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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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겸 교육가. 보성전문 법과 교수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무총장을 역임했으며, 끝까지 일제에 타협하지 않고 한국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생을 마감했다. 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국내에서의 독립운동
1875년(고종 12) 경상도 고령현 내곡면 내상동(현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내상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이웃마을인 읍내면 쾌빈리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으며, 상경해서는 경기도 경성부 가회동 북촌(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북촌한옥마을)에 거주하였다.
1908년 고령 지역의 석학인 이두훈(李斗勳)의 권유로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였으며,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에 가입하여 평의원이 되었고, 1909년에는 서상일·안희제·김동삼 등의 동지들과 함께 청년 중심의 비밀 독립운동 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에 가입하여 고향에서 지하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재차 상경하여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하였으며, 1911년부터 1917년까지 보성전문학교 법률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보성전문학교 학감·교감·교장 등으로 재직하며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15년 1월에는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현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 소재 안일암(安逸庵)에서 윤상태(尹相泰)·서상일 등 동지들과 함께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朝鮮國權恢復團中央總部)라는 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회복에 신명을 바칠 것을 결의하고 활동하였으며, 같은 해 3월에는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奬勵契)를 조직하기도 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경상남도 창원군 등지에서 시위를 적극 주도하였으며, 같은 해 3월 17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한족회(韓族會)를 근간으로 하는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를 설립하고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하는 등 각료들이 선출되었을 때, 산업총장(産業總長)에 선임되기도 했다.
2.2.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의 활동
1919년 4월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와 군자금 5천원을 지참하고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를 대표해 중화민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리하여 4월 13일 여운형, 신채호, 조소앙,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주도하고, 법무차장에 선임되었다. 같은 달 25일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된 뒤 의원자격심사위원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 해 5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총장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는데, 이후 잠시 귀국했다가 창원군 3.1 운동 주도 관련 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그 해 9월 29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에 대해 고등법원으로 이송되어# 구금되었다가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내란죄 혐의에 대해 공소권 없음으로 면소 판결을 받고 출옥하였다.#
출옥 후 재차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1920년 11월에는 교통총장에 보임되어 교통국 등을 운영하였다. 그 후 1921년 4월 사임할 때까지 임시정부 법무총장과 교통총장으로 일하였다.
1921년 베이징의 군사통일회와 간도의 액목현(額穆縣)[3] 회의 등에서 의견 차이로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각기 다른 국민대표회의를 계획하게 되자, 상하이와 베이징 사이를 오가며 절충하려 노력하였다. 이후 그는 1923년 1월 3일부터 그 해 6월 7일까지 74차례에 걸쳐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의 대표적 인물로 활약하였는데, 무능하기 짝이 없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없애고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 본격적인 무장투쟁으로 나아가자고 주장한 것이었다.
이와 병행해서 1922년 4월에는 배천택(裵天澤)·서동일 등과 베이징 마사묘(麻四廟)[4] 에서 '무언실행(無言實行)'을 행동 지침으로 하여 부일 협력자를 처단하는 "다물단(多勿團)"[5][6] 을 조직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그 후 다물단은 실제로 수많은 친일파와 일제 밀정들을 암살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서북협성학교 교감이자 김활란의 형부였던 김달하를 들 수 있다.[7]
1922년 5월에는 국민대표회의 문제로 임시정부가 혼란에 빠지자, 국민대표회의의 주비위원장으로서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과거의 분규와 착잡한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의 완전 확실한 방침을 수립하여 독립운동이 통일적 조직적으로 진행할 것"을 선언하는 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2년 7월에는 안창호·최창식·신익희·차이석·신숙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이를 수습하려 하였으나 별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1924년 1월 다물단원인 서동일을 국내에 잠입시켜 경상북도 청도군·경산군 등지에서 군자금 1,400여 원을 모집하여 송금하게 하였으며, 1924년 5월 30일 재입국한 서동일과 배천택에게 재차 군자금을 모집케 했다가 이듬해 1925년 두 사람이 활동 도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군자금 모집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이때 남형우도 수배 대상에 있었으나 그 해 7월 2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다이쇼 8년 제령 제7호 위반 및 공갈 혐의에 대해 기소중지로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1926년 5월 20일에도 같은 혐의에 대해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무죄 판결을 내린 기록이 보이며#, 1928년 1월 16일에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소위 폭발물취체규칙 위반, 치안유지법 위반, 협박, 살인미수, 사기 등의 혐의에 대해 기소중지로 불기소처분을 내린 기록이 있다.#
한편, 그는 1928년 가족들을 이끌고 베이징에서 만주 하얼빈으로 함께 이주하여 헤이룽장성에서 사설학원(學院)을 경영했다.
2.3. 쓸쓸한 말년
1930년 한국인 의사 부인의 밀고로 공산주의자 혐의를 받고 공안부(公安部)에 구금되었다가 주민들의 진정으로 석방되었으며, 1931년 불복수토병(不伏水土病)으로 귀국하여 고향에서 요양 생활을 했다.
1943년 3월 13일 혹독한 일제의 감시와 위협, 창씨개명 및 신사참배에 대한 강요 등을 참을 수 없어 음독자살하였다.
사후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 25세 우(祐) 항렬.[2] 삼성 라이온즈 1군 투수코치 정현욱도 이 마을 출신이다.[3]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돈화시 어무(額穆)진.[4]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하이뎬구 이허위안로5호 베이징대학 캠퍼스 내에 위치했었다고 하는데, 확실치 않다.[5] 다물(多勿)은 고구려말로 '옛 땅을 회복한다'는 의미라고 한다.#[6] 이회영의 조카 이규준, 이회영의 장남 이규학 등도 여기에 참여하였다.[7] 김달하는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의친왕 이강의 부스승이기도 하였다. 서우학회와 서북학회에서 활동하며 이승훈, 안창호, 이상재 등과 친하게 지내다가 경술국치 이후 중국으로 옮겨 베이징에서 거주하면서 중국 북양군벌의 안휘군벌의 수장 돤치루이 정부의 시종관부 부관으로 일하면서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정보를 일본에 제공하였다. 1925년 3월말 다물단의 이인흥, 이기환 등에 의해 처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