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쿠라기초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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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기초 사고 당시의 모습. 출처는 위키백과출처
1. 개요
2. 사고 상세
3. 사고를 키운 원인
4. 사고후 대책
5. 기타


1. 개요


桜木町事故 (桜木町事件)
쇼와 26년(1951) 4월 24일 13시 45분 무렵,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일본국유철도 도카이도 본선의 지선인 게이힌 선(현재의 네기시선) 사쿠라기초역 구내에서 발생한 열차 화재사고. 일본에선 '''전후 국철 5대사고(国鉄戦後五大事故)'''로도 손꼽힌다.[1]

2. 사고 상세


사고는 케이힌선 사쿠라기초역 구내의 상행선에서 가선의 절연체(애자) 교환 공사를 진행 중이던 작업원이 실수로 스패너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일어났다. 이에 가선이 고정되지 않고 아래로 처쳤는데, 여기에 케이힌 선의 하행 제1271B 전동열차(第1271B電車)[2]가 그대로 진입하여 선두차의 팬터그래프와 가선이 엉켰다.[3] 기관사는 서둘러 팬터그래프를 내리려고 했지만, 선두차의 팬터그래프가 파손되어 가선이 차체와 접촉했다. 이 과정에서 전기가 합선되어 격렬한 불꽃이 튀었다. 당시 열차의 지붕은 나무로 만들어 가연성 도료를 발랐는데, 여기에 불꽃이 튀긴 탓에 불이 붙었다. 그 결과 선두차인 모하 63756이 전소되고 2번째 량인 사하 78144가 반소되어 사망 106명, 중경상자 92명이 발생한 대참사가 터졌다. 이 사고는 20세기 일본의 철도사고 중 사망자수 5위, 1872년에서 2011년까지 일어난 일본 내 철도사고 중 세 자리 수 사망자를 기록한 6대 사고 안에 들어가는 참사였다.
합선이 일어난 탓에 자동문이 작동하지 않은 데다 승무원이나 역무원도 '''비상용 코크의 위치를 몰랐기 때문에''' 문을 외부에서 수동으로 여는 것도 시도할 수 없었다. 기관사가 차단된 관통로를 통해 승객을 구출하려고 했지만, 당시 차량의 관통로는 객실 사이의 관통이 목적이 아니라서 관통로의 문이 바깥쪽에서 잠겨 있었다. 가까스로 2번째 량의 관통로는 열렸지만, 첫 번째 량은 탈출하려는 승객들이 몰리는 바람에 압력을 받아 열리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첫 번째 량에 탑승한 승객은 유리창을 깨는 것 외에는 탈출경로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피해가 더 커졌다.
사고 당시 사쿠라기초 역 부근의 가선에 전기를 공급하던 곳은 요코하마 변전소츠루미 변전소였다. 요코하마 변전소는 고속도 차단기가 작동하여 급전을 정지할 수 있었지만, 츠루미 변전소는 고속도 차단기가 작동하지 않았다. 그 결과 약 5분 동안 가선에 전기가 계속 흘러 화재를 더 키웠다.

3. 사고를 키운 원인


이 사고를 키운 원인이 여럿 있지만, 그중 중요한 요소로 지목되는 것이 바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이 저지른 수탈(공출)'''이다. 일본군은 전쟁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 했다. 단순히 수저나 놋쇠뿐만 아니라 철로까지 떼어갔을 정도인데, 열차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군은 열차에 들어가는 철을 줄이기 위해 '''기존 금속제 객차의 금속을 떼내고 목재로 대치하거나 아예 처음부터 목재 열차(...) [4]를 만드는''' 기행을 저질렀다.[5] 이 과정에서 화재 위험이 수직 상승했다.
다만 차체에 가연성 소재가 많다는 것은 전쟁 이전의 차량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63계에는 가연성의 도료나 베니어판의 천정내 의욕 등 가연성이 높은 재료가 많이 사용되었고, 그 결과 내연 구조는 전쟁 전 차량보다 오히려 더 뒤떨어졌다. 게다가 다른 객차로 이동할 수 있는 관통문조차도 없는 차량이 있어서 출입문이 고장나면 나갈 방법 자체가 아예 없는데다, 대형 유리판 제작도 자재부족으로 중단되어 3단식 유리창[6]이 붙어 있었다. 이것 때문에 유리창을 깨고 나갈 여지도 없어졌다. 그밖에 목재로 된 열차 출입문을 강철문으로 교체하면서 '''비상시 수동으로 문을 열수 있는 장치의 위치를 표시하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더군다나 전선 처리에도 문제점들이 있었다. 실외 배선을 절연용 피복으로 덮어야 하는데도 노출된 채로 방치된 것, 전기 합선사고가 일어날 때 대비해야 할 보안기기가 일부 누락된 점 등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화재 직전까지 버틴 게 용한 셈이다.

4. 사고후 대책


이 사건의 여파로 국철은 사고 수일 후 모든 차량에 수동으로 차량문을 열 수 있는 장치의 위치를 재빨리 표시했고, 전시 설계로 만들어진 열차들을 점검해 문제점을 고쳤다. 2년에 걸쳐서 대상 열차 800여 량을 대대적으로 보완하는 등, 국철은 이와 같은 사고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했다.

5. 기타


아이러니컬하게도 당시 국철은 일본국유철도 3대 미스터리 사건 등으로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하고자 야구단 국철 스왈로즈(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을 창단하고 신형열차들을 투입해 태평양 전쟁 때 중단되었던 특별급행열차, 식당차, 침대차 서비스를 복원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었지만, 이 사건이 이런 노력을 날려버리고 말았다. 당시 일본 언론들은 '''일본프로야구 참가할 정신 있으면 열차나 더 점검해라''' 하고 국철을 대대적으로 비판했으니 할 말이 없다(...).
아사히 신문에 연재되던 사자에상에서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에피소드가 있다.
일본에서 밀폐식 스크린도어 도입을 주저했던 이유 중에는 바로 '''이 사고로 생긴 트라우마'''가 있다는 카더라가 있다.[7] 현재는 도심지역을 중심으로 난간형이나 로프식 등 다른 형태로 스크린도어가 설치되는 중.
[1] 국철 5대사고 중 나머지는 1954년 토야마루 침몰사고, 55년 시운마루호 침몰 사고, 62년 미카와시마 사고, 63년 츠루미(鶴見) 사고이다.[2] 국철 63계 전동차 5량 편성, 당초 운전시각표보다 9분 지연되었다.[3] 열차는 당시 하행선으로부터 포인트를 건너 상행선에 진입하던 중이었다.[4] 이 물건도 내부 인테리어가 나뭇결 '''시트지'''로 되어 있어서 이런 별칭이 있지 엄연한 금속제 객차이다.[5] 1926년 9월 23일 산요선 특급열차 탈선사건에서 목제 객차가 파손되어 사망자 34명이 나온 이후 전금속제 차량을 도입,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객차의 전금속화를 달성하였다. 전시의 목제객차는 이러한 선진적인 대책에 완전히 역행하는 조치였다.[6] 창틀을 상, 중, 하단으로 나눠 붙였는데, 중간 창이 고정되고 상단 창틀을 아래로 내리거나 하단 창틀을 위로 올려야 창문이 열리는 구조였다. 이 상태에서 창문을 열면 상단 하단 모두 최대 29 cm밖에 열리지 않았고, 유리창을 깨더라도 창틀이 가로막아 탈출이 불가능했다.[7] 실제로는 각 열차마다 출입문 방식이 '''몽땅 제각각'''이기에 설치하고 싶어도 설치할 수가 없다. 출입문 방식을 한국처럼 완전 통일해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수천여 가지에 수만 대의 전동차와 디젤동차'''의 출입문 방식을 개조하거나 변경해야 하는 극한작업이기에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로, 일본의 스크린도어 완전설치는 아주 먼 미래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