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운마루호 침몰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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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5년 5월 11일 오전 6시 56분, 수학여행을 떠난 초등학생, 중학생들을 태운 일본국유철도 우코연락선(宇高連絡船)[2] 소속 철도 연락선(기차 수송 연락선) "시운마루호(紫雲丸, 상행 객화제8편 (上り第客貨8便))"가 같은 철도 연락선인 "제3우코마루(第三宇高丸, 하행 153편 대형 화차운항선 (下り153便大型貨車運航船))"[3] 와 충돌하여 168명이 사망한 해양 사고다. 그리고 '''"전후 국철 5대사고(国鉄戦後五大事故)"''' 중 하나이다.[4][5]
2. 사건 진행 상황
1955년 5월 11일,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치 현 초등학생과 고치 현 중학생을 태운 시운마루호는 안개가 끼었는데도 출항을 강행한다. 계속하여 바닷길을 나아간 시운마루호는 이윽고 세토 내해 메기지마(女木島) 남서쪽 해역에 다다른다. 참고로 해당 해역은 조수 간만의 차도 크고 조류도 빠른 곳.
사고 당일, 하지만 반대편에서는 같은 항로를 다니는 일본국유철도의 대형화차운항선 제3우코마루가 있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두 배는 모두 과속 운항을 하였다!''' 두 배는 서로 접근한다는 것을 알고 회피했으나, 하필 두 배 다 같은 방향으로 꺾는 바람에 충돌했다. 시운마루 선체 우현 기관실 쪽에 높이 3.5m, 최대폭 3.2m, 선내쪽 3.5m로 찢어져 파열구가 생겨 엄청난 양의 바닷물이 침수하기 시작한다. 충돌로 인해 생긴 여파로 기관실 엔진룸 복수기와 주배전장치가 폭발하여 선내 전체가 정전이 되었다. 또 배 안에 침수를 막아 침몰을 지연시키는 역할인 수밀문이 정전 때문에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이미 선미 쪽에 물이 차버린 탓에 승무원들이 수동으로 폐쇄하는 것을 포기했다. 수밀문이 작동이 안된 채 침수하여 좌현으로 급속도로 기울자, 승객들은 황급히 우현으로 쏠리는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힘이 일반 남성보다 약한 어린이와 청소년은 그대로 배 안에 남겨지게 되어 희생되고 말았다.
서로 부딪혔지만 그나마 멀쩡한 제3우코마루가 파손된 시운마루호 우현 기관실의 침수 진행을 막으면서 조난 당한 승객들을 옮겨 태우기 위해 좌현으로 완전히 튼 채 배 엔진을 전속력으로 전진시켜 밀어 붙었다. 제3우코마루가 접근하는 광경을 보자마자 사람들은 재빨리 배를 옮겨 탔고, 인솔하는 교사들이 배에 남겨진 학생들을 구하러 갔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이미 들어 찬 바닷물로 인해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고 구하러 온 인솔하는 교사들도 학생들과 함께 희생되고 말았다.
왜 희생자들 중에 학생들이 많았냐면 부모님께 수학여행에서 사온 선물을 버리지 않았고, 아수라장 상황이 되어 주위 어른들이 정신없이 서로 밀쳤기 때문에 대피가 늦어졌다. 게다가 구명조끼 수납한 곳에 손에 닿지 않았고 선원들이 배포한 구명 조끼를 입으려고 해도 착용법을 몰랐다는 것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3. 여담
참고로 이 해난사고는 다섯번째이다.
일본에 있는 거의 모든 학교에는 수영장이 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정착한 것이다. 또한 세토 대교는 이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졌다고 한다.출처#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하자 해당 사고가 재조명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