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태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신상태는 1889년 4월 1일 경상북도 칠곡군 악목면 복성리에서 신영승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동락의숙(同樂義塾)에서 수학했고 서울에 상경해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13년, 그는 안희제, 남형우, 배천택 등 30여명의 동지와 더불어 애국결사인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한 지하운동을 전개했다. 1915년에는 대구의 안일암에서 시회를 가장하고 윤상태, 홍주일, 서상일 등 30여동지로 하여금 대한국권회복단을 조직하여 그 본부를 대구에 지부를 마산에 두었다.
또한 대구은행에 재직한 기회를 이용하여 은행의 출납주임인 이종암과 협의한 후 독립자금으로 쓰기위해 1918년 은행돈 1만 9천원을 인출해 이를 아우 신상헌의 집 뒷산에 묻어놓고 이종암을 아우에게 부탁한 뒤 다음날 평상시와 같이 근무했으나, 은행은 발칵 뒤집혀졌다. 그후 아우 신상헌은 일본경찰의 감시를 피하여 낮에는 산속에서, 밤에는 다락방에서 지내다가 수사가 잠잠해지자 이종암을 변장시켜 숨겨두었던 돈을 주어 만주로 탈출하게 했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한 후, 신상태는 독립운동을 꾀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1921년 4월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동지들과 만나 구국책을 논의하고 만주의 각처를 돌아 다니며, 안동현에서 군자금 전달 및 국내외 투사들의 연락책무를 맡아 활약했다. 그러나 대구에서 밀파된 일제 경찰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6년 6.10 만세 운동에 개입해 허홍제, 조중규, 채충식등의 동지와 더불어 시위계획을 논의하다 또다시 체포되었다가 얼마후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후 신간회에 참가하면서 지하공작을 별도로 준비했으나, 금오산 독립단 잠입사건의 관련혐의로 체포되었다. 또한 신간회 해산반대 투쟁을 벌이다 체포되기도했다. 1945년 8.15 광복 직전에 위험인물로 간주한 일제 경찰에 의해 왜관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8.15 광복 후 고향에서 병고에 시달리다 1950년 12월 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신상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7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