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군

 



[image]
[image]
[image]
[image]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군
Soviet Armed Forces
Вооружённые силы СССР

[image]
소련군(1985년 기준)
상비군
5,070,000명
예비군
13,500,000명
소련 육군
전차
55,260대
장갑차
70,577여대
대포
95,124문
육군소속 헬기
7,341여기
소련 해군
항공모함
5여척
순양함
32여척
구축함
74여척
프리깃함
32여척
핵잠수함
227여척
재래식 잠수함
154여척
초계함
185여척
고속정
430여척
상륙함
32여척
소련 공군
전투기
6,890여기
수송기
2,135여기
폭격기
1,200여기
정찰기
1,000여기
공중급유기
210여기
대잠기
185여기
미사일
5,361여발
핵미사일 발사차량 SS-25
306여발
핵미사일 발사차량 SS-27
54여발
1. 개요
2. 수뇌부
2.1. 1941년
2.2. 1945년
2.3. 1991년
3. 발전
3.1. 창군과 발전
3.2. 종심 작전의 부상
3.4. 냉전
3.4.1. 공군과 방공군
4. 병폐
4.2. 부실한 병참 능력
4.3. 부족한 전문 인력
4.4. 낮은 훈련 수준
4.5. 취약한 군인 복지
4.6. 정치장교의 전횡
4.7. 인명경시
4.7.1. 반론(?)
4.8. 전시강간
5. 징병제
6. 개입한 전쟁 및 분쟁
7. 군조직
7.1. 각군별
7.2. 독립 군종
7.3. 군관구
7.4. 해외주둔 소련군
7.5. 함대
9.1. 관련 소련군영상
10. 장비, 차량, 군복
11. 한국계 인물
12. 기타
13.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image]
그대는 해를 거듭하며 강인해지는 소비에트 인민의 군인이라![1]
소련군은 소련국군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붕괴하는 순간까지 미군과 함께 세계 최강의 군대였고,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군대였다. 2차 대전 종전시에는 약 1000만, 냉전 말기에도 총병력이 500만 명 이상이었다.[2] 국방예산은 1982년 기준 2,000억 달러였다. 2015년 현재 1년마다 엄청난 국방예산을 퍼붓는 그 중국조차도 국방예산이 1132억달러로 80년대의 소련보다 딸린다. 환율 물가상승률 등을 다 따지면 지금 중국의 4~8배까지도 간다. 지금 달러로 거의 7,000~8,000억 달러 수준. 미군이 2015년 기준 7,000억 달러 수준으로 이 수치와 유사하다.[3]
1918년 창설된 소비에트 러시아군(Вооружённые силы Советской России)을 시초로 소련이 성립되는 1922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군(Вооружённые Силы Союза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이 창설되었다. 약칭을 소련군(ВС СССР)이라 하며 1993년 12월 25일까지 존속했었다.[4] 흔히 이전 명칭으로 알려진 노동자와 농민의 붉은 군대(Рабоче-Крестьянская Красная Армия), 약칭 붉은 군대, 적군, 노농적군(Красная Армия, РККА)은 1918~46년 동안의 소련 육군을 지칭하는 것으로 소련군 전체를 지칭하지는 않는다.[5]
육군, 공군, 방공군, 전략로켓군 등이 속하는 소비에트 군대, 해군이 속해 있는 소비에트 함대로 크게 나뉘고 여기에 각 군종이 배속되는 형태라 서방권 대비 군종별 독립성이 낮은, 준 합동군에 가까웠다. 계급 체계도 군대형과 함대형으로 나뉘어, 해군과 해안경비대 등만 쓰는 함대형 계급 일부를 제외하면 군대형 계급 체계로 통일돼 있었다. 거기에 해군 소속 해군 보병항공대, 의무, 법무 병과도 군대식 계급을 썼는데, 이들의 경우 군종에 구애받지 않고 인사 이동을 수시로 했기 때문이다. 즉, 한 군의관이 공군 비행단 의무대에서 근무하다 해군 순양함으로 발령받는 식의 모습이 흔했다.
초기에는 종심작전의 창안 등 큰 발전을 보여주지만 대숙청으로 죄다 무위로 돌아가는 등 불안불안한 모습을 보여주더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추축군을 상대로 혹독한 대가를 치르며 경험과 전략을 배우고 종심작전을 부활시키는 등 크게 성장한다.[6] 승전한 시점에서는 그 군사력이 워낙 강한데다, 자본주의 세력에 대항하여 싸울 것을 명시한 공산당 이론과 힘의 논리에 민감하던 점이 겹쳐 다른 나라들을 불안케 했다. 실제로, 냉전 기간 동안 소련군의 주된 임무는 전쟁발발시 나토군을 분쇄하고 서유럽에 진주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막대한 양의 병력과 전차, 항공기를 준비하고 육군 병력의 70% 가량을 유럽지역 국경에 공격형으로 배치하고 있었다.[7]

2. 수뇌부


2차 세계대전 때까지의 소련군 수뇌부는 스타프카라는 일종의 위원회로 구성되어 있었다.

2.1. 1941년


[image]
독소전쟁 발발당시 스타프카의 구성원.
위줄부터 세묜 티모셴코 원수(국방장관), 이오시프 스탈린 공산당 서기장,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외무장관, 게오르기 주코프 대장(총참모장),
세묜 부됸니 원수,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대장(해군 총사령관)

2.2. 1945년


2차 세계대전 승리 직전이다.
총사령관
국방장관
총참모장
[image]
[image]
[image]
이오시프 스탈린
이오시프 스탈린 대원수[8]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
총사령관 대리
해군 총사령관
공군 총사령관
[image]
[image]
[image]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원수
알렉산드르 노비코프 공군상급원수

2.3. 1991년


소련 해체 당시인 1991년 기준이다.
통수권자
국방장관
총참모장
[image]
[image]
[image]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
예브게니 샤포슈니코프 공군 병과 원수[9]
블라디미르 로보프 육군 대장
이 중 국방장관은 8월 쿠데타 이후 임명된 옐친계 인물들이다.

3. 발전



3.1. 창군과 발전


러시아 제국러일전쟁 패배와 국내 혁명운동으로 나라 꼴이 말이 아닌데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결국 전비 때문에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해 제정이 몰락하고 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임시정부는 제정에 뒤이어 전선을 맡았으나, 결과적으로 전황은 더욱 나빠졌고, 이 틈을 타서 볼셰비키 당이 휘하 소수병력을 이용하여 정권을 전복시키면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탄생했다.
그러나 새로 정권을 잡은 이들은 대다수가 군대나 군사에 정통하지 못한 비전문가들이었다. 게다가 아직 불안정한 정권의 상태를 볼 때, 군대처럼 힘있는 집단이 반란을 시도할 경우 체제가 전복되는 것도 가능했다.[10] 영관급 이상의 경험많은 장교들은 대부분 반혁명세력의 편에 섰고, 이들은 공산당에 대항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볼셰비키 당의 무력은 병사 소비에트와 연결된 적위대뿐이었다.
그 후로 러시아는 1918년부터 20년까지 적백내전에 돌입하며, 실제로 그 후유증은 20년대까지도 계속됐다. 그 불안한 틈을 타고 다른 나라 군대들이 러시아를 침범하기도 했다. 미군, 일본군도 백군을 지원하며 공산세력과 싸웠지만 결국 승리는 붉은 군대에게 돌아간다.
초기의 적위대는 계급제를 완전히 없애려 했다. 붉은 군대의 전신으로도 볼 수 있는, 병사 소비에트에서 지휘관은 선거로 뽑히던 전통 때문에, 적위대의 지휘관은 선거로 뽑혔다. 그러나 이 때문에 사병 출신들이 지휘관을 맡게 됨에 따라 내전 초기에 적위대는 연패했다. 레온 트로츠키는 1918년 적위대를 개편해서 장교선거제도를 폐지하고 위에서 능력자를 지휘관에 임명하는 체제로 바꾸고, 이름을 "노동자와 농민의 붉은 군대"로 개칭했다. 문제는 "능력자"들이 대부분 러시아 제국군 장교출신이었으므로, 이를 감시하게 도입한 것이 정치장교 제도. 그러나 트로츠키 아래서 계급제도는 끝내 내전이 끝날 때까지 도입되지 않았다.
그래서 군대에는 계급제에 의한 통제가 사라지고 부대 내에는 오로지 '분대장,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같은 직책만이 존재하게 됐다. 예외는 장군 뿐이었기에, 군의 계급은 사실상 '병사, 장군' 이 둘 밖에 없었다. 사실 고급 장교들 사이에서는 그런 직책이 계급 역할을 하기도 했다. 보병이나 기병들로만 싸운 적백내전에서 승리하는 등, 처음에는 이런 체제가 그럭저럭 돌아갔다. 그러나 문제는 군이 복잡해지면서 불거졌다. 복잡한 조직에서 너도나도 같은 계급이다 보니, 지휘관의 명령을 듣더라도 병사들이 잘 따르려 하지 않게 된 것이다. 중대장이나 대대장 이외엔 중간 책임자가 없었기에 병사들은 평상시에도 통솔하기 힘들었지만, 전시에는 더더욱 통제가 불가능했다. 누구 하나 명령이 제대로 수행되는지 안 되는지 관심없었고,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다. 때문에 트로츠키에 이어 붉은 군대의 총사령관[11]이 된 미하일 프룬제는 이를 개혁하려 했으나, 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되면서 이 문제는 계속 남아있었다. 그동안 붉은 군대는 500만 대군으로 성장한데다가, 기갑부대, 공수부대와 같은 새로운 병과가 창설되면서 계급의 필요성이 절실히 제기되어, 결국 1935년 붉은 군대에 계급제도가 마침내 도입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적백내전의 경험은 소련의 군사학과 군사 사상을 크게 발전시켰다. 1차대전보다 훨씬 광활한 지역에서 내전을 겪은 소련군은 부족한 예비 전력을 철도로 이동시키면서 전선 곳곳을 틀어막았고, 간신히 패배를 면할 수 있었다. 연이어 위협받던 전선을 증강하기 위해 철도로 대규모 부대가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적백내전은 또한 제대 전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일부 보병 사단들은 전쟁 기간 중에 다섯 차례나 여러 전선을 오가야 했다. 이 경험을 통해 모든 참전자들은 준비된 전력과 전략 예비대의 필요성을 뼈아프게 인식하게 되엇다.
내전 과정에서 소련군 1세대 지휘관들은 소수의 전력으로 광대한 공간을 방어한 대다수의 전투들을 큰 경험으로 삼아, 이와 같은 전장 환경에서 모든 전술적인 작전들을 전체 전역으로 통합하여, 적 후방 깊숙한 목표를 겨냥했다. 그리하여 붉은 군대는 승리의 2가지 원동력은 특정 지역에 적을 압도하는 전력을 집결시키는 것과 산개한 적을 섬멸하기 위한 후방 진출, 돌파, 포위 등의 신속한 기동에 있음을 깨닫게 되어 당시의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먼저 기동전의 필요성을 깨닫고 발전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기동의 전제 조건은 고도로 기동화된 공세 전력이었고, 적백 내전에서는 이점을 무장 열차와 차량, 특히 기병 전력에 많은 부분을 의존했다.

3.2. 종심 작전의 부상


적백 내전이 끝난 후 붉은 군대는 전선군 내지 야전군 규모의 작전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1차대전 시절같은 1회의 전략적 승리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닌 지속적이고 누적되며 연속적이고 장기적인 작전을 연구하게 된 것이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폴란드의 비스와 강까지 진격한 미하일 투하쳅스키는 위와 같은 소련 군사학계의 논의에 공감하여 블라디미르 트리안다필로프의 '충격군' 이론을 받아들여 이를 자신의 '광정면 동시접촉 이론'과 결합시킨 소련식 기동전 전술인 종심전투교리를 완성시켰다. 투하쳅스키와 트리안다필로프는 현대식 군대는 한 번의 결정적인 전투로 무너트리기에는 너무나 규모가 방대하고 피해로부터의 회복도 빨라서 공격자는 일련의 연속적인 공세를 펴야 하며, 각 공세는 직후에 적 후방에서의 신속한 전과확대로 연계되거나, 방어자가 전력을 재정비할 때는 새로운 전투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전투를 일반적인 전략의 문맥에 놓고 본다면, 당시 소련 군인들은 개별 전투의 전술과 전체 전쟁의 전략 사이에 위치한, 용병술의 새로운 수준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중간적인 수준은 알렉산드르 스베친이 저술한 책 제목인 작전술이라는 이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작전술은 전체 전략적 작전이나 전체 전역의 맥락에서 대규모 부대의 작전을 기획하고 조율하는 상급 지휘관들의 영역이자, 전략적 목표 달성을 위한 일련의 연속적인 군사 행동이다. 영어로는 'Operational Art'.
모든 전선에서 충분한 밀도의 부대로 적을 고착시킨 후(견제군의 역할) 선택된 지점을 보병, 포병, 전차가 결합된 충격으로 돌파할 수 있으며, 그 간극을 통하여 항공기 및 기계화 부대의 지원을 받는 기동군을 적 후방에 투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종심전투교리는 1929년부터 소련군의 표준 전술로 정착됐지만 아직 공업화되지 않은 소련에게는 다소 꿈같은 전투교리였으며 그 영역이 전술 차원에만 미쳤고 아직 작전술의 범위까지는 발전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당시까지는 투하쳅스키 이론을 지지해 준 스탈린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종심전투 교리의 실행을 위한 대규모 기갑세력 양성 등 붉은 군대의 현대화 계획을 적극 집어넣었다. 이를 통해 1936년에 이르면 마침내 소련 군사학계의 최고 걸작인 종심작전이 탄생하게 되었다. 종심작전은 현대의 러시아군중국 인민해방군, 조선인민군 등의 공산권 표준 전투교리로 자리잡게 된다.
당시 영국의 리델 하트와 프랑스의 샤를 드 골기동전 교리를 상부에 내놓았지만 번번히 무시당하고 독일의 하인츠 구데리안 또한 그다지 대접받지 못한 시대임을 감안하면 종심작전의 등장은 큰 발전이었다.
[image]
전술 훈련중인 소련군. 1935년.
그러나 결국 대숙청의 칼바람이 붉은 군대에 몰아닥쳐서 투하쳅스키가 처형당하자, 종심작전은 철저히 부정당하게 되었고 소련의 군사 사상은 크게 퇴보하고 만다. 그 결과는 겨울전쟁독소전쟁 초반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혹독한 경험을 치른 소련군은 게오르기 주코프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를 비롯한 숨은 투하쳅스키 지지자들에 의해 종심작전이 부활하고(앞으로 종심작전을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마침내 베를린을 점령해 나치 독일을 패망시키게 된다.
당시 미국에서 가상적국이었던 소련군의 군사 교리를 특수작전교범(Special tactics)이라는 이름으로 연구했다. 그 결과를 러시아어에서 영어로 번역해 OPFOR Battle Book ST 100-7 (156쪽 분량) 공개했다. 그래서 그 내용을 공부할 수 있다.
다음은 소련군 작전술의 핵심들이다.
  • 기동을 통해 적을 물리친다.
  • 적이 대규모로 유기적인 활동을 할 수 없도록 방해한다.
  • 적이 상황에 맞춰 반응하는 것을 막는다.
  • 군단 이상 단위를 갖는 적의 조직과 통제를 부순다.
이를 위해서 강조되는 요점은 다음과 같다.
  • 기동성
  • 속도
  • 우선권
  • 유연성
  • 주 목적 달성에 집중할 것
  • 기습
  • 전장 정보
  • 전투력의 유지
  • 효과적인 조직

3.3. 제2차 세계 대전


1941년 6월 독소전쟁(대조국전쟁) 발발 이후, 12월 모스크바 전투 직전까지 약 5개월간 소련군이 날려먹은 병력은 사상자와 포로를 합해 약 600만으로서, 전쟁 직전의 총전력을 거의 탕진했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여기에 장비의 손실도 엄청나서 전투기와 전차의 손실량은 각각 2-3만대에 육박했다. 이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첫번째로 대숙청으로 조직력과 지휘력이 매우 약화된 점, 두번째로 부적절한 병력 배치, 세번째로 2년간 실전경험을 쌓아 최강의 군대로 성장한 독일군의 가공할 전력 등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엄청난 병력을 날려먹었기 때문에 야전의 허리가 되는 경험 많은 초급장교와 부사관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으며, 전쟁이 계속되면서 전혀 훈련을 받지 않은 초급장교들과 부사관들이 일선 지휘를 맡으면서 1943년 말까지 독일군에 비해 몇 배나 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전쟁터란 현세의 지옥을 버티면서 사관학교가 아닌 실전에서 교리를 학습하게 된 이런 초급장교나 부사관들의 레벨업이 계속되고, 살아남은 사병들이 경험을 쌓으면서 초급장교나 부사관으로 계속 승진함에 따라 소련군의 전력도 계속 향상된다. 특히 러시아 혁명 이후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대숙청 이후 쾌속 승진한 40대 고급지휘관들의[12] 지휘가 세련되어 가면서 소련군은 점점 소프트웨어 면에서 독일군에 맞설만한 진용을 갖추게 되었다.
소련은 이미 1941년 전쟁 발발 직후부터 독일이 1943년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있던 총력전 전 산업 총동원 체제를 실시하였다. 독일군의 진격이 예상되는 곳에서는 아예 공장 전체의 설비가 며칠 만에 해체되어 우랄 산맥 동쪽에서 조립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무기의 대량 생산을 달성함으로서 초기에 손실했던 장비와 무장을 만회하고도 넘칠만큼 보급을 확보하게 되었다. 분명히 개별 무기의 성능은 뛰어난 기술력을 바탕으로한 독일군이 우수했지만, 소련은 개별 성능은 독일에 미치지 못해도 생산 비용, 소비 자원, 생산 물량 등을 고려한 총합은 독일보다 우수한 것으로 하드웨어 면에서도 우위를 점하는데 성공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기점으로 독일군 지휘부는 소련을 군사적으로 정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특히 미군이 개입한 이후로는 소련의 정복이 아니라 전선 안정화를 목표로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43년 여름 소련군의 주력을 섬멸하기 위한 치타델 작전을 실시했다가 위와 같이 기량이 향상된 소련군에게 결정적으로 패하면서 동부전선의 균형추는 소련측으로 기운다. 이후 소련군은 투하쳅스키가 생전에 꿈꾸었던 종심작전 교리를 십분 발휘하여 독일군을 몰아붙여 결국 승리했다. 소련군은 바그라티온 작전, 비수아-오데르 대공세, 만주 작전에서 인상적인 기갑 웨이브 공세를 발휘함으로써 서방측에게 깊은 인상과 함께 공포감을 줬다.

3.4. 냉전


냉전이 시작되자 소련은 미국에 위협을 느끼고 동유럽 위성국들과 함께 집단방위동맹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 결과물로 나온 것이 바르샤바 조약기구였다. 소련은 미국으로 상징되는 서방세력과 직접적으로 맞설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동유럽 위성국들로 하여금 완충지대를 만들어서 2차대전과 같은 사태를 다시는 겪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의 두 배의 국력을 자랑하고 있었으며, 2차대전에서도 소련의 생산시설은 반 이상 파괴되었지만, 미국은 피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소련이 단시일 안에 미국의 경제력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재래식 전력을 대규모로 확충하는 것보다는 핵개발이 더 싸게 먹히므로, 흐루쇼프는 돈이 많이 드는 재래식전력을 줄이고, 이 재원을 경제개발에 투입하는 대신, 비교적 돈이 적게 드는 핵무기와 대륙간탄도탄으로 전쟁 억지력을 확보하려 했다.[13] 이는 2차대전으로 비대해진 군부의 반발을 불렀고, 흐루쇼프는 주코프를 해임함으로써 일단 군부의 반발을 눌렀지만, 군부의 불만은 지속되었다. 이렇게 핵무기와 로켓을 강조하여 만들어진 결과물이 스푸트니크차르 봄바이다.
소련 말기에는 고르바초프 집권 이후 실시한 개혁과 혼란 속에 1991년 소련은 붕괴하였고, 소련군도 공중분해되었다. 국방비나 병력이 전성기의 1/10까지 줄어들고, 국방 시스템이 모조리 붕괴된 나머지 2000년대 중반까지 그 후신인 러시아군은 안습이었다. 이 상황은 푸틴 집권 이후 나아졌다. 자세한 것은 러시아군 참조.
  • 소련 육군
  • 소련 해군: 전통적인 대륙국가였기 때문에 육군에 비해 해군은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그래도 냉전 시대에 소련 해군미 해군의 뒤를 이은 세계 2위의 해군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미국을 제외하면 그 어떤 나라도 소련 해군의 전력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문서 참조.

3.4.1. 공군과 방공군


냉전기간 동안 일단 소련은 항공기의 숫자 면에서는 미국을 훨씬 앞지르고 있었으나, 질적 전력면에서 뒤쳐져 공군력에서 밀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2차 세계대전 시기 독일 공군에 워낙 호되게 당한 것 때문에 대공 미사일과 화기류 개발에 큰 관심을 쏟았다. 2차대전에서 소련 공군을 지휘한 알렉산드르 노비코프 공군원수는 흐루쇼프에게 대규모 공군 건설을 제안했으나, 흐루쇼프는 국방비를 줄이고 싶어했기 때문에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렇기 때문에 방어에 치중하여 대공미사일과 대공무기 개발에 열심이었고, 특히 대공미사일 성능은 뛰어났다. 그러나 80년대 초까지도 전투기와 요격기는 숫적 우세를 앞세우는 저성능기 위주의 항공기가 대다수였고, 이는 이란 혁명 당시 입수된 미군 항공기와 그 교범을 분석한 소련군이 Su-27MiG-29 등을 배치할 때까지 별다른 대책이 없이 이어진다.[14] 그나마 항공기의 속도나 기동성, 미사일의 사정거리 등의 하드웨어 수준은 미국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항공 전력에게 매우 중요한 레이더, 통신 등 전자 기술은 미국에 비해 확실히 부족했다.
소련군이 대공 체계를 아래에 언급하는 공군-방공군 체계로 이원화하고 지상 관제소의 관제에 따라 수동적으로 대공 체계를 수행한 것도 이 때문이다. 부족한 전자 기술 때문에 제한된 전술기의 체급에 전자 장비를 탑재하는 건 당연히 한계가 있었고, 결국 지상 관제의 지원을 받아야 제대로 된 대공 체계를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군은 공군과 방공군을 분리하여 방공군에게 방공전투기 + 고고도 대공미사일, 군사위성을 담당시켰다. 우주군도 방공군 소속이다. 일반 공군에는 전투기와 전략, 전술폭격기를 운용하게 했다. ICBM이나 중거리탄도탄 같은 경우는 전략로켓군에서 담당했다. 그 이외에도 특이한 점은 수송기 세력인데, 워낙 영토가 넓다보니 유사시 신속대응군 역할로서 공수부대의 규모와 임무가 매우 중요하였다. 때문에 수송기의 성능과 그 숫자 등에서 우월한 경향을 보인다. 냉전기에 생산된 소련 수송기들은 냉전이 끝난 지금까지도 민간화물분야에서 독보적으로 자주 사용될 정도.

4. 병폐



4.1. 대숙청


위에 언급한 정치장교들은 소련군의 전투력을 작살내는 요소였고, 투하쳅스키를 비롯한 장성과 장교들은 이 때문에 정치장교를 없애던가 권한을 줄이려 노력했다.
또한 우크라이나 대기근에서 스탈린은 소련군을 동원해 우크라이나를 철저히 탄압했고, 수백만의 아사자가 발생했다. 공산주의 이념적으로도 군대는 인민을 위한 것이고, 당시 정식 명칭조차 '노동자 농민을 위한'인 붉은 군대가 이 따위 짓을 하는걸 본, 혹은 참여한 장교들은 스탈린에게 반감을 품었고, 얼마 안되던 당 소속의 군인들이 스탈린에게 반대표를 던지기도 했다. 이는 스탈린의 의심병 을 부채질했고 결국 대숙청이 벌어졌다.

4.2. 부실한 병참 능력


겉으로 드러나는 숫자나 전투력은 무시무시했지만, 그 내실은 부실한 측면이 많았다. 특히 전투력의 기간이 되는 보급 능력과 지원 병과에서 그 열악함이 두드러졌다. 이는 소련이 경제력에 비해 무리할 정도로 군대의 체급을 키워놓는 바람에 발생한 문제였다. 당장 전투 장비의 수량을 유지하는 데만 여력을 집중하다보니 전투 분야를 뒷받침해주는 비전투 분야가 부실해진 것이다. 비전투 분야에서의 열악함은 보급, 의료, 교육 및 훈련까지 그 전반에 걸쳐 심각했다. 이러한 문제는 전신인 구러시아 제국군도 가지고 있었고, 후신인 현대 러시아군에도 계승되었다.
냉전 당시 동구권과 서구권은 경제력의 차이가 너무 컸다. 그런 상황에서 서구권과 대등한 군사력을 건설하는 것은 소련에 심각한 부담이었다. 바르샤바 조약국은 소련을 제외하면 기껏해야 중진국 수준이었던 폴란드,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등이었다. 반면, 나토에는 미국, 서독, 영국, 이탈리아 같은 선진국이자 군사강국들이 포진해 있었다. 게다가 독자노선을 표방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프랑스도 준 가맹국이었다.[15] 소련과 미국만 일대일로 비교하면 70년대 후반 즈음에는 소련군의 국방비가 얼추 미군과 대등한 수준까지 도달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군사력을 지탱하는 경제력과 동맹국의 양질에서는 나토가 바르샤바 조약국에 비해 넘사벽이었다.
결국 무리하게 키운 체급을 유지하느라 군수지원, 의료지원 같은 지원 분야는 부실해져갔다. 특히 탄약 등의 군수물자 비축량은 비실전적인 것을 넘어 비현실적인 수준이었다. 일례로, 소련군이 미군의 험비 한 대를 상대하기 위해 할당한 DShK 기관총탄의 숫자가 겨우 2발이다. 단 두 발로 미군 험비를 때려잡을 수 있을 만큼 소련제 중기관총의 성능이 우수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비현실적인 가정을 하지 않으면 계산이 맞지 않을 정도로 비축 탄약량과 탄약 생산력의 여유가 없었다는 뜻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가상적국인 미국은 쇼미더머니로 비유되는 압도적인 생산력을 자랑했다. 단순히 생산력만 엄청났던 것이 아니라 군대의 후방 지원체계도 매우 튼실했다. 베트남 전쟁 때 다 못 쓰고 창고에 썩어넘칠 대로 쌓아놓은 폭탄을 걸프전쟁 때 다 처리했었고, 유사시 한반도에 투입시키기 위해 주일미군 기지에 보관 중인 치장물자만 한국군 1개 보병사단을 재무장시킬 정도라는 이야기도 있다. 사막의 군용기 보관소에서 보관 중인 예비 항공기 숫자만 해도 다른 나라의 공군기보다 많다는 얘기는 이미 유명하다.
의료지원의 수준은 더욱 처참해서 기껏해야 2차 세계대전 때보다 살짝 나은 수준이었다. 아프간 전쟁 소련군 참전용사가 쓴 수기에도 '그래도 대조국전쟁 때보다는 나은 의료지원을 받고 있었다'라는 안습한 내용이 나온다. 당시 소련은 공산주의 사회의 특성으로 인해 민간 사회의 의료 수준도 군사병원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야전군이 양질의 의료지원을 제공받기는 힘들었다.
소련군의 열악한 야전 의료지원을 보여주는 자료는 많다. 대표적으로, 소련-아프간 전쟁에서의 의료지원 기록들이 있다. 아프가니스탄 주둔 병력은 풍토병으로 엄청나게 고생을 했고, 작전이 불가능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해당 자료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전체 파병병력의 67%에 달하는 41만 5천명의 인원이 심각한 질병으로 인해 치료받았다. 게다가 이중에서 폐렴은 무려 20%, 말라리아 4%에 이질[16] 등도 많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소련군의 질병 입원 비율도 비슷하게 35% 정도였다.
이 논문은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소련으로의 말라리아 감염 경로에 관한 논문이다. 여기에는 7600명의 병사가 말라리아 걸린 채로 그냥 전역했다고 나온다. 심지어 이중 70%는 군대에서 단 한 번도 말라리아 약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 반면 이후에 벌어진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시 미군은 2006년부터 2008년 전체 감염자 숫자가 고작 179명, 2009년부터 2011년까지는 170명에 불과했다.[17]
비전투용 군수품의 부족도 소련군에서 일상적이었다. 이는 소련 특유의 생필품 부족 현상과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 원인은 근본적으로 공산주의식 계획경제의 부작용 때문이었다. 정책 결정자들이 집중 투자한 분야는 물자가 넘쳐나는 반면, 그들이 미처 계산하지 못한 분야는 심각한 물자 부족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소련군은 수천달러짜리 포탄을 수없이 허공에 퍼부었지만, 정작 군인들은 치약 같은 생필품의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단순한 보급품만이 아니라 아예 핵심 장비를 적국인 서방에서 수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역시 소련의 민간 소비재에 대한 연구와 생산이 크게 뒤쳐지다보니 발생한 문제였다. 마이크로칩, 자동차, 에어컨처럼 민간 주도의 산업 분야는 서방과의 격차가 너무 커서 자급자족이 불가능했다. 사실, 소련도 이런 제품들을 아예 생산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서방과 기술력 및 품질에서 격차가 너무 컸다. 이는 소련의 계획 경제에는 학문의 자유와 치열한 경쟁을 통한 기술 혁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전자, 컴퓨터, 소프트웨어 같은 분야는 학문의 기반 자체가 서방에 비해 크게 빈약했다. 그나마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수학, 물리 등의 기초과학은 소련도 미국과 나름 비견되는 수준을 유지했다.[18] 그러나 소련이 필요했던 고품질 전자기기들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으로 민간 주도의 전자공학과 응용과학의 발전이 뒤따라야했다. 결국 끝까지 해당 분야가 지지부진했던 소련은 해당 제품들을 수입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군용 전자기기에 쓰이는 마이크로칩이나 잠수함에서 쓰이는 에어컨까지도 서방의 제품들을 사다 썼다.
군사와는 무관해 보이지만 소련의 농업이 안습했던 것도 약점이었다.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미국은 식량 수출 금지를 검토할 정도였다. 당시 소련의 대외 식량 수입국 1위가 미국이었다. 그만큼 소련은 자국 식량 수요의 상당량을 적국인 미국을 비롯한 서방에 의존하고 있었다. 소련에는 비옥한 농토 지대는 매우 많았다. 그러나 비효율적인 집단농장은 소련의 농업 생산 효율을 크게 갉아먹었다. 현대 러시아 연방은 경제적 여건이 소련보다 악화된 와중에도 농업의 생산성만큼은 오히려 소련보다 크게 나아졌다. 이러한 변화가 소련 농업의 비효율성을 입증한다.

4.3. 부족한 전문 인력


소련은 가용 예산 이상의 군사력을 보유하기 위해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전문 인력을 모병하기보다는 2년제 징집 병력으로 인력을 끊임없이 채워넣는 방식으로 군을 운영했다. 이는 심지어 부사관 계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명목 상으로는 부사관 계급이 존재했지만 이들 역시 전문 직업군인이 아니라 우수 선발자원들이 연장 복무를 하면 주는 계급일 뿐이었다. 그나마도 이들은 의무 복무가 끝나면 그냥 전역해서 장기복무 인력 양성이 어려웠다. 게다가 장교마저도 수년마다 근무지를 옮겼다. 결국 한 부대에 장기간 머무는 인원이 없었다.
이런 인사체계는 특히 정교한 최신 장비를 사용하는 부대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복잡한 군사 장비를 가장 오래 다뤄본 병사도 2년 정도가 한계였고 장교들도 근무지를 자주 옮기다보니 해당 장비에 대한 미숙련 인력만이 부대에 남았다. 괜히 서방 국가들의 군대가 부사관 같은 하급 간부들을 조직의 중핵으로 여기고 육성하는 것이 아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는 그래도 베테랑 병사들이 부사관 역할을 수행하여 인력 부족 문제가 크지 않았다. 주코프 원수 역시 이들을 군대의 등뼈라고 칭찬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은 전후 전역하거나 장교로 임관해서 부사관 계급이 유명무실해졌다.
소련군의 부사관 제도는 전문인력 양성에는 역부족이었다. 1972년까지의 소련군의 부사관 계급은 실질적으로 연장 복무를 한 병사에게 주어지는 계급일뿐이었다. 그나마도 병사의 의무 복무기간을 3년에서 2년으로 감축하여 전문성 문제가 심화되었다. 소련군 부사관의 복무기간은 연장복무까지 해봐야 2~8년 정도였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는 잘 쳐줘봐야 서구권의 하사에서 초임 중사 정도였다. 그렇다보니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이류 간부로 취급되는 부사관이 아니라 장교에 지원했다. 소련군은 세계 최대급 병력을 자랑했기 때문에 장교의 수요가 많아서 장교 지원도 매우 쉬웠다. 그렇다보니 우수한 인재들은 다 장교에만 몰려들었다. 결국 부사관은 지원율도 인적자원의 질도 계속해서 떨어졌다.
소련도 이런 문제점은 인지하여 1971년 부터 준사관 제도를 육성했지만 이 역시도 문제가 있었다. 준위 계급은 2년 병사복무를 마친 이들이 지원 가능했다. 그런데 2년 복무를 마친 병사들 중에서 우수한 자원은 이미 장교로 지원하고 없었다. 또한 준사관 제도를 실시한 후, 병사가 최대 6년까지 연장복무를 할 수 있었던 제도는 사라졌다. 이에 따라 오히려 부사관단의 규모는 축소되고 장교단의 규모만 확대되는 역효과가 발생했다. 결과적으로 준위 계급 역시 부사관단처럼 장교로 임관 못하는 2급 자원정도로 취급되었다. 그리고 붉은 군대가 해체될 때까지도 준위계급의 대우가 서방의 부사관단에 준했던 적은 없었다.
그래서 소련군의 초급 장교들은 부사관의 역할까지 떠맡아야만 했다. 이는 장교단이 비대해지고 부사관단은 부실해진 결과였다. 하지만 이는 장교단의 업무 강도가 지나치게 높아지는 문제를 만들었다. 게다가 정작 이들의 본업인 군 지휘에 대한 집중도와 전문성은 역으로 하락해버리는 부작용까지 생겼다. 기본적으로 장교와 부사관은 업무 속성 자체가 다른데 장교가 부사관 역할까지 하는 것은 무리한 처사였다. 그래서 데탕트 시기에 서방의 군대를 방문한 소련군 장성들이 서방의 부사관단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소련 해체 후 신생 러시아 연방군은 유의미한 부사관단을 양성하는 것을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결국 2008년쯤에야 러시아군에 제대로 된 부사관 양성체계가 마련된다.

4.4. 낮은 훈련 수준


미군보다 부족한 경제력으로 3배 이상 거대한 군대를 유지하던 소련군의 특성상 기초군사훈련 역시 당대의 NATO군 대비 크게 떨어졌는데, 베트남전기의 미군 역시 징병제임에도 9주간의 훈련을 시켰고, 프랑스군독일군의 경우는 무려 3개월간에 가까운 기초군사훈련을 시켰지만, 소련군은 겨우 6주간의 훈련기간을 가졌으며, 그마저도 실질적인 훈련은 약 4주에 불과했다.[19]
단순히 훈련기간만 짧은것도 아니고, 훈련 시수 역시 짧았는데, 1960년대의 베트남전기의 징병제 미군역시 주당 44시간에 총 352시간의 훈련 시시간을 가진 반면, 소련군은 1990년에도 주당 48시간에 192시간의 훈련 시간을 가졌으며, 이마저도 정훈 교육을 굉장히 중시하던 소련군 특성상 이것을 제외할 시 144~168시간까지 떨어지게 되는데, 이것은 60년대 미군의 훈련 수준의 절반도 안되던 양이었다. 현대 한국군처럼 훈련 시간이 짧아도 개개인의 교육 수준이 높다면 어느 정도 커버가 가능하지만, 소련의 의무 교육 기간은 7~8년에 불과 했으며, 소련의 대학생들은 장교 자원으로써 합법적으로 면제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마저도 기대하기 힘들었다.
열악한 군수능력과 조직체계상의 약점은 소련군의 훈련수준 역시 저하시켰다. 북한군처럼 개막장은 아니었지만 훈련량은 확실히 부족했는데, NATO군 전차승무원이 일반적으로 연간 100~200발의 전차포 교탄을 소모할 때 소련군은 정예사단이 연간 50발, 보통은 20여발 수준의 전차포 사격을 수행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엔진 신뢰성 및 부품 수급 문제 때문에 전차 기동훈련은 끽해야 중대급이었으며, 전차병의 훈련 수준도 NATO군에 요구되는 것보다 크게 낮았다.[20] 미군 M1 에이브람스 전차병들이 2,000m 거리에서 등장한 표적을 12초 이내에 90% 확률로 격파할 것을 요구받은 데 반해 소련군은 최대유효사거리 내의 표적을 60초 이내에 격파하는 것이 기준이었다. 차탄 사격 시간도 미군은 5초, 소련군은 12초. 독일군이나 네덜란드군레오파르트2도 미군 M1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성능상 서방 신예 3세대 전차와의 비교는 불공정하다고? CAT '85의 성적을 보면 M60 패튼이나 레오파르트1, 치프틴 같은 구형 전차들의 퍼포먼스가 3세대 전차들보다 좀 떨어지긴 했지만 표적과 교전하는 데 16.2초 이상 걸린 전차는 단 하나도 없었다. [21]
소련군은 충분한 교탄과 부품을 일선에 보급할 능력이 없는 것은 물론, 부대의 등뼈라고 할 수 있는 부사관을 단기 징집으로 유지하는 조직체계상의 문제 때문에 충분한 훈련도를 확보할 수 없었다. 전차소대 내에 2년 이상 야전에서 근무하면서 훈련한 병력이 1/4을 넘기는 소대는 극히 드물었으며, 사실 2년 이상 복무한 인원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징집병을 유지하면서도 전문적 부사관을 육성해 부대의 연속성을 확보하는 서유럽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 그 대가는 BGM-71 TOW 탑재 지프를 동축기관총 5~7발로 격파할 수 있다는 비실전적, 아니 비현실적인 훈련기준이었다.[22][23]
심지어 이런 문제는 특수부대인 스페츠나츠도 피해갈 수 없었다! 스페츠나츠 또한 전원이 2년 복무하는 징집병 중에서 임의로 인원을 선출하였고, 이들 부대의 부사관 역시 한국군의 병장 계급 비슷하게 징집병 중에서 복무기간이 긴 병사에게 그냥 주어진 것. 그나마 스페츠나츠의 명성에 관심을 보이고 지원하는 병사도 많았다고 하며, 이들을 정규직 부사관 학교에 보내어 못 버티는 사람은 탈락시키고 나머지를 훈련시키는 식으로 인적자원의 질을 좀 더 높여보려는 시도는 하였다. 하지만 이들 대다수의 질적 수준은 소련군 상층부의 인식에서도 조금 더 특수한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 병사 정도였다. CIA 자료를 보면 실질적으로 특수전에 관해 훈련받은 기간은 부대에 따라 다르지만 공수훈련을 포함하여 대체적으로 약 2달에서 3달정도로 예측되는데 이것은 본격적인 특수전을 하기에는 훈련기간이 너무 짧기때문에 잘봐야 수색대나 레인저 정도의 훈련 강도라 봐야한다. 아프가니스탄의 실전에서 일반 보병부대보다 이들의 전과가 높았던 것은 사실이나, 이는 이들이 체계적인 훈련을 잘 받은 것보다는 임무의 특성상 소련군에서 이례적으로 자율판단과 행동을 허가받았기 때문으로 평가된다. 소련군 내에서 몇 안되는 '병사 개개인의 창의성, 독창성'을 인정받은 병종이라 게릴라전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유연하게 대처했다고 한다.
실제로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스페츠나츠들과 교환훈련을 하게된 미군 특수부대원들이 이들의 사격, 전술 능력에 대하여 "명성만큼 대단하지는 않다"라고 평가를 하였으며, 그 분야에서 도리어 여타 동유럽 특수부대를 더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24] 실제 사례에서도 인질 구출 작전에서 인질의 안전보다는 인질을 잡은 테러범을 때려잡는데 더 집중한다거나, 버스 인질극 제압 시범을 보일 때 수류탄과 폭약으로 버스를 아주 박살내버리는 동영상은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정작 전문적인 특수부대가 나온 건 소련이 붕괴한 뒤 러시아가 되고 나서 체첸 저항세력과 마피아를 상대로 한 저강도 전쟁이 일상화되면서부터다. 일례로 1997년 스베르들롭스크 주에서 열린 스페츠나츠 대회(Spetsnaz Competition)에서 미군 특수부대 최초로 참가한 델타 포스 출신 전술사격 교관 마이크 페넌 같은 경우 스페츠나츠를 "실력에 비해 많이 과장됐다"고 평가했다.

4.5. 취약한 군인 복지


러시아 역사를 통틀어 군인들은 러시아 제국 때부터 대우가 좋지 못했다. 당시 러시아군 대우는 육, 해군을 가리지 않고 정말 열악해서, 포템킨 호 사건 같은 반란이 터지기도 하였다. 오죽하면 1917년 2월 혁명 당시 러시아군에 식량 배급을 달라며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던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자신들의 가족 등 지인들을 발견한 군인들이 그대로 시위대에 참여하면서 러시아 제국이 전복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러시아 제국군은 제정 말기에 자국민들로부터 학살자, 전쟁범죄자 소굴, 개새끼 수준의 취급을 받았고, 소련군도 이것의 영향으로 나치 독일이 쳐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자국민 내에서의 평가가 썩 좋지 못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피의 일요일 사건과 같이 권력을 지키기 위해 민중들을 향해 발포하는 일조차 서슴치 않았고, 이러한 모습은 소련의 선전 영화였던 전함 포템킨과 같이 비인간적으로 그려질 정도였다. 소련군 역시 공산당 독재 아래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받으면서 1962년 노보체르카스크에서 시위를 벌이던 자국민에게 발포, 26명이 숨지기도 했고, 1990년 리가, 바쿠, 트빌리시같은 각 공화국 수도에서 독립시위를 벌이던 시민들에게 발포해 사상자를 내기도 했다. 현대 러시아군 또한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1996년과 1998년 체첸전에서의 전쟁범죄로부터[25] 자유롭지 못한 실정이다.
사실 이럴 만도 한 게 러시아 제국 시절,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의 시절부터 높으신 분들의 졸개가 되어서 민중을 가장 억압하고 착취한 게 군인들이었다. 군인들이 착취에 앞장선 이유는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는 현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땅이 너무 광대하고[26] 척박해서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27] 그러다 보니 행정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이 별로 없었기에 사실상 군인들이 대부분의 행정 일들을 도맡아서 했는데, 땅이 척박하고 인구수도 많지 않기에 생산력이 적어서 군인들이 세금으로 가져갈 것이 없으니 착취했다고 보면 된다. [28]
러시아 제국군은 나폴레옹이 쳐들어오니까 적 막는답시고 민가를 싸그리 불태워버렸고, 피의 일요일 사건 때도 군인들이 무차별적인 학살을 벌였으며, 적백내전 당시에는 백군은 민간인들을 빨갱이라며 잔혹하게 학살했고, 적군은 조국을 지켜야한답시고 농민들이 애써 수확한 농산물을 모두 징발하니 러시아 민중들 입장에서는 군인을 좋게 볼 수가 없었다.
소련 시절에는 게다가 들의 계급이 2단계로 간소화 되어 있었고, 또한 병 생활을 잘 아는 부사관급 간부가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없다시피하니 사병 간의 계급 갈등과 구타, 갈취, 내무부조리도 군 전반에 만연하였다. 그나마 장교 계층이 비교적 부대 관리에 신경을 쓰고 있었고, 병들끼리도 공감하지 못할 정도로 과도하게 선을 넘은 경우는 당에 꼰질러서 반동으로 몰아버리면 문자 그대로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사태가 됨으로 관리가 된 편이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 생활고에 시달리게된 장교층이 군을 대거 이탈하면서 신생 러시아군에서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군대를 빠져나갈 수 있다면 징병 인력들이 병역을 기피하려고 하는 풍조를 낳음으로써 징집 자원이 사회 취약계층에 한정되는 악순환이 발생하였다.

4.6. 정치장교의 전횡


흔히들 정치장교가 활용된 가장 큰 이유를 군에 대한 불신이라고 알지만, 실질적으로 가장 큰 원인은 적백내전 시절부터 독소전쟁에 이르기까지 병사들의 수준이 대단히 떨어졌기 때문에 그렇다. 병사들이 질적으로 낮다보니, 이를 통제하고, 또 한편으로는 병사들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정치장교를 부대마다 배치하게 되었다.
위에서도 말했듯, 군사분야에 미숙한 정치가들이 군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려다 보니 독소전쟁 초기까지는 그 부작용도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정치장교 시스템이다. 소대장급 이상 지휘관에게는 같은 권한에 같은 계급의 정치장교가 1:1로 따라 붙었다. 이들은 당의 이론과 지시를 군이 잘 따르도록 지시하고 교육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이들은 군의 계급, 명령체계에서 독립된 조직으로 공산주의 이론이 우선적으로 교육되었다. 사실상 부대 안에 지휘관이 두 명인 셈이라, 의사결정에 걸리는 시간이 두 배로 늘고 신속한 결정을 내릴 수 없어 군의 작전수행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다.
더욱 문제를 심화시킨 요인은 정치장교들이 권한은 큰 주제에 군사적 자질이 심각하게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에 있었다. 차라리 그냥 지휘관이 둘이면 또 모르겠는데 대부분의 정치장교들은 당원 출신으로 군사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이 거의 전무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소련군은 군인 둘이 아니라 군인 한명과 말 안 듣고 하는 일마다 꼬치꼬치 태클 거는 민간인 한명에게 지휘받고 있었다.
결국 정치장교가 있는대로 병크를 터트리는 사이에 병사들은 무슨 명령을 따라야 할지 우왕좌왕하게 되고 결국 적 부대의 공격에 사이좋게 전멸하고 마는 식이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같이 가뭄에 콩나듯이 군사적 재능이 있거나 최소한 개념이라도 있는 정치장교가 있었던 부대는 다행히 두 지휘관이 쿵짝이 맞아 괜찮은 전과를 올릴 수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이런 사례는 드물었기 때문에 정치장교가 있는 부대는 대부분 참혹한 최후를 맞기 일쑤였다.
다행히 독소전쟁 초기에 독일군에게 신나게 털린 이후에는 정치장교가 작전에 간섭하는 일은 사라지고 정훈, 심리상담 등의 업무만 맡게 되었으며 그 결과 뛰어난 지휘관들의 지휘와 병사들의 애국심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4.7. 인명경시


러시아 제국이나 소련은 질적으로 좋은 정예 부대를 육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과 힘을 쏟았지만 쉽지가 않았다. 일단 병사들에 대한 대우가 낮다보니 자연적으로 군대의 질적 저하가 심해졌다. 이러다보니 질적으로 저하된 자가 군대에 우글거려 인명경시가 더 심해졌다. 특히 형벌부대가 창설된 이후에는 더더욱 질적 저하가 심각해졌는데, 교도소에 들어가야 할 범죄자나 사형당해야 하는 죄수들이 군대에 들어오다 보니 군의 질적 저하가 더 심각해지고, 이는 곧 인명경시로 이어졌다. 형벌부대가 대규모적으로 운영된 독소전쟁 이후에는 병사들의 질적 저하가 매우 심각해졌고, 질적 저하가 심각해지다 보니까 들어오는 병사의 질 또한 낮았다. 그렇게 또 병사의 질적 저하가 심각해졌고, 이런 악순환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학계마다 이 악순환의 시초에 대해서 얘기가 많지만, 상당수 연구가들이 시베리아 개척 시점을 이 악순환의 시초로 보고 있다.
원래 러시아 제국군도 그런 성향이 있었지만 소련군 역시 병사의 목숨이나 안전에 대한 배려가 극히 적었다. 대표적으로 T34전차의 구조를 보면 된다. 미국의 전차가 탑승자에 대한 배려하면서 설계했지만, 소련의 경우에는 최대생산효율을 기준으로 설계되었다. 탑승자에 대한 배려가 적다보니 각종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으며, 실제 독소전에서 소련군 전차병들은 미국전차를 더 선호했다.[29]
제2차 세계대전 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핵무기가 개발되자, 소련군은 기존의 재래식 물량만으로는 전쟁에 한계가 있음을 인지하고 점차 핵전력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재래식 전면전을 대비한 전략교리 수행을 위해 소련군도 미군과 같은 기계화 노력에 힘썼다. 실제로 소련 말기에는 고전적 의미의 보병사단은 모두 기계화보병으로 이루어진 차량보병사단들로 대체되었다.
냉전 시절 동독군의 주 임무는 서방 세력과의 전쟁시 제파식 전술의 제1파였는데, 이게 NATO처럼 각 국가별로 담당영역[30]이 존재하여 해당 전선은 해당 국가가 주력이 되어 담당하는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니다. 좀 더 쉽게 풀어서 설명을 하면, 공격시 제일 큰 피해가 발생하고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는 최초 공격을 동독군에게 맡겨서 동독군이 적 전력을 깎아먹고 피해를 보면, 그때 소련군 본대가 공격을 들어가는 식이다. RPG 게임으로 비유하면 동독군은 탱커, 소련군은 딜러 역할이란 말. 당연하지만 적의 공격을 다 받아내는 것은 동독군이고 가장 큰 피해도 동독군이 보게 되어있다. NATO 마냥 가맹국들이 최대한 동등한 지위에서 자국방위, 혹은 동맹국 보호를 위해 각각의 영역을 맡고 희생을 보는게 아니고, 소련의 위성국이 소련군이 볼 피해를 적게 보도록 만든 총알받이인 셈. 소련군의 작계를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 면에서 이 점을 부정조차 하기 힘든데, 첫째는 소련군 작계 자체가 제파식공격의 제 1파는 큰 피해를 보는 것을 가정하기 때문에 제일 중요한 정예 병력은 보내지 말도록 하고 있다. 1파가 적에게 피해를 주고 나면 그 때 잘 준비된 정예부대를 투입하여 공격하도록 하고 있다. 두번째는 유사시 나토군이 동독을 공격할 때의 방위 계획인데, 우습게도 동독군은 공격시 선봉을 서야 하기 때문에 뒤로 빠진다. 소련군이 동독을 방어하고, 다시 반격을 할 때 동독군을 보낸다. 동독군은 바르샤바 조약군에서도 정예이고, 이를 전략 예비대 같은 개념으로 보는 사람도 있겠으나, 정작 소련군은 자기네 부대는 전략예비대로 쓰려고 뒤로 꽁쳐놓고 동맹국 군대를 총알개념으로 적진에 던지려 하고 있었다. NATO의 경우는 동맹국들에게 정치적인 배려를 안할 수가 없었기에 NATO 국가별로 각자 담당 구역이 있었고, 이 담당 구역은 그 나라가 목숨걸고 지켜내는 식이었다. 주전장이 되는 것은 서독이었지만, 그 서독 방위에는 영국군, 미군, 프랑스군도 각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몸빵을 하는 사이 미 본토에서 주력이 도착하여 바르샤바 조약을 막는게 주 전략 이었다. 어디처럼 '너넨 우리 총알받이'라고 드러내놓은게 아니다.
그리고 소련 붕괴 이후에는 상황이 악화되어 엄청난 감군을 한데다가, 가혹행위 방지도 담당했던 정치장교가 사라지자 병사 대우가 나빠져서 지금 러시아군은 구타, 가혹행위 등 온갖 비인간적인 처사에 시달리고 있다.[31]

4.7.1. 반론(?)


군대라는 조직자체는 기본적으로 인명경시적 성격을 지닌다. 인명을 중시한다는 그 미군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상당한 인원이 사망한다는 것이 예상됨에도 투입하였다. 군대작전의 전제가 최소병력의 사망으로 최대 효과를 내는 것이다. 인류역사상 어떤 군대도 어떤 지휘관도 자신의 병사를 단 한명도 죽지않고 전투에서 이길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단순히 편의성을 더 봐준다고 인명을 경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기본적으로 군대는 일부 병력의 사망을 전제로 한다.

4.8. 전시강간



붉은 군대는 이상적이지 않고, 그럴 수도 없습니다.

- 이오시프 스탈린,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밀로반 질라스가 소련군의 유고슬라비아 여성 강간에 대해 항의할 때 한 말.[32]

소련군은 곳곳에서 전시강간(war rape)을 저지른 것으로 악명이 높다.
대표적인 것이 2차대전 종전 전후 독일 여성을 상대로 한 강간. 영국의 저널리스트 안토니 비버는 이 사건을 인류역사상 최악의 대량 강간으로 호칭하였다. 소련군은 독일 내에서 200만명의 여성에게 성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파악되고 있고, 베를린에서만 약 10만명의 여성을 강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3] 더욱이 강간은 한 차례로 끝난 것은 드물고, 많게는 수십명에게 윤간당한 여성들도 비일비재했다. 8세에서 80세까지의 거의 대부분의 연령대의 여성들이 성범죄의 표적이 되었고, 안토니 비버의 주장에 의하면 독일로 끌려온 자국 소련 여성들까지도 강간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34] 슐레지엔의 나이세 강 인근의 수녀원도 소련군의 전시강간의 희생양이 되어 182명의 수녀들이 강간을 당하였고, 카토비체의 한 교구에서는 66명의 수녀를 임신시켰다고 한다. 고아청소년 10만명 중 80%가 성병에 걸렸다는 얘기도 있다.기사 소련군이 강간을 많이 하는 이유는 단순한 성욕 때문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독일군이 자국의 여자들을 학살하고 강간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복수를 목적으로 저지르는 것일 수도 있다. 독일 박물관이나 동유럽 박물관의 독일의 이러한 행위들을 똑같이 복수한다는 일기가 수도 없이 존재한다. 연합군들도 독일 여성들에게 수십만건의 성범죄를 저질렀으나 냉전의 여파와 탓에 묻혀버리고는 한다.[35]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만 독일 여성들 2만 명이 강간을 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모두 합치면 150만 명의 독일 여성들이 서방 연합군에 의해 강간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소련의 전시강간을 문제삼는 이들 대부분은 의도적으로 자료를 부풀리기도 하며, 반대로 소련측을 옹호하는 이들은 축소시키기거나 어쩔 수 없는 일, 즉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는 식으로 피하려고 한다. 현재 러시아는 소련군의 전쟁범죄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안토니 비버가 소련에 비판을 했다고 해서 네오 나치로 오해될 소지를 막기 위해서 첨언하자면, 비버는 자신의 저서인 '스탈린그라드-피의 기록'에서 소련군의 업적이 2차 대전의 결과를 바꿨다며 높이 평가[36]하기까지 했으며, 스탈린이 비록 잔혹한 독재자이지만 그 덕분에 소련군이 독일을 무찌르는데 힘이 됐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비버는 소련군 만행뿐만이 아니라, 서방 연합국의 만행에 대해서도 제대로 쓴소리와 비판을 가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단순히 소련에 비판적인 논조를 지녔다고 해서 네오 나치란 소리를 하지 않는다. 네오 나치 참조.
소련 상부측에서는 병사들이 전시강간을 저지르자 초기에는 무관심하다가, 갖가지 문제점들이 터지고 장교들이 군기 유지에 문제가 많다면서 항의하자 결국 이를 문제삼아서 NKVD를 동원해 전시강간 행위를 엄격하게 단속하였고, 이후 전시강간은 사라졌다.[37] 이 당시의 상황을 잘 표현한 영화가 니나 호스 주연의 독일 영화 '베를린의 여인'인데, 독일의 한 전직 저널리스트의 수기를 극화한 실화영화이다.[38] 소련군의 성범죄를 정면으로 다룬 내용이라 이 수기가 1959년 독일에서 출간되었을 때 패전의 상흔이 아물지 않은 독일인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았으며 판매량도 좋지 못했다.# 수기에서 나오는 소련군의 무자비한 성범죄는 독일 여성들에겐 잊고싶은 기억이었고, 무엇보다 주인공이 수차례 강간을 당한 뒤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소련군 장교에게 붙는 내용이 독일 여성들의 명예를 훼손한 거란 비난을 받았다. 예상치 못한 부정적인 반응에 당황한 작가는 익명으로 출판된 이 수기를 자신이 생존해있는 동안에는 다시는 출판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작가가 죽은 2년 후인 2003년 이 수기는 재출판되었고, 첫 출판 당시와는 가치관이 변한 현재에는 담담하면서도 구체적인 서술이 높이 평가받으며 2차대전 당시의 상황을 잘 나타낸 회고록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이 수기를 쓴 익명의 작가의 이름은 마르타 힐러로 밝혀졌다.참조[39] 베를린의 여인이라는 영화는 초점을 소련군 전체가 아니라, 주인공 하나에게만 맞췄고, 철저하게 주인공이 보는 시각으로만 초점을 맞춘데다가, 영화가 중립적인 편이라 때문에 꽤나 높게 평가받는 편이다. 다만 매춘으로 출세하여 다른 여성들을 괴롭히고 군림한 여성들에 대해서는 자세히 나오지 않아서 이 부분에 대해서 아쉽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또한 '조이디비전'#이란 영화에서도 소련군의 성범죄를 다루고 있다. 베를린의 여인에 비해 완성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평을 받았지만, 이러한 평은 매우 부당한 평가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애시당초 이 영화는 소련군의 성범죄[40]를 직접적으로 다룬 것이 아닌 고아가 된 독일인 소년이 소련군 여성 정치장교의 도움으로 소련의 KGB가 되어 영국으로 보내진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41] 이 영화에서는 영국 정보부가 소련 여자 스파이를 고문[42][43]하거나 패전이 코앞인데 승리할 수 있다는 개드립을 치는 나치 당원[44]이 나오는 등 중립적인 편이다. 한국에서는 레지스탕스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폴란드와 유고슬라비아, 핀란드에서도 소련군의 부녀자 강간이 빈번했는데, 특히 독일로 진격하는 길목에 있는 폴란드가 심했다. 독일계가 아닌 순수 슬라브족 폴란드계 여성만 최소 10만 명이 강간당했다. 폴란드가 보수적인 가톨릭국가이고 전후 친소정권이 들어섰음을 생각해 보면 피해사실을 밝히지 않은 피해자는 그보다 몇 갑절은 많을 것이다. 독일계 폴란드인 여자들이 얼마나 강간살해를 당했는지는 추산조차 불가능하다.
이같은 소련군의 강간 행위가 먼 유럽만의 이야기는 아닌데, 특히 소련군이 한반도 북한 지역에 진주해 세운 소련군정 내에서 벌어진 민간인 강간 행위도 상기해야 할 부분에 속한다.# 특히 주된 피해자들은 식민지 주재 일본인이나 현지 조선인들이 되었다. 북에서 월남한 여학생 임영애는 1946년 1월 18일 반탁전국학생총연맹 연설에서 "북한에 진주한 로스케 놈들은 밤이면 쌀과 공장의 기계들을 소련으로 가져가는가 하면 대낮에도 부녀자를 강간하고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소련군정 항목 참조.

5. 징병제


소련은 한국처럼 징병제를 실시했다. 복무 기간은 군대는 2년으로 우리나라와 비슷했고 해군와 KGB 등은 3년이었는데, 3년 복무지들은 지원제였던데다 대우가 2년 복무지들에 비해 매우 좋았기 때문에 긴 복무기간에도 많은 이들이 몰렸다. 현재 러시아도 징병제를 실시하지만, 복무 기간은 1년이다. 그래도 러시아군은 84만 5천명의 상비군 병력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소련의 대학생들은 ROTC처럼 학교에서 실시하는 교련 수업만으로 예비역 장교 자격이 부여되어 사실상의 병역 면제 혜택을 받았다. 현재 러시아의 대학생들도 병역 면제 혜택을 받고 있다.

6. 개입한 전쟁 및 분쟁



7. 군조직



7.1. 각군별


  • 소련 육군(Советская Армия, СА)[45]
    • 지상군(Сухопутные Войска, СВ)
    • 항공대(Военно-воздушные силы, ВВС)
    • 전략로켓군(Ракетные войска стратегического назначения, РВСН)
    • 방공군(Войска противовоздушной обороны, ВПВО)
  • 소련 해군(Военно-Морской Флот, ВМФ)

7.2. 독립 군종


  • 국가안보위원회 국경수비대(Пограничные войска КГБ): 소련군 병력 수에 합산되지 않는 명목 상의 준군사조직이지만, 전성기 시절 병력 수만 28만이나 되며 자체 스페츠나츠전차까지 보유하고, 훈련 수준도 높은 정예군이었다.
  • 민방위군(Войска гражданской обороны)
  • 소련 내무군(Вунтренние войска МВД)[46]


7.3. 군관구


  • 레닌그라드
제2근위포병사단
제229방어사단
제250예비차량화소총병사단
제30근위군
제45근위차량화소총병사단
제64근위차량화소총병사단
제26군단
제77근위차량화소총병사단[47]
제6합동군
제54적기차량화소총병사단
제111적기차량화소총병사단
제131차량화소총병사단
제10적기방공군
제21방공군단
제4방공사단
제5방공사단
제23방공사단
제6방공군
제18방공군단
제27방공군단
제14방공사단
해군
제5해군미사일항공사단
제35장거리대잠항공사단
제24대잠항공연대
제403대잠항공연대
제88전폭기항공연대
제279대함항공연대
제392정찰항공연대
제912혼성항공연대
제830대잠헬리곱터항공연대
전략로켓군
제7근위미사일사단 - 1967년 부터 UR-100 ICBM을 운용했으며 1975년 부터 개량형을 운용했다. 1994년 부터 SS-25를 운용했고 2017년 부터 RS-24를 운용했다.
제40적기미사일사단 - SS-4와 SS-5 중거리 탄도미사일들을 운용해 서유럽의 주요 대도시들을 겨냥했다.
육군 지상병력은 유사시 노르웨이를 침공할 계획이었으며 소련 제2의 도시 레닌그라드 그리고 전략적 요충지인 콜라 반도를 방어한다는 특성상 신예 요격기/전투기와 폭격기[48], 방공미사일들이 다수 배치되는 군구였다. 이 군구의 방공망이 돌파당하게 된다면 미공군은 곧바로 모스크바를 폭격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소련은 이 지역의 방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 발틱
제107차량화소총병사단
제144근위차량화소총병사단
제149적기포병사단
제11근위합동군
제1적기전차사단
제40근위전차사단
제1근위차량화소총병사단
제18근위차량화소총병사단
제15공군
제39전투기폭격항공사단
제886정찰항공연대
제249혼성항공소대
독립
제326폭격기항공사단
제132폭격기항공사단
방공군
제2적기방공군
제3방공사단
제6방공군
제27방공군단
제14방공사단
해군
제15정찰항공연대
제263혼성항공연대
제342전자전항공연대
제846근위대잠항공연대
전략로켓군
제50근위미사일군 - 서유럽을 겨냥한 중거리 탄도미사일들이 배치되었고 소련 붕괴 이후 사일로들이 그대로 남게 되면서 관광상품이 되었다.
제24근위미사일사단
제58미사일사단
칼리닌그라드와 발트3국을 담당하던 군구.유사시 폴란드군을 지원할 계획이었다. 발트3국의 독립 이후 철수하거나 해체되었다.
  • 벨라루스
제51근위포병사단
제120근위차량화소총병사단
제70포병사단
제80포병사단
제231후방방어사단
제238예비차량화소총병사단
제5근위전차군
제8근위전차사단
제29적기전차사단
제193적기전차사단
제84차량화소총병사단
제7적기전차군
제3적기전차사단
제34전차사단
제37적기전차사단
제267차량화소총병사단
제28적기합동군
제6근위전차사단
제28전차사단
제76전차사단
제50근위차량화소총병사단
공군
제15폭격기항공사단
제22근위적기폭격기항공사단
제2폭격기항공사단
제26공군
제1근위폭격기항공사단
공수군
제103근위공수사단
방공군
제2방공군
제11방공군단
전략로켓군
제50적기미사일사단 - SS-20 IRBM이 배치되었다.
소련의 서유럽 침공시 전략예비대1. 이러다보니 막강한 지상군과 이를 백업하는 공군이 배치되었다. 소련 붕괴 이후 대부분 전력이 해체되거나 벨라루스군 자산에 편입되었다.
  • 카르파티아
제24적기차량화소총병사단
제168차량화소총병사단
제251예비차량화소총병사단
제62예비전차사단
제72포병사단
제61대공미사일포병사단
제119대공미사일포병사단
제232후방방어사단
제233후방방어사단
제66포병군
제26적기포병사단
제81포병사단
제8적기전차군
제30근위전차사단
제13합동군
제51근위차량화소총병사단
제97근위차량화소총병사단
제161차량화소총병사단
제38적기합동군
제17근위차량화소총병사단
제70근위차량화소총병사단
제128근위차량화소총병사단
공군
제92 전투기 항공 연대
제145 전투기 항공 연대
제192 전투기 항공 연대
제 452 공격 항공 연대
제 243 대 혼합 항공 연대
제69 전투기 폭격기 항공 연대
제179 전투기 폭격기 항공 연대
제686 폭격기 항공 연대
제118 전자전 항공 연대
제138 전투 항공 사단 제 168 전투 항공 연대
제 32 폭격기 항공 사단
제 7 폭격기 항공 연대
제727 경비대 폭격기 항공 연대
제 56 폭격기 항공 사단
제 230 폭격기 항공 연대
제947 번째 폭격기 항공 연대
방공군
제28 방공 군단
전략로켓군
제37 근위 미사일 사단 - SS-20 IRBM이 배치되었다.
소련의 서유럽 침공시 전략예비대2. 체코슬로바키아 군을 백업하는 역할을 맡았다. 소련 붕괴 이후 해체되거나 우크라이나군에 편입되었다.

  • 키예프
제254적기차량화소총병사단
제70예비전차사단
제67포병사단
제73포병사단
제61대공포사단
제141대공포사단
제182대공포사단
제232후방방어사단
제1근위합동군
제25근위차량화소총병사단
제72근위차량화소총병사단
제6근위전차군
제17근위전차사단
제93근위차량화소총병사단
제17공군
제13폭격기항공사단
제60폭격기항공사단
방공군
제8적기방공군
제9방공사단
제11방공사단
제19방공사단
전략로켓군
제43근위미사일사단 - SS-20 IRBM이 배치되었다.
소련의 서유럽 침공시 전략예비대3. 소련 붕괴 이후 해체되거나 우크라이나군에 편입되었다.
  • 오데사
제28근위차량화소총병사단
제98근위공수사단
제55적기포병사단
제71포병사단
제252예비차량화소총병사단
제234후방방어사단
제32군단
제126적기차량화소총병사단
제157차량화소총병사단
제14근위합동군
제59근위차량화소총병사단
제86근위차량화소총병사단
제180적기차량화소총병사단
제158차량화소총병사단
제208차량화소총병사단
제5공군
제119전투기항공사단
제6근위수송기항공사단
제7수송기항공사단
방공군
제8적기방공군
제1방공사단
제21방공사단

해군
제2근위미사일항공사단
제30정찰항공연대
제43공격기항공연대
제318대잠수함항공연대
제872대잠수함항공연대
제912혼성항공연대
제78대잠수함헬리곱터항공연대
전략로켓군
제46미사일사단 - SS-25를 배치했으나 핵무기 감축 조약의 영향으로 해체되었다.
소련의 서유럽 침공시 전략예비대4. 소련 붕괴 이후 해체되거나 우크라이나군에 편입되었다.
  • 모스크바
제2근위차량화소총병사단
제4근위전차사단
제32근위차량화소총병사단
제106근위공수사단
제16포병사단
제17포병사단
제149차량화소총병사단
제196차량화소총병사단
제206차량화소총병사단
제65예비전차사단
제255예비차량화소총병사단
제228후방방어사단
제13근위군단
제60전차사단
제89차량화소총병사단
제225차량화소총병사단
공군
제9전투기항공사단
제8수송기항공사단
제12수송기항공사단
방공군
제1적기방공군
제2방공군단
제3방공군단
제7방공군단
제16방공군단
전략로켓군
제27근위미사일군 - 다수의 ICBM들이 배치되었으며 2010년대 이후 RS-24들을 배치받았다.
제3특수미사일경보군 - 대탄도탄 레이더들이 배치되었다.
제9미사일방어사단 - A-135 운용부대
제18우주공간통제단 - 소련의 조기경보위성들과 레이더들의 우주 공간 감시 임무를 총괄하는 부대였다.
수도라는 특성상 온갖 좋은 장비가 배치되어 있고 특히 미사일 방어 까지 구현되어 있었다.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군의 중요 자산으로 이용된다.
  • 볼가-우랄
  • 북캅카스
  • 투르케스탄
  • 시베리아
  • 트랜스바이칼
  • 극동
  • 중앙아시아[49]

7.4. 해외주둔 소련군


  • 서부군집단
제1근위전차군(드레스덴)
제9전차사단
제11근위전차사단
제20근위차량화소총병사단

제2근위전차군(퓌르스텐베르크)
제16근위전차사단
제21근위차량화소총병사단
제94근위차량화소총병사단
제207차량화소총병사단

제3충격군(마그데부르크)
제7근위차량화소총병사단
제10근위전차사단
제12근위전차사단
제47근위전차사단

제8근위군(바이마르 주 Nohra)
제27근위차량화소총병사단
제39근위차량화소총병사단
제57근위차량화소총병사단
제79근위전차사단

제20근위적기군(에베르스발데)
제25전차사단
제32근위전차사단
제35근위차량화소총병사단
제90근위전차사단

제16공군(브란덴부르크 주 Zossen)
제6전투기항공사단
제16근위전투기항공사단
제10전폭기항공사단
제125전폭기항공사단
제126전투기항공사단

동독 주둔 소련군 부대로 최대 33만에 달하는 병력이 주둔했다. 나치 독일을 붕괴시키고 가장 먼저 베를린을 포함한 독일의 주요 영토들을 유린한 부대다 보니 최정예 부대였으며 당연히 최신 장비들이 우선적으로 배치되었다. 이외에도 다수의 전술핵무기들이 배치되었고 SS-12 스케일보드 탄도미사일들도 배치되어 서유럽의 주요 대도시들을 겨냥했다. 전시에는 동독군을 지원하며 서독으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독일이 통일된 이후에도 한동안 주둔하다가 1994년에 철수했다.
  • 북부군집단
제6근위차량화소총병사단
제20적기전차사단

제4공군(레그니차)
제132적기폭격기항공사단
제149폭격기사단
제239적기폭격기항공사단

폴란드 주둔 소련군 부대로 동독군에 비해 사단급 부대들이 매우 적지만 대신에 바르샤바 조약 기구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후방 전략적 요충지라는 특성상 여러가지의 전투지원 및 방공,항공 부대 등의 독립 연대와 대대들이 다수 주둔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다수의 전술핵무기들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유사시 폴란드군의 덴마크 침공을 지원할 계획이었다.
  • 중부군집단
제15근위전차사단(체코)
제18근위적기차량화소총병사단(체코)
제48적기보병사단(체코)[50]
제55근위차량화소총병사단(슬로바키아)
제31전차사단(슬로바키아)
체코슬로바키아 주둔 소련군 부대로 전시에 체코슬로바키아 인민군의 서독 침공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다.
  • 남부군집단
제13근위전차사단(헝가리 베스프렘)
제19근위전차사단(헝가리 에스테르곰)
제93근위차량화소총병사단(헝가리 케치케메트)
제254차량화소총병사단(헝가리 세케슈페헤르바르)
제36공군
제195근위전투기항공사단
제177근위폭격기항공사단
루마니아와 헝가리, 불가리아를 지원하는 군집단으로 전시에 이들 국가의 그리스와 터키 침공을 지원하는 부대였다.
  • 쿠바 - 쿠바에 배치된 핵미사일 철수 이후에도 전술적 무기를 운용하는 다수의 부대가 주둔했었다.
  • 베트남 - 베트남 전쟁 때 부터 소련군 전투부대[51]가 파병되어 베트남군을 지원했고 미군이 패전하고 철수한 뒤에는 캄 란 만 해군기지에 폭격기와 항공기, 군함들이 주둔했다.
  • 몽골 - 중국군의 몽골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주둔했다.

7.5. 함대



8. 훈장


훈장(상훈)/소련 참조.


9. 군가


아래는 소련군의 유명한 군가들이다. 대체로 소련군가에는 러시아 민요풍의 노래가 많다. 한편으로는 애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경쾌하다. 반복되는 후렴구가 특징이며, 음악적으로 봐도 훌륭하다. 소련군(현재 러시아군도 마찬가지)의 공식 합창단인 붉은 군대 합창단[52]은 웅장한 선율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1990년에는 한국에도 방한하여 연주회를 가진적이 있다. 소련의 군가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은 군가/소련-러시아 항목을 참조할 것.
대표적인 소련 군가 초원. 자세한 건 항목을 참조하라. 월드 인 컨플릭트 트레일러로 쓰여 유명하다.

9.1. 관련 소련군영상




1967년 10월 혁명 기념일에서 소련 국가가 나오는 부분 영상
1979년 10월 혁명 기념일[53]


1990년 소련의 마지막 전승 기념일 행사
일본이 안보교범용으로 만든 영상, 소련 육군의 주요 무기체계를 설명한다


소련 해군에 관한 교범 영상
소련 공군 및 방공군에 관한 영상

소련군 1945~1990 제식

10. 장비, 차량, 군복


소련군/장비 문서로.
소련군/차량 문서로.
군복/러시아군 문서로.

11. 한국계 인물


소련이 다민족 국가였던 만큼 고려인 출신의 소련군인도 있었다. 일부는 제 2차 세계대전 말 소련군이 관동군을 제끼고 내려온 1945년에 북한 지역으로 진입하기도 했다.
  • 정상진: 소련군 출신 조선인민군이다. 소련식 이름은 유리 다닐로비치. 2차대전 이후 적기훈장을 수여받았고 조선 청진시 상륙 작전에도 참전하였다. 후에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소련에 가서 호화롭게 살았다고. 그리고 소련내 한인재단에 도움을 주면서 여러 차례 대한민국을 방문했다. 2013년에 사망했다.
  • 김일성: 1940년부터 광복 때까지 소련 극동군 제 88국제여단에서 장교(소령)로 복무하였다.

12. 기타


소련제 무기와 장구류는 서방과는 전혀 다른 개성을 자랑했기 때문에 밀리터리 매니아 중에는 이쪽에 심취하는 경우도 있다. 하야미 라센진이라던가.
많은 병사들이 우샨카를 착용했기 때문인지 우샨카는 소련군 또는 러시아군, 이 이미지가 나아가 전반적인 러시아인 남성의 복장을 상징하는 물건처럼 인식되고 있다.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에서는 아인슈타인이 타임머신 개발에 성공해 과거로 날아간 뒤 히틀러를 없애버리지만, 시간의 반동으로 스탈린이 이끄는 소련군이 세계대전을 일으킨다. 소련군(레드얼럿) 항목 참조.
레드얼럿 1편에서 소련군은 나치 독일군 대신 V2로켓과 잠수함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상상속 무기인 테슬라 코일을 사용한다. 전반적으로 C&C 타이베리움 시리즈의 악역인 Nod의 변형판이었지만 유닛들 성향은 GDI에 가깝다. 맘모스 탱크와 헤비 탱크 등으로 강력한 화력을 보여주는 것이 특징.
레드얼럿 2편에서는 유리의 사이킥 능력이 추가되었다.

3에서는 2 이후(유리의 복수 이후) 시점에서 과거로 날아가 아인슈타인을 날려버리고 세계 유일의 초강자로 새로 등극하나 했는데, 웬 욱일 제국군이 나타나 뒷통수.
싱귤래리티에서는 카토르가-12 섬의 과거인 1955년의 회상 속에서 온갖 괴물들에게, 혹은 아예 과거로 직접 타임슬립한 주인공에게 썰려나가는 안습한 역할로 등장한다.
고전 액션 영화나 그것을 오마주한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와 비슷한 분위기의 FPS 게임 데드폴 어드벤처(Deadfall Adventures)에서는 유물 사냥꾼들 아니면 독일 국방군 or 슈츠슈타펠만 나오는 클리셰를 비틀기 위함인지 북극 지역에서 1930년대의 소련군이 적으로 등장한다. 신나게 주인공에게 썰린다.
슈퍼마리오의 별칭이다. 실향민 출신인 오락실 주인이 마리오를 보고 1의 군인을 닮아서 그렇게 불렀대나 뭐래나.
이거 하나면 이해가 갈 것이다. 배경 노래는 슬라브 여인의 작별.
걸즈 앤 판처프라우다 고교는 소련군을 본땄다.
소련은 멸망하는 순간까지도 전군 (해군 제외)에게 양말 대신 발싸개를 지급했다. 우리가 흔히 양말도 못 사는 거지나 쓴다고 '거지 발싸개'라고 부르는 그 발싸개다.영문위키 Footwraps 발싸개는 제대로 싸지 않으면 양말보다도 심각한 발 부상이나 물집을 불러오기 십상이었고 통풍이 잘 안되어 발냄새가 엄청났다고 한다. 소련이 붕괴하자마자 독립국가들은 전원이 군에서 발싸개를 퇴출시키고 양말을 지급하였으나, 심지어 러시아는 2012년에(!) 국방장관이 올해야말로 군에서 발싸개를 완전히 퇴출하겠다고 했을 정도.
하지만 이는 양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소련식 군화(장화식)에서는 양말보다 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군에는 양말을 보급했다. 북한군도 1990년대까지는 발싸개를 지급했다. 1990년대 MiG-19기를 몰고 귀순한 이철수 대위가 발싸개를 하고 왔을 때, 일부 언론에서 엘리트 공군 비행사에게도 경제난 때문에 양말을 지급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철수 대위가 직접 "소련식 비행화를 신을 때는 양말보다 발싸개가 더 편리하다"고 반박한 바 있다.[54] 발싸개는 양말보다 빨리 건조가 되고 구멍이 뚫려도 돌려서 싸면 구멍이 덮어지는 장점이 있다.

13. 관련 문서



[1] 1988년 소련 '조국 수호자의 날'(День защитника Отечества) 기념 포스터.[2] 대전 말기인 45년 기준으로 무려 13개 전선군(집단군)을 굴렸다. 대한민국의 55만 상비군을 다 모아도 집단군을 편성하려면 예비군까지 전부 끌어와야 가능하다.[3] [image]
그림에서 보듯이 1970년대 중후반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대통령 시기의 소련 국방비가 오히려 미국을 앞서는 위엄을 보였다. 그러나 레이건 행정부의 집권으로 미국도 군사비를 늘림에 따라 다시 미국의 국방비가 소련을 능가했지만 그래도 1980년대 초중반의 국방비는 미국 소련이 비슷했다. 문제는 소련은 미국의 반밖에 안되는 경제력이었기 때문에 소련의 부담이 훨씬 컸다는 것. 이런 국방비 몰빵은 결과적으로 소련의 해체에 영향을 미쳤다. 사실 미국도 1980년대 식의 국방비를 계속 하다가는 골로 갈뻔 했다. 그나마 냉전이 해소된 조지 H. W. 부시 집권 후부터 대폭 삭감하면서 1990년대 미국의 경제가 살아난 것이다. 근데 2000년대 테러와의 전쟁의 전비로 미국도 2000년대 후반부터 경기 침체에 접어든다.
[4]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군이 1992년 창설됐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이외의 CIS 국가 중심의 반쪽짜리 소련군이 93년까지 유지됐다.[5] 붉은 군대는 인민군을 지향했으나 1946년에 소련 육군으로 이름을 바꿔 국군이 되었다. 해당 시기 해군은 붉은 함대라 칭했다.[6] 붉은 군대가 초기의 막장상태에서 크고 아름다운 무적의 스팀롤러로 변하는 과정을 담은 책으론 리처드 오버리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Russia's War)>이 있다.[7] 사실 순수공격형이라기보다는, 나토군이 침공 징후를 보일 때 선빵을 날린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공세형 수비.[8]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독소전쟁이 터지자 국방장관이던 현역군인 세묜 티모셴코 원수는 서부전선군 사령관을 맡아 전선에 나갔고, 스탈린은 공석이 된 국방장관을 전쟁 끝까지 겸직했다.[9] 소련군에서 한 병과의 최선임 자격으로 주어지는 대장보다는 높고 원수보다는 낮은 계급이다.[10] 실제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그런 선례를 만들었다. 때문에 그들은 군에 대한 당의 통제력을 강화하는데 주력했다. 이런 곱지 못한 시선은 정치장교 제도의 창설과 훗날 스탈린 시대에 벌어진 대숙청의 기조가 됐다.[11] 정확히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12] 1945년 종전 당시 원수까지 오른 주코프, 코네프가 전쟁 발발 당시 만 44세(1897년생), 그리고 바실렙스키가 45세, 로코솝스키가 46세였고 대장까지 오른 추이코프, 노비코프는 41세, 체르냐홉스키는 겨우 34세밖에 되지 않았다.[13] 이 전략은 1960년대 중국과 1990년대 북한이 따라한다. 자꾸 이 항목에서 1960년대 미국의 핵전력을 들어 소련이 핵개발 대신 재래식 전력에 집착했다는 설을 푸는 밀덕이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는 흐루쇼프 회고록 및 소련사만 봐도 바로 나온다. 흐루쇼프가 2차대전의 영웅인 국방장관 주코프 및 공군사령관 알렉산드르 노비코프를 해임한 것은 이들이 지나치게 재래식 전력 확충을 강조했기 때문이다.[14] 실제로 베트남전, 4차 중동전쟁 등을 보면 미국산 전투기들을 괴롭힌 것은 오히려 적 전투기보다도 대공포대공미사일이었다.[15] 참조 블로그[16] 그냥 설사만 하고 마는 병으로 아는 사람도 있는데, CDC에 따르면 매년 전세계에서 110만명이 사망하는 병이고, 전장에서는 매우 흔하다. 그나마 그 피해를 최소화한 군대는 미군 정도.[17] Falling rates of malaria among U.S. military service members in Afghanistan substantiate findings of high compliance with daily chemo prophylaxis, - Remington L. Nevin, 2012/12[18] 소련은 이런 기초과학 분야에서는 성과도 꽤 냈다. 시뮬레이션의 바탕이 되는 확률론이나 확률과정론 같은 분야는 거의 소련에서 완성된 학문이었다.[19] 실제로는 6주였지만, 실질적으로 받는 훈련을 받는 기간이 4주 정도밖에 되지 않다보니, 냉전기 CIA에서는 소련군의 훈련기간을 약 4주로 예측했었다.[20] 여기에는 미군과 소련군의 방침 차이도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미군은 '운용하기 쉽고, 수리하기 쉬운' 엔진을 만든 반면, 소련군은 '만들기 쉽고 잔고장은 적은' 엔진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웬만한 고장은 내구도로 버티다가 치명적 손상에는 엔진을 갈아버리는 것으로 대처한 것. 하지만 이러한 형태는 생산과 효율 측면에서는 뛰어났을지 몰라도 실제 훈련과 야전상황에서는 좋지 못했다.[21] 다만 이 기준은 군필자라면 알겠지만, 한 두번 정도 훈련받은 신병도 충족시키고도 남을 정도로 너무나 낮기 때문에 부대에서 자체적으로 훈련도를 조정했을 가능성은 높다.[22] Zaloga, Steven J. Tank War-Central Front: NATO vs. Warsaw Pact, Osprey Publishing, 1989[23] 해당 서적의 한국어 번역은 여기로[24] 실제로 미국, 영국의 특수부대원 출신들에게 동유럽 최고의 특수부대를 뽑아보라고 하면 러시아의 알파 그룹 등은 언급도 안 되고, 폴란드그롬은 거의 반드시 언급된다.[25] 체첸 반군의 악명높은 공격과 테러, 잔인한 만행에 대한 보복으로, 체첸 점령 이후 대테러작전이라는 명목 아래 자치스트카(Зачистка)를 진행, 수많은 체첸 민간인을 학살했다.[26] 지금이야 철도와 비행기 등이 있지만 근대까지만 해도 이동수단이라고 해봐야 말뿐이었다.[27] 지금이야 화학비료를 쉽게 구할 수 있고 각종 기계들을 활용 가능하지만 당시에는 철저하게 사람의 노동력에만 의존해야했다. 철저히 노동력에만 의존해야하는데 척박한 땅이다 보니 농사 짓기 힘들어서 사람들이 잘 안 살려고 했다(중세까지의 기록을 봐도 심심치 않게 러시아 농노들이 서유럽쪽으로 도망쳤다는 기록들이 있다).[28] 러시아 지역은 옛날엔 생각 외로 엄청나게 가난했다. 수확철이 되면 사람들은 농산물의 냄새를 맡으며 풀뿌리, 벌레, 나뭇잎들을 씹어먹었다는 얘기들도 있을 정도다.[29] 이전판에서는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이 비인간적인 처우와 인권무시로 군 사기가 크게 낮았다고 설명하지만, 그랬다면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이 승리했을리가 없다. 심지어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에서는 사실상 지휘체계가 붕괴된 상태였음에도 끝까지 도시를 사수한 것이 소련군이다.[30] 예를 들면 중부유럽 지상군은 미군, 서독, 영국이 담당하고 준 가맹국인 프랑스도 유사시 돌파당할 가능성이 높은 전선을 담당한다는 식.[31] 그래도 그나마 러시아군은 쇼이구 시대에 들어오면서 조금 나아지고 있긴 하다.[32] 출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Russia's War), 351쪽[33] 독일 뿐 아니라 독일을 도와주었던 적이 있었던 헝가리, 루마니아, 그리고 나치의 만행을 방조했던 오스트리아 등도 이런 일을 당했다.[34] 그는 이뿐만 아니라 러시아 국내에서조차 자국군에게 강간당한 러시아인들의 보상을 촉구한다는 의견을 밝힌 적이 꽤 되는 편이다.[35] 연합군의 전쟁범죄는 최근 들어 조명받았지만, 학계에서 큰소리가 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가해자인 서방 입장에서는 당연히 말하기 껄그럽고, 독일측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인과응보당했으니 뭐라고 할만한 처지가 못되는 편이고, 러시아측도 자신들도 흑역사가 있으니 대대적으로 학계에서 연구가 못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36] 원본 저서 속의 뉘앙스로는 '소련군 없었으면, 연합군은 2차 대전 이기지도 못했을걸'하는 식으로, 소련군을 정말 높게 평가하고 있다. 소련군의 활약을 어떻게든 축소하고 왜곡하려는 대다수의 서방쪽 사람들과 대조적이다.[37] 전시강간이 사라진 이후 흥행한 것은 매춘이었다. 독일측 여성들이 배급의 우선권 확보나 안전 확보 등을 위해서 자발적 매춘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몇몇 독일 여성들은 소련측 고위 장교들을 상대하면서 쌓은 인맥들로 타 여성들을 괴롭혔다고 한다.[38] 이 수기도 한국어로 번역되어 정식출판되었다.[39] 영화와 수기에 나오지 않는 뒷얘기이지만, 마르타 힐러는 독일군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 스위스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결혼하여 살았다고 한다.[40] 여기서 소련군의 강간 장면이 꽤 나오는 편이다. 그 때문에 러시아쪽 반응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41] 냉전시기 소련이 고아들을 교육해서 서구권으로 스파이로 보낸다는 도시전설이 있었다.[42] 초기 각본 구성 상태에서는 영국 정보부에서 소련 여자 스파이를 고문하다가 윤간하려는 장면이었지만, 영국쪽에서 올 후폭풍 때문에 윤간 장면을 빼버리고 약간 다듬어서 시나리오를 작성했다고 한다.[43] 이 때문에 영국쪽에서 이 영화를 안 좋게 보는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실제로 영국 정보부가 좌익 성향의 사람들을 납치하고 고문했다는 증언들이 있다. 즉, 영국을 까기 위해 만든 거짓이 아니라, 실제 사례를 넣은 셈.[44] 이 나치 당원이 승리할 수 있다고 말하는 모습은 무언가 마치 사이비 종교 신자같이 보인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45] 이하 소련 육군 소속이다.[46] 평시에는 내무부 관할이나, 전시에는 국방부의 지휘를 받는다.[47] 1989년 이후 해안방어사단으로 축소제편된다.[48] 북해의 미국 항모전단을 격파하기 위해 다수의 초음속 대함미사일로 무장한 Tu-16,Tu-22M 폭격기들이 배치되었다.[49] 중국-소련 국경분쟁 이후 새로 창설되었다.[50] 창설연도가 무려 1919년으로 그야말로 초창기부터 탄생한 사단. 전통을 위해 부대명만 보병사단으로 남겨두었을 뿐이지 냉전시대에는 다른 차량화소총병사단과 마찬가지로 모든 예하부대가 기계화되어 있었다.[51] 주로 방공부대였다.[52] 정식 명칭은 알렉산드로프 앙상블. 저것도 줄인 것이고 진짜는 '적기훈장을 두번 수훈한 A. V. 알렉산드로프 명의의 러시아군 정통 가무 앙상블이다.[53] 이 해를 끝으로 80년대부터 진행 구성이 많이 변경되었다.[54] 그런데 소련에서도 편의를 위해 운동화나 서방식 전투화 쓰는 부대가 있었으나 이쪽도 양말 대신 발싸게 지급 받는 경우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