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티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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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렌티 포미치 시티코프(러시아어: Терентий Фомич Штыков, 벨라루스어: Цярэнцій Фаміч Штыкаў 차렌치 파미치 슈티카우, 1907년 2월 28일 ~ 1964년 10월 25일)는 소련의 군인이었다. 그는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있으면서 해방 후 북한의 소련 군정을 총지휘했다. 그의 유고 "시티코프 일기"는 해방 직후 남북한 역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다.
2. 생애
러시아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고교 졸업후 레닌그라드의 기관차 수리공장에 취직하여 노동자로 근무하였다. 22세 때인 1929년 소련공산당 레닌그라드시당에 입당했다. 그는 곧 소련공산당 레닌그라드시 지구당 제1서기이자 소련공산당 중앙당 정치국원으로 이오시프 스탈린의 측근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눈에 들어 가까운 사이가 되고, 고속승진하여 평당원에서 얼마 뒤 레닌그라드시당 제2서기로 올라갔다. 1941년 겨울부터 약 900일 동안 진행되었던 레닌그라드(페체르부르크) 포위전 때 '식인단속 기동타격대' 대장을 지냈다.
3. 활동
소련은 1945년 3월 하바로프스크에 사령부를 둔 극동전선군(Far Eastern Front)에서 분리하여 보로실로프(오늘날 우수리스크)에 연해주 군단(Maritime Group of Forces)을 설치하였다. 1945년 8월 초 대일본전을 위해 보로실로프의 연해주 군단은 제1극동전선군으로, 하바로프스크의 종래의 극동전선군은 제2극동전선군으로 개편하고, 만주서부를 침공할 트랜스 바이칼 전선군 등을 설치하며, 이 3개 전선군을 총지휘할 극동군 총사령부(Far East Command)를 하바로프스크에 두었다. 일본전이 끝난 후인 9월 30일에 제1극동전선군은 연해주군관구(Primorsky Military District)로 개편된다. 시티코프는 1945년 4월 보로실로프의 연해주군단으로 부임해와 제1극동전선군, 연해주군관구로 명칭이 바뀌는 동안 줄곧 사령관인 키릴 메레츠코프 원수 휘하의 군사위원으로 있었다. 이 때 시티코프가 한국문제에 관여한 시기에 그의 정치적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는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연해주군관구와 25군 사령관에게 하달한 명령서에 북한의 민간행정에 대한 지도는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에서 수행할 것을, 즉 시티코프가 총괄할 것을 지시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러시아 국방성문서보관소 문서는 이렇게 전한다. 시티코프는 당시 "연해주 군관구 사령부는 주 북조선 소련군 유지를 위한 비용이 기본적으로 소련의 부담이 되도록 하는 제의를 당신의 결정으로 내놓았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북조선이 부담 지는 소련군의 부양은 정치적으로 유리하지 못한데, 왜냐하면 남조선 주둔 미군은 자국의 부담으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주 남조선 미군은 돈을 주고 조선 식품들을 이용하지조차 않고 있고, 자국 군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은 미국에서 들여옵니다. 북조선 예산 부담으로 우리 군대의 유지는 조선 사회에 부정적인 분위기를 불러일으킬 것이며, 미국인들과 조선 반동들에게 반소선동을 위한 더한 명분을 줄 것입니다. 둘째, 북조선이 자신의 군대를 유지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북조선의 예산은 소련군 유지를 위한 비용을 견딜 수 없습니다."라고 보고를 했었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 제25군은 제1극동전선군(연해주군관구) 산하 부대이다. 평양 소련군정의 최고사령관은 표면적으로는 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1900~1979) 대장이었지만 그는 정치를 잘 모르는 야전군인이라, 실제로는 연해주 군관구의 군사위원 시티코프가 보로실로프와 평양을 오가며 소련군정을 총지휘하였다. 평양에 상주한 25군 군사위원 니콜라이 레베데프는 뒷날 증언에서 시티코프에 대해 '그가 조선에 있건 연해주군관구에 있건 또는 모스크바에 있건 간에 그의 참여 없이 38선 이북 조선에서 이뤄진 조치란 하나도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북한 주재 소련 대사로 있던 시기, 시티코프는 1949년 1월15~25일 중 남한의 군인과 경찰이 수차에 걸쳐 38선을 넘어 침입해 온 사건이 발생했다고 보고(1월 27일)했다. 그러나 그는 대내외상황을 고려할 때 현시점에서 남한군의 침입이 있다고 믿기는 어렵다고 보고 남한의 38선 부근 병력 집결은 북한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견을 개진했다. 2월 3일에는, 38선 부근에서 일어난 북한군 초소에 대한 남한군의 공격에 관해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외무장관에게 보고했다. 그는 보고서에서 북한군은 1명당 소총 탄약이 3~10발 정도밖에 없어 대부분의 경우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고 지적하고 극동군구 사령부가 북한의 2개 여단에 대한 무기공급을 지연시키고 있는 바 무기가 조속히 공급될 수 있도록 몰로토프 외무장관이 개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다음 날(2월 4일)에도, 그는 남한군의 초소 공격과 관련해 북한 내무성이 상세한 사실을 알리는 문서를 2월 5일 발간할 예정임을 보고하였다.
이 문서는 이러한 무력도발이 유엔 한국위원단의 도착에 즈음해 발생하고 있음과 미군의 한국철수를 늦추기 위한 책략임을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8월 27일, 그는 8월 12~14일의 김일성과의 면담내용을 스탈린에게 보고하고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북한의 대남공격이 불가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1. 현재 한반도에는 두 나라가 존재하며 그중 남한은 미국 및 기타 국가에 의해 승인됨. 북의 공격시 미국은 남쪽을 무기탄약 공급뿐 아니라 일본군의 파견을 통해 지원할 가능성이 있음. 2. 북의 대남공격은 미국이 대소련 모함∙선전에 이용할 수 있음. 3. 정치적 측면에서 북의 공격은 남북한 인민 대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있으나 군사적 측면에서 북은 아직 남에 대해 압도적 군사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4. 남한은 이미 상당수 강한 군대와 경찰력을 창설하였음.(시티코프는 김일성이 제의한 강원도 지역의 '해방구역' 창설계획에는 찬성하고 또한 인민군에 의한 옹진점령계획도 군사적으로 타당하다고 보고했으나 남한의 반격시 이 작전이 지구전이 돼버릴 수 있다고 언급) 스탈린에게 제출한 9월 15일자 보고서에서, 그는 “김일성과 박헌영은 현 정세하에서는 평화통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북이 남한 정부를 무력공격하면 남북양쪽의 인민들이 이를 지지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지금 무력통일을 안하면 통일이 연기될 뿐이고 그동안 남한 정권은 좌익세력을 탄압하면서 북진할 수 있는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 통일은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김일성은 남진을 시작할 때 소련과 중공이 원조해줄 것을 기대하는 듯하다.”고 썼다. 그의 견해는 남북의 내전은 북에 유리하나 북한군이 남한 공격을 개시하면 소련이 국제적 비난을 받게 되며 미국이 끼어들 것은 물론 남한을 적극 지원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또, 물론 북한이 남한에서 빨치산 활동을 강화하는 것은 좋다. 옹진작전은 유리한 상황하에서는 실시 가능하고, 이를 위해 38선 지역에서 남쪽의 도발을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소련 공산당 중앙위는 현재의 대내외적 상황으로 보아 남한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적절치 못하다는 지침을 시티코프에 하달했다.
시티코프는 1950년 1월 17일 박헌영 관저에서 열린 리셉션에 참석하여, 김일성의 전쟁 승인 요청을 받았다. 1월 29일에는, 대한민국 정부의 비공개회의(1월 6일)의 내용을 외무부에 보고했다. 그 내용은,
- 분쟁 발생시 미국이 한국을 도와줄 희망은 별로 없다는 것,
- 미국은 대만방어를 위해 장제스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
- 영국의 중국 승인(1950년 1월 6일)은 서방의 북한 승인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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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코프는 평생 본인이 있었던 일들을 사진으로 남기고, 기록으로 꼼꼼히 적는 습관이 있었다. 그가 심장마비로 죽는 순간까지 사진기와, 메모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유산은 "시티코프 일기"다. 일기장은 구소련 붕괴 후에 발굴되었는데, 소련군정의 북한 통치와 대남공작에 대한 주요한 내용들이 담겨있다. 일기 초반부 소련 정부는 기본적으로 북한 주둔 군대의 유지비용을 북한 당국에 부담지어 왔는데, 시티코프는 이 정책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소련 정부의 방침이 결과적으로 소련의 국익에 저해될 뿐더러 북한의 경제적 부담에 대한 우려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한반도 정책의 입안과 집행 과정에서 소련 스탈린의 지도부와 다소간 다른 의견을 가졌다할지라도 자신의 입장을 전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수단은 없었다. 그는 소련의 국가이익을 보다 더 준수해야하는 소련의 군인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최대한 북한측의 이익을 반영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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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차 美蘇공동위원회 소련 측 수석대표로 나서 美군정과의 협상에서도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사진 속의 인물이 바로 하지 주한미군사령관(왼쪽)과 시티코프 소련군 연해주관구 군사평의회 위원(오른쪽)이다. 1929년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스티코프는 한국에 오기 전 1938년 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 제2비서, 1939년 소련-핀란드 전쟁 시기에 제7군 군사평의회 위원, 1943년 볼호프스키 전선 군사평의회위원, 1944년 카렐리야 전선 군사평의회위원 등을 역임했다. 군인이면서 철저한 공산주의자, 노련한 정치가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는 1956~61년 소련공산당중앙위원, 1963년 소련공산당중앙위원회 당국가검열위원회 부위원장 등 당의 요직들을 거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