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만세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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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세 갈래의 독립운동 준비
3.2. 벌어진 독립 운동
3.3. 결말
4. 일제의 반응과 의미


1. 개요


1926년 6월 10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던 순종 황제의, 장례식에 일어났던 독립 만세 운동이다.

2. 배경


1926년 4월 26일, 대한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승하하면서 조선 왕실의 역사는 막을 내린다.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가서 황제의 죽음을 슬퍼했지만, 사람들이 뭉칠 것을 우려한 일본 경찰들이 강제로 사람들을 해산시킨다. 그러면서 일제는 영친왕을 이왕으로 봉하고, 항일운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를 펼치게 된다.
하지만 애국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사람들을 모아 다시한번 독립운동을 궐기하였으며, 순종의 장례식인 6월 10일에 전국적인 만세운동을 하기로 결의한다.

3. 전개



3.1. 세 갈래의 독립운동 준비


천도교조선공산당3.1 운동과 같은 만세시위를 다시 한번 전개하고자 이 두 단체의 주도하에 이뤄졌다. 권오설을 중심으로 운동지도부로서 '6.10 투쟁특별위원회'가 설치되고, 시위의 전국적인 확산을 위해 순종황제의 장례식에 서울에서는 학생을 중심으로, 지방에서는 장례식에 참석한 대중들을 결집해서 항일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계획했다. 이들은 구체적으로 세 갈래로 나뉘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첫 번째로 권오설을 중심으로 한 노총 및 인쇄 조합원들의 만세 운동 계획이다. 원래 5월 1일에 하기로 했다가 순종 황제가 승하하면서 사태가 급변하자 장례일인 6월 10일로 변경하고, 5만 매의 격문을 인쇄하여 천주교당에 숨기며 때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 무렵 중국의 돈을 위조한 사건이 일어나 일본 경찰이 인근 인쇄소들을 샅샅이 수색하는 과정에서 엉뚱하게도 이 계획이 발각되고 만다. 권오설을 포함한 17명의 주요 인물들이 체포되어 계획은 실패하게 된다.
다행히 나머지 두 갈래의 운동은 들키지 않고 활발히 준비할 수 있었다. 먼저 사직동계[1]의 중앙고보의 이선호, 연희전문학교(대학교)의 이병립, 박하균, 경성제국대학의 이천진과 박두종, 유면희 등이 주도하여 만세운동을 계획한다. 이들은 8, 9일에 걸쳐 태극기를 만들고, 이병립이 격문을 작성하여[2] 1만 매의 격문과 6천 장의 전단을 준비한다.
마지막 한 갈래는 통의동계인 중앙고보의 이동환, 박용규, 중동고보의 김재문, 박대형 등 5명이 중심이 되어 통의동의 김재문 집에서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계획 도중 본정[3]에 폭탄을 던져 총독부를 파괴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만세운동으로 세계에 이 일을 알리는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만세운동을 계획한다. 5월 29일에 김재문이 격문을 작성하고, 그 외 최남선, 최린, 김성수 등이 전단을 작성해 준다.
한편, 일본 경찰은 권오설의 독립 운동 계획을 알게 된 후 경계를 늘려 200명의 애국 지사를 잡아들이고 청년 단체를 조사하였으며, 심지어 총독부에서는 본국에서 군대까지 끌고와 서울에 배치하고 부산항과 인천항에 군함을 배치한다. 학생들이 6월 8~9일에 걸쳐 격문을 나눠주는 과정에서도 경찰의 검문에 들킬 뻔 했으나 격문 위에 일반 책을 얹어가는 재치를 발휘해 들키지 않는다.

3.2. 벌어진 독립 운동


만세운동이 벌어진 당일인 1926년 6월 10일 오전 8시 30분, 일본 경찰, 헌병 외 5천 명의 보병, 기마병, 포병 등이 삼엄하게 지키는 가운데, 당시 22세였던 이현상 지휘 하의 중앙고보(현 중앙고등학교) 학생들 30-40명이 용감히 만세를 제창하고 격문 1천 장을 살포하며 태극기를 휘날린 것으로 노도와 같은 만세함성이 종로 단성사 앞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관수교 부근에 도열해 있던 보성전문학교 학생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고 전단을 뿌렸으며, 이에 맞은 편에 모여 있던 연희전문학교 학생들이 만세를 부르며 격문을 살포하면서 시위가 확대되었다.
이 6.10 만세운동에는 다양한 세력이 참여하였는데 해외에서는 조선 공산당 임시 상해부, 임시정부의 일부 세력, 임시정부의 외곽 조직인 의용대, 그리고 일본에서 유학하던 학생들까지 참가하였다. 한편 국내에서는 조선공산당, 고려공산청년회, 천도교, 조선노동총동맹, 국내 학생운동조직 등이 참가해서 각 세력 간에 긴밀한 연대를 이뤄 만세시위를 추진했다.
만세 시위 과정에서도 각 참여 단위들은 각자의 역할을 분담하기로 했는데, 조선공산당 계열은 운동의 지휘부를 이끌었고, 천도교는 유력한 조직기반을 바탕으로 격문 인쇄와 지방 연락을, 여기에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같은 학생단체는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점화 주도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6.10 만세 운동에서는 다양한 이념적 편향의 구호와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교육과 관련해서는 국가경비에 의한 의무교육과 직업교육을 실시, 식민지 노예화 교육의 소멸, 보통교육을 의무교육으로, 보통학교 교육용어를 조선어로, 학생집회의 자유보장, 대학은 조선인 중심으로, 일본인 교원 배척, 조선인 교육은 조선인 스스로등이 주장되었다.
한편 만세 시위와는 별개로 순종황제의 장례식 때는 송학선 의사의 의거도 있었다. 송학선이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처단하려다 목표를 잘못 잡아서 총독이 아닌 다른 일본 정치인들을 살해하고 붙잡혀서 사형당하기도 했다.

3.3. 결말


일제는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200여명의 학생들을 체포한다. 체포한 학생들 중 106명을 심문하고 그들 중 이병립, 박하균, 유면희 등 8명이 주모자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는다. 11월 2일에 공판이 열렸고, 여기서 이병립과 친구 이석훈을 구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등 학생들은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재판결과 1심에서는 박하균만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나머지는 거기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2심 상급 법원에서는 유면희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나머지는 모두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문창모, 손성엽, 염필주 등이 제 2차 만세 운동을 계획했지만, 밀고자로 인해 실패하기도 한다.

4. 일제의 반응과 의미


이미 3.1 운동으로 한번 데인 적이 있는 일제는 철저하게 탄압했고, 서울에서는 학생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일어났을 뿐이고 지방에서는 산발적인 시위 이외에는 크게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국내외 민족운동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무엇보다 더욱 큰 의미는 이념을 초월한 운동 세력의 연합에 의해 반일민족운동을 전개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특히 3.1 운동 이후로 학생운동이 점점 조직화되어 조선학생회, 조선학생대회,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의 독자적 학생운동 조직을 만들었다. 이들이 6.10 만세운동의 중심세력으로서 수행하였는데 이것을 계기로 '''학생들이 독자적인 운동주체로 부상'''하게 되고 이는 3년 뒤 광주학생항일운동(1929년)같은 주요 반일운동의 주체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천여 명이 체포되어 투옥되고, 제2차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였던 권오설을 비롯한 다수의 공산당원이 체포됨으로서 '''조선 공산당이 와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담으로 이때 고하 송진우는 정인보와 함께 순종황제의 유언을 위조해 만세운동을 확산시키려 했으나 발각되어 이루어지지 못했고, 이어 11월 '국제농민본부기념사' 사건으로 징역 6월형이 확정되어 복역했다가 1927년 2월 쇼와 덴노 즉위기념 특사로 출옥했다. 박헌영도 배후 조종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으나 무혐의로 밝혀진다.
드라마 야인시대 4회 후반부에서도 6.10 만세운동이 그려지는데 학생들이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나오자 미와가 체포 하는것으로 묘사된다.

[1] 사직단이 있는 데서 유래한 지역.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종로구의 필운동, 사직동, 내수동, 내자동의 일부이다.[2] 내용은 대충 원수를 몰아내자는 짧은 격문이다.[3] 지금의 충무로.