에서 종주권을 행사하고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만약 호주가 그럴 수 있었다면 전후의 인도네시아 독립과 엮여 어쩌면 태평양권의 군도 몇 군데를 확보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26]
- 3인칭화로 자신을 지칭하는 버릇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웃기다고 할 수 있는데, 저 3인칭화법이 전근대 유럽 군주들의 화법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마냥 웃을 수만도 없다. 예를 들어서 미국 역사에서는 첫 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턴이 자신을 3인칭으로 칭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건 맥아더가 스스로 군주, 혹은 대통령으로 인식했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걸 부하들 앞에서 뿐만 아니라, 대통령 특사나 장차관들 앞에서도 종종 이런 말투를 썼다고 한다. 이는 스스로를 인류 역사에 남을 역사적 위인으로 생각한 맥아더의 자뻑(?)이었겠지만, 처음 접한 사람들은 다들 기겁했다고. 본인의 입으로 직접 "맥아더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런 식으로 말한 꼴이다. 트루먼을 무시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걸 확대해석이라고 볼 여지가 줄어든다. 최대한 축소해서 봐도, '내가 나인데' 급의 권위주의자 였다고 해석해야 한다. 이런 3인칭 화법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보면 나오는 것이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야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런 3인칭 화법을 썼던 것으로 유명하다. 소문으로는 맥아더 본인도 자신을 카이사르의 환생으로 생각했다고 하나 실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전기작가 중에도 이런 떡밥을 문 사람이 있는지 자신의 맥아더 전기 제목을 'An American Caesar(미국의 카이사르)'라고 지었다.
- 맥아더는 군생활을 공병 장교로 시작했다. 당시 미군에서는 엘리트 코스가 공병이었다고 한다. 이는 이종찬과 비교되는 점이라는 말이 있다.
- 맥아더는 미주리호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면서 6개의 펜을 사용했다. 평소에 사용하던 만년필 외에 5개의 펜을 더 사용한 것인데, 이는 종전 문서에 서명한 펜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5개를 더 만든 것이다. 이 중 2개는 2차대전 당시 일본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항복조인식에 초대된 조나단 웨인라이트 미 육군 중장과 아서 퍼시벌 영국 육군 중장[27] 에게 각각 1개씩 선물로 주어졌다. 1개는 아들에게 물려줬고, 1개는 웨스트포인트 미국육군사관학교에 보냈고, 마지막 1개는 미국 국립 문서보관소에 보냈다. 맥아더라는 인물의 치밀함과 동시에 정치적 성향이 그대로 드러나는 행동이다.[28] 여담의 여담으로 이 만년필은 모두 Parker사의 듀오폴드 만년필로, 이 때문에 파커사는 맥아더를 기리는 한정판을 발매하기도 했다.
- 이승만이 선물한 향로를 부대에도 가지고 와 전시했는데 적군의 기습으로 급히 비행기로 퇴각하다 한 장교가 향로를 태평양 한가운데에 떨어뜨린 것에 분노, 열흘 간 온 해군을 소집해 태평양 지대를 뒤진다. 작전명은 '향로 찾기'. 이승만이 선물한 향로가 아니라 고종 황제가 19세기 말 조선을 방문한 아버지 맥아더에게 선물한 향로를 필리핀 퇴각 상황에서 잃어버린 것이다. 후에 이승만이 이 소식을 듣고 똑같은 국보급 향로를 선물로 전달하게 된다.
- 맥아더 원수의 무공 훈장에 네 번째 백엽 장식을 서훈하는 트루먼 대통령. 사진 맨 오른편은 오마 브래들리 원수. 1950년 10월 15일 웨이크 섬.
- 웨이크 섬의 회담에서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을 마중하기 위해 몇 시간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기다리는 시간 동안 잠시 눈을 붙인다고 한 게[29] 나이 때문인지 아니면 수하들이 감히 그의 잠을 깨우지 못한 건지 모르지만 트루먼이 도착해서 비행기 문이 열릴 때까지 미처 마중 나가지 못하고 트루먼은 비행기 문에 서서 마중나오는 그를 한참이나 기다려야만 했다. 그 뒤에 트루먼의 표현을 빌자면 "70살 쳐먹은, 그것도 원수라는 인간이 19살 소위처럼 빌어먹을 선글라스와 채우지도 않은 상의와 부착물들이 잔뜩 달린 모자를 쓰고 나온" 맥아더를 접견하고 같이 차를 타고 가면서 트루먼이 "난 당신을 만나려고 지구 반바퀴를 돌아서 왔소.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따위 것이 아니오. 당신이 해리 트루먼이란 인간을 어떻게 대접하든 어떻게 생각하든 난 신경 안 쓰지만 다시는 군 통수권자를 기다리게 하는 일 따위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게 하시오. 알아들었소?"라고 말하며 무안을 주었고 맥아더는 이때 얼굴을 붉혔다고 한다.[30]
- 제46대 미합중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2016년 대선 토론 중 맥아더를 언급하여 다시금 화제가 되었다. 이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맥아더 원수를 가장 좋아하는 장군으로 언급하며, 반대로 제임스 매티스 장군은 가장 과대 평가된 장군이라며 평가 절하하고 있다.
- 2017년 12월 17일, 6.25 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의 측근이었던 에드워드 라우니가 별세했다. 최종 계급은 예비역 중장으로 향년 100세.
- 여러모로 맥아더의 파면은 이승만 입장에선 상당히 아쉬운 일이었다. 1951년 당시엔 중공군의 참전으로 눈 앞에서 통일을 놓치게 된 상황에서 휴전에 대한 관심이 쏠리기 시작하였다. 이승만은 휴전을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염원하였으나 미국 정부의 상당수 요인들은 제3차 세계 대전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북진통일을 할 생각이 없었고 따라서 기존의 남한 영토를 어느 정도 수복하고 나면 바로 휴전을 할 생각이었다.[31] 맥아더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이승만과 뜻을 같이하여 북진통일을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이었는데 맥아더가 파면되었으니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든든한 후원자를 놓친 셈이었다.
- 맥아더의 시계는 예거 르쿨트르의 리베르소 모델이다.
- 뉴욕 주 롱아일랜드의 롱아일랜드 맥아더 공항은 그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헌데 맥아더는 이곳 출신도 아니고 공항을 방문하거나 한 적도 없었다. 그의 필리핀 탈출 무용담이 전해지자 지역 주민들이 그의 이름을 붙이자고 제안해서 붙여진 이름.
- 패전 후 일본인들이 맥아더를 숭배한 바 있다. 우상숭배 항목에도 언급될 정도로 강했다. GHQ 재임시절 일본사람들의 편지를 44만여 통이나 왔고 대부분 맥아더를 구세주, 신과 같은 자비 등등으로 표현하고 심지어 '당신의 아이를 낳고 싶다'(...)는 내용까지 있어 담당관들이 당혹스러워했다고.#
7. 대중매체에서
- 닐 스티븐슨의 소설 <크립토노미콘>에 보면 강력한 포스를 뿜어내는 동시에 은근 웃기게 나온다.
- 일본 작가 모토 라이치의 가공전기 만화 몽환의 전함 야마토에서는 주적으로 등장. 다만 육군이라 주인공인 쿠루스와 별접점이 없어서 비중은 낮다. 어째서인지 실제보다 젊은 모습으로 나오며 상당히 경박한 모습이다. 작가인 모토 라이치는 후에 아사히 신문사에서 출간한 주간 망가 일본사에서 맥아더의 GHQ 통치기를 그렸다. 여기서 맥아더는 일본인을 사랑한 푸른 눈의 쇼군으로 군국주의 일본을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국가로 만들었다고 묘사한다.
- 일본식 발음으로는 막카-사-(マッカーサー). 일본어로 진적좌(真赤左)와 발음이 같다. 그래서 재벌 해체와 노조 허용, 토지 개혁 등의 조치를 두고 일본에서는 '진짜 좌익 빨갱이'라는 뜻으로 비꼬기도 했다.
- 한국에서도 번역가 류한수[32] 등이 '매카서'라고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긴 한다. 그래서인지 몇몇 번역본에선 매카서라고 쓰기도 하는데, 그래서 대체 이 인물은 누구냐 하는 독자들의 불편함을 자아낸 경우도 많다. 하지만 현행 외래어 표기법상 매카서라고 표기하는 게 맞다. 다만 위에도 기술되어 있듯이 관용 존중 차원에서 맥아더라 쓰고 있다.
- 당연히 영화로도 나왔다. 1977년 영화 맥아더에서는 그레고리 펙이 주연을 맡아 열연했다. 펙을 캐스팅한 이유는 실제 맥아더와 닮아서라고.[33] 1962년 5월 맥아더가 모교인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하여 후배 생도들에게 고별 연설을 하는 장면을 시작과 마지막에 넣고, 그 사이에 2차대전과 6.25 전쟁 시절을 회상 방식으로 보여주는 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