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전쟁

 


Talvisota (핀란드어)
Vinterkriget (스웨덴어)
Зимняя война (러시아어)[1]
Winter War (영어)
겨울전쟁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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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1939년 11월 30일~1940년 3월 13일
장소
핀란드 동부 지방
교전국
<^|1>[image] 핀란드 공화국
<^|1>[image] 소비에트 연방
[image] 핀란드 민주 공화국
지원국
<^|1>[image] 스웨덴 왕국 [2]
[image] 헝가리 왕국[3]
[image] 이탈리아 왕국 [4]
[image] 노르웨이 왕국[5]
[image] 폴란드 망명 정부[6]
[image] 영국[7]
[image] 자유 프랑스[8]
[image] 미합중국 [9]
<^|1>
지휘관
<^|1>[image] 퀴외스티 칼리오
[image] 리스토 뤼티
[image]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1>[image] 이오시프 스탈린
[image]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image] 세묜 티모셴코
[image] 키릴 메레츠코프
결과
소련의 전술적 승리, 전략적 패배
영향
핀란드의 항복과 영토[10] 상실
소련군의 군사적 결점이 드러남
독소전쟁 발발의 결정적 계기[11]
핀란드의 독립국 지위 유지 성공
병력
병력 25만~34만 명
전차 32대[12]
항공기 114대[13]
병력 42만~99만 명
전차 2,514~6,541대
장갑차 718~1,691대
항공기 3,880대
피해규모
총 피해 7만여 명
전사/실종 2만여 명
부상 4만 3천여 명
포로 800~1천여 명
공습으로 민간인 957명 사망
전차 30여 대 파손
항공기 62대 손실
총 피해 36만여 명
전사/실종 4만 8천~16만여 명
부상 18만 명
포로 5천여 명
전차 300여 대 파손
항공기 1천여 대 손실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핀란드군의 대비
3.2. 소련군의 진격
3.3. 전세역전
3.4. 소련군의 재반격과 종전
4. 결과
5. 이후
6. 평가
7. 기타
8. 관련 링크
9. 매체에서
9.1. 영화 겨울전쟁
9.1.1. 개요
9.1.2. 상세


1. 개요



그냥 내놓으라고 해서 말을 안 들으면 목소리를 좀 높이면 될 것이고, 고함을 질러도 안 되면 총을 몇 발 쏘면 돼. 그저 그뿐이야. 이건 무척 쉬운 일이라고.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1939년 11월 30일 소련핀란드를 침공하여 발발한 전쟁. 1940년 3월 13일까지 지속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로 간주된다.
정식으로는 제1차 소련-핀란드 전쟁/핀란드-소련 전쟁이라고 부르지만, 겨울전쟁이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불리고 있다. 전쟁의 개전과 종전이 겨울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한 탓에 이렇게 불리는 것이지만, 겨울에 일어난 전쟁이 수없이 많은데도, 이 전쟁이 유독 이같이 불리는 까닭은 영미권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소련의 침략 행위를 가리기 위한 목적으로 겨울전쟁이라는 명칭을 선호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하자 영국, 프랑스는 이 문제에 대해 미적지근한 반응이었고, 다급해진 핀란드는 나치 독일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미 1939년 8월 독소 불가침 조약이 조인된 상태에서 핀란드의 처지는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2. 배경


핀란드는 1581년부터 스웨덴 왕국의 영토였고,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는 러시아 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1917년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자 핀란드는 독립을 선언하고 핀란드 내전에 돌입했다. 소련에선 적군이 승리했으나 핀란드에서는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이 이끄는 백군이 독일 제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승리했다.
1920년 핀란드와 소련은 두 국가의 경계선을 확정하는 타르투 조약(Treaty of Tartu)을 맺었다. 핀란드는 도시 페차모(Petsamo)[14]북극해에 접한 항구 하나를 얻어냈다. 이후에도 국경 갈등은 지속적으로 있어왔지만, 어쨌든 명목상으로나마 소련-핀란드의 국경선은 확정되었다.
1930년에 소련은 불가침조약을 제안했지만 핀란드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소련은 1932년에 다시 한 번 불가침조약을 제안했고 결국 체결되었다. 34년에 갱신된 이 조약은 향후 10년간 서로 침공하지 말자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오시프 스탈린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러시아 내전 동안 핀란드 지역을 상실한 것에 대해 많은 실망을 한 그는 불가침조약을 맺었음에도 이곳을 계속 탐냈다. 1930년대 초반 성공적으로 소련의 공업화를 이룩하고 빠른 경제 성장을 일궈낸 그의 눈에 핀란드는 먹기 딱 좋은 케이크처럼 보였을 것이다.[15]
당시 소련은 나치 독일과 맺은 독소 불가침조약에 따라 폴란드를 침공하여 폴란드의 반쪽을 접수한 상태였다. 그러나 애초에 여기에 만족할 리가 없는 스탈린이었고, 그는 독일이 프랑스마지노 선을 사이에 두고 앉아서 시간만 보내며 노는 사이에 발트 3국을 합병했다.[16] 게다가 독소 불가침조약 체결 당시 이미 핀란드는 소련 몫으로 밀약이 되어 있던 상태. 그리고 소련은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완전히 회복시킬 마지막 타겟으로 핀란드를 선택하였다.
1939년 소련은 레닌그라드 일대의 안전 확보 등을 명목삼아 핀란드에 대대적인 영토 할양 및 조차를 요구하였다. 소련이 핀란드에게 제시한 요구는 다음과 같다.
  • 핀란드와 소련 국경 부근의 카렐리야(Karelia)[17], 라플란드(Lappland) 지방 등을 포함해 약 2,300km2에 해당되는 영토의 할양.
  • 수르사리(Suursaari) 섬, 코틀린(Kotllin) 섬 등 핀란드 만의 4개 섬과 올란드 제도를 할양.[18]
  • 투르쿠(Turku)[19], 코트카(Kotka), 항코(Hanko), 헬싱키(Helsinki)[20], 비푸리(Viipuri)[21] 등 발트 해에 속한 보트니아 만과 핀란드 만을 접하고 있는 주요 항구에 대한 소련군 주둔권 및 조차 권리 보장.[22]
이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퀴외스티 칼리오 핀란드 대통령은 소련 대변인에게 "안 되오."라고 짧고 굵게 대답했다.
그러자 소련 측 대표인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이제 내 역할은 끝났소. 나머지는 붉은 군대가 말할 것이오."라는 반협박적 언어로 대답한 뒤 소련으로 돌아갔다. 스탈린은 핀란드가 요구를 거절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전쟁을 하기 위해 일부러 무리한 요구를 했고, 회담이 결렬되자 즉각 전쟁에 돌입할 태세에 들어갔다. 이미 소련에서는 핀란드 공산주의자들이 '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웠다. 소련은 이 시점에서 이미 핀란드를 소비에트 연방 구성국가로 병탄할 의도를 갖고 있었다.
핀란드는 당시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중립을 선언하고 소련의 위와 같은 조치에 영국, 스웨덴, 프랑스에 도움을 청하여 중립을 유지하려 하였으나 일이 잘 안되어 결국은 실패하였다. 그리고...
1939년 11월 26일, 소련-핀란드 국경 지대의 마이닐라(Mainila)에서 소련은 핀란드를 침략할 명분을 만들기 위하여, 마치 자신들의 국경 수비 초소가 핀란드군에게 포격을 당한 것 마냥 위장한 자작극을 벌였다.[23] 이에 소련은 핀란드군의 포격에 대한 반격을 구실삼아 4일 뒤 핀란드에 전면적인 침공을 개시했다.

3. 전개



3.1. 핀란드군의 대비


핀란드군의 전쟁 대비는 지리적 이점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소련과의 국경은 1000km에 달했지만 기후도 좋지 않고 도로 사정도 나빠서 제대로 된 공격을 할 수 있는 지역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를 토대로 핀란드군 수뇌부는 만네르헤임 선[24] 위쪽, 즉 라도가 호수 이북 지역으로 5개 전후의 사단이 올 것이라 예상했다. 이런 예상대로라면 핀란드군은 1명 당 3명의 소련군을 상대해야 했다. 허나 실제로 라도가 이북으로 온 소련군은 그 2배가 넘는 12개 사단이었다.
더 큰 문제는 장비였다. 무기를 전부 외국에서 수입해야 하는 데다가 그 양도 많지 않았다. 연료 비축량은 19~60일분에 불과했고, 20년 전에 있었던 내전으로 안 그래도 허약한 군대는 더 약화되어 있었다. 때문에 전쟁 기간 동안 핀란드군은 노획한 장비에 상당 부분을 의존해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따발총의 원조 수오미가 보급되어 있었다는 것인데 문제는 역시 물자부족으로 인해 비싸다고 많이 쥐어주질 못했다. 전차 전력으로는 1928년에 생산된 6톤짜리 비커스 Mk. E1차대전 당시 물건인 르노 FT-17이 있었다. 그나마 핀란드에서는 겨울 전쟁 기간 도중 외국에 지원을 요청했고 그 중 미국의 경우 이례적으로 자국에도 10여기 남짓 밖에 배치되지 않은 최신형기를 무려 44대나 원조해 주는 배포를 보였지만, 미국에서 이걸 수송해 오는 동안 겨울전쟁이 끝나버렸다.
핀란드군의 구체적인 방어계획은 이러했다.
  • 후고 외스테르만이 이끄는 6개 사단으로 구성된 카렐리야 지협군은 만네르헤임 선에 주둔한다. 카렐리야 지협군은 제2군과 제3군의 합동군이었다.
  • 볼데마르 헤글룬드가 이끄는 2개 사단으로 구성된 제4군은 라도가 호수 북부를 수비한다.
  • 도시 수비대, 국경수비대민병대로 이뤄진 북부 핀란드군은 핀란드 북쪽 국경을 수비한다.
여기서 핀란드군의 전쟁 준비가 남부 공업 지대에만 집중됐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이는 북부가 제대로 된 도로조차 없을 정도의 황야였기 때문이다.

3.2. 소련군의 진격


개전 당시 소련군은 무려 25개 사단, 54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였는데, 당시 핀란드는 전체 인구가 370만이 조금 안되는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 인구의 1/7에 해당하는 병력이 핀란드를 침공했고, 소련군 54만명은 당시 핀란드가 동원할 수 있는 병역 자원[25]을 전부 합친 숫자의 약 세 배에 달했다.[26]
전차의 숫자비는 2,400:9였다. 당시 핀란드 국방군이 보유한 전차는 전쟁 전 영국에서 수입한 비커스 Mk. E 전차 33대가 전부였는데, 개전 시점에 주문 물량이 다 들어오지도 않은 상황[27]이었으며, 가격 절감을 위해 무장을 뗀 상태로 수입한 상태였다. 이때문에 개전 시점에 현지에서 무장의 장착을 완료한 비커스 E는 고작 10대에 불과했다. 이 외에 구식 경전차 르노 FT-17 32대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실전에서 운용하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에, 대부분 땅에 파묻어 벙커토치카 용도로 쓰거나 노획 장비 견인 용도로 활용하는데 그쳤다. 그 밖에 비커스 E 도입시 테스트용으로 같이 들여온 카든-로이드 Mk.VI 탱켓 1대, 1933년형 4.5톤 카든 로이드 경전차 1대와 스웨덴에서 수입한 란츠베르크 182 장갑차 1대가 있었으나, 전투에서의 활약은 아예 없거나 미미했다. 반면 소련은 개전 당시에만 전차 2,514대, 장갑차 718대를 동원하였으며, 종전까지 무려 전차 6,541대와 장갑차 1,691대를 핀란드 전선에 투입하였다.
항공기는 500:80이었다. 소련 3,880기, 핀란드 114기인데 핀란드는 훈련기 및 관측기, 예비기까지 포함할 경우 216기였다. 뿐만 아니라 핀란드군은 대전차포대공포, 야전 통신 장비도 부족한 상태였다. 한편 해방전함 2척과 잠수함 5척 등의 전력을 가지고 있었던 핀란드 해군은 연안 방어[28]를 비롯해 올란드 제도와 발트 해상의 핀란드 상선 보호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게다가 핀란드군은 개인 화기조차 아무 거나 되는 대로 사다가 들려준 탓에 정규군도 정식 군대라기보다는 거의 게릴라 부대 수준이었다. 종합적으로 소련의 군사적 우위는 핀란드군의 3배, 공군은 30배, 전차는 100배에 달했다. 뭘로 봐도 소련군의 압도적인 우위였다. 때문에 소련군은 자만에 찬 나머지 장교들이 병사들에게 너무 진격하다가 스웨덴 국경 넘지 말라고 농담을 하고, 장군들도 10일치 보급품만 준비할 정도였다. 심지어 어떤 한 장군은 2~3개월치 보급품을 준비하자고 했다가 완전히 왕따당하기까지 했다는 야사까지 있을 정도. 그러나 곧 이어진 겨울전쟁에서 그러한 자만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소련의 구체적인 진공 계획은 이러했다. 남부-북부 순이다.
  • 7개 사단과 1개 기갑사단으로 이뤄진 제7군은 만네르헤임 선을 돌파하여 비푸리로 진격한다.
  • 6개 사단과 1개 기갑 여단으로 이뤄진 제8군은 라도가 호수 북부에서 진격하여 만네르헤임 선을 후방에서 공략한다.[29]
  • 4개 사단으로 이뤄진 제9군은 중부 핀란드를 공격한다. 이 공격은 핀란드를 양단하여 오울루로 계속될 예정이었다.
  • 3개 사단으로 이뤄진 제14군은 무르만스크에서 북극해를 끼고 진격하여 페차모를 점령하고 로바니에미로 진격한다.
얼핏 봐도 엄청난 전력을 전선마다 넉넉하게 나눈 소련군은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를 폭격하며 진격을 시작했고, 눈 깜짝할 새에 국경에서부터 30~75km를 진격하여 핀란드군의 방어선인 만네르헤임 선에 도달했다. 여기서 25만의 붉은 군대는 13만의 핀란드군과 만났다. 이때 핀란드군은 그 중 2만 1천의 병력을 빼서 방어선 앞쪽에서 지연전을 펼치려 했지만 실패했다.
핀란드군 초기의 혼란은 주로 소련군의 전차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핀란드군에는 대전차 무기가 별로 없었고 근대적인 대전차 전술로 훈련받은 병사도 없어 초창기엔 큰 희생을 치루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소련군 전차병들은 숙련도가 미숙했고, 전차의 장갑 또한 아직 그리 두껍지 않았다. 곧이어 핀란드군은 이를 이용하여 근거리 대전차 전술을 개발해낸다. 크로우바나 굵은 통나무를 전차 궤도와 현가장치 사이에 밀어넣어서 잼을 일으키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전술이었다. 나중에는 엔진룸이나 해치 속에 화염병[30]을 던져넣는 전술이나 '카사파노스(Kasapanos)'라는 흡착식 대전차 폭약을 사용하는 전술도 자주 사용되었으며, 얼음 위에다 위장망을 깔아놓은 함정을 만들어 전차를 돈좌시키는 방법 또한 병행했다.
한편 소련군이 점령한 국경 지대의 마을인 테리요키[31]에서는 1939년 12월 1일 핀란드 민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오토 빌레 쿠시넨(Otto Ville Kuusinen)을 수장으로 한, 이른바 '테리요키 정부'라는 소련의 위성국이 수립되었다. 이는 1940년 3월 12일까지 존속되다가 모스크바 평화 협정으로 겨울 전쟁이 끝나자 새로 수립된 카렐리야-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되었다. 이 정부는 1956년 해체되었으며 그 후 카렐리야 공화국에 합병되었다.

3.3. 전세역전


사방이 새하얀 정적에 싸여 있었다. 핀란드군 저격수들의 귀신 같은 사격 솜씨를 익히 알고 있던 우리 소대의 기관총 사수 미하일로프는 M1910 기관총 앞에 달린 방탄판 뒤에 단단히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때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미하일로프의 목이 뒤로 확 젖혀지더니 철모가 나뒹굴었다. 새하얀 눈밭 위에 붉은 피가 점점 튀었다. 그 핀란드군 저격수는 기관총 방탄판 가운데 1cm 틈의 조준 구멍 사이로 총탄을 쏘아 넣었던 것이다.

우리 중대장은 응사하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쳤지만, 우리는 아무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것은 중대장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겨울전쟁 당시 소련군의 증언. 당시 그 핀란드군 저격수가 소련군 병사들에게 얼마나 공포스런 존재였는지 잘 나타내는 부분이다.

12월 6일 모든 핀란드군은 만네르헤임 선을 비롯한 방어선에 틀어박혀 방어전에 돌입했다. 붉은 군대는 방어선의 일부인 타이팔레에 첫 공격을 가했다. 소련군은 군사력에서 우위에 있었지만 핀란드는 기후와 강을 이용한 방어로 첫 공격을 격퇴해냈다. 14일이 되자 소련군은 다시 공격을 감행했지만 또다시 물러나야 했다. 소련군 제3사단은 전투에서 예상 외로 강력한 핀란드군의 저항에 직면하자 패닉에 빠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공격은 계속되었으나, 방어선은 여전히 뚫리지 않고 소련군의 피해만 늘어갈 뿐이었다. 한 번은 1시간 동안의 전투에서 병력 1천 명과 전차 27대를 잃은 적도 있었다.
한편 라도가 호수 북부의 핀란드군은 숲을 이용해서 방어전을 펼쳤다. 이곳은 도로도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험준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소련군 제8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도로를 깔면서 진격했고, 덕분에 약간씩이나마 보급 상황이 개선될 수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전진하다가, 12월 12일 라도가 호수 북부에서 벌어진 톨바예르비 전투에서 소련군 2개 사단이 파보 탈벨라 대령과 아로 파야리 중령이 이끄는 핀란드군 1개 연대에 개박살이 나면서, 이 지역의 전세 역시 핀란드군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핀란드군은 소련군을 끌어들여서 조금씩 포위해 각개격파하였다.
역사가 윌리엄 R. 트로터는 이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소련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싸우는 걸 포기한다면 그는 총에 맞아 죽을 것이다. 숲에서 몰래 움직여 탈출하려 한다면 얼어 죽을 것이다. 항복은 그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소련의 선전에는 핀란드군의 악랄함이 매우 자세하게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부와 북부 지역의 도로는 라도가 호수 북부보다도 훨씬 심각했다. 핀란드군은 여기에 정규군 사단 1개도 배치하지 않는 등 사실상 이곳에 대한 방어 계획은 거의 세우지 않았는데, 이는 당연히 이런 보급 사정을 고려한 것이었다. 소련군도 공세를 펼치기엔 무리인 곳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뚝심의 스탈린은 이곳에 무려 8개의 사단을 전개하며 핀란드를 공격했다. 때문에 소련군은 이 지역에서 압도적인 수적-장비적 우위를 점했지만, 수오무살미 전투에서 햘마르 실라스부오가 이끄는 핀란드군에게 처절하게 발리며 더 이상의 진격은 좌절되고 말았다.
사실 소련군은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인해 불과 얼마 전에 군부에 대한 숙청 작업을 한바탕 벌인 후였고, 유능한 장교라고는 죄다 굴라크나 총살대로 끌려간 뒤인데다 살아남은 군 간부들도 어디서 트집을 잡힐지 무서워서 제대로 된 지휘는 꿈도 못 꾸는 식이었다. 이렇게 소련군의 내부는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스탈린의 예상과 어긋난 것은 또 있었다. 핀란드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이 소련군에 호응하지 않은 것이다. 이 역시 대숙청과 관련되어 있는데, 핀란드 공산주의자들은 핀란드 내전 패배로 인해 소련으로 망명하여 공산국가 건설에 열중하다가 숙청당한 바 있었다.
물론 소련도 추위로 유명한 나라다. 과거 추위 덕분에 전쟁에서 이긴 경험까지 있었다. 문제는 이때 소련군의 병력들 대부분이 하필 우크라이나아르메니아 등 소련 남부에 위치한 공화국 출신 병사들이 많은 편이었다. 소련 남부도 썩 따뜻한 기후는 아니지만 그들에겐 핀란드만큼의 혹한기는 경험해 보지 못한 극한의 고통이었다.[32] 게다가 소련의 겨울은 듣보잡 취급하는 핀란드 동장군의 강림으로 별로 좋지도 않은 도로가 몽땅 폭설에 묻히자 전차가 진격은 커녕 보급도 못하는 상황에 빠져버렸다.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부실한 월동 장비 보급은 피해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1939~40년의 겨울 동안 카렐리야 지역의 평균기온은 영하 15도에 육박했고 최저 기온은 영하 43도를 찍었다.[33] 그나마 따뜻한 남부 지역의 기온이 이 정도였다. 소련군의 10%가 핀란드 국경을 넘기 전에 이미 동상에 걸려 있었다는 통계도 있다. 이 추위가 소련군에게 준 유일한 이점이 있었다면 눈이 녹지 않고 얼어서 중장비의 이동이 수월했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소련군의 주력인 전차는 폭설 때문에 제대로 진격도 못했고, 이때를 틈타 핀란드군은 술에 불을 붙여 전차 안에다 던져 버리는 식으로 공격했다. 이때 핀란드군은 이 술병을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에게 바치는 술병이라 해서 몰로토프 칵테일이라 비꼬았다. 출처[34][35] 이것으로 무려 80대에 달하는 소련군 전차가 파괴됐다. 이것이 소련군에게는 상당한 위협이 되었는지 소련 공군이 몰로토프 칵테일을 생산하는 공장을 폭격하도록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더군다나 핀란드군 총사령관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원수가 짜놓은 만네르헤임 방어선이 워낙 단단하고, 그곳을 방어하는 핀란드군이 의외로 강해서 소련군의 맹공에도 쉽게 뚫리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핀란드군이 스키를 타고 나타나 총 몇 발만 쏘고 사라져도 발이 묶인 소련군은 오도 가도 못한 채 고립되기 일쑤였다. 움직이자니 핀란드군의 귀신 같은 저격 실력에 당하고, 가만히 있자니 그대로 얼어죽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등지에서 핀란드에 대해 자금과 무기를 지원하고 자원병을 파견하는 등 도움의 손길도 왔다. 특히 스웨덴은 영구 중립 노선을 걷는 국가임에도 겨울전쟁 당시에는 이례적이라 할 정도로 핀란드에 많은 군수 물자와 자금 지원을 해주었으며, 자원병 파견 숫자도 가장 많았다. 언급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외에 에스토니아헝가리, 이탈리아에서도 소수의 자원병을 파견하였으며 영국, 프랑스, 미국 등도 핀란드에 물자를 지원해 주었다. 다만 나치 독일은 전쟁 초기 외국의 군수 물자가 자국 영토를 통해 핀란드로 들어가는 것을 허가하는 등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으나, 얼마 후에는 소련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해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당시만 해도 독소 불가침조약 체결로 표면상으론 독일이 소련과 우호국이었기 때문이다.
총에 맞아 죽은 병사보다 얼어죽은 병사가 더 많았다. 본대와 고립되고 보급이 끊어진 소련 병사들의 운명은 가혹했다. 핀란드군은 철저하게 방어에 유리한 자연 지형을 기반으로 모티 전술(모티는 핀란드어로 큰 통나무를 장작용으로 쓰기 위해 잘게 쪼개놓은 것을 뜻함)을 구사하였는데, 말 그대로 통나무를 조각내듯 소련군 부대를 각개격파하는 방식이었다. 핀란드의 울창한 삼림과 엉망이었던 도로 사정에 스탈린의 조급한 공격명령이 더해지면서 소련군의 영역은 면이라기 보다는 선에 가까운 형태를 띠게 되었는데, 핀란드군은 좁은 진격로를 전면 참호전 형태로 막는 것에만 주력하면서 후방부대 혹은 보급대를 기습했다 빠지는 것을 반복했다. 이렇게 하면 선의 일부가 떨어져 고립되는데, 이때 이 떨어진 조각보다는 큰 별동대가 고립된 적을 타격하여 신속히 섬멸하고 다시 도주하곤 했다.
특히 12월 9일부터 다음해 1월까지 계속된 수오무살미 전투에서 소련군이 25,000명을 넘는 사망자를 내며 대피해를 보자 전쟁은 완전히 교착 상태에 빠져버렸다. 이걸 본 세계는 소련군을 비웃고 핀란드에게 갈채를 보냈으며, 타임지는 스탈린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3.4. 소련군의 재반격과 종전


이는 스탈린을 상당히 당혹하게 했고, 결국 스탈린다차[36]에서 총지휘관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와 격렬한 언쟁을 벌였다. 언쟁 도중에 스탈린이 보로실로프의 무능함을 지적하자, 보로실로프는 격한 반응을 보이고 접시를 집어던지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Stalin jumped up in a white hot rage and started to berate Voroshilov. Voroshilov was also boiling mad. He leaped up, turned red, hurled Stalin's accusasions back into his face. "You have yourself to blame for all this!" shouted Voroshilov. "You're the one who annihilated the old guards of the army; you had our best generals killed!" Stalin rebuffed him, and at that, Voroshilov picked up a platter with a roast suckling pig on it and smashed it on the table.

스탈린은 시뻘겋게 열받아 펄펄 뛰며 보로실로프를 야단치기 시작했다. 보로실로프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결국 속이 뒤틀리고 얼굴이 시뻘개지면서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이 저지른 죄를 면전에 대고 쏘아붙였다. "이게 다 네놈 때문이잖아!"라고 보로실로프가 고함을 질렀다. "붉은 군대의 베테랑들을 다 없애 버린게 네놈 아니냐! 네가 유능한 장군들을 다 죽여 버렸잖아!" 스탈린이 들은 척도 않자 보로실로프는 새끼돼지 통구이가 든 접시 하나를 집어 테이블에 내동댕이쳤다.

클리멘트 보로실로프가 자신을 비난하는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스탈린이 이 말을 듣고 느낀 게 있었는지, 보로실로프가 흥분한 나머지 접시를 깨트려가면서 스탈린을 논박한 엄청난 불경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37] (니키타 흐루쇼프의 회고록 영문본 Vol.1 256p.) 그는 숙청당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대신 대숙청에서 살아남은 지휘관 중 폴란드 침공에서 맹활약했던 세묜 티모셴코가 새 지휘관으로 부임하여 소련군을 재정비하였다.
결국 소련군은 1940년 봄이 되자 티모셴코의 지휘 아래 자신들의 지난 패배에서 얻은 교훈을 되새기면서 대규모 공습을 실시하며 90만 명의 병력을 더 투입해 총공격을 감행, 마침내 만네르헤임 선을 돌파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핀란드군은 한계에 달한 상태였다. 물론 놀라운 교환비를 내며 선전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미 핀란드군의 사상자는 7만명에 가까웠고 이는 핀란드군 병력의 20%를 넘는 심각한 피해였다. 아래 언급되는 비푸리를 포위당한 시점에서는 소년병과 노인들, 그리고 산업기반을 유지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남겨놨던 비숙련병까지 징집해야 했다. 또한 탄약 등의 군수 물자도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결국 핀란드는 소련군이 만네르헤임 선을 돌파하자 1940년 3월에 소련에게 항복하고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평화 협정 내용은 아래와 같다.
  • 핀란드는 소련에 비푸리(오늘날의 비보르크. 당시 헬싱키에 이은 핀란드 제 2의 도시)를 포함한 카렐리야 지협 및 라도가 카렐리야, 라플란드 동부의 살라, 리바치 반도, 핀란드 만의 섬들을 할양한다.
  • 항코 반도를 소련에 30년 간 임대한다.

4. 결과


핀란드는 영토의 11%[38](하지만 당시 주요 공업지대가 밀집되어 있어 산업 능력의 30%)를 소련에게 넘겨주었지만, 이웃 발트 3국과는 달리 소련에 흡수되는 운명은 면했다. 핀란드는 패배하기는 했지만, 우주방어와 치밀한 외교전을 통해 조국을 구한 만네르헤임은 지금까지도 핀란드의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당시 핀란드의 외교는 약소국이 현실주의 외교를 통해 강대국에게 전략적 승리를 거둔 사례로 정치·외교학 저서에서 널리 인용되고 있다.
전쟁 기간 동안의 핀란드군은 전사자 약 2만 5,000여 명, 부상자 4만 5,000여 명의 피해를 입었으며 소련군은 전사자 12만 7천 명, 부상자 18만 9천 명이라는 경이적인 인명피해를 냈다. 부대 병력의 30%가 사상으로 전투능력을 상실하면 그 부대를 전멸로 간주하는데, 개전시 소련이 투입한 병력이 54만명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참패했던 셈이다. 소련은 가볍게 삥 한 번 뜯어보려다 핀란드에게 밑천까지 털리는 바람에 대독일 방어선에 거대한 구멍이 생겼고, 이는 독소전쟁 초기 북부집단군을 비롯한 독일군이 쾌속진격하는 원인이 되었다.[39] 반면, "핀란드인들은 전투종족"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겨울전쟁 종전 1년 후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핀란드는 복수를 위해 나치 독일과 손을 잡았다. 계속전쟁에서 소련에게 잃은 땅을 잠시 수복했으나,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 대세가 완전히 소련으로 기울자 1944년 재빨리 소련에 항복하고 라플란드 전쟁으로 핀란드 국내의 독일군 잔당을 소탕했다. 물론 기껏 수복한 영토를 다시 소련에 할양하고 상당한 전쟁배상금을 물어야 했지만, 정부 자체가 없어지거나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한 동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경미한 희생에 불과했다.
한편 핀란드 국민들은 이 전쟁 이전까지는 핀란드를 사실상 속국 취급하다가 막상 핀란드 국경에서 전쟁이 터지자 중립을 표방한 이웃나라 스웨덴에 대해 큰 배신감을 느꼈다. 사실 스웨덴 역시 자원병을 파견하고 적지 않은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등 겨울전쟁에서 큰 도움을 주었지만, 이는 스웨덴 국민 개인 자격이었고 스웨덴 정부는 중립을 지켰다. 핀란드 입장에서는 600년 가까이 스웨덴과 러시아의 지배를 번갈아서 받다가 고작 겨울전쟁 20여년 전(1917년)에 독립했고 스웨덴이 중립을 유지한 것이 곱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스웨덴 입장에서는 핀란드가 초반에 상당한 선전을 했다고 해도 승패의 예측은 따져보지 않아도 사실 뻔한데, 스웨덴 정부차원에서 소련을 상대로 핀란드를 돕는 것은 상당히 부담된다는 현실주의적 인식도 있었을 것이다. 자칫하면 핀란드를 돕다가 자국 영토까지 전쟁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5. 이후


억울하게 영토와 재산을 빼앗기고 큰 피해를 입은 핀란드는 이후 추축국에 가담하여 1941년부터 '계속전쟁'을 벌여 잃었던 영토를 일시적으로 회복하기도 하였다. 물론 1944년에 전세가 뒤집히자 독일을 버리고 소련에 붙어서 다시 뱉어냈다.
소련군에게 겨울전쟁의 심각한 피해는 값이 매우 비싼 수업료였지만, 이렇게 비싼 값을 치르고 배운 전훈은 훗날 독소전쟁에서 크게 도움이 되었다. 소련군은 장비, 의복과 전술에 있어서도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수많은 병사들이 동사한 것에 교훈을 얻어 방한장비가 대폭 개선되었으며, "기관단총은 총알을 낭비한다"는 과거의 교리 탓에 기관단총 채용을 거부했다가 핀란드제 기관단총 KP/-31에게 호되게 당한 붉은 군대는 이후 현대전에서 기관단총의 효용을 깨닫고 PPSh-41을 전군에 보급하게 된다.
독소전에서 초반 대참패 끝에 모스크바를 내줄 위기에 몰렸던 모스크바 공방전에서는 이때 체득한 동계작전의 교훈을 십분 활용해 독일 국방군에 톡톡히 돌려주었다. 모스크바 전투 때는 소련군이 질 뿐만 아니라 이후 전투에서 독일군에 우위였던 양까지도 뒤져 있었던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전쟁 때 체득한 동계 작전의 교훈을 활용하여 독일군을 100km 정도 후퇴시켰고, 이는 소련군에게 기사회생의 전기가 되었다.
또한 소련은 개전 후 국제연맹에 의해 침략자로 낙인찍혀 1939년 12월 14일 축출되었다.[40] 동시에 영국프랑스의 주저가 소련군의 낮은 질적 수준을 히틀러에게 알려준 계기가 되어 이후 히틀러는 자신감을 갖고 소련을 침공한다는 계획을 명백히 하였다.
냉전 시기의 핀란드는 중립을 유지하면서 NATO바르샤바 조약기구에 따로 가입하지는 않았으나, 소련과 군사조약을 맺고 있었고 초강대국 소련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소련제 무기로 무장하고 소련을 반대하는 방송·도서를 자체 검열하는 등 "알아서 기어야" 했다. 소련 정부 입장에서도 핀란드는 공산당이 지배하는 국가가 아니고 서방식 민주국가였지만, 소련의 외교 방침을 크게 거스르지 않았고, 공산화할 경우 미국과 서방 국가들의 반목을 살 것이 뻔했기 때문에 소련이 망할 때까지 핀란드에 노골적인 간섭을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알아서 기는 관계가 1970년대 핀란드 경제에 도움이 된 면도 많았는데 오일쇼크 당시 핀란드는 소련의 우방국 대접을 받아 싼 소련제 원유를 도입할 수 있었고 1970년대 내내 서방국가들이 경기침체에 빠졌지만 핀란드는 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약소국이 강대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스스로 자국의 정치·사회를 통제하는 유화주의, 자기검열식 행태를 정치학에서는 "핀란드화(핀란드어: suomettuminen, 스웨덴어: finlandisering, 독일어[41]: Finnlandisierung, 영어: Finlandization)"라고 표현한다. 핀란드인들은 "주변 강대국의 도움 없이 홀로 소련과 맞서야 했던 핀란드의 처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면서 이 단어를 매우 모욕적으로 여긴다. 하지만 총균쇠를 서술했던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냉전시기의 핀란드의 이런 유연성을 높이 평가했다.

6. 평가


겨울전쟁은 강대국이 약소국을 상대로 섣불리 전쟁을 일으켰다가 이득은 커녕 손해만 본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비슷한 예로는 베트남 전쟁,[42]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이 있다. [43]
핀란드는 전국민이 일치단결하면서 소련과 맞서 싸웠다. 비록 패배하여 영토의 10%를 내주어야 했지만 주변에 있던 라트비아나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등 무수한 나라들처럼 소련의 공화국으로 강제합병되지는 않았으므로 적어도 독립국으로서의 국체는 보존해내는 데 성공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무의미한 결과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압도적인 숫적 열세 속에서 그토록 열심히 싸우고 전술적으로도 이득을 거두면서 나라가 완전히 흡수되는 것을 막아낸 것이다.
또한 소련 국내에서조차 핀란드 이상으로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고작 저 정도의 땅을 차지하려고 전쟁했느냐?", "핀란드에게서 뺏은 땅은 전사한 소련 젊은이들을 묻고자 얻은 땅이다"라는 악평이 나왔을 정도. 소련에서도 피로스의 승리에 불과하다고 여겨졌다.
핀란드에도 겨울전쟁은 이후 외교정책에 큰 영향을 주었다. 소련이라는 강대국으로부터 독립을 지켜내기는 했지만, 이런 전쟁은 약소국으로서는 상당한 부담이었다. 그리하여 냉전내내 소련과의 마찰을 극도로 피하며 서방과 거리를 두고 소련의 비위를 맞추는 (위에서 지적한 핀란드화) 정책을 취했다.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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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의 안습 전설(?)은 여기서부터 시작. 사진에 나온 격파된 전차는 쌍포탑 사양 초기형인 T-26A(또는 T-26 obr.31). 더불어 이 전쟁에서 핀란드군이 몰로토프 칵테일(화염병)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면서 그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핀란드-소련 전쟁에서 핀란드인들은 소련군 폭격기가 떨어트린 폭탄을 몰로토프의 빵이라 부르며 조롱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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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군의 전설적인 저격수 시모 해위해.
저격 시 적에게 위치를 들키지 않기 위해 조준경을 사용하지 않았다.
통칭 '겨울 악령', '하얀 죽음', '백사병' 등 각종 이명을 보유하신 괴물 저격수 시모 해위해가 유명하다. 이 외에도 400명 이상을 저격한 것으로 알려진 핀란드 저격수 술로 콜카(Sulo Kolkka)가 있긴 한데, 이 사람은 바실리 자이체프의 라이벌로 유명한 에르빈 쾨니히와 더불어 실존성이 모호한 저격수로 유명하다.[44]
핀란드 공군 소속의 F2A 버팔로들과 그것을 탔던 에이노 일마리 유틸라이넨도 대단한 활약을 했으며, 그의 형 아르네 유틸라이넨도 활약했다. 그리고 불운한 카타야이넨으로 유명한 닐스 에드바드 카타야이넨도 핀란드 공군 에이스였다. 여러모로 핀란드인은 전투종족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증명하는 전쟁이다.
한 가지 일화가 있는데, 핀란드 국민들이 보이는 모든 도로 표지판에 '모스크바'라고 써놓고, 진격하던 소련군이 이걸 보고 '흠? 잘못 가고 있네?'라고 생각해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길 바랐다고 한다.
이 전쟁에서 헝가리에스토니아,[45] 주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자발적으로 핀란드를 많이 지원하였다. 물자 지원도 했고 자원병 형식으로 참전하여 소련군에 맞서 싸운 사람들도 많았다. 다만 공식적으로 이 나라들은 모두 중립이었다.
이 전쟁에 투입된 소련군의 무기 중에 M1939라는 야삽박격포가 결합된 해괴한 무기도 있었다. 성능이 어땠냐면, 어지간한 무기는 다 쓰는 소련군이 내다 버릴 수준. 또 다른 소련군의 무기로는 무선전차가 있다. 그런데 이쪽은 2개 대대까지 만들어 독소전쟁 초기까지 써먹은 거 보면 나름 괜찮았는지도 모른다.[46]
핀란드군의 하켄크로이츠 마크는 나치당과는 별개로 당시 핀란드군에 항공기를 기증한 어느 사업가[47]가 고안한 마크이다. 독일군 제복과 비슷하지만 엄연한 독자적 제복이다.

8. 관련 링크



9. 매체에서



9.1. 영화 겨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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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개요


본 문서의 전쟁을 배경으로 한 1989년 핀란드 영화. 원 제목은 Talvisota(핀란드어로 겨울전쟁(The Winter War)이라는 뜻).

9.1.2. 상세


핀란드 남포흐얀마 지역에 자리잡은 카우하바(Kauhava) 시 예비병 출신으로 구성된 핀란드 제23보병연대(Finnish infantry regiment "Jr23") 참전 군인들이 쓴 증언과 기록을 기초로 만들었으며, 이 당시 살아 있던 참전 군인들에게 직접 감수까지 받았다고 한다. 주인공 마르티가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형제들과 전쟁에 참전하는데, 전투 도중 동생 파보가 날아온 포탄에 오체분시되고 이복동생들마저 모두 전사하면서 자신만 살아남는 스토리. 상영 시간만 해도 260분에 달했으나, 해외 개봉 당시에는 190분 정도로 편집되었다. 90년대 비디오 출시판과 KBS 방영판도 이 버전으로 소개되었다. 미국판은 더해서 자그마치 140분을 잘라내고 120분으로 단축되어 소개되기도 했다. 2013년에 <겨울전쟁 105일의 전투>란 제목으로 한국에 늦게나마 개봉했으나 꼼수 개봉 성격이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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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에서 당시 사상 최대 제작비로 CG 없이 만들어낸 전쟁 영화로서 흥행이나 비평도 상당히 성공했다. 소련군의 우라돌격, 백병전, 참호전과 비처럼 쏟아지는 포탄, 폭격, 물량 공세 등 당시의 고증과 재현도 꽤 잘 된 편이다. 2차 대전 영화 중에선 상당한 명작으로 꼽힌다. 주 촬영지는 제지회사 UPM-키멘(Kymmene)[48]에서 제공했다.
여담으로 1992년 12월 13일 일요특선 외화로 겨울전쟁이란 같은 제목으로 SBS, 1998년 1월 24일 MBC에서 더빙 방영한 영화는 이 영화가 아니라 독일 영화 Krigerens Hjerte(1992)란 영화로 토마스 크레치만 주연인 다른 영화이다.

[1] 러시아 역사학계에서는 주로 '소련-핀란드 전쟁(Советско-финляндская война)'이라는 정식 명칭으로 더 많이 쓴다. 다만 추후의 계속전쟁도 같은 이름으로 불리기에 뒤에 년도를 표기하여 구분한다.[2] 식량 및 총기와 탄약,포탄과 지뢰 등의 장비들을 대량으로 지원한 것은 물론이고 글로스터 글래디에이터로 이루어진 의용비행대를 파견했다.[3] 대대급 규모의 의용군 파병.[4] 피아트 G.50 전투기 및 소총과 같은 군사장비 지원 및 소수의 의용군 파병.[5] 군수장비 지원 및 소수의 의용군 파병.[6] 극소수의 의용군 파병.[7] 브리스톨 블렌헤임 폭격기와 글로스터 글래디에이터 전투기, 보이스 대전차 소총을 지원한 것은 물론이고 신예 호커 허리케인까지 제공했다. 의용군도 파병되었다.[8] M.S.406 전투기와 C.714 경전투기 그리고 소총과 탄약도 제공했다.[9] 신예 F2A 버팔로 전투기 제공 및 민간 차원의 핀란드 지원용 모금 활동 및 기업 차원의 대소련 금수제재[10] 국토의 11%에 달하는 카렐리야 상실.[11] 히틀러스페인 내전을 겪으며 소련군의 능력을 상당히 높게 평가했다. 실제로도 소련은 스페인 내전 초기, 그러니까 대숙청 직전까지만 해도 지구상에서 가장 발전된 군사이론, 수많은 경험을 쌓은 장교들, 막강한 전시동원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겨울전쟁의 소련군은 지극히 한심했고 이를 지켜본 히틀러는 소련을 얕잡아보게 되어 결국 침공을 결정한다. 하지만 자신의 전투능력도 높게 잡아버리고 시베리아 지역의 병력 및 공장들의 생각도 별로 안 했다. 특히 소련군의 물량은 상상을 초월했고 여기에 히틀러의 많은 실수와 전선이 2개가 되어 생긴 문제점 등이 겹쳐 결국 독일은 패전한다.[12] 비커스 Mk. E: 1933년 테스트용으로 구입한 물량 1대와 수입 물량 32대(개전 시점까지 도착한 물량 26대, 나머지는 전쟁 기간 도중 및 종전 이후 도착). 현지에서 포탑 무장 장착 완료 후 부대에 배치된 전차 도합 18대(가격 절감을 위해 무장을 장착하지 않은 상태로 전차를 수입). 실전 투입 물량 중 5대는 1940년 2월 25-27일 혼카니에미 전투에서 소실, 이후 소규모 전투에서 3대 추가 소실. // 르노 FT-17: 37mm 포 장착형과 7.62mm 기관총 장착형을 합쳐 32대. 28대 분량 전쟁 기간 중 소실(땅에 파묻어 토치카로 전환, 또는 노획작업이나 수송 도중 전장에 유기되거나 소련군에 의해 탈취). // 그 외: 훈련용 경전차 2대(카든-로이드 Mk.VI, VCL M1933 각각 1대), L-182 장갑차 1대(실전 투입), 노획전차 및 장갑차 다수(겨울전쟁 도중 실전 투입 사례 미미함).[13] 훈련기, 관측기, 예비기 포함시 216대.[14] 오늘날 러시아무르만스크 주 페쳉스키 지구. 핀란드 독립 시점에는 핀란드 영토였지만 계속전쟁 말기 소련과 핀란드 간 휴전 협정 과정에서 소련에 할양되어 오늘날까지 러시아 영토로 남아있다.[15] 그런데 바로 위에서 본 것처럼 원래 이 조약은 1944년까지 효력을 발휘하니 명백한 조약위반이다. 그런데 소련은 또 조약을 위반하고 3국을... 그런데 정확히 1년 뒤 불가침조약 깼다가 참교육당하는 나라가 하나 더 있었으니...[16] 다만 완전히 합병한 것은 1940년이고, 이때는 영토 내 소련군의 주둔을 허용하고 해군 및 공군기지를 소련군 관할로 넘기는 식으로 협정을 맺은 상태였다.[17] 핀란드어로는 카르얄라(Karjala). 당시 핀란드의 주요 공업지대 중 하나였다.[18] 핀란드의 육지와 해상의 요충지를 비롯한 영토 상당수를 내놓으라는 그야말로 날강도 짓이다.[19] 핀란드의 옛 수도이다![20] 현재 핀란드의 수도이다. 이 당시에도 인구와 도시 규모에 있어 핀란드의 최대 도시였다.[21] 오늘날 러시아의 비보르크(Vyborg). 러시아-핀란드 국경상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이 당시 헬싱키에 이은 핀란드 제2의 도시였다.[22] 대부분 약 30년에서 40년 가량이었으며 기간을 준수할 것인가도 미지수였던데다가 앞서 발트 3국의 사례를 보건대 그 뒷일은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23] 당시 핀란드군이 배치했던 야포 중 마이닐라에 사거리가 닿는 장소에 배치된 야포는 없었고, 러시아의 역사가 파벨 압테카르가 소련군의 일일 보고를 열람한 결과 마이닐라 포격 사건 당시 소련군의 주장과는 달리 인명 손실이 없었으며, 따라서 이 사건은 조작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니키타 흐루쇼프도 회고록에서 해당 사건은 그리고리 쿨리크 원수에 의해 계획되었다고 서술했고, 1994년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도 해당 사건이 소련 측의 전쟁 도발 행위의 일부였다는 점을 인정했다. 나치 독일 또한 폴란드를 침공할 때 자작극을 벌여서 폴란드가 전쟁의 구실을 만든 것으로 위장했는데, 스탈린은 히틀러가 했던 방식을 똑같이 따라했다고 볼 수 있다.[24] 독일과 스웨덴의 지원을 받아 만든 방어선이다.[25] 현역병 뿐만 아니라 예비역, 퇴직 군인을 모두 포함한 수치[26] 비슷한 사례로 고수 2차전쟁이 있는데, 수서기록에 따르면 수나라는 전투병력 113만, 보급병력 200만을 동원했는데, 당시 고구려 인구는 약 70만호(구당서 기준) 300만명으로 추정된다. 수나라는 인구의 30% 보급병력도 포함하면 고구려 인구보다 더 많은 병력으로 고구려를 공격했다.[27] 33대 중 26대 도착[28] 개전 이후 해방전함은 투르쿠 항만 대공 방어에 동원되기도 했다.[29] 라도가 호수 북부는 만네르헤임 선 동쪽에 위치하고 핀란드 전체로 볼 때는 남부지역이다.[30] 일명 '몰로토프 칵테일'[31] Terijoki, 지금의 젤레노고르스크 Зеленогорск[32] 소련 남부와 우크라이나 지방은 오히려 여름에 평균 기온 40도까지 올라갈 정도로 온난하다.[33] 출처-http://www.winterwar.com/other/weather.htm#avg3940[34] The Second Book of General Ignorance, Faber and Faber, 2011, p.76, ISBN 978-0-571-26965-5: When the hand-held bottle firebomb was developed to attack Soviet tanks, the Finns called it the "Molotov cocktail", as "a drink to go with the food"[35] 몰로토프 칵테일의 명칭 유래에는 이것 말고 또다른 이야기가 있다. 1940년 올림픽의 개최지는 원래 일본 도쿄였으나 중일전쟁으로 무산되어 핀란드 헬싱키로 결정되었다. 그래서 핀란드는 스타디움도 짓고 선수촌도 지으며 열심히 개최 준비를 갖췄으나, 겨울전쟁이 발발하자 소련군 폭격기가 이곳에 폭격을 가했다. 이 일로 국제사회에서 비난이 일자 소련 외무부 장관 몰로토프가 "빈곤한 핀란드인에게 보내는 빵"이라며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을 했고, 이에 핀란드인들이 폭격기를 '몰로토프 아저씨', 폭탄을 '몰로토프의 빵바구니'라고 비꼬았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옛다, 빵값이다" 하면서 이름을 몰로토프 칵테일이라고 지었다는 것.[36] 러시아의 겨울 별장.[37] 두 사람이 젊었을때부터 인생을 함께했던 절친이었기에 그렇지 만약 보통 사람이 했다면 끔살당했을 자살행위였을것이다. 아님 오히려 이렇게 대놓고 무례하게 멱살 맞잡고 소리지를 정도니 "적어도 뒤에서 배신할 리는 없다"는 묘한 충성심 확인이었을 수도 있다.[38] 이 지역에 거주하던 주민이 당시 핀란드 인구의 12%인 41만명이었다. 이들은 고향을 잃고 핀란드의 다른 지역으로 피난했다가 계속전쟁때 일부가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으나 조국이 전쟁에 패배하면서 또 다시 피난해야 하는 운명을 겪었다.[39] 겨울전쟁에서의 소련군 졸전이 히틀러가 한판 붙어볼만 하겠는데 라는 마음을 먹게한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는 시각도 있다.[40] 침략전쟁을 이유로 한 이런 축출은 소련이 유일했다. 사실 나치 독일과 일본과 이탈리아는 침략을 시작하던 1933년 일찌감치 스스로 탈퇴했기 때문에 이런 처분은 당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차피 국제연맹은 이미 1931년의 만주사변 이후로 이미 유명무실한 존재였다.[41] '핀란드화'라는 용어는 당시 반공 진영의 일원이었던 서독의 정치·역사학자들이 처음 쓰기 시작했다.[42] 이 전쟁도 초강대국 미국이 벌인 전쟁이라는 점과 혹독한 기후에서 치른 전쟁이라는 점에서 같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 고전한 이유가 울창한 정글 때문이기도 했다.[43] 혹은 반대로 약소국이 아무리 전쟁에서 초반에 선전해도 결국 강대국의 무력에 굴복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로도 인용된다. 다만 이 쪽은 너무 뻔하고 어쨌든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는 점 등에 묻혀 부각되지는 않는 편이다.[44] 영어 위키백과를 기준으로 하면, 수로 콜카는 별개 문서를 가지고 있고, 2차대전 저격수로도 꼽히지만, 본문에서 에르빈 쾨니히와 함께 실존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가공의 저격수 분류에 에르빈 쾨니히와 함께 포함되어 있다. 다만 2차 대전 저격수 틀에서 apocryphal(사실이 아닌듯한)이라는 표기가 있는 에르빈 쾨니히와 달리 이 사람에게는 그런 표시가 또 없다.[45] 에스토니아는 같은 핀족 계열 국가로서 공동의 적성국인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1930년대부터 비밀리에 핀란드와 군사 협력을 하고 있었다.[46] 성능은 전후진, 좌우회전, 기관총 발사명령 등의 간단한 것만 수행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재장전 기능은 없어서 잼이 걸리거나 탄약 다 떨어지면 다시 사람이 재장전해줘야했는데, 당시의 극초기형 진공관 회로를 썼기 때문에 기관총이고 뭐고간에 앞으로 움직여주기만 해도 쓸만했다고 한다(...). 하지만 안 그래도 추운 북유럽의 겨울 덕분에 진공관 과부하 걱정은 덜해서 작동이 잘될 때는 아주 잘 되었다고 한다.[47] 이 사업가의 이름은 에리크 폰 로젠으로, 그의 아들인 칼 구스타프 폰 로젠은 자신의 수송기를 폭격기로 개조해 겨울전쟁에 참전했다.[48] 제지, 임산물 유통 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