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토후국

 


시칠리아 아미르국
존속기간
831년 ~ 1091년
왕조
칼비드 왕조
수도
팔레르모
공용어
시칠리아어
아랍어
비잔틴어
라틴어
민족구성
이탈리아인
베르베르인
유대인
동로마인
정부형태
군주제(아미르)
국교
이슬람교
기독교
유대교
이전국가
동로마 제국
이후국가
시칠리아 백국
1. 개요
2. 역사
2.1. 이슬람의 시칠리아 상륙
2.2. 정복된 시칠리아
2.3. 이슬람 왕조들의 지배
2.3.1. 아바스 왕조, 파티마 왕조


1. 개요


831년부터 1091년까지 팔레르모를 수도로 시칠리아를 다스리던 아미르국.
652년 시칠리아에 상륙한 이슬람 세력은 동로마 제국을 몰아내고 965년 마지막 기독교 도시 로메타를 점령했다. 이로 인해 시칠리아에서는 동로마와 아랍문화가 섞인 문화가 발달하였다. 1071년 노르만족의 공격으로 멸망하였고, 1091년에 마지막 이슬람 도시인 노토가 정복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세기말까지는 이슬람인들이 시칠리아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2. 역사



2.1. 이슬람의 시칠리아 상륙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동로마 제국에게 점령된 시칠리아는 동로마 제국의 세력이 약해지기 시작하자, 652년 이슬람에게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이들을 격퇴했다.
7세기말 ~ 8세기초에 우마이야 왕조북아프리카를 정복하면서 시칠리아는 본격적으로 이슬람의 위협에 노출되기 시작했다. 700년경부터 동로마 제국과 우마이야 왕조는 협정을 맺어, 시칠리아에서 이슬람 상인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슬람은 완전한 지중해 제해권 장악과 발칸반도와 이탈리아로 세력 확장을 위해서는 시칠리아의 완전한 정복이 필요했다.
이슬람의 시칠리아 침공은 740년부터 본격화되어 이슬람이 시라쿠스를 정복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베르베르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슬람은 시칠리아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2.2. 정복된 시칠리아


826년 시칠리아 동로마 함대의 지휘관인 에우페미우스는 수녀 한 명을 강제로 결혼시켰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미카엘 2세는 이 일을 눈치채고 콘스탄티누스 장군에게 결혼을 끝내고 에우페미우스의 코를 잘라내라고 명령했다. 이에 에우페미우스는 콘스탄티누스를 죽이고 시라쿠사를 점령하였으나 결국엔 패배하고 북아프리카로 쫓겨났다. 북아프리카로 도망치는 에우페미우스는 튀니지의 아그라비드 에미르 지야다트 알라에게 시칠리아의 통치를 제의했고, 시칠리아로 이슬람 군대가 파견되었다.
지야다트 알라는 조공을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에우페미우스에게 시칠리아를 가지도록 약속했다. 이슬람군은 70세의 고령인 아사드를 지휘관으로 하는 1만명의 병력과 100척의 함선을 이끌고 시칠리아로 향했다.
827년 동로마 제국과의 첫 전투에서 이슬람은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지휘관 아사드는 시라쿠사를 포위하였고, 1년간의 공방전끝에 시라쿠사를 정복하였다. 하지만 페스트로 인해 지휘관 아사드와 많은 병사들이 죽자, 이슬람세력은 시라쿠사에서 후퇴하였다. 이후 이슬람은 공세를 재개하였으나, 카스트로기오반니를 정복하지 못하고 다시 마자라로 후퇴했다.
830년 이슬람군은 이프리키야와 안달루스에서 증원을 받아 병력이 3만명으로 증강되었다. 이슬람은 830년 7월에 동로마 함대를 격파하고 다시 시칠리아 공격에 나섰으나 그해 8월 또다시 페스트로 인해 마자라로 후퇴하고 이프리키야로 돌아가야 했다. 이슬람은 팔레르모 포위를 위해 831년 오랜 포위전끝에 팔레르모를 점령하였다. 이로써 팔레르모는 알 마디나로 이름이 바뀌고 시칠리아 아미르국이 건국되었으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시칠리아가 완전히 정복되기까지는 10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2.3. 이슬람 왕조들의 지배



2.3.1. 아바스 왕조, 파티마 왕조


시칠리아는 아바스 왕조파티마 왕조에 의해 연이어 지배를 받았다. 시칠리아의 인구 대부분은 수니파였기에 이들은 파티마 왕조에게 격렬히 저항하였다. 시칠리아는 파티마 왕조를 피해 도망치는 수니파들의 도피처가 되었다. 한편 동로마 제국은 시칠리아가 혼란한동안 잠시 시칠리아의 일부를 수복하였다가, 다시 밀려났다. 파티마 왕조의 칼리파 알 만수르의 통치기간 동안 게속해서 반란을 일으키는 동로마 세력이 약화되었고, 시칠리아는 번영하였다.
10세기 말부터 파티마 왕조의 쇠퇴와 함께 시칠리아 역시 쇠퇴하였다. 11세기부터는 시칠리아내의 분쟁이 더욱 격해져 시칠리아에는 다시 큰 혼란이 찾아왔다. 이 시기 지리 왕조가 파티마 왕조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시칠리아를 점령하였다.

2.3.2. 지리 왕조


지리 왕조는 토지개혁을 추진하여 시칠리아의 생산성을 크게 높였다. 1050년까지 시칠리아의 인구는 크게 늘어 수도 팔레르모는 인구 35만명을 보유한,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11세기말에 노르만족들이 시칠리아를 침공하여 시칠리아 아미르국은 멸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